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432화
2부 21장 10화 – 진주성
전쟁이 일어나고 열흘이 지나도록 진주에 머물고 있어서 좀이 쑤셨는데 일본군은 정보 수집에 대해 생각보다 정상적인 반응을 보였다. 동래가 뚫리고 진군을 재개하는 시점부터 모든 지역에 소수 정예의 첩자를 파견한 것이다.
- (전략) 첩자는 이하(伊賀 - 이가)라는 이들인데 두령은 복부반장(服部半蔵)이라 하네. 산야를 재빨리 드나들고 아국의 언어에 능통하지 않아도 어리숙한 이를 속일 정도는 된다네. 부디 주의하게.
권율이 보내온 편지를 보고 감이 잡혔는데 복부반장의 일본식 발음은 핫토리 한조로 읽힌다.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고 유명한 이름이라 닌자라는 사실은 눈치 챘는데 만날 줄은 몰랐지.
물론 닌자가 나타나 갑자기 모든 사람들을 죽이거나 분신술을 쓰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정찰이 목적이었는지 그들은 진주 시내 일대를 염탐하더니 빠져 나갔고 조만간 일본군이 쳐들어 올 것이라는 사실은 모두에게 전해졌다.
이미 진주 서쪽에는 유생들이 집합해 있었는데 이들 모두를 소집해서 긴급 축성을 시작하였다. 솔직히 말해 보조 성채가 없어도 이길 수 있지만 준비해둔 것을 내버려 둘 수 없으니 당장 공사를 시작하라 지시를 내렸다.
“지금부터 바로 성을 쌓겠소. 적도가 당도할 때 까지 보름가량의 시일이 남는데 성을 축조하고 남을 지경이니 어서 공사를 도와주시오.”
처음에는 콧대 높은 유생들이 함부로 공사에 끼어들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벌떼같이 몰려들어 쌓인 자재들을 모조리 운반해 성을 축조하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보니 예전에 영직이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요즘은 그런 일이 적지만 자신이 한창 보디빌딩을 배울 때는 보디빌더들은 다양한 근육을 기른답시고 택배 상하차나 각종 공사현장에서 일했다고.
“박석 더 올리게! 아무리 그래도 성인데 흙을 밟아서야 쓰겠나?”
“이거 성을 열흘 만에 쌓는다 하는데 멀쩡히 버틸까 모르겠어.
“거 오랜만에 이런 토목일도 해보고 얼마나 좋은가? 혹여나 성이 무너진다 하면 남강을 타고 도주하면 충분하니 그리 염려하지는 말게.”
민가가 순식간에 철거되어 폐목이자 땔감으로 변하고 창고에 가득 쌓여있던 수백만 장의 벽돌이 차곡차곡 쌓이며 진주성을 강 너머에서 보호하기 위한 성채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미 계획한 대로 밤이 되면 거적을 덮어 양생(養生)하고 낮이 되면 성을 쌓기를 반복하니 예상보다 조금 낮은 성이 완성되었다. 군말 없이 작업을 같이 지휘했던 이일도 혀를 내두르며 벽을 발로 걷어차면서 감탄을 늘어놓았다.
“참으로 믿기지 않는 일입니다. 이 엄동설한에 열두 자(4.16m)가 넘는 치성을 축조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표정이 영 좋지 않으시군요.”
“내 계산이 틀렸으니 답답한 노릇이지. 본래 열다섯 자(5.2m) 이상을 쌓으려 했거늘 영회가 생각보다 느리게 굳어서 아쉬울 뿐이오.”
계획대로면 진주성 너머 남강 맞은편에 두 개의 치성(雉城)을 두어 진주성을 보조하게 만들려 했는데 계획보다 조금 낮은 치성이 완성되었다. 다른 문제를 떠나서 현대에 만드는 시멘트보다 영회의 경화 속도가 늦은 것이 문제였다.
결국 높이를 조금 낮춰야 했지만 이것만 해도 어디인가. 혹시 몰라 녹로를 동원해 대포도 올려보고 위에서 수십 명이 밀집해 발을 구르게도 시켜보니 성은 요동치지 않았다. 유생들도 성이 온전히 굳어지자 환호성을 지르며 모든 짐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어서 짐을 옮기게! 아무리 열흘 만에 지어진 성이라 하여도 서애 대감께서 보증하셨으니 강도는 확실하다네!”
