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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조선-430화 (430/573)

근육조선 430화

2부 21장 8화 근육으로 가로막혔다

양산 전선의 실패는 일본군에게 아직까지는 큰 타격이 아니었다. 일본의 강은 크기가 작은 편이라 세토 내해를 제외하면 상당수의 전투에선 육로로 보급품을 운송하였다.

일본의 보급부대는 동래에서 김해로. 김해에서 다시 밀양으로 이동하는 전선에 보급을 보내기 위해 움직였다. 수레 3대와 120명에 달하는 병사들은 저녁 해가 저무는 와중에도 발걸음을 이어갔다.

대오를 담당하는 사무라이는 주변을 둘러보며 병사들을 독려하였다.

“양산을 점거하지 못하였어도 큰 문제는 없으니 다들 염려하지 말라. 그 거대한 강을 사용하지 못하여 고생하지만 조선군도 이만(일본 기준)이 넘는 병사를 양산에 박아두기만 했어.”

“하지만 소나 말을 구할 수 없어서 사람이 식량을 끌고 가야 하지 않습니까.”

“그건 좀 아쉬운 일이지. 조선 백성들은 소를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산 위까지 끌고 갔을까.”

“혹시나 식량이 부족해지면 소를 잡아먹을 생각 아니겠습니까?”

그나마 고기를 입에 대어본 -어디까지나 병사하거나 사고로 죽은 소나 말의 고기이지만- 아시가루나 보인들은 입맛을 다셨지만 사무라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답하였다.

“덴무 덴노께서 명하신 바를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어찌 군침을 흘리는지 모를 일일세.”

본래 사치품이나 각종 재화를 금지하는 명령이 하달되면 백성들은 힘이 없어 이를 철저히 지키고 높으신 분들은 몰래몰래 사치품을 축적하고 사용하기를 즐긴다.

하지만 일본의 육식 금지령은 지난 구백여 년의 세월 동안 체면 때문에 뒤틀려 있었으니 병사들은 여전히 체면을 차리는 사무라이를 보며 슬쩍 웃어댔다.

그러나 그 미소도 얼마 가지 않았다.

해가 떨어지자 모두 예상외로 심각한 추위에 골머리를 썩였다.

따스한 일본열도에 두툼한 누비 솜옷이 있을 리가 만무하였으니 조선의 추위는 그들에게 가까스로 견딜 수 있는 강추위였다.

여기에 이들의 머리 위로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삽시간에 땅에 쌓여버렸다.

눈이 내려도 곧잘 녹아내리는 일본과 달리 소빙기의 한반도는 눈이 한 자가 쌓이는 일이 보통이었다.

“오라지게 춥네! 도시마(豊島: 도쿄의 옛 이름) 촌구석이 그리워질 지경인데.”

“이 시기에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게 정상이긴 한가? 이거 발목 너머까지 쌓이겠는데?”

함박눈은 서서히 눈보라로 변했으며 주변 기온은 삽시간에 영하로 치달았다.

일본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이니 병사들은 당황하였고 군량을 잔뜩 올린 우마차의 바퀴가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눈이 내렸으니 어쩔 수 없군. 본래 길가에서 숙영하려 하였지만 이대로는 얼어 죽을 것이다. 인근 마을에서 하루를 묵고 내일 아침 일찍 이동한다.”

마을에는 보인 몇 명이 남아 숙소로 사용하도록 조처를 취하였다. 조선 백성들이 피난하며 식량은 챙겨갔지만 땔감은 챙겨가지 않았기에 장작은 차고 넘치게 쌓여 있었다.

아궁이에 장작을 잔뜩 넣고 불을 놓으니 방 안이 따스해지며 얼어붙었던 병사들의 사지가 풀리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가마솥에 지은 밥이 나오니 왜병들은 입맛을 다시며 밥을 뱃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이게 뭔 신세야? 저 드넓은 강이 있는데 육로로 짐을 옮겨야 하다니. 이런 개고생을 우리가 왜 해야 하는데.”

“그래도 우리 신세는 나은 거야. 이렇게 추운 겨울이니 산속으로 피난한 조선인들은 죄다 추위에 떨고 목마름에 시달리다 저절로 산 아래로 내려올 걸세.”

잡담을 나누며 잠을 청하려던 왜병들의 귀에 기묘한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숨이 넘어가는 소리와 경첩이 덜그럭거리는 것 같은 소리. 처음에는 바람소리라 생각했지만 잔뼈가 굵은 아시가루인지라 하나둘씩 병장기를 갖추고 쏜살같이 달려 나왔다.

“컥…….”

“나리! 네놈은 대체 누구냐!”

