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436화
2부 21장 14화 한산도 대첩(2)
거제도에서 가장 오래된 세진암은 일천 근의 화약이 터지며 말 그대로 분해되었다.
하늘 높이 치솟은 연기는 물론이요, 사방으로 비산한 파편이 사찰 인근의 병사들까지 모조리 휩쓸어 버렸다.
“야마가타 어르신께서 사라지셨다! 놈들이 폭약을 사용했다!”
“조선 놈들이 섬 안에 남아있다! 놈들이 어디 있는지 찾아라!”
지휘관들이 고래고래 목소리를 높여도 거대한 폭음에 질린 일본 병사들은 상황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런 상황이니 사방으로 흩어져 조선군을 수색하는 분견대에 소식을 전할 여유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거제도의 산 곳곳에 퍼져있던 분견대에 난데없는 사무라이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준마를 타고 번뜩거리는 광목(廣木)에 염색한 군기를 등에 짊어진 채 분견대에 지시를 전달했다.
“거기 자네들! 수군이 적장을 죽이고 한산도를 공격하였다네! 한산도의 화약 창고를 불태워 섬 전체가 불바다가 되었어! 조선 수군이 거제도 일대에 상륙하여 목숨을 건지고자 하니 사방으로 산개하여 제압하라는 명령일세!”
“자네 지금 뭐라 하였나?”
처음에는 조선에서 보낸 첩자라 의심하였지만 올바르게 만들어진 군기와 온전한 형태를 갖춘 갑주를 보니 첩자로 의심할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시선이 쏠리는 것을 알아차리자 사무라이는 말을 돌리며 일방적으로 명령을 전달하였다.
“나도 소식을 전해야 하니 미안하지만 알아서 판단하고 움직이게. 나리께서도 다급히 움직이시느라 현장의 판단에 일임하실 예정이라더군.”
사무라이의 말을 들은 대다수의 분견대는 잠시 고민하다 해안가로 몸을 움직였다. 어차피 섬 안에 조선군은 없으니 공을 세우려면 해안으로 달려가서 조선군의 목을 베야 하는 법이다.
세 개의 분견대에 소식을 전한 사무라이는 엉뚱하게도 말에서 내려 거친 수풀 속을 헤집고 들어갔다.
그러자 등 뒤에서 람보복이라 불리는 위장복을 입은 병사들이 벌떡 일어났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아 퉁명스럽게 말하였다.
“세 개의 분견대에 소식을 전하였소. 얼마나 움직일지는 모르지만 놈들이 갈 장소는 훤히 꿰고 있을 것이니 당신들이 알아서 하시구려.”
그의 정체는 큐슈 전선에서 포로로 잡힌 사무라이였다. 다케다 가문의 신하인 사나다 마사유키 휘하에 있던 사람인지라 설득 끝에 조선에 협력하기로 하였다.
이번 일이 잘 돌아간다면 충분한 보상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하였으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의문이 있었는지 장비를 점검하는 임해도감 병사를 보고 질문을 퍼부었다.
“그 장난질은 대체 왜 치셨소. 함정에 속아서 해골을 후려친 덕분에 바로 화약에 불이 붙었기에 다행이지 혹여나 일이 수포로 돌아가면 어쩌려고 하였는지 의문이구려.”
“임해도감에서 가장 중요히 여기는 것이 함정을 설치하는 방법과 자신의 흔적을 지우는 법이지. 놈들이 해골을 건드리지 않았어도 구들 아래에 기름을 넣은 접시를 두고 촛불을 올렸지. 통제사께서는 오로지 정해진 시간에 화약을 터트리라 하셨다네.”
세진암은 단순한 암자이기에 적장이 폭발에 휩쓸리는 건 기대하지도 않았다. 임해도감 병사는 원시적 시한폭탄을 설치하면서 함정까지 같이 설치해 둔 것이다.
동쪽 해안으로 일본군이 상륙하자마자 지정된 시간에 폭약을 터트리라는 명령이 하달되었고 이를 철저히 지켰을 뿐이다.
병사는 사슴가죽으로 된 장갑을 꽉 조이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주변을 정탐하기 좋은 위치라 왜인들이 많이 드나들 줄 알았는데 대박이 터졌지 뭐야. 하지만 놈들이 손대지 않았어도 반 시진만 더 기다렸다면 타들어 간 촛불이 자빠지면서 기름에 불이 붙고 화약이 터졌을 것이네.”
철두철미한 임해도감 병사의 모습을 본 사무라이가 침을 삼켰지만 병사들은 태연히 도끼를 들고 허리춤에 투척용 도끼까지 장착하였다.