본성인 진주성에 정군 3,500명과 입신체비를 익힌 유생 1,000명. 두 개의 치성에는 병사 1,500명과 유생 750명을 배정하였다. 성의 공간은 차고 넘치지만 전투력이 없는 보인 대신 성 안에 둘 사람은 따로 있었다.
“양반가의 아녀자들을 성 안으로 들이고 남는 이들은 머슴으로 채우게. 나머지 보인과 유생들을 따라온 왈패들 그리고 당나귀와 말을 비롯한 우마는 모두 단성(丹城 - 현 산청군의 일부) 인근에 대기시키도록 하게.”
“네? 단성이라 하시면 지리산 산자락이 아닙니까? 병사보다는 못하여도 충분히 여러 방법으로 쓸 수 있는 이들을 어찌하여 이십 리 거리나 멀리 떨어트려 두십니까?”
“내 다 생각이 있어서 하는 일일세. 적장이 멍청하다면 이 성들에 무턱대고 들이박아 적도를 어육으로 만들 것이지만 적장이 어느 정도 자질이 있다면 함부로 접근하지 않을 걸세.”
성 하나에 주변에 축조한 보나 망루 그리고 산성만 있다고 안심해서 진주까지 왔는데 갑자기 성이 더 생겨났다? 어지간히 멍청한 놈이라면 모를까 아니라면 철저히 경계하리라.
하지만 이일은 여전히 불안한 마음이 앞섰나보다. 하긴 부관이라면 장수가 생각하지 못한 것을 파악해 알려주는 역할이니 그의 조언을 듣기로 했다. 이일은 내 예상대로의 질문을 시작하였다.
“참으로 고난이 많았습니다만 일이 틀어질까 걱정될 뿐입니다. 혹여나 왜장 등길랑(히데요시)이 공격을 포기하면 지난 세월이 허사로 돌아가지 않습니까. 그리 된다면······.”
“내 단언하겠소. 등길랑은 내가 상대해본 왜장 가운데 가장 빼어난 자이며 왜국 전체를 통틀어서 적수가 없을 자요. 그런 자이니 더더욱 공격을 거듭할 거요.”
놈은 조선군의 막강한 화력에 호되게 데인 상태이다. 그런 놈이 이 포진을 보고 뭐라 생각할까? 지금 나는 단순한 수성전을 준비한 것이 아니다. 놈이 우리를 상대로 사력을 다 하지 않으면 무조건 몰살당할 군대로 오인하게 만들어 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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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요시의 별동대는 조금 늦은 11월 13일 출발하여 진주를 향한 행군을 시작했다. 주변의 보루와 산성에 있는 의병들이 옆구리를 노리며 귀신같이 들이닥친 별동대가 후방을 기습하였지만 히데요시는 이를 무시하며 진군하였다.
“키노시타님! 저들이 뭉친다면 보급이 끊길 가망이 있습니다.”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 하나? 전쟁이 두 달이 넘게 지속될 것 같아? 조선 수군이 돌아와 동래에 있는 함선을 모조리 파괴하는데 아무리 길어도 두 달 정도가 걸릴 거다! 저 산성을 공략하면 일이 어떻게 돌아가겠나!”
히데요시는 다시 입술을 악물며 진군 명령을 내렸다. 지난 전쟁과 마찬가지로 이번 전쟁도 시일이 촉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자신들은 철저한 수적 우위가 있으니 손해도 크지 않다.
하지만 기습을 당할 때 마다 진군 속도는 더뎌지기 마련이었고 히데요시는 유성룡의 함정을 염려해 지나치게 신중한 진군을 보였다. 결국 신속한 진군이 장기인 히데요시가 진주에 도착한 것은 나흘이 지난 음력 11월 17일이었다.
“보고 올립니다! 주민의 소개가 모두 끝났는지 마을은 텅텅 비어 있습니다.”
“저······. 키노시타님, 죄송하지만 잠시 확인해 볼 것이 있습니다. 저희가 도저히 믿지 못할 일인지라 키노시타님이 꼭 직접 보셔야겠습니다.”
남강을 넘어 진주 남쪽을 염탐한 정찰대가 놀란 눈으로 돌아왔고 히데요시는 한숨을 푹푹 쉬며 정찰대의 인도를 받아 남강 건너편에서 천리경을 들었다.
“저희가 듣기로는 진주에는 예전부터 세워져 있던 진주성 하나만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강 건너에 두 개의 성이 세워져 있지 뭡니까?”
