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근육조선-437화 (437/573)

근육조선 437화

2부 21장 15화 달구벌 결전(1)

일본군의 행군은 지옥과 같았다.

사방팔방에서 의병과 승병의 습격, 그리고 산성에 주둔 중인 지방군의 견제까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공격이 일본군을 향해 이어졌다.

억지로 부대를 합류시켜 공격을 막아냈지만 본대가 아닌 보급대가 공격을 당했다.

“이번 보급도 습격당했습니다. 놈들이 곡식을 가져가는 것을 포기해서 아예 불을 놓아서 보급의 절반만이 도달하였습니다.”

“이래서야 보급품이 바닥날 지경인데 화약이 조금 여유가 있어서 다행이긴 하군. 그나저나 야마가타가 큰일을 하였어. 한산도에 피해를 입히지 않았다면 퇴로마저 막힐 수 있었겠지.”

구키의 배신은 일본 본대에 전해지지도 않았다. 조선에 붙어놓고도 태연하게 동래로 돌아온 그는 한산도에 타격을 입혔지만 이순신에게 추격당해 죽을 고생을 했다며 동래에 칩거하였다.

이제는 사람도 아닌 의지를 가진 태풍인 히토카제(人風)라 불리는 이순신의 본영이 파괴되어 퇴각하였다는 소식에 사기가 조금 올랐지만 불만이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심지어 가토 기요마사는 저 멀리 있는 산성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차라리 산성을 몇 개라도 걷어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대로라면 피가 말라 죽겠습니다.”

섣불리 산성을 에워싸고 공격하면 군을 돌리는 데만 하루, 산성을 포위하고 진격하는 데 이틀 그리고 기약 없는 공성전을 벌여야 한다.

하지만 시간은 일본군의 편이 아니니 카츠요리는 오늘도 습격당한 가토 기요마사를 달래듯이 말하였다.

“자네의 말도 틀리지 않다네. 하지만 조선 수군이 열도 외부의 항구를 모조리 격파하고 돌아오는 시일은 아마 십이월 중순일 걸세. 앞으로 한 달 이내에 결전을 치러야 하네.”

시간이 촉박하니 그냥 포기하고 진군하자는 말을 하였지만 오늘의 진군 거리는 20리(8㎞)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심지어 아직 해가 훤히 떠 있음에도 진군이 정지되었다.

본래 진군과 숙영은 많아야 수천 명, 적을 경우 수백 명 단위로 쪼개진다. 수많은 이들이 한 번에 머물 장소가 흔하지도 않으니 적당한 거리를 행군하면 알아서 인근의 숙영지를 찾는다.

지금의 일본군이 그런 방식으로 숙영을 취한다면 밤중에 철갑괴물 -공식적으로는 조선의 최정예 병사- 에게 습격당하거나 승병들이 수풀로 기어들어 와 산탄총을 난사하고 도주한다.

결국 비효율적 진군을 거듭하니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통하지 않을 명령이지만 카츠요리는 인근의 산성이 있음을 확인하고 명령을 내렸다.

“저 멀리 산성이 있으니 불을 놓도록.”

잘못하면 본대가 휩쓸릴지도 모르지만 산불을 내서 화공이라도 실시하지 않으면 병사들의 불만이 커지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저 멀리서 잠시 피어오르다 사라진 연기를 본 카츠요리는 돌아온 병사들을 마지못해 꾸짖었다.

“이번에도 산불이 커지지 않았는가?”

“애초에 산속으로 들어가면 미친 땡중들이 마음대로 텟포를 쏘아대지 않습니까. 어떻게든 산 중턱까지 나아가 불을 놓았는데 불이 커지는 것 같다가 진화되었습니다.”

무슨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선군은 물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산속에서 물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라도 가지고 있나 보다.

깊은 한숨을 쉬며 퇴각을 생각하던 카츠요리였지만 군막을 젖히고 들어온 이가 무릎을 꿇으며 보고를 올렸다.

“조선의 전령이 보내던 서신을 확보하였습니다! 산성으로 올라가던 놈의 덜미를 잡으니 전력으로 도주하였는데 밀랍으로 감싸 봉인한 서신을 떨구었다 합니다.”

“뭐라고? 평상시에는 전령이 잘 오가지도 않는 조선이 어찌하여 전령을 보냈는가!”