심지어 해안가에 잘 숨겨둔 망루의 병사들마저 기지개를 켜며 밖으로 나왔다.
“지난 닷새 동안 숨어 있느라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이제 놈들을 사냥할 차례군요.”
“아무렴. 자네들은 대다수가 사수(射手)이니 망루에 콕 틀어박혀 놈들이 접근하면 불벼락을 쏟아내게. 놈들이 함정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함정으로 나설 계기를 만들면 충분하겠지.”
다수를 상대로 임해도감은 쉽사리 나설 수 없지만 소수로 분열하고 사방을 색적(索敵)하는 적보다 만만한 상대가 없었다.
서로 망루의 위치를 알고 있었는지 거울로 햇빛을 반사해 망루끼리 빛이 오갔고 임해도감 병사들은 도끼를 들어 올리며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제 사냥에 나설 시간이다! 놈들에게 퇴각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사방으로 나아가 놈들을 습격하라! 스스로 함정이 있는 해안가로 올 것이니 하나하나 찾아서 도륙하라!”
앞으로 지루한 추격전과 일방적인 공격이 이어지겠지만 이는 임해도감의 장기 중의 장기였다.
하지만 임해도감 병사들에게 생각지도 못한 지원군이 합류하였다.
* * *
한산도 남쪽의 수많은 섬에서는 새벽부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추격전이 이어졌다.
고작 스무 척에 불과한 조선 수군은 이백여 척에 달하는 일본 수군의 포위망에 휩쓸리지 않으려 전력을 다하여 섬 사이를 종횡하였다.
“이순신이 북쪽으로 나서 구키를 상대하고 있으니 우리가 공훈을 세워야 하지 않겠느냐!”
구키와 더불어 일본 수군을 이끄는 모리 모토무라는 지휘봉을 계속 휘두르며 지시를 하달하였다. 사방에 퍼진 이백여 척의 일본 함선으로 추격하라는 지시가 전달되었지만 제대로 된 포위망은 형성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부관이 애써 의견을 제시했다.
“혹여나 함정일지도 모릅니다. 이순신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않습니까?”
“남쪽의 큰 섬(매물도)에서부터 지금까지 사방을 종횡하며 퇴각하였는데? 내가 조선 수군이라면 함대를 반전해서 격멸했을 것이다. 하지만 놈들은 계속 도망치기만 하잖아!”
처음에는 이순신을 상대할지도 모른다는 중압감에 똘똘 뭉쳐 움직이지 않던 일본 수군이지만 조선 수군이 섣불리 나서지 않자 어느 순간부터 이순신이 없는 조선 수군을 격멸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여 공세를 취하였다.
정밀한 포격도 아닌 기껏해야 함선이 돌아갈 때 어설픈 포격을 퍼붓는 조선 수군의 모습을 확인한 일본 수군은 더더욱 기세를 올렸고 거제도에 모든 병사를 상륙시킨 일백여 척의 함선이 추가되자 재차 명령이 하달되었다.
“합류한 일백여 척은 어서 한산도로 북상하라! 상륙하자마자 닥치는 대로 불화살을 날려라!”
천하의 이순신이라 하여도 보급이 끊기면 퇴각할 수밖에 없다. 조선군은 보급을 불태우고 도주하기를 거리끼지 않으니 한산도가 함락되면 즉각 화약 창고를 불태우며 신호를 보내리라.
이제 눈앞의 조선 수군을 격멸하면 만에 하나 이들과 합류하여 반격에 나설 이순신을 저 멀리 전라도라는 땅으로 쫓아 보낼 수 있으리라.
모리 모토무라는 다시 지휘봉을 휘두르며 명령을 하달하였다.
“와키자카 그 멍청한 놈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함대를 이끌고 이순신에게 무턱대고 덤벼들었지. 하지만 이 자리에 이순신은 없다! 놈들은 우리를 절대 이기지 못해! 속력을 높여라!”
“지금 계속 서쪽으로만 항해하고 계십니다. 이대로라면 한산도에서 점점 멀어집니다.”
“이미 분견대를 보냈으니 상관없다. 그나저나 저 무거운 배를 이끌고 내빼는 솜씨 한번 대단하군.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포위하여 격멸할 수 있는데 아슬아슬하게 실패하고 있군.”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바로 움직이고 움직임을 멈춘다 싶으면 급선회를 하는 솜씨는 대단하지만 이순신이 없으니 시간을 끌고 있을 뿐이리라.
지금쯤 이순신에게 처절히 박살 나고 있을 구키에 대한 애도를 표하며 모리 모토무라는 추격의 쐐기를 박으려 하였다.
