근육조선 438화
2부 21장 16화 달구벌 결전(2)
이연의 본대는 부대를 계속 분열하여 12,000명에 불과하였고 일본군 본대는 여전히 3만 명이 넘었다.
하지만 포진을 확인한 일본군은 조선군의 방침에 대응하기 위해 자신들도 부대를 나누었다.
“일단 남쪽에 있는 산에 기병이 있습니다. 최소 삼천 기는 보이는데 매복한 숫자를 감안하면 최소 두 배는 되겠군요.”
“조선 왕이 필사적으로 병력을 이끌고 왔군. 하지만 모든 전투를 포기하고 여기에 뭉쳤다면 기병이 이만 기가 넘었겠지. 구로다 자네가 남쪽 전선을 담당하여 기병의 돌격을 막게.”
어차피 일본군이 챙겨온 소수의 화포는 죄다 기병의 돌격을 저지하기 위해 아끼고 아껴 두었다.
귀중한 천리경을 들어 진영을 살펴본 카츠요리는 이를 부득부득 갈다 한숨을 내쉬었다.
“화포는 아주 아낌없이 챙겨왔군. 저 작은 산(두류산)에 얼마나 많은 화포가 있는지 나뭇가지 사이로 검은 형체가 빼곡하게 있다네.”
“조선 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전형적인 진형이군요. 본대가 공격을 버티는 동안 틈이 보이면 기병이 나서는 전략이지요. 결국 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저는 조선 기병을 상대할 책략을 마련해 뒀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선은 망치와 모루 개념을 택하였다. 이연이 속한 본대가 소수 정예의 병사와 포격으로 일본 본대를 막아내는 동안 틈을 노린 별동대가 허리를 노리겠다는 전략이다.
카츠요리도 병법의 기본은 아니 이에 철저히 응수하려 하였다.
“내가 병사의 육 할을 이끌고 조선 왕이 머물고 있을 적의 본영에 신속하게 접근하겠네. 자네는 기병이 우회하여 내 옆을 치는 것을 막게나.”
조선군이 자신들의 움직임에 따라서 분열하니 저들도 얼마 전에 도착하여 회전을 준비하고 있으리라.
어떻게든 신속히 달라붙어 두 배에 달하는 인원으로 적을 밀어버릴 채비를 갖춘 카츠요리의 눈에 한 기병이 들어왔다.
“저놈 설마 단기대결을 생각하는 건가?”
“응수하지 마십시오. 조선군이 무슨 함정을 파놓았을지 모릅니다.”
덩치는 평범해 보이는 -실제로는 비율이 어긋나서 평범하게 보이는- 기병이 편곤을 휘두르며 양 진영의 중간쯤으로 나오는 모습을 보자 카츠요리는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구로다는 책사로서 철저히 의견을 내놓았다.
“놈들이 화포를 쏘아 날려 버리면 애꿎은 장수 한 명만 죽지 않겠습니까?”
“그래, 어차피 이기면 만사가 해결되는데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저놈은 총이나 활도 챙겨오지 않았다네. 그러면 우리가 활을 쏘아 먼저 쓰러트리면 어떤가?”
방법이 비겁하건 뭐건 적장을 죽이면 그만이라 생각한 카츠요리는 본영에서 대기하고 있던 가토에게 제안을 하였다.
결전의 시작을 알리는 단기대결이 시작되었다.
* * *
지금까지 임차손은 착실히 살아왔다 생각했다. 어린 시절부터 몸을 키우고 젊어서는 죽어라 훈련에 매진하여 오위의 기병으로 일하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무엇보다 운이 없었다.
기껏 공훈을 인정받아 일본으로 건너갔음에도 예측하지 못한, 우에스기 겐신의 급사라는 사태를 경험하고 패장이 되었으며 요동 사태가 터질 적에는 공식적으로 나서지 못하여 끓는 피를 잠재워야 했다.
“여해는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고 신립 그 머리에 들어 있는 것도 없는 녀석은 머리도 챙기고 공훈도 챙겼는데 나야 내금위장이 된 것 외에 뭐가 남았는가. 이번 기회를 잘 잡아야지. 그렇지 않더냐? 도철(饕餮: 사흉 중 하나)아?”
자신의 말 도철이 푸르륵 거리는 소리를 듣자 임차손은 배에 힘을 꽉 주고 정면을 노려보았다.