조선 상인도 아니고 서반아 상인에게서 오래 전에 입수한 천리경을 움직일 때마다 히데요시의 안색이 변했다. 본래 민가만 있어야 할 진주 남쪽에는 거대한, 최소 이천여 명이 농성할 수 있는 치성이 두 개나 지어져 있었다.
천하의 유성룡이라 하여도 성 하나만 가지고는 온전히 방어할 수 없으니 포위하고 천천히 싸우려 하였지만 갑자기 성이 세 개나 되었다. 천리경을 집어 던지려다 품에 고이 접어 넣은 히데요시는 방방 날뛰며 호통을 쳤다.
“네놈의 눈깔은 개 눈깔을 뽑아다 쑤셔 박았나! 진주 일대에는 성이 몇 개라 하였지?”
“마······.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본래 성이 한 개에 불과하였는데! 혹여나 목책이 아닐까요? 높은 목책이지만 열흘 정도의 시일이면 세우고도 남을 겁니다.”
“저게 목책이더냐! 벽돌이란 말이다! 벽돌 성이야! 애초에 너희 놈들을 믿는 게 아니었어! 삼백 명이 넘는 이가류 닌자를 고용했는데 백 놈이 넘게 소식이 두절되다니!”
진주 일대의 정찰을 했던 이가류 닌자가 고개를 숙였지만 히데요시는 눈이 분기로 치밀어 오르는 와중에 슬쩍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진주로 향하는 별동대를 이끈 목적은 살아남기 위해서지 딱히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가 아니다.
만에 하나 일본군 본대가 조선군과 싸워 이기면 뚫으면 진주에서 전라도 방면 지원군을 끊어낸 공을 세울 수 있다. 설령 본대가 패배하여도 온전히 보전한 별동대를 이끌고 일본으로 돌아가면 되리라. 히데요시는 혀를 차며 옆을 돌아보았다.
“대충 보니 강을 끼고 본성과 치성이 어우러져 있군. 저런 성은 쉽사리 함락시킬 수 없는 법이지. 자네가 보기에도 그렇지?”
“물론입니다. 그나저나 방금 전 척후에게서 보고가 왔는데 북서쪽에 일만여 명에 달하는 조선군이 있다 합니다. 일만여 명이 넘을지도 모른다더군요.”
“전라도에서 급히 소집된 지원군이겠군. 조금만 늦었으면 회전(會戰)을 벌였을지도 몰라.”
부관인 도도 다카도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히데요시는 말을 몰며 좀 더 진주성 인근으로 다가가 천리경으로 성벽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더니 짤막하게 평가를 내렸다.
“내가 알기로 생회(生灰 - 생석회, 산화칼슘)를 물이 얼 정도로 추운 날씨에 사용하면 몇날 며칠이고 굳지 않는다 하였지. 어떻게 저 성을 만들었을까.”
“서애 유성룡이니 기발한 방법을 동원했겠지요. 혹여나 퇴각하시겠습니까?”
“지금 퇴각하면 온 목적도 이유도 없지. 저 북서쪽에 조선군이 성 안의 조선군과 합류하면 순식간에 이만 명에 달하는 대군이 된다. 오면서 걷어낸 별동대를 합치면 삼만 대군이야. 차라리 여기서 숨통을 조여 두는 게 안전할 것이다.”
히데요시의 명령이 떨어지자 일본군은 진주성 북쪽에 진지를 차렸다. 하지만 사람은 자리에 앉으면 눕고 싶듯이 히데요시 휘하의 제장들은 침묵중인 조선군을 살펴보며 공격을 종용하였다.
“주군께 유성룡의 목을 바치기로 하였는데 당장 공격을 시작하지요. 주변을 낱낱이 살펴보니 큐슈 방어선과 같은 거포는 눈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성이 제법 험하고 해자도 깊긴 하지만 예전과 다르지 않습니다. 유성룡이 실수를 하여 저렇게 허술한 성에 머물게 되었으니 독안에든 쥐 신세가 아닙니까.”
“내가 보기엔 당장이라도 강으로 빠져나갈 것 같은데. 하긴 적과 싸워보지도 않고 포위만 하여 시간을 끈다면 오히려 수세에 몰리는 법이지.”
어차피 며칠 정도는 공성전을 시도해 보고 답이 나오면 함락하며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적당히 떨어져서 포위망을 유지한 채 버티면 그만이리라. 시일이 촉박하니 땅굴을 파낼 수는 없고 사다리를 이용한 공성전이 시작되었다. 아니 되려 하였다.