“쇼군께서 도지(東寺: 교토의 큰 절)에 기거하시며 승전을 기원하여 불제를 올리고 계신다! 아무리 이순신이라 해도 한산도가 함락당하면 물러날 것이니 염려하지 말고 추격하라!”
일본 수군이 다시 기세를 올렸지만 조선 수군도 전력을 다하여 도주하였다. 하지만 조선 수군은 피를 말리는 추격전에도 여유를 보이며 노를 젓고 돛을 움직이며 섬 사이를 움직였다.
스무 척의 선박을 지휘하는 이는 일본 수군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었다.
그렇지만 이순신은 산발적인 화포 사격을 명령했을 뿐 태연하게 일본 수군을 돌아보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지금쯤 놈들은 북쪽으로 향한 분견대가 나에게 격멸당하고 있다며 멋대로 판단하겠지.”
군대를 분열하면 목적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지만 서로 소식을 전할 수 없는 시대이다. 이 시대에 소식을 전하는 법은 기껏해야 연기를 피우거나 연을 높이 올려 단순한 소식을 전하고 상세한 소식을 전하려면 전령을 보내야 한다.
하지만 급박하게 움직이는 일본의 세 군대가 서로 유기적으로 연대할 방법은 없다. 그저 현장 지휘관이 상황을 판단하고 독단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전부이니까.
하지만 이순신의 보좌관으로 있는 아케치 미츠히데는 참다못해 물어보았다.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처음에 매물도라는 섬에서 적과 맞서 싸우셨으면 이길 수 있었는데 어찌하여 이리 번거로운 일을 하시는지요.”
“언제라도 싸워서 이길 수 있지만 사방으로 도주하는 왜선을 추격하는 것이 더욱 번거로운 법이지. 놈들이 돌아간다면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훗날 적이 되어 만날 것이 아닌가.”
태연히 천리경을 들어 사방을 살피는 이순신의 모습을 본 아케치 미츠히데는 혀를 내두르며 그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이순신의 눈은 인근에 있는 섬 한복판에 가서 멈추었다.
“최 수사는 어떻게든 적을 견제하며 견내량 너머로 넘어오지 못하게 만들고 있군. 작전대로 잘 진행하고 있어.”
“잠시 섬을 훑어보았을 뿐인데 어찌하여 저 멀리 있는 견내량의 상황을 아십니까?”
“섬 위에 깃발이 있지 않은가. 한산도 일대의 섬은 기껏해야 다섯 리(2㎞) 이내의 간격이니 천리경으로 보면 깃발의 색과 위치를 명확히 알 수 있어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다네.”
아케치는 놀란 눈으로 품 안에서 천리경을 꺼내 섬 위를 바라보았다.
오른쪽으로 걸린 붉은 깃발과 왼쪽 사선으로 걸린 청색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깃발이 교체되었다.
“지금 전해온 소식은…….”
“내가 보낸 소식일세. 적선 일백여 척이 분열하여 한산도로 향하니 이를 재차 유인할 것. 그나저나 정해진 때가 되었을 텐데 어찌하여 거제도에서 소식을 전하지 않는가.”
지휘대 위에 있는 화승(火繩)이 천천히 타들어 가는 것을 확인한 이순신은 초조한 눈빛으로 거제도를 바라보았다. 마침 한산도로 일백여 척의 적 함선이 진격한 터라 신호를 보내오기 가장 좋은 시기였다.
이윽고 북쪽의 거제도에서 폭음과 오십 리(20㎞) 밖에서도 보일 거대한 연기가 치솟아 올랐다.
마침내 때가 되었음을 알아차린 장병들이 환호성을 질렀고 이순신은 강철 지휘봉을 들고 명령을 내렸다.
“놈들을 용초도로 유인하라! 정해진 장소로 놈들을 끌어모아 일제히 격멸한다! 함선은 세 갈래로 분열하여 갈피를 잡지 못하고 도주하는 것으로 오인하게 만들어라!”
한산도에서 보내온 신호를 보니 적선은 보이지 않는다 하였다. 그 말은 정해진 대로 예비함대 스무 척이 나서서 적을 용초도 인근으로 유인했음을 뜻하리라.
하지만 이순신의 눈이 섬을 스치자 잠시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였다.
“최 수사가 적을 격멸? 격멸이 아니고 전원 생존? 왜 신호를 두 번 보내는지 알 수 없군.”
“적이 모두 항복하였을지도 모르지요. 그나저나 그 지휘봉 무겁지 않으십니까? 지나치게 튼튼한 쇳덩어리를 휘두르시다니 팔이 아프실 것 같군요.”