단기대결을 거부하리라 생각했던 일본에서 장수 하나가 나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우에스기를 돕기 위해 일했던 임차손이니 해석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가토 가문의 장남이자 아명은 야사와카요 이명은 토라노스케인 기요마사이다! 조선의 장수의 목을 베어 공훈을 세우고자 하니 네놈은 목을 내놓거나 꼬리를 말고 도망가라!]
“가토라 하였느냐! 내가 네놈의 짓뭉개진 유해를 남겨서 화장할 수 있게 적당히 봐주마!”
임차손은 말의 옆구리를 치며 전력으로 맞서려 하였다.
상대는 예상대로 창을 말안장에 걸치더니 등에 짊어진 활에 화살을 올려 임차손을 향해 세 발이나 쏘았다.
-툭.
전신에 판금갑주를 착용한 임차손이니 가뜩이나 위력이 약한 데다 근거리 위력만 강하지 원거리 위력이 약한 교토 활(京弓: 대나무를 아교로 붙여 만드는 일본 활)로 쏜 화살은 판금갑옷에 맞아 튕겨 나갔다. 두 발의 화살이 더 날아왔지만 마갑에 박힌 것이 전부였다.
삽시간에 거리를 좁힌 임차손의 거대한 체격과 거대한 말을 보자 두 장수의 크기는 거의 어른과 어린아이의 차이로 비칠 지경이었다.
심지어 임차손의 머리 위에서 붕붕 돌아가는 편곤은 상식을 초월한 물건이었다.
수양대군이 사용하던 대역기봉을 절반으로 잘라 남명 조식이 사용했으며, 다시 그 대역기봉을 절반으로 자른 물건이니 끝부분의 무게만 8근(5.1㎏)에 달하고 길이는 두 자에 달하는 괴물이니 가토의 창도 장작개비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가토는 창날을 집어 드는 척 허리에 숨겨둔 장총통, 자신이 죽인 승병(僧兵)이 사용하던 물건을 꺼내 들고 겨눴다.
아무리 튼튼한 갑주를 입고 있어도 지근거리에서 쏘아댄 장총통이라면 뚫을 수 있으리라 계산한 수였다.
“네놈이 이럴 줄 알았다!”
가토가 발사한 탄환이 임차손의 판금갑옷의 가슴을 두드렸지만 흠집이 아로새겨진 것이 끝이었다. 애초에 보총 탄환을 버티도록 설계된 갑옷이라 얇은 얼굴 갑주나 겨드랑이가 아니라면 관통할 가능성이 없었다.
필사적으로 날린 장총통의 탄환이 갑주에 회색 선을 남긴 것을 확인한 가토는 창은커녕 투구도 벗어 던지고 전력을 다해 도주하였다.
상식을 벗어난 일이 계속 일어나자 아예 콧물을 흘릴 지경이었다.
“히익! 이놈도 테츠오니다!”
“테츠오니는 뭔 개소리야! 야! 장수라면 어서 머리를 들이대라! 내가 수양대군께서 쓰신 물건으로 만든 편곤으로 네놈의 머리통을 단번에 부숴서 끝내줄게!”
호기롭게 나선 장수이기에 별로 아프지 않게 끝내주려는 임차손의 배려를 끝끝내 거절하는 가토는 갈지자로 말을 몰며 임차손에게서 달아나려 애썼지만 도주도 끝이 났다.
“그아아아아아악!”
“이놈의 새끼! 잡았다!”
일본군 진영에서 일백 보(일본 기준 120m)까지 도망친 가토였지만 임차손은 놓칠 수 없다는 듯이 편곤을 집어 던졌고 말의 다리가 걸리면서 가토의 몸이 바닥을 뒹굴었다.
사지가 꺾여 피를 토하는 가토의 모습을 본 임차손은 그의 멱살을 잡고 나름 자비를 베풀었다.
“장승부수기(파일 드라이버)!”
전력을 다해 실시한 장승부수기로 가토의 머리를 박살 내 확실하게 이승에서 저승으로 호적을 변경한 임차손은 손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일본군은 가토가 쓰러진 직후부터 준비했는지 이미 사격을 개시하였다.
“이딴 식으로 나설 거면 단기대결에 왜 응수했어! 역시 왜인은 신의가 없다니까!”