언제쯤 조선 왕을 사로잡을 수 있을지 고민하던 카츠요리가 한달음에 달려갔고 이미 서신을 해독 중인 문인(文人)들이 머리를 맞대고 해독하고 있었다.

나름 기밀을 확보하려 하였는지 파자(破字)는 물론이요 알아보기 힘들게 일정한 간격으로 기입된 서신이었지만 철저한 암호화는 되어 있지 않았다.

한참 동안 파자를 해석한 이들은 확인할 수 있는 한자를 기입해 가츠요리에게 가져왔다.

“신(辛)자에 눈 목(目)자와 궤(几)자…… 여기에 입 구(口)자 세 개로 끝나니 친림(親臨: 왕이 몸소 나섬)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삼천(三千)이라는 파자가 열 번 반복되니 적군은 삼만 명 내외겠군요.”

“친림과 삼만의 군사. 조선이 정병만 군사로 기입하니 본대와 거의 대등한 수의 병력이겠군. 그 병사들이 머무는 장소는 어디라 하였는가?”

“달구벌(達句伐)이라는 글귀가 여러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미 조선에서 잡혀 온 백성들에게 물어보았는데 달구벌은 지금 대구라 불리는 지역의 옛 이름입니다.”

카츠요리의 눈이 커지며 북쪽을 바라보았다.

이미 조선 왕은 지척인 대구에 있으며 자신이 있는 장소는 현풍현(玄風縣: 현 달성군 북쪽)이다. 만약 퇴각하면 오만 명 이상의 사상자와 패전에 대한 책임, 그리고 모든 항구가 박살 난 일본 열도만이 남을 뿐이다.

하지만 조선 왕의 본대와 결전을 벌여 승리하거나 큰 타격을 입힌다면 이 모든 일을 뒤집을 수 있다.

사기가 바닥으로 내리꽂힌 상황에 마지막 수를 결정한 카츠요리는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조선 왕은 달구벌에 있다! 다들 진군 속도를 높여라! 조선 왕을 격퇴하기라도 하면 강화 협상을 맺을 수 있다. 이대로 시달리며 한양까지 나아가느니 한번 자웅을 겨뤄보자!”

어느새 자신의 부하인 키노시타 토키치로처럼 강화(講和)를 종용하는 입장이 되어 쓴웃음이 나왔지만 지금 조선군의 정예는 죄다 일본 열도의 항구를 타격하고 있으리라.

그러니 충분한 승산이 있다 여긴 카츠요리였다.

* * *

마침내 결전의 날이 밝았다.

지난 사흘 동안 결전지로 배정한 대구 일대에 진영을 차린 조선군은 마침내 11월 27일 일본군의 도착을 코앞에 두고 진영 분배를 시작하였다.

이미 갑주를 차려입은 이연은 물론이요, 각 장수들과 참모 역할을 하는 이이가 있었으며 이이는 어느새 만들어둔 대구 일대의 지형 모형을 탁자 위에 올려두고 보고를 시작하였다.

“진형 자체는 신천과 금호강을 끼고 있는 배수진(背水陣)입니다만 신천에는 이미 수많은 부교를 두어 여의치 않을 때 퇴각할 준비를 마쳐 두었사옵니다.”

“훌륭하군, 혹여나 아국의 병사들이 패퇴하는 불상사가 벌어져도 시가지를 끼고 적을 돈좌시켜 퇴각할 틈을 벌 수 있을 것이네. 그러한 일이 벌어질 이유는 없겠지만.”

일대 격전이 일어날 달구벌은 논밭이 즐비한 구릉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기병도 보병도 움직이기 좋지만 분지 지형인 대구의 특성상 퇴로는 낙동강 일대 외에는 없는 지형이다.

계획대로면 36,000명에 달하는 오위 정예병과 북인 기병을 두어야 하지만 예상보다 방어선의 손실이 적어서 사방에서 퇴각한 병사들이 이미 달구벌 북쪽의 달성군에 소집되어 있었다.

전령으로 위장한 첩자가 일본군에게 정보를 흘리기를 왕이 친정(親征)을 실시하였으며 군의 규모는 정군(正軍)만 따져 삼만 명에 미치지 못한다는 내용의 서신을 흘렸다. 그러니 군을 적당히 나누어 함정으로 유도해야 하리라.

