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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조선-418화 (418/573)

근육조선 418화

2부 20장 8화 밑작업(2)

한양으로 올라와 며칠 동안은 휴식을 취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웬 선물이 있었는데 아내가 말하길 서반아 사람들이 난데없는 선물을 보내왔다더라.

그런데 보내온 놈이 아는 놈이다.

[일전에 명나라의 도시 남경에서 보인 추태를 사과하려 하오. 비록 해임되어 한가로이 여생을 보내고 있으나 부디 스페인으로 오면 나를 만나주었으면 좋겠소. 내 팔을 앗아간 장수도 함께 방문하면 더욱 좋을 거요. 로베르토 우리엘 레예스]

“이놈이 돌았나? 전쟁 끝나면 미주나 호주로 발령받을 몸인데 나보고 서반아까지 가라고? 가야 하나? 진짜로? 만도 녀석이 보관중인 놈의 팔이라도 가져가서 얼굴에 던져줘야 하나.”

“이렇게 많은 금은보화를 선물한 사람인데 정성을 보아 한번 방문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저도 서책을 많이 보았는데 청해군(한명회의 군호)도 서반아를 방문하지 못했다 하였습니다.”

한명회가 이베리아 반도 근처까지 갔다가 극심한 반발에 시달려서 돌아온 일이 있었지. 정말 2년 가까이 항해해서 스페인을 다녀와야 하나.

혹시 조약을 맺으면서 현대인의 시선으로 이득을 챙길 수 있을지도 모르니 이건 고려 대상이다.

선물은 아무리 봐도 잉카에서 약탈한 문화재들이다. 잉카는 스페인에게 약탈당했지만 유물 중에 녹이지 않은 멀쩡한 물건이 있다니.

이걸 어떻게 쓸까 고민했는데 팔아 보았자 녹여서 금화가 되리라.

결국 큰마음을 먹고 조정에 기부하기로 하였다.

“지나친 재물은 사람을 게으르게 만드는 법이오. 내 나라에 이를 바칠 것이니 훗날 잉가국의 후예들이 아국을 방문할 적에 옛 조상들의 흔적을 보고 마음이 평안해질 것이오.”

“낭군께서 이토록 올바른 뜻을 정하시니 선친께서도 마음이 놓일 것입니다.”

생각해 보니 조식도 재물을 혐오하였지. 입신체비를 위한 어느 정도의 재물은 필요하지만 그 이상은 뱃살을 찌운다며 꺼렸었다.

조식의 유품인 경의봉을 위패 앞에 두고 한참 늦게 제사를 올리니 아내의 기분이 풀어진 것 같았다.

휴가가 끝나고 조정으로 출석하자마자 주상전하께서는 조회(朝會)에서 나를 앞으로 불러서 손을 맞잡더니 칭찬을 시작하였다. 얼마나 칭찬이 대단한지 내 귀가 빨개질 지경이었다.

“유성룡 자네를 믿으면 세상에 안 될 일이 없다네. 단순히 백성들을 이주시키는 일을 넘어서서 고을을 빠르게 만드는 방법을 창안하며 유생들의 입신체비를 돕는 방법도 마련하다니.”

“신이 부족한 꾀를 내었을 뿐이옵니다. 경목조라 불리는 새 주택은 십 년이 지나면 헐어버려야 하니 이는 미봉책에 불과하옵나이다.”

“미봉책이라 하여도 널리 쓰일 수 있으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닌가. 이미 근력 제재소는 풍속이 되어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에는 대동계(大同契)라 하여 유생들이 제재소를 통해 인연을 맺고 백성을 돕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네.”

어디서 본 사극인데 정여립이 대동계 어쩌고 하면서 역모를 꾸민다 해서 피바람이 불었던 것 같은데. 조금 꺼림칙하지만 주상전하께서 만족하시니 큰 문제는 아니겠지.

내가 단을 내려가자 주상전하께서는 다시 진중한 표정으로 선언하였다.

“하주도의 백성들이 아국으로 이주한 원인이 무엇인지 잊어서는 아니 된다. 왜국은 엄연히 아국과 명국에게 할양된 강역을 침공하였으며 이를 발본색원(拔本塞源)하는 일이 남았다.”

“전하! 왜를 정벌하는 일은 단번에 행할 수 없는 일이옵나이다. 왜의 인구는 적게 보아도 아국의 절반에 달하며 강역은 아국의 팔도보다 더욱 넓으니 충분한 계획이 필요하옵나이다.”

“익히 알고 있는 일이니 새로운 계획을 수립할 것이다. 먼저 세종대왕께서 설립하신 지변사(知邊事)의 규모를 확충하여 비변사(備邊司)로 개칭할 것이다.”