임차손을 죽이기 위해 화살과 총을 쏘아댔지만 위력이 부족해 임차손은 팔과 다리에 눈먼 탄환을 얕게 맞았을 뿐이었다.
임차손은 전력을 다해 말에 올라 도주하여 이미 나 있는 길을 따라 조선 진영으로 돌아왔다.
“신 임차손! 적장의 머리를 바수었사오나 적의 사기를 꺾진 못하였사옵니다!”
“참으로 훌륭한 일이다. 몸이 크게 상한 것 같으니 어서 의원의 치료를 받도록.”
“신의 몸은 신이 잘 알고 있사옵니다. 아직 전선에서 물러날 때가 아니니 내금위를 인솔하여 적도를 도륙할 수 있도록 허하여주시옵소서!”
앞으로 자신이 할 일은 창날의 아래로 기어들어 가 적을 도륙하는 작업이다.
이미 사지의 갑옷을 벗은 임차손은 살 속에 박힌 총탄을 꺼내고 담뱃잎을 쑤셔 넣어 출혈을 막았다.
양 군을 합쳐 전선에 나온 병사만 7만여 명에 달하니 조선에서 일어난 전투 가운데 가장 거대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어느 정도 접근한 조선군이 침묵하며 대오를 갖추고 계속 접근하는 일본군 진영으로 포격이 날아들었다.
어느덧 보총의 최대 사거리까지 접근하였지만 조선군은 아직 침묵하였다. 허공에서 쏟아지는 포격을 조금이라도 음미하는 것 같은 태도였지만 실제로는 아니었다.
맨 앞의 일본 병사가 무언가를 밟은 느낌에 섬뜩해한 순간, 한참 뒤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이건 뭐야! 조선군의 포격은 아닌데!”
“뭐긴 뭐야! 빨리 달려가서 텟포나 쏘라고! 멍청한 새끼야!”
어리둥절한 일본군이 반사적으로 대열을 갖추고 조총을 장전하였지만 진영의 뒤. 자신이 죽어나가면 바로 응수할 이들의 위치에서 폭음이 계속 울리며 일본군이 하늘 위로 치솟았다.
이연은 흡족한 표정으로 진영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유성룡 그 친구가 좋은 물건을 알려줬지. 작포((炸砲)를 가로가 아니고 세로로 놓으면 적진 한복판에서 터트릴 수 있다니까.”
조선군은 회전을 염두에 두었지만 최소한의 함정은 갖추어 두었고 그것이 명나라에서는 사장된 작포라는 물건이었다.
적을 모조리 몰살시킬 목적도 아니고 대열을 무너트릴 목적으로 작포를 사용하면 충분하다.
맨 앞의 병사가 발화장치를 밟으면 20보 뒤에서 폭발하니 적은 정밀한 포격으로 오인할 지경이었다.
조선의 일제 사격이 쏟아졌지만 일본 진영은 아직 작포로 인해 붕괴된 진영을 수습하느라 움직임이 더뎌졌다. 약간의 차이는 전열을 담당해야 할 조총수의 궤멸로 돌아왔다.
진영을 재차 유지하려면 움직임을 멈춰야 하고, 움직임을 멈추면 신각이 쏘아대는 화포에 정면으로 노출된다.
일본군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포탄을 뚫고 조선 진영에 도달했을 무렵에는 이미 일본 본대의 일 할 가량인 2,000명이 불귀의 객이 되었다.
하지만 일본군도 동료의 시체를 발판으로 삼아 대열을 완성하고 조총의 일제사격이 시작되었다.
최정예인 의흥위의 병사들이지만 지근거리에서 쏘아진 조총 사격은 그들의 갑옷을 뚫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창 들어! 비격뢰를 알아서 던지며 모든 수단을 동원해 놈들의 진격을 막아라!”
“조총을 쏘아라! 놈들과 싸워본 적도 없더냐! 주상전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위력이 부족한 조총 탄환이 의흥위의 갑옷에 막히거나 투구에 튕겨 나가는 것과 달리 조선에서 발사한 보총 탄환은 대부분 일본군의 몸을 꿰뚫어버렸다. 여기에 일본군의 대열이 또다시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놈들의 정강이를 모조리 박살 내라!”
내금위를 시작으로 한 조선의 장교진과 일본의 사무라이는 창날 아래에서 일대 격전을 벌였다.
하지만 싸움의 철칙이 있었으니 힘이 센 놈과 넓은 데서 싸우라는 동서고금의 진리였다.