횃불이 사방을 에워싸고 마을 한복판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불침번으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 대다수가 목이 꺾여 쓰러졌고 그들을 인솔하던 사무라이는 누군가에게 목이 감긴 채 손톱을 세워 상대의 팔을 긁어대고 있었다.

-우직

목뼈가 부러지는 둔중한 소리가 울리고 철컹거리는 쇳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있던 사람은, 아니, 물건은 일본은 물론 동양에서 찾아볼 수 없는 물건이었다. 정확히는 경진만란이라 불리는 전쟁에서 잠시 모습을 드러내었던 서양의 풀 플레이트 메일이었다.

조선의 판금갑옷도 주요 부위가 판금이고 나머지는 쇠사슬로 방어하는 녀석이기에 아시가루들은 겁에 질렸다.

하지만 상대는 휘황찬란한 갑옷을 입고 있을 뿐 혼자라는 사실을 눈치챈 아시가루들이 사방을 에워쌌다.

“아무리 갑옷이 귀하다 해도 저렇게 빨간색과 휘황찬란한 금색으로 도색을 해! 십 리 밖에서도 훤히 보이겠군!”

경진만란에서 잡힌 포로들이 기술 교환을 하며 풀 플레이트 메일의 설계 방법을 알려주었지만 지나치게 비싼 가격 때문에 선뜻 손을 벌리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전쟁의 소식을 들은 곽재우는 이를 진귀한 보배라 여겼고 왜병들을 도륙하는 데 사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의 플레이트 메일은 석간주(石間硃)와 황동가루로 색을 입혀 아시가루의 말 대로 산 너머에서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휘황찬란하였다.

“왜놈들은 어서 덤벼보거라! 이 판갑은 보총 탄환이 아니고서는 뚫을 방법이 없도다!”

한 아시가루가 전력을 다해 일본도를 휘둘렀지만 지나치게 튼튼한 판금갑옷은 겉이 조금 일그러졌을 뿐 여전히 멀쩡하였다.

곽재우의 주먹이 아시가루의 턱을 강타하자 치아가 우수수 뽑혀 나온 아시가루는 그 자리에 쓰러져 버르적거리는 산송장 신세가 되었다.

“테츠오니(鐵鬼: 철귀)다! 칼이 통하지 않는 테츠오니다!”

“텟포 가져와! 텟포!”

조총을 다급히 장전하는 일본 병사들이지만 조총보다 더 흉악한 무기를 곽재우가 가지고 있었다.

아시가루들이 뒤로 물러난 사이 허리춤에 패용한 수석(燧石: 부싯돌)식 장총통을 집어 든 곽재우는 거리낌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두 개의 총열을 엮은 쌍열 수석식 장총통이 불을 뿜으며 두툼한 산탄을 쏟아냈고 한창 조총에 화약을 넣던 병사는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다시 반대편의 장총통이 불을 뿜자 이번에는 가장 앞에서 돌격하던 병사의 머리통이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아시가루들도 계속된 전투로 단련된 이들이었다. 화살이 날아들어 곽재우의 움직임을 막고 저 멀리서 여러 명의 병사가 조총을 장전하고 거리낌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이거나 처먹어라! 쇳덩어리 새끼야!”

가까스로 장전한 조총이 불을 뿜었지만 붉은색의 흉갑에 맞고 탄환이 튕겨져 나갔다.

일백 보 밖에서 쏜 보총 탄환에도 버틸 수 있도록 든든하게 만든 녀석이니 구경이 작은 조총은 아예 밀착해서 쏘아야 하리라.

“다들 덮쳐! 올가미 가져오라고! 쇳덩어리를 입었으니 넘어지면 일어서지 못한다!”

“이 머저리 새끼들아!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사람이라고! 다들 올가미에 힘을 주아아아아아악!”

한 아시가루가 꾀를 내어 새끼줄로 올가미를 만들어 팔에 던졌지만 상대는 삼대운동 900근을 달성한 곽재우였다.

판금갑옷을 포함해 체중이 115㎏에 달하는 내수린의 달인이니 힘의 차이는 네 배가 넘었다.

오히려 곽재우가 팔에 힘을 주자 왜병이 앞으로 당겨지며 몸을 훤히 드러냈고 위로 들린 턱에 구반완(句絆腕: 래리어트)이 작렬하며 왜병의 목뼈를 부러트렸다.

모두 침묵한 사이 네 개의 장총통을 모조리 발사한 곽재우는 아시가루에게 달려들었다.

“테츠오니가 날아다닌다!”