당연히 비변사의 수장은 율곡 이이였다. 이미 일본에 다녀온 경험이 있으며 여기에 나를 포함한 대 일본 정책을 수립한 이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니 이미 익숙한 얼굴들이 아닌가.

조회가 끝나고 나를 다시 만난 이이는 나를 보자마자 반색을 하였다. 이이도 좌찬성으로서 전쟁 이후 필요 물자를 보내고 각종 정책을 수립하는데 온갖 고생을 다 한 모양이다.

“자네를 다시 보게 되어 마음이 놓이는군. 앞으로 비변사에서 일하며 왜국을 정벌하는 데 힘을 보태도록 하게. 그나저나 갑신(甲申: 1584년)왜변을 일으킨 왜장들이 문제로군.”

“왜장들의 처우를 어떻게 하였습니까? 듣자 하니 사로잡힌 왜인 삼만여 명은 난을 일으킬 것을 염려하여 북방으로 보내 소모시킨다 들었습니다.”

“소모라니 너무 심한 말이로군. 왜국의 수뇌가 아닌 이들은 기껏해야 각지에 있는 소로(小路)를 수레 석 대가 교차하여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만드는 것에 불과하네.”

그게 소모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적게 잡아도 하르빈까지 1,000㎞에 비포장도로를 만들려면 삼만 명 가운데 생존자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리라.

하지만 노예로 팔려가는 신세보다는 나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왜 삼만 명이 고스란히 있지?

“잠시만, 삼만 명의 포로가 고스란히 아국에 남아 있습니까? 혹여나 몸값을 내서 다시 사들이겠다는 왜장들조차 없었습니까?”

“그러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일세. 아국은 물론 명국을 침략하였음에도 화친을 논할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네. 차라리 성을 내며 재침을 노린다면 일이 편해질 것인데. 일단 비변사에 배정된 인원이 소집되기 전에 남은 왜장을 심문하도록 하세.”

이이를 따라 의금부가 특별히 마련한 금부옥(禁府獄: 중범죄자를 가두는 감옥)으로 들어가니 일본에서 사로잡힌 장수들이 각 감방에 따로 수감되어 손목과 발목, 그리고 목에도 계구(戒具: 차꼬와 칼)를 착용한 채로 갇혀 있었다.

“왜장 가운데 다섯은 남겨두고 심문을 계속 진행한다네. 이들은 왜국에서 손꼽히는 인재라 하여 함부로 목을 벨 수도 없지. 어중간한 놈들은 효수하였지만 이들은 아닐세.”

정보는 뽑아낼 만큼 뽑아내야 하고 혹여나 조선에 충성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면 선봉에 세워 길잡이로 사용하면 충분하리라.

슬쩍 살펴보니 상태는 대부분 괜찮았다.

“생각보다 상태가 좋은 것 같습니다. 고신을 심각하게 행하지는 않았나 보군요.”

옆을 관리하는 나졸과 금부도사는 더 이상 쳐다보기도 싫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지만 생각 외로 상태는 좋았다. 기껏해야 피멍이 들거나 극심한 피로에 시달리는 정도가 아닌가.

금부도사는 옆에 놓인 곤장을 들더니 말하였다.

“실은 고신을 행하면 행하는 대로 실토하기는 하였다네. 하지만 겉을 맴도는 정보만 내뱉고 고신이 심해지면 간혹 죽어 나가는 이가 있어서 답답하던 차였지. 그래서 한 달 넘게 밥만 주고 방치하다 난동을 부리면 두들겨 팼다네.”

눈빛이 살아 있는 놈이 있었는데 이이와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니 나름 고개를 숙이며 예의를 표시하였다.

뭔가 기대하는 듯이 입을 우물거리는 왜장에게 이이는 한숨을 쉬며 말하였다.

“진전창행(真田昌幸: 사나다 마사유키) 자네는 뭘 기대하고 있는가. 벌써 넉 달이 넘게 지났지만 왜국에서는 아무런 답이 없다네. 애초에 기대를 하지 말아야지.”

“지금까지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하셨습니까? 심지어 친서(親書)는커녕 일방적인 통보조차 보내지 않았습니까? 혹여나 언로(言路)를 막으셨다면 아니 됩니다!”

“일방적인 통보라도 받았으면 좋았을 것이네. 아국의 함대가 사국(四國: 시코쿠) 동부와 대내씨(오우치)의 연안의 항구를 모조리 부수고 돌아왔음에도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지.”

이이의 말을 듣고 한참을 곱씹던 사나다 마사유키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뭐라 중얼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알아들을 수 없는 한탄이었지만 끝에 가서는 우리가 똑똑히 들으라는 듯 일부러 큰 소리로 말하였다.

“내가 시동으로 옛 주인을 섬기고 카와나카지마 전투에서 공훈을 세우며 출세하였거늘. 어중이떠중이보다 더욱 오랜 시일동안 다케다 가문을 섬겨서 이토록 많은 공을 세웠는데.”