이전에 사용하였던 대나무 방패대신 튼튼한 나무판자를 두 겹으로 붙인 수레를 앞세워 적의 조총 사격을 막고 사다리를 올리려 하였지만 난데없는 거무튀튀한 물체가 쏜살같이 날아오더니 수레에 쑤셔 박혔다.
“으학! 이게 뭐야!”
“이런 미친놈들! 여기까지 팔십 보(일본 거리기준 96m)는 되는데!”
“나무판자가 다 박살났으니 다른 수레로 붙어! 놈들이 텟포를 쏜다!”
끈에 묶인 작은 공령(플레이트)이 판자를 박살내 버렸지만 우연이라 치부한 병사들이었다. 하지만 다음에 날아온 물건은 더욱 끔찍한 녀석이었다. 처음에는 화살이나 총탄을 예상한 병사들의 머리 위로 자루가 팔뚝만한 망치가 날아들었다.
입신체비 단련용으로 사용하는 12근(7.7kg)의 천축퇴(인디언 메이스)가 높다란 진주성의 성벽 위에서 날아들었다. 망치의 운동에너지는 중력의 영향을 받아 더욱 증폭되었기에 수레를 박살내고 뒤에 있던 병사의 배를 후려쳐 버렸다.
피를 토하며 뒤로 날아간 왜병은 사지를 버르적거리다가 숨을 거뒀지만 이번 일도 우연이라 치부하였다. 곧이어 수레 위에 올라간 왜병들이 산발적인 사격으로 공성전의 시작을 알렸지만 진주성에서는 온갖 기괴한 물건이 날아들기 시작하였다.
“저 쇳덩이 무조건 피아아아아아아악!”
“저거 뭐야! 뭔 쇳덩이를 저렇게 던져대! 조선에는 쇠가 아무데서나 솟아 나나!”
“그럼 빨리 사다리 걸고 올라가! 올라가라고!”
조선군은 화약병기를 잘 사용하니 엄폐물로 든든한 나무판자를 골랐던 일본군이지만 정작 납환의 수백 배나 되는 질량의 거대한 쇳덩이가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 쇳덩어리들은 점점 정확도를 높이며 수레를 향해 날아들었다.
텟포야 작은 구멍 하나가 뚫린다며 독려하였던 사무라이들도 한 발을 맞으면 사지가 으스러지는 쇳덩어리들 앞에서는 사방을 뛰어다니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삽시간에 전선이 혼란에 빠지려는 중 한 사무라이가 칼을 들고 앞으로 짓쳐 나갔다.
“놈들이 무기가 없으니까 쇳덩어리를 던질 뿐이 아니냐! 저런 쇳덩어리는 방패로 걷어내면 충분한 법이다! 나 카스야 타케노리가 일번검(최초로 적을 죽이는 무사, 공훈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이 되겠다!”
장검 대신 튼튼한 방패를 들고 입에 작은 칼을 문 사무라이가 쏜살같이 사다리를 걸치고 올라가자 일본군은 정신을 차리고 빠르게 달려가 사다리를 걸쳤다.
위에서 다시 둥근 쇳덩이나 육각 쇳덩이가 떨어졌지만 팔이 부러지는 것 같은 통증을 감내하며 올라간 카스야 타케노리의 뒤로 수많은 아시가루들이 사다리에 올랐다. 하지만 카스야의 눈이 커지며 입에 물고 있던 칼을 떨궈 버렸다.
“이런 미친 새끼들!”
“네놈들 봉 무게는 조상님도 못 들어준다!”
카스야가 마지막으로 본 물건은 40근(24kg)에 달하는 대역기봉 10개가 쇠사슬로 엮인 거대한 쇳덩어리였다. 기껏해야 10kg 내외의 중량만 걷어낼 수 있는 그의 완력으로는 입신체비사 내 명이 달라붙어 던지는 대역기봉 덩어리를 견딜 방법이 없었다.
사다리의 대나무는 부러지는 소리도 아닌 터져나가는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으로 분해되었고 일번검이 되려고 노력했던 그의 시신은 다른 아시가루들의 시체와 겹쳐져 소 발굽에 밟힌 개구리처럼 땅과 한 몸이 되었다.
“이게 뭐야······. 저 성은 대체 뭔데!”
처음에는 방비가 대단하다 하여도 화포나 총이 많으리라 예상했던 히데요시는 순수한 힘으로 수성(守城)하는 끔찍한 광경을 목도하고 사지를 후들거리며 땅바닥에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