방법이야 수없이 많았지만 이번 전투에서 대놓고 방어진을 만들거나 적이 들어오지 못할 장소에 머물러 수비하려 하면 일본군은 주저 없이 퇴각하리라.

이연은 적이 승부를 걸기 적합한 회전(會戰)을 위한 최종 진영을 편성하였다.

“진영을 크게 넷으로 나눈다, 먼저 삼랑진 방어선 이후 퇴각을 거듭한 병사 일만여 명과 호분위 기병 삼천 기를 떼어 북서쪽의 달성에 둘 것이다. 혹여나 본대가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면 후방을 치고 아니라면 낙동강 일대를 틀어막아 왜군의 퇴각을 저지하도록.”

“신 이경록!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효령대군의 후손이자 오위 소속 호분위의 지휘관 중 한 명인 이경록이 무릎을 꿇으며 인사를 올렸다.

아무리 지방군이라 하여도 격파된 왜군을 상대할 수 있다 여긴 이연은 재차 명령을 하달하였다.

“다음으로 기병을 나누겠다. 호분위 병사들과 북방에서 소집된 기병들은 모두 비파산 북쪽에 진을 차린다. 자고로 기병은 구릉을 타고 쏜살같이 적을 몰아치는 법이 아니겠느냐.”

“신 정지운, 주상전하의 명을 언제나 받들 준비가 되어 있사옵니다.”

“혹여나 왜인들이 모든 기병을 확인하면 질겁하여 퇴각할지도 모르니 적당히 엄폐하도록.”

전투의 목적은 단순한 승리가 아닌 최대한 많은 왜군의 격멸이었다. 만약 어설프게 승리를 거두어 적을 흩어지게 만들면 살길을 찾아 어떻게든 산성으로 공격을 감행하리라.

그렇게 되면 이겨 놓고도 백성들이 피해를 입게 되니 철저한 격멸을 위해 본대의 규모가 줄어들게 마련이다.

외부에 배치할 두 부대의 장소를 정한 이연은 다시 본대와 포병대의 위치를 정하였다.

“본대는 와룡산과 두류산 사이의 둔덕에 자리를 잡을 것이다. 지금이 여름이라면 대명천이 해자 역할을 하겠지만 겨울이니 벌판과 차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신각을 필두로 한 충무위는 두류산에서 마음대로 화포를 쏘아라!”

“지금 당장 나아가 화포를 옮겨 두겠사옵니다. 놈들을 단매에 때려 부수겠나이다!”

지난 전쟁의 공훈을 인정받아 포병 전문 부대인 충무위의 장(將)으로 진급한 신각은 화포를 사용할 생각에 마음이 벅차올랐다.

천자총통만 육십 문에 기타 화포를 합치면 300문에 달하니 큐슈 전역을 능가하는 화력을 퍼부을 수 있으리라.

“모든 편성이 끝났으니 놈들이 공격을 취할 때까지 병사들을 배불리 먹이도록. 나는 후방에 대기하고 있는 사신들을 접견하고 오겠다.”

이연이 향한 곳은 이번 전쟁에 협력한 외국 사신들이 머무르는 장소였다.

스페인을 비롯한 협력 국가의 사신들, 아직 사신을 보내오지 않은 명나라를 제외하면 전쟁에 협력했으니 이번 결전을 직관할 기회를 얻었다.

외국의 사신이라 해봤자 유구에서 보내온 사신과 조선에서 대월국으로 이주한 이의 후손인 대월 사신 한 명, 그리고 스페인에서 파견한 사신단의 대표 한 명이 전부였지만 셋 중 둘은 입에 침을 튀기며 역관을 통해 대화를 나누었다.

“왜인들이 항구에서 화약을 팔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저에게 걸렸지 뭡니까. 제가 웃통을 벗고 엿이나 먹으라고 말하며 달려들어 놈들을 근육 하였습니다.”

“근육 하였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덩치 한번 대단하신 분이니 당시의 꼴이 상상이 갑니다. 이렇게 단련된 신체를 가지셨으니 제 진정한 기예로도 쉽사리 상처를 입힐 수 없지요.”

문흑중도(文黑中島)라는 대월 출신 사신이 팔을 올렸다 내리며 추임새를 넣었고 스페인에서 파견된 제로니모 산체스 데 까란사라는 귀족은 손뼉을 치며 맞장구를 쳤다.