임차손이 휘두른 철퇴가 사무라이의 칼을 박살 내버렸다.
본능적으로 넓은 공간을 찾아 민첩하게 내금위 병사들의 등을 노리려는 사무라이였지만 바짝 엎드린 상태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무기의 크기와 힘 단 두 가지였다.
“여섯 놈! 일곱 놈!”
“이거 고란 녀석이 왔어야 하는데 덩치가 커서 힘들어 죽겠군!”
어느새 피칠갑이 된 임차손은 칼날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 피를 흘렸지만 자신의 피보다 철퇴로 때려죽인 상대의 피가 더 많이 묻어 있는 형편이었다.
두 배나 많은 숫자의 일본군이 차츰 붕괴되자 이연은 재차 지시를 내렸다.
“애초에 당해낼 수 없는 싸움을 하니 저런 식으로 무턱대고 달라붙을 수밖에 없지. 신각에게 명령을 내려 화포 사격을 중단하라 하게. 더 쏘아봤자 화약만 아까울 것이네.”
잘못하면 화포가 애꿎은 조선 진영을 공격할 염려가 있기에 이연의 명령이 하달되었다. 침묵한 화포들은 왜군이 퇴각할 때 쐐기를 박기 위해 일제히 쏘아지리라.
일본군 진영은 벌써부터 듬성듬성 틈이 드러나며 갈라지고 있었으나 조선 진영은 여전히 굳건하게 버티고 있었다. 오히려 일본군의 사기가 점차 줄어드니 얼마 지나지 않아 진영이 궤멸되리라.
하지만 제로니모는 생소한 모습을 보았다.
“제가 듣기로 조선 사람들은 궁시의 달인이라 하였는데 오히려 일본 측의 화살이 많군요.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제로니모가 하늘을 수놓은 화살을 확인하자 이연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적의 공격을 최대한 분쇄시키기 위해 장수들이 필요한 병사들만 남겨놓게 했더니 궁병들이 이탈한 군대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연은 조금 엉뚱한 생각을 하였다.
“이제는 장수가 활을 쏘고 보졸(步卒)은 총을 쏘는 시대가 되었네. 지금 내가 이끄는 병사는 일만 이천 명에 불과하지만 보총수는 사천오백 명에 달하는데 이들을 궁수로 전환해 보았자 무얼 얻겠나?”
“이론상으로는 납득할 수 있는 일이지요. 모든 병사가 머스킷을 쏘면 무적에 가까운 군대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저희도 그런 비용을 지불할 수는 없습니다.”
“아국이 세 배로 강성해지면 정말 보총수만 두어서 군대를 꾸려도 괜찮을 것 같군. 지금이야 억지로 병사를 나누어 보총수를 줄였건만 후대에는 가능할지도 모르지.”
그저 소원뿐인 말이었지만 미래에는 정말 이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전선에서 희생자가 빗발치고 있지만 일본 진영에서 세 명이 죽어 나갈 때 조선 진영에서는 한 명이 죽는 꼴이다.
조선이 택한 망치와 모루 개념에서 적의 공격을 버터야 할 모루가 적의 망치를 부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지만 반대편의 상황은 더욱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 * *
12,000명. 말이 일만 대군이지 실질적으로 예비로 가져온 말과 이를 보조하기 위한 시종까지 합치면 삼만 명 이상의 대군이 밀집한 것과 같은 기병은 정지운의 명령대로 숨을 죽인 채 비파산 기슭에 대기하였다.
이미 본대에 달려든 왜인들이 스스로 무너지고 있었으나 정지운의 눈은 병사들을 살펴보기를 반복하였다.
아무리 기세가 좋은 기병이라 하여도 상황을 봐가며 돌격해야 하는 법이다.
“어르신! 슬슬 돌격해야 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이대로라면 주상전하께서 적을 모조리 격멸하실지도 모릅니다!”
“잠시 더 지켜보자꾸나. 주상전하께서 판단을 일임하셨으니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한다.”
요동 토벌에서 경험을 쌓은 북인 젊은이들은 몽골의 고참병을 고용해 기마술을 비롯한 무술을 배웠으나 이들의 전력이 얼마인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나뭇가지 하나가 정지운의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치워라.”
“네? 뭘 치우라 하셨습니까?”