“이 지휘봉 말인가? 백여 년 전에 수양대군께서 말년에 만든 대역기봉 토막이라네. 내 벗인 서애가 나에게 주어서 지휘봉으로 쓰게 되었지.”
한때 수양대군이 만들었던 대역기봉의 조각은 이순신이 다시 길게 벼려내 지휘봉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은빛이 휘황찬란하게 감도는 지휘봉을 확인한 병사들은 진짜 싸움을 시작할 때가 되었음을 알고 전력을 다해 노를 저었다.
한편 일본 수군도 거대한 폭음을 확인하였다. 깃발과 천리경으로 서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조선 수군과 달리 이들은 저 폭음이 한산도의 화약창고가 자폭한 것으로 오인하였다.
“놈들이 도주하고 있어! 여기서 놈들을 격멸, 아니다! 놈들이 빠르게 움직이니 한산도로 향하여라. 한산도를 철저히 짓뭉개면 이순신도 저 멀리 도망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선 수군은 폭음을 듣자마자 경기를 일으키듯 전력을 다해 노를 저어 섬 뒤로 사라지더니 사방으로 분열하여 도주하였다.
비록 조선 수군이 발작적으로 움직여 시야에서 벗어났지만 모리 수군의 사기는 꺾이지 않았다.
시야에서 사라졌다는 말은 함선을 쪼개어 규모를 줄였다는 말이다. 다수가 모여 있다면 모를까 소규모로 분열한 조선 수군은 손쉬운 먹잇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자신들이 할 일은 한산도의 완전한 파괴이지 조선 수군의 격멸이 아니었다.
“저 섬이 한산도다! 저렇게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한산도가 아니면 무엇이겠느냐!”
“놈들이 섬으로 돌아가 봤자 분견대가 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뭘 어찌하겠는가! 한산도에 상륙해 닥치는 대로 약탈을 실시하라!”
사방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섬의 정체는 한산도 남쪽의 용초도와 죽도였다. 일대의 해역에 대한 경험이 없는 일본 수군이 섬에 접근하자 백여 척에 달하는 분견대가 섬 남쪽 해안에 밀집해 있음을 확인하였다.
“자네들이 정말 고생이 많아! 세상에 이렇게 빨리 한산도를 점령하다니 이번 전쟁의 일등공신은 자네들일세.”
“네? 저희는 조선 수군이 이 섬의 좌우측에 자리하고 있어 일단 섬의 산 위에 올라가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일단 한산도의 위치를 알아야 공격을 하지요.”
어리둥절한 표정의 모리 모토무라가 주변을 돌아보니 용초도는 산불이 났는지 연기가 치솟았지만 기껏해야 배를 댈 수 있는 포구(浦口) 두어 개와 어촌이 전부인 한적한 섬이었다.
그리고 좌우를 살펴보니 조선 수군이 결사적으로 좁은 물길을 막고 있었다.
“이건 함…….”
말이 끝나기도 전에 후방에서 조선 수군이 등장하였다. 비진도와 죽도 그리고 용초도의 세 섬 안에 밀집한 일본 수군 함선 삼백 척을 상대로 후방에서 등장한 조선 수군은 맹렬한 포화를 퍼부었다.
“놈들과 맞서 싸우란 말이다! 당장 배를 돌려서 맞서 싸워! 놈들의 함선은 기껏해야 스무 척에 불과하다!”
“놈들의 함선이 늘어났습니다! 마흔 척에 달합니다!”
지금까지 승냥이에게 쫓기던 양 떼처럼 도주하던 조선 수군은 온데간데없었다. 화포를 쏘면 반드시 적중하고 육지에서도 거대한 불화살(신기전)이 날아들었다.
거대한 중신기전이 세키부네에 적중하자 얇은 갑판을 관통하고 선체 아래에서 폭발하며 배를 두 쪽으로 분해해 버렸다. 가뜩이나 선회반경이 큰 편인 세키부네는 억지로 배를 돌리려 하였지만 서로 부딪히며 자멸의 길을 재촉하였다.
함선의 수가 부족해 엉성한 일자진을 택한 조선군이지만 그 일자진은 비진도에 머무는 포대의 지원을 받아 사방에서 교차사격을 퍼붓는 살상지대로 돌변하였다.
이미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진 왜군의 측면으로 조선 수군의 함선이 추가되었다.
이미 전투를 끝낸 최호가 일자진을 보강하기 위해 합류하였다.
삼 면이 포위당해 두들겨 맞는 왜군은 이미 제대로 된 반격은커녕 제자리를 맴돌 뿐이기에 약식으로 보고를 올렸다.