“지금까지 군문에 대한 일을 물어보았으나 이제 왜국의 정계와 관련된 일을 묻고 싶으니 대답해 줄 수 있겠는가. 더 이상 신의를 지켜보았자 뭘 얻을 수 있는가.”

이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사나다 마사유키는 고개를 끄덕였고 이이는 손발의 차꼬와 칼을 풀어주더니 따로 마련된 별실로 인도하였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일단 저와 함께 군대를 이끌던 이들의 신세가 궁금하군요.”

“달리 말할 거리는 없다네. 왜장 열 명은 목이 잘리고 나머지는 고신을 당하거나 수감된 채로 있으며 간혹 자결한 이도 있고 항복하여 아국에 온전히 복속한 이도 있다네. 그리고 특이한 자가 있군. 고전직부(古田織部: 후루타 오리베)라는 자이네.”

“후루타는 장수가 아니고 다인입니다. 군문에 대해 아무런 것도 모르는 자이지요.”

“그래, 심문 결과 아무런 쓸모도 없는 자이며 차와 도자기에 미친 자이기에 방면하지는 않고 합당한 장소로 보냈다네. 고령에서 도공(陶工: 도자기 장인)으로 일하게 하였지.”

포로로 잡힐 때까지 솔잎차를 내놓겠다고 했던 그놈? 고령에 있는 빼어난 도공들 휘하에서 십 년 정도 일하면 일본으로 돌아가 정말 도자기 장인이 될지도 모르겠다.

사나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이를 바라보다 결국 입을 열었다.

“정계와 관련된 일에 입을 열지 않았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정계가 한 치 앞도 알 수 없을 정도로 헝클어져 있어 함부로 입을 열었다가는 큰 화를 입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지요.”

“정계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 대체 어떤 상황이기에 그러나. 혹여나 무전(다케다) 가문에 반기를 들려는 이들이라도 있는가?”

“엄밀히 말하자면 겉으로는 막부와 쇼군을 내놓고 속으로는 다케다 가문이 통치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각 가문의 혼인동맹과 인척으로 얽혀 있는 느슨한 집합체입니다.”

“혼인동맹과 인척으로 얽혀 있다 하였는가? 그게 어떻게 나라인가?”

이이의 말에 끼어들어 조금 미안하지만 나도 할 말이 있다. 그게 어떻게 나라냐? 호족 간의 혈연으로 시작한 고려조차도 핵심 세력인 왕건이 존재한 덕분에 국가의 축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이는 기가 차지도 않는다는 듯이 말하였다.

“그러하면 과두(寡頭) 정치가 아닌가? 아니 다두(多頭)정이라 해야겠군. 그나마 흡사한 이들이 있기는 하네만. 머나먼 미주의 미주인들이 족장을 여럿 두는데, 각 방면을 통솔하는 이들을 모두가 선출하여 뽑는다 하였지.”

“미주인들이 어떠한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서로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으니 책임을 지려는 이도 없고 나서는 이도 없었지요.”

이게 뭔 개판이란 말인가. 그럼 지금 일본의 상황이 어떤 거야?

이이도 나도 눈을 마주쳤는데 사나다 마사유키는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지금의 상황을 예측하여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 *

넉 달이 지났지만 교토는 아직도 혼란의 도가니였다.

느슨한 동맹체계를 발판으로 아무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았고 아무도 당당히 나서지 않았다.

그저 패장인 후지와라 토키치로, 본래 역사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가둬둔 채로 사형을 내리지도 않고 말과 말이 오가는 언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장마가 시작되어 적의 진군이 가로막히자 일이 어느 정도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이번 큐슈 원정은 실패요. 조선이 아직까지 반격에 나서지 않았으니 더 이상 침략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구려. 우선 토키치로의 목을 잘라 조선에 보내도록 하시오.”

넉 달이나 늦은 사과이며 제대로 된 말도 없이 목 하나만 보낸다면 오히려 더욱 심한 무례이리라.

하지만 희생양이 필요한 일본 조정에선 히데요시의 목이 아닌 사지를 분해해 조선에 보내자는 험악한 말이 오갔다.

그때 구석에 앉아 있던 한 사람이 일어나 앞으로 걸어 나왔다. 지금까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사태를 관망하던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쇼군으로 부임한 이래 최초로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후지와라, 아니, 키노시타 토키치로의 목을 벤다 하여서 뭘 얻을 수 있겠소? 그나마 첫 전투에서는 승전을 거두고 이후 조선의 요새에 접근하기 전까지 계속 이긴 사람이 아니오.”

“전쟁에서 패한 사람이니 패장의 목을 잘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미천한 출신에도 불구하고 재주를 높게 사서 출세시켜 주었더니 대패(大敗)하고 몸만 살아 돌아오다니요!”