“아니, 나뭇가지를 치우…… 쿨럭!”
일본군 진영을 살펴볼 수 없어 나뭇가지를 잘라 치우라는 말을 하던 정지운은 갑자기 날아온 먼지에 기침을 하였다.
한참의 침묵이 이어지자 북인 기병들은 이걸 명령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어르신께서 놈들을 치우라 하신다!”
한 철부지 기병이 목소리를 높이자 정지운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을 수습하려 했지만 겨울바람으로 인해 계속 기침이 나왔다.
그러자 북인 청년들부터 끓어오르는 혈기를 이기지 못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왜인들은 치워 버려야지! 저놈들은 아국을 침략한 쓰레기 더미가 아니더냐!”
“놈들을 죽여서 치워라! 박살내서 치워라! 머리통을 으깨서 치워라!”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서 치워라! 치워라! 치워라! 낙동강으로 밀어 넣어서 치워라!”
상황을 보아가며 우회 및 파상적인 돌격 명령을 하달하려 하였지만 자신의 말을 명령으로 알아들은 젊은 놈들이 기세만 앞세워 당장 돌격하려 하였다.
명령을 물리고 싶었지만 정지운 자신도 환갑이 넘은 나이에 피가 끓어오르며 명령을 하달했다.
“내 말을 가져오너라! 해진(海珍)이가 좋겠구나! 나도 저놈들을 치우기 위해 대오에 합류하겠다! 무얼 아끼느냐! 어서 돌격을 시작하라!”
“아니 영감님! 이런 방식으로 명령을 내리면 어떻게 하십니까!”
“명령은 무슨! 내가 언제 말이라도 한 적 있어? 이미 사태를 수습할 수 없으니 돌격하라고!”
그나마 이성을 갖춘 호분위 병사들도 정지운이 환갑의 몸으로 말 위에 올라타는 모습을 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돌격을 시작하였다.
본래 차근차근 적진을 유린해야 할 일만 기가 넘는 기병이 한 번에 들이닥쳤다.
그것은 근육의 바다였다. 벌판 가득 흙먼지가 피어오르니 의지를 가진 파도가 일본군을 덮쳤고 압도적인 힘 앞에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구로다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병사들을 닦달하였다.
“저놈들이 터지는 화살(작렬신기전)을 쏘려고 대열이 멈출 것이다! 화포를 쏘아서 돌격을 중단시켜라!”
“놈들이 멈추지 않습니다! 멈추지도 않고 마방책을 힘으로 때려 부숩니다!”
“이 미친놈들을 보았나! 저걸 힘으로 때려 부순다고!”
아무리 작렬신기전 대응을 위해 느슨하게 만든 마방책이라도 한 개의 무게가 15관(56㎏)에 달하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양손으로 편곤을 휘두르자 마방책의 나무가 분질러지며 사방으로 나동그라졌다.
전력으로 달려와 포격을 피하며 말을 급선회함과 동시에 편곤을 전력으로 휘두르려면 보통 재주가 아니다.
하지만 몽골 용병들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제자들을 격려하였다.
“불친(몽골어로 근육)들 실력이 엄청 늘어났어! 아주 잘 치우네!”
속도를 유지한 채 급선회하는 대열에 포격을 쏟아봤자 큰 효과도 없었다.
옆의 병사가 파편에 휩쓸려 바닥에 자빠졌지만 북인 기병들은 끊임없이 편곤을 휘둘러 마방책을 부숴 버렸다.
“이런 멍청한 놈들을 보았나! 작렬신기전을 버티려고 마방책을 이따위로 약하게 만들어!”
“역시 정지운 어르신이다! 이 물건을 치울 수 있으니 왜인도 치울 수 있다고 판단하신 거야! 안력(眼力)이 얼마나 좋으신가!”
본래 튼튼한 나무를 억세게 엮어 칼날에 버티게 만드는 마방책이지만 작렬신기전에 휩쓸리면 모조리 부서지기에 작고 가볍게 만들어 숫자로 버티려 하였다.
하지만 그런 가벼운 마방책은 도리깨질 한 번에 무너져 내렸다.
“쏴! 쏴! 텟포를 쏘라 아아악!”
일본군이 나서서 조총을 쏘려 했지만 마방책이 얇아지자 다음 대열은 크게 선회하며 화살을 마구잡이로 쏟아부었다.