판금갑옷은 마상시합용으로 두껍게 만든 물건을 제외하면 충분한 완력이 있다는 전제하에 대부분의 동작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곽재우는 완력이 차고 넘치는 자이다.

힘을 절제하던 내수린꾼이 전력을 다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눈앞에서 증명되었다.

두 다리가 꽂히자 흉갑이 일그러지다 못해 산산조각으로 박살 나며 아시가루가 피를 토하며 바닥을 뒹굴고 다른 아시가루들은 벌떡 일어선 곽재우에게 창날을 밀어 넣으려 하였다.

“밀어! 이 새끼를 밀어서 자빠트리라고!”

“젖 먹던 힘도 다해서 밀어라! 넘어트리고 망치로 두드리면 놈도 피를 뿜으며 죽는다!”

십여 개의 창날을 받아낸 곽재우는 열 명의 힘을 감당할 수 없었는지 차츰차츰 발을 뒤로 물리며 밀려났고 그의 등 뒤에는 내리막길이 있었다.

쇳덩어리가 부딪히는 소리가 나며 내리막길로 자빠진 곽재우의 모습을 본 아시가루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테츠오니가 쓰러졌다! 테츠오니가 아니지! 놈이 쓰러졌단 말이다!”

몽둥이든 돌이든 집어서 쓰러진 상대를 짓밟아 죽이면 되리라.

하지만 곽재우가 굴러떨어진 내리막길에서 곽재우와 똑같은 판금 갑옷을 입은 자 네 명이 쇳소리를 내며 걸어 올라왔다.

“테츠오니가 늘어났다! 놈들이 도술을 쓴다!”

자세히 보면 크기와 체형이 조금씩 달랐지만 어두운 밤에 횃불로만 상대를 볼 수 있는 상황이니 그런 차이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애초에 휘황찬란한 붉은 색과 금색으로 치장된 갑주에서 세세한 차이를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새로 추가된 곽재우의 동료들도 여섯 정의 장총통을 쏘아댔고 아시가루들은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지다 못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이윽고 곽재우가 장총통의 장전을 마친 채 다시 불을 뿜으니 아시가루들은 혼비백산해 사방으로 도주하였다.

“테츠오니다! 텟포도 창도 통하지 않고 쓰러지면 넷으로 늘어나는 테츠오니가 나타났다!”

하지만 입신체비사들은 야음을 틈타 마을의 빈집에서 매복하고 있었다.

짐을 챙겨 달아나려는 아시가루들은 하나둘씩 몽둥이에 맞아 사지가 꺾이고 부러졌으며 간혹 비상식적인 물건에 맞아 두개골이 박살 났다.

“으아아아아악 돌절구라니!”

구석에 숨은 아시가루에게 돌절구를 굴려 다리를 분지른 내수린꾼이 땀을 훔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120명에 달하는 적 병사 중 절반가량이 도주하였고 운반하던 곡식도 고스란히 널려 있었으니 이번 기습은 완벽한 승리였다.

곽재우를 비롯하여 판금 갑옷을 입은 다섯 명은 온몸에서 김을 뿜어 올리며 머리를 식혔다.

대승이지만 왜 이런 행동을 하였는지 다들 의문을 품고 있었으니 한 명이 곽재우에게 질문을 하였다.

“다른 일이야 다 이해할 수 있지만 저라면 밤에 암습하기 쉽도록 갑주를 검은색으로 물들였을 것입니다. 대체 왜 이런 행동을 하셨습니까?”

“왜국에는 괴력난신(怪力亂神)이 넘쳐난다 하더군. 워낙 험악하게 살아온 이들이니 산속에는 도깨비가 살고 강에는 하동(캇파)라 하여 장을 빼먹는 짐승이 살고 아국에서는 민담에서나 나오는 구미호가 세상을 장악했다 하였네.”

“그런 동네가 세상에 있습니까?”

곽재우는 이미 전라도에 이주한 하주도 백성들을 만나보았기에 소문의 편린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많은 괴담이 있을 줄은 몰랐지만 그 괴담을 듣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니 내 스스로 왜인들의 괴력난신이 되어 놈들이 산길을 지날 때마다 붉은색이 보이면 기겁하게 만들 것이네. 아직 색을 들이지 못했을 뿐 같은 판금갑주는 스무 개에 달하니 이제 스물로 분열하는 괴물이 되지 않겠는가.”

곽재우의 기대대로 김해 일대의 왜병들에게는 테츠오니라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한밤중에 나타나고 사람의 몇 배의 괴력을 발휘하며 쓰러트리면 다섯으로 분열하는 괴물의 소문이.