어느새 레이피어를 뽑아 들고 원형을 그리며 사방을 뛰어다니던 제로니모는 문흑중도가 집어 던진 옷가지를 노려보고 기합을 넣으며 검을 휘둘렀고 네 조각으로 찢어진 웃옷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급작스럽게 천막 안으로 이연의 호위병인 내금위장 임차손이 들어왔고 둘 다 임차손의 부릅뜬 눈과 마주하자 의복을 정돈하고 이연에게 인사를 올렸다.

“이런 삼엄한 곳에서 지나치게 흥에 겨워 못 할 행동을 하였습니다. 부디 저희의 불민한 행동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내가 직접 듣고도 대소를 터트릴 만큼 우스운 일이니 그럴 수도 있지. 왜인들이 머나먼 길을 풍랑에 시달리며 대월까지 당도하였는데 정작 항구를 관리하는 자에게 두들겨 맞고 내던져지다니. 그러한 일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법이네.”

“용서해 주신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머나먼 이국에서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나 이런 행동을 보일 줄은 몰랐습니다. 조선은 참으로 강대한 나라이니 펠리페 2세 전하께서 동맹을 맺음은 참으로 대범한 선택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하면 그 강대함을 몸소 보여주면 충분하겠지. 이미 진형을 움직이고 있으며 결전이 코앞으로 다가왔으니 한번 확인해 보겠나?”

이연을 따라 밖으로 나온 제로니모는 사방을 살피며 조선군의 진영을 확인하였다.

듣자 하니 검술은 물론이요, 병사의 지휘에도 일가견이 있는 자이기에 진형의 허실을 한눈에 파악한 것 같았다.

정확히는 허도 실도 없는 평범한 진영이었다.

“너무 정석적인 진형 같습니다. 조선의 장기는 다른 무엇도 아닌 다채롭고 위력이 강한 화포라 하였습니다. 저렇게 많은 적이 밀집하여 있는데 화포를 퍼부으며 기선을 제압하시지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일반적인 싸움이라면 강점을 부각시키고 약점을 숨기는 법이지만 조선군의 약점이라 해 보았자 근육이 지나치게 많아 지구력이 부족해 장기전에서 약점을 보인다는 점 하나였다.

이연은 코웃음을 치며 답하였다.

“그럴 필요는 없네. 전략과 전술이 동원된 싸움은 상대의 수를 파악한 순간 뒤엎어질 가망이 생기는 법이라네. 하지만 압도적인 힘 하나만 사용한다면 무슨 수를 써도 뒤엎을 수 없으니 내수린을 할 때 경합(競合) 구도가 이루어질 때와 같지.”

“내수린이라는 무술은 또 무엇입니까?”

“아주 훌륭한 국기(國伎)이니 마음이 있다면 배우게나.”

문흑중도는 콧노래를 부르며 전쟁이 끝나고 내수린할 상대를 찾아 눈을 굴렸지만 이에 대한 지식이 없는 제로니모는 자신이 모르는 무술이라 생각해 마음속에 담아두며 재차 질문을 퍼부었다.

“자칫 잘못하면 적의 역공이나 계략에 당하지 않겠습니까. 조선의 힘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어느 정도의 전략은 수립하심이 마땅해 보입니다.”

“전략이라? 코끼리가 사자를 만나면 겁에 질려 횡보(橫步: 옆걸음)를 행하는 일은 없다 하였으니 충분한 힘이 곧 전략이며 전술이지. 그러고 보니 한 손 검술에 일가견이 있다 하였는데 한번 시험해 보겠나?”

제로니모가 고개를 끄덕이자 본영 안에서 칼을 뽑고 휘두른 제로니모를 따끔히 혼내주려는 임차손이 무기 대신 커다란 목도를 차고 앞으로 나섰고 제로니모도 이에 질세라 오른손에는 레이피어 대용의 죽도를, 왼손에는 단검 대용의 홍두깨를 들었다.

“양손 검을 한 손 검으로 상대할 수 있다 여기니 자만심이 대단하시구려.”

“상대할 수 없으니 알아서 피해야 하는 법입니다!”

역관(譯官)을 통해 말싸움을 하기가 무섭게 자세를 잡은 둘은 서로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죽도를 앞으로 세우고 사방으로 움직이며 임차손의 공격을 유도하는 제로니모였지만 임차손은 섣불리 공격할 수 없었다.