“최 수사 보고 올립니다. 견내량에서 서로 견제를 벌이던 구귀가륭(구키 요시타카)이 항복하여 아국에 복속하기를 청해 왔습니다.”
“아국에 복속한다 하였는가? 참으로 잘된 일이니 그에게 거제도에 상륙한 왜군들을 소탕하는 작업을 일임하게. 아직 신의를 보이지 않은 자이나 왜군을 소탕하면 제대로 된 신의를 보임을 입증할 수 있지 않겠는가.”
오십여 척의 세키부네를 끌고 조선 수군에 합류한 구키 요시타카가 이순신에게 고개를 숙였고 이순신은 이를 맞이하였다. 본래 싸움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제일이라 하였는데 이제는 이기지 않고 복속하는 이가 생겨났다.
이번 거제도 전투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으면 조선에서 더욱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으리라 여긴 구키는 한달음에 거제도로 상륙하였다.
구키가 거제도로 상륙할 무렵 해전은 조선의 승리가 확정되었다. 기껏해야 십여 척의 배가 사방으로 도주하였지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표류하다 목숨을 잃으리라.
이미 백병전을 실시해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아타케부네를 침몰시킨 이순신은 명령을 재차 하달하였다.
“왜인들은 내버려 두어도 좋다. 하지만 왜장만큼은 반드시 사로잡아 목을 베어라! 왜장이 처음부터 항복했으면 모를까 아국을 범하려 한 이들이니 절대 용서해서는 아니 된다!”
조선군에서 수급(首級)은 더 이상 전공이 아니었다. 얼마나 많은 적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격멸하였는가에 대한 전공을 세울 뿐 수급은 상징 이상의 가치가 아니었다.
기껏해야 옛 풍속을 잊지 않는 대양도(대만) 출신 병사들이 기념품 삼아 수급을 챙길 뿐 그들도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순신은 눈에 핏발을 세우며 명령을 확인하였다.
“왜장의 시신이 물 위를 떠돌아다닌다! 사로잡아서 목을 베어라!”
이순신의 명령은 지엄하였기에 물 위를 떠다니는 장수들의 시체는 하나같이 사로잡혀 목이 베어져 아케치 앞으로 보내졌다.
아케치는 잘린 목을 보더니 얼굴을 찡그리며 답하였다.
“이자는 아는 자입니다, 아마 지휘관일 모리 모토무라군요. 그나저나 통제사께서는 어찌하여 장수의 수급에 그리 집착하십니까?”
“왜인들은 신의가 없고 퇴각을 주저하지 않는다네. 그러니 매번 전쟁에서 희생되는 이들은 민초(民草)였을 왜병뿐이고 왜장들은 하나같이 권세를 누리며 목숨을 부지한다네.”
“그야 당연한…….”
아케치는 이미 조선 생활을 오래 하였기에 조선의 방침을 알고 있었다.
군대가 무너져 퇴각하여도 지휘관은 퇴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관을 보내 전쟁의 상황을 전하고 자신은 병사들과 함께 책임을 다하는 법이다.
이순신은 아케치가 침묵하자 말을 이어갔다.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아닐세. 나는 이번 전쟁에서 왜장들을 모조리 사로잡을 것이네. 설령 죽음으로 도피한다 한들 수급을 거두어 놈들이 죽어서라도 도망치지 못하게 만들 것이고.”
거제도의 사방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화포 소리가 울렸다. 사방에서 엄습하는 임해도감 병사들과 배신한 구키 휘하 수군의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차례차례 격멸 당하고 있으리라.
이순신은 해가 높게 떠오르는 한산도로 돌아가며 스스로에게 당부하듯 말하였다.
“왜추(다케다 카츠요리)는 주상전하께서 처벌하실 것이지만 남은 장수는 아닐세. 내 혼신의 힘을 다하여 왜장을 죽이고 그들의 수급을 보전하게 조처를 취할 것일세.”
이순신도 한달음에 동래로 나아가 왜군을 격멸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육지에서 패배해 일본으로 돌아가려는 왜장들을 최대한 격멸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아껴 두어야 하리라.
#작가의 말
이순신은 본래 역사에서 일본에 대한 막대한 증오를 품었지만 역사가 변하며 일본 병사들은 가급적 죽이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싸울 때는 모르겠지만 싸움이 끝나면 살려두자는 주의이지요.
하지만 장수는 병사들의 시체를 밟고 도피하는 이들로 생각하게 되었지요.
사실 본래 역사에서도 항복한 왜인들은 잘 대접해 주었지만 장수는 기본이 참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