* * *

당연하지만 일본군은 바보가 아니었다. 수뇌부는 테츠오니를 조선에서 파견한 최정예 병사로 생각하였으며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였다.

다케다 24장에 속하는 츠치야 마사츠구(土屋昌次)는 이들의 거처가 산성이라 생각했으며 산성을 공략하여 테츠오니의 소문을 끊어내려 하였다.

여기에 응한 이는 가토 기요마사였으니 그는 이천오백 명의 병사들을 인솔하여 산성을 공략하려 하였다.

하지만 산성을 향해 오르며 산길을 헤매던 가토 기요마사 앞에 장삼(長衫)을 입은 승려 여럿이 합장하며 앞길을 가로막았다.

“소승의 법명은 휴정이라 하오, 삿된 마음을 품고 이 산에 오르고 계시니 만류하겠소. 앞으로 험지가 계속되고 병졸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으니 어서 돌아가시오.”

“스님께서 어찌하여 이리 추운 겨울 산속에 계시오?”

가토의 눈이 가늘게 떠지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열 명의 승려가 산길을 가로막고 있을 뿐 매복의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생소한 지형과 눈이 쌓인 주변 환경인지라 더 이상은 알 길이 없었지만 가토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칼을 집어넣고 말하였다.

“조선에도 승려가 있다는 소문은 익히 알고 있었소. 백여 년 전에 전해진 소문을 듣자 하니 조선은 불교를 탄압하는 국가라 하였는데 그 원한을 풀 기회를 마련해 줄 것이오.”

“탄압(彈壓)한다 하였소이까?”

“그렇소. 내 일련종(日蓮宗)이라는 종파에 속해 있지만 불도는 모두 한 몸이 아니오. 만약 우리의 앞에서 길을 안내하면 조선의 왕을 사로잡은 뒤 보배를 제공할 것이요 불교를 재흥(再興)할 길을 만들어 드리겠소.”

열렬한 불교 신자인 가토는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소문을 입수하였다. 백여 년 전 조선에서 방문한 신미라는 승려가 말하길 왕이 불교의 팔 할을 무너트려서 불계(佛戒)가 깨어지기 직전이라 하였다.

이후 조선은 사절단에 유생을 보내올 뿐 승려들을 말미에 끼워 넣는 행적을 보였으니 일본에서는 조선이 불교를 철저히 탄압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서산대사는 깊게 합장을 하며 말하였다.

“참으로 마음에 드는 제안이구려. 소승 또한 깨달음이 깊지 않은지라 물욕을 온전히 버리지 못하였소. 하지만 진정한 보배는 여기에 있으니 멀리 갈 필요는 없소이다.”

“선문답이시오? 이 땅도 보배이니 여기에 있긴 하구려.”

정중히 거절하는 것이 분명한 말을 듣자 가토는 은근슬쩍 뒤로 손짓을 하며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저들을 사로잡고 오라로 묶어 산길을 안내하게 할 속셈이었다.

하지만 서산대사는 소매에 손을 넣으며 말하였다.

“아니오. 감히 아국의 땅을 넘보는 왜장의 목이 보배가 아니겠소. 눈앞에 진귀한 보배가 있으니 군침이 도는구려! 다들 저들을 탄압(彈壓)하라! 탄환으로 억압하란 말이다!”

장삼의 소매에서 장총통을 꺼낸 승려들이 가토를 향해 일제 발포하였지만 가토의 명줄이 길기는 하였는지 옆으로 몸을 날려 탄환의 대부분을 회피하였다.

하지만 다른 병사들은 아니었다.

“살생계를 폐하라! 조선을 침략한 적도들을 도륙함은 백성의 목숨을 구하는 길일지니!”

“나무아비타! 불!”

“산탄을 정확히 일백 발에 여덟 발을 넣었다! 네놈들의 번뇌를 모두 앗아가 줄 것이니 몸으로 받아내어라!”

새하얀 무명천을 덮어쓰고 눈 위에 앉아 있던 승려들이 일어서며 사방으로 산탄총을 난사하였고 가느다란 일본군의 대형은 쏟아지는 산탄 세례에 산길을 피로 물들였다.

하지만 장총통이든 조총이든 한번 쏘면 장전이 필요하다.

일제히 산탄을 쏘아댄 승려들이 사방으로 도망치자 덤불 속에 숨어 있던 가토가 일어나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 미친놈들을 모조리 죽여! 천태종의 소헤이(일본 승병, 폭력배와 흡사하다) 놈들을 도륙한 오다 노부나가처럼 죽이란 말이다!”

“놈들이 도망칩니다!”

“그럼 찾아가서 죽여 이 머저리 새끼들아! 이런 염병할! 숲속으로 숨었잖아!”