임차손의 칼을 받아내면 제로니모의 죽도가 박살 날 것이지만 그의 발걸음은 지나치게 경쾌하니 단 한 번이라도 칼을 잘못 휘두르면 빈틈을 타고 들어와 승부가 끝나리라.

대치가 이어지자 임차손은 갑자기 뒤로 뛰어가더니 다른 무기를 가져왔다.

“그래 이게 답이지! 다 때려 부숴야지!”

“이런 미친!”

거대한 편곤을 장작개비처럼 휘두르자 제로니모는 그 거대한 공격범위와 바람을 가르며 움직이는 힘에 질려 뒤로 물러나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콧방귀를 뀐 임차손의 모습을 본 이연은 그의 손을 들어주며 승패를 정했다.

“이게 조선의 답이네. 마상에서 휘두르기도 벅찬 편곤을 장작개비처럼 휘두른다면 기교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 힘이 곧 답이지.”

허탈한 표정의 제로니모는 거대한 편곤 끝에 매달린 쇳덩어리를 확인하고 혀를 내둘렀다.

서양도 이런 프레일(frail)을 사용하는 경우는 많았지만 지나치게 거대한 쇳덩어리이니 어중간한 힘으로는 휘두르다 허리가 빠질 지경이다.

“이런 거력을 가진 이와 싸우려면 검술을 다시 창안해야겠군요. 아니, 전쟁이 끝나면 조선에서 몇 년 머물며 검술을 비롯한 무예를 다시 벼려내겠습니다.”

제로니모의 태도를 보니 조선에 있는 대부분의 무인(武人)들을 꺾기 전까지는 절대 돌아가지 않으리라.

이연은 외국의 검술을 건져내서 기분이 좋았는지 임차손에게 제안을 하였다.

“서반아에서 건너온 검술의 달인이 아국에서 배움을 청할 줄은 몰랐네. 저자를 통해 얻은 검술은 천금의 가치가 있을 걸세. 자네 덕분이니 소원 하나를 들어줄 것이니 무얼 원하는가?”

“주상전하께 감히 아뢰옵나이다. 신이 내금위장으로 발탁되었으니 주상전하를 호위할 뿐이옵니다. 하지만 제 벗인 서애가 수양대군께서 사용하신 대역기봉의 조각을 주어서 이를 편곤으로 엮어냈지만 쓸 방도가 없사옵니다.”

“어차피 내가 주장으로 나서는 싸움이니 내금위 전체를 전선에 내보낼 생각이었네.”

“그러하면 신이 전열에 서서 단기접전(單騎接戰: 일기투)을 행하는 것을 허하여 주시옵소서.”

잠시 고민한 이연이지만 조선 전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무위를 보이는 자가 임차손이었다. 궁시(弓矢)야 평범한 축이라 신립보다 조금 부족하다 평가받는 임차손이지만 기창(騎槍)만큼은 제일이라 하였다.

전략적인 가치도 있었다. 요즘 삼국지연의라는 소설이 유행하고 있으니 소설처럼 단기접전을 벌여 적장을 무찌르면 사기가 하늘 끝까지 치솟으리라.

허가를 받은 임차손이 판금갑옷을 정리하는 모습을 본 이연은 태연히 진중으로 나아가 잠을 청하였다.

다음 날인 음력 11월 28일, 일본군이 마침내 대구의 입구인 옥포에 모습을 드러냈다.

병사만 3만5천에 보조 병력이 3만에 달하는 군대가 한 몸으로 진군하는 모습을 본 조선군은 태연히 회전을 위한 대형을 갖추었다.

#작가의 말

제로니모는 스페인의 소드마스터이고 중세 스페인 검술의 정수를 창안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등장하고 기존 검술이 모두 사장될 정도로 격차가 심해졌다 합니다.

미디어에 나오는 쾌걸 조로의 검술이나 현대의 펜싱이 이 사람이 창안한 검술의 머나먼 후손이라 보시면 됩니다.

물론 실전성에 있어서는 제로니모의 ‘진정한 기예’라 해석할 수 있는 [라 베르다데라 데스트레자]가 훨씬 우수하지만요. 이 검술은 일종의 철학이자 유파로 발달하여 의학에까지 영향을 끼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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