일본군 진영이 붕괴되는 모습을 보자 부관인 황진이 명령을 하달하려 하였다.
“철기(鐵騎)! 철기들은 나서서 놈들을 완전히 치워라!”
“철기가 뭔 철기야! 이럴 때엔 총기병(銃騎兵)이 먼저 나서야지! 나도 나서겠다! 따라와라!”
최정예 병사에 속하는 기병은 보급품 외에도 스스로 무기를 사들여 무장하는 일이 보편적이었다.
당연히 부유한 북인들은 나팔총이나 총열을 잘라내 사용하기 편한 보총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정지운은 허리춤에 네 정의 나팔총을 착용한 채 휘황찬란한 옥색 두정갑을 휘날리며 전선으로 향하였다.
정지운의 뒤를 따라 혼란 속에서도 총기병 모두가 그에게 합류했다.
“쏴! 놈들이 밀집해 있잖아! 쏘는 대로 맞으니 닥치는 대로 쏘라고!”
“어르신 그러다 죽습니다!”
“내가 죽을 거면 스물 무렵에 죽었다! 네놈들 나팔총 내놔! 전쟁 끝나고 내가 두 정씩 사줄 테니 당장 던져!”
다리를 노리고 날아오는 창날을 나팔총으로 걷어낸 정지운은 주변 북인들이 던진 나팔총을 받아 마구잡이로 난사하였다.
그의 뒤에 달라붙은 황진조차 신들린 기마술에 혀를 내두르며 뒤꽁무니를 따라가기 바빴다.
“네놈이 왜장이렷다! 네놈도 왜장이고! 야 거기! 총 내놔!”
“여기 있습니다! 어르신!”
“황진! 너 똑바로 못 해! 내가 여덟 놈 머리통을 날렸으니 네놈도 날려야지! 아악!”
한 왜병이 용기를 내어 조총을 쏘았지만 정지운은 배를 움켜쥐더니 얼굴을 일그러트릴 뿐이었다.
후방으로 물러나 갑옷을 벗으니 두정갑을 꿰뚫은 탄환이 튼튼한 복근을 스친 상태였다.
병사들이 안심하자 정지운은 황진에게 명령을 하달하였다.
“다 죽여! 이미 진영이 무너지다 못해 수세미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 있으니 그냥 돌격하면 끝나! 그나저나 탄환에 맞았으니 나도 퇴물이 다 되었네.”
늙은 몸으로 한참을 날뛴 덕분에 북인들은 기세를 무너트리지 않고 마지막 작업에 돌입하였다.
본영 근처로 돌아와 시종들에게 장창을 받은 이들이 예비마를 타고 돌격하는 모습을 본 정지운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북쪽을 바라보았다.
“내가 주상전하께 받은 은혜를 일 할이라도 돌려드릴 수 있었으니 참으로 다행이구나. 그나저나 저 철부지들 언제 저렇게 돈이 많아졌지?”
어느새 흥분이 가라앉은 정지운이 살펴보니 이미 전쟁의 승패는 정해졌다.
일본군 2진이 얼마나 버티건 간에 조만간 무너질 것이고 후방을 기습한 조선군과 합쳐져 이 달구벌에서 살아남는 이는 거의 없으리라.
하지만 정지운은 북인들의 무장을 보더니 이들의 몸값을 걱정하였다. 이번 전쟁에 참전한 기병 12,000명의 장비 가격만 따져도 한 명당 은자 60냥이 넘으리라. 그러하면 고용비로 나라가 파산할지도 몰랐다.
비용을 계산하는 와중에 일본군의 후방으로 달려 들어간 기병들이 보였다.
뚫리지 않는 본대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몰살당한 분견대를 확인한 일본군은 전열이고 뭐고 모든 일을 포기하고 도주를 택하였다.
“참 쉬운 전쟁이었군.”
후방의 이경록이 도주하는 일본군 뒤를 막는 것을 확인한 정지운은 느긋하게 기지개를 켰다.
앞에는 조선의 예비대요, 뒤에는 조선의 본대를 마주한 일본군은 낙동강으로 몸을 던지며 살길을 찾아 발버둥을 쳐댔다.
이제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는 일 하나만 남았으리라.
#작가의 말
이제 지루한 전쟁도 끝났습니다. 다음 주 내에 종전을 끝내고 성룡이를 끔찍한 업무 지옥으로 몰아넣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