산탄을 얼굴에 맞아 볼의 피부가 찢겨나간 가토는 등에 메고 있던 활을 풀어 정신없이 쏘아댔지만 기껏해야 두어 발이 불운한 승려의 등판에 맞은 것이 전부였다.

일본 병사들이 대오를 이루어 산속으로 추격하였고 승려들은 정신없이 도주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방에서 총성이 빗발치고 일본어로 된 고함과 불경 소리가 들리며 산 전체를 울렸다.

그리고 잠시 뒤, 몇 명의 병사가 돌아오기는 하였다.

“죄송합니다. 산길로 보이는 곳을 따라 추격하니 돌이 떨어지고 나무가 날아오며 저희 모두를 유린하였습니다. 놈들은 산세를 손금 보듯 훤히 꿰고 있습니다.”

“그럼 도주하였나? 거기 너희! 앞으로 나서서 중놈들이 어디 있나 확인해 봐! 놈들은 총을 쏘아대니 놈들이 매복한 장소 근처에는 분명 화승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날 거다.”

적이 매복한 장소에 가라는 명령이 떨어졌지만 아무도 발길을 돌리지 않았고 가토는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몸을 확인했다.

갑옷 곳곳에 파인 자국을 보니 놈들의 탄환은 얼굴에만 맞지 않으면 죽지는 않을 것 같았기에 용기를 내어 병사들을 인솔해 산길을 올라갔다.

하지만 가토의 코에도, 후각이 좋기로 소문난 병사의 코에도 화승이 타들어 가는 특유의 지린내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매복을 포기했나 싶은 가토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대열 후방에서 승려들이 일어났다.

“우리는 화승을 쓰지 않는다! 이 멍청한 놈아! 유생 나리들이 우리에게 부싯돌을 주었다니까!”

발화장치로 쓰이는 황철광은 조선에서 극히 적은 양만 산출된다. 대다수가 수입품이니 인도산 부싯돌을 사용하고 간혹 나팔총(권총)에만 사용하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이순신이 창안한 쇠부리는 막대한 양의 황철광을 필요로 하였고 이 황철광의 양을 더욱 늘리자 제안한 이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사재를 털어낸 유생이었다.

다량의 인도산 부싯돌을 보급한 덕분에 승려들은 산속에서 철저히 매복할 수 있었다.

다시 장총통이 산탄을 쏟아내고 후방을 기습당한 병사들은 발작적으로 산개하며 자멸의 길로 향했다.

“나를 따라 퇴각해! 퇴각하란 말이다 이 머저리 새끼들아!”

“지금 산 위로 올라가고 계시지 않습니까!”

골목을 돌 때마다 장총통을 쥔 승려들이 튀어나오며 불을 뿜었고 대열의 방향이 꺾였다.

사슴을 몰아넣듯 차근차근 사지(死地)로 향하는 것 같았지만 적에게 반격할 방법도 마땅히 없었다.

화살을 피할 수 있는 수풀이 우거진 곳, 냉병기가 닿지 않는 언덕 위에서 귀신같이 튀어나오는 승려들에게 시달리니 이천에 달하는 병사들이 수십 명의 승병을 죽인 것이 전부였다.

마침내 포위망에서 탈출한 것 같았던 가토와 병사들은 자신들이 산 정상에 가까워졌음을 알았다.

하지만 눈앞에는 5m가 넘는 가파른 경사 위에 다시 5m가 넘는 산성이 있었고 조선 초병(哨兵)의 보고를 받은 장수가 명령을 내렸다.

“왜병이다! 왜병이 나타났다! 어서 돌을 굴려라!”

산성 위에 쌓여 있던 돌과 통나무가 대열을 강타하였고 가토는 투구가 돌에 맞아 일그러진 채 정신조차 차리지 못하고 산 아래로 도주하였다.

“여긴 어디야! 미친 땡중 놈들이 우리를 다 죽이러 온다! 어서 도망쳐!”

“가토! 네놈 제정신이더냐!”

가토의 찢어진 뺨에 손바닥이 날아들었고 얼얼한 충격으로 정신을 차린 가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귀신에 홀린 듯 자신이 당당하게 출병한 산기슭으로 돌아온 가토의 눈앞에는 놀란 표정의 츠지야 마사츠쿠가 있었다.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가토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따라온 병사들을 확인하였다.

산을 오를 적에는 2,500명에 달하는 병사들이었지만 지금은 기껏해야 500명만 남아 있었다.

그의 귓가에 병사들이 어디에 갔냐는 호통이 들려왔지만 병사들은 모두 산귀신이 된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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