“애초에 한 달의 시일 동안 모든 힘을 다하였다가 적의 원병을 만나 뒤늦게 퇴각한 것이잖소. 만약 토키치로가 한 달의 시간을 더 벌 수 있었거나 병력이 더 많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소?”

이름만 남은 막부의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의견을 내놓자 모든 다이묘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서로 책임은 지기 싫고 이득을 챙기려는 이들의 모임이니 어느새 앞으로 나선 이가 대표나 마찬가지인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누군가 나서지 않는다면 내분으로 자멸하리라.

요시아키는 평상시에 들어오는 녹봉이나 받아먹으며 체면치레나 하던 모습이 아닌 나름 진중한 태도로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러니 토키치로에게 패전의 책임을 묻는 대신 처음 승전의 공을 인정하여 다시 중용하는 길을 택해주시오. 만약 조선이 역공을 가한다면 그나마 상대할 수 있는 장수가 아니겠소.”

“옳은 말씀입니다. 하온데 쇼군께서도 어느 정도의 책임은 지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도 책임을 질 수 없는 상황이니 책임을 지라 하였지만 요시아키에게는 뭐 하나 내놓을 거리가 없었다.

하지만 요시아키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였다.

“책임이라 하였소? 토키치로를 중용하는 데 내 책임이 필요하다? 그러하면 토키치로가 조선의 재침을 막아낼 경우, 혹은 다른 방면에서 공을 세우면 내 양자로 입적시키겠소.”

“쇼군께서 모범을 보이시니 아둔한 저희의 눈이 뜨이는 것 같습니다!”

“그럼 더욱 모범을 보여야겠군. 하옥된 토키치로를 내 손으로 직접 석방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구려. 공을 세우면 내 양자가 될 사람인데 의부(義父)가 석방시켜야 하지 않겠소.”

수많은 찬사가 허수아비인 아시카가 요시아키에게 쏟아졌지만 그는 겸손하게 고개를 돌리고 방 밖으로 나서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기에 살길을 찾으려 애썼다.

“애초에 뭔 희망이 있다고. 내 대에서 막부도 끝날 게 분명하지만 그나마 토키치로와 한 편이 되면 어느 정도 살길이 생기겠지. 살길은 잘 찾아내는 사람이 아닌가.”

난데없는 쇼군의 행차와 패장 토키치로라 불리는 이를 당당하게 양아들이 될 사람이라 칭하는 모습을 본 병사들은 히데요시를 석방하였다.

감옥 안에 갇힌 채 죽을 날만 기다리던 히데요시는 요시아키에게 절을 연거푸 올려댔다.

“제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쇼군께서 저를 어여삐 보아주시니 비천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나저나 제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혹여나…….”

“자네가 후지와라 가문에서 내쳐졌으나 가족들은 죄가 없다 하여 파혼당하거나 결별하는 선에서 끝났다네. 그러니 안심하도록 하며 앞으로 공훈을 세울 생각을 하게. 만약 뚜렷한 공훈을 세운다면 내 자네의 의부가 될 생각이 있다네.”

아무리 허울만 있는 쇼군이라 하여도 엄연한 막부의 수뇌이다. 잘만 하면 양자가 되어 차기 쇼군, 혹여나 실패하여도 막부의 중핵이 되어 차기 쇼군을 보좌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뚜렷한 공훈이라 하니 히데요시는 침을 삼키며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다.

“뚜렷한 공훈이라 하시니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혹여나 조선에서 침략을 시작하였습니까? 이미 오우치가 함락당하거나 교토가 위태로운 상황입니까?”

“아니라네. 조선은 지난 넉 달 동안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네.”

어떻게든 당당한 표정을 지으려 하였지만 히데요시의 얼굴 근육이 파들파들 떨리며 눈이 주변으로 휙휙 돌아갔다.

충분한 전쟁 준비를 하지 않은 조선이 바로 반격에 나섰다면 이를 격퇴할 자신은 있었다.

수없이 많은 희생이 있겠지만 각지에 있는 산성과 교두보를 틀어막고 진격을 저지하면 조선이 급조한 군대 정도는 어떻게든 교토까지 닿지 못하게 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조선은 아직도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만약 조선이 몇 년에 걸친 원정 준비를 한다면? 수없이 많은 희생이 아니고 모든 힘을 결집하여도 승산은 절반에 불과하리라. 별동대로 날뛰던 입지(신립의 자)라는 장수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파놓은 함정에 빠졌음에도 큰 손실이 없이 퇴각을 성공하였으며 역으로 심리적 허점을 노려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런 장수들과 장수와 합을 맞출 수 있는 병사들이 즐비한 조선군이 아닌가.

일단 히데요시에게는 정보가 필요했다.

“쇼군께 무례한 청을 올리고 싶습니다. 지난 원정의 지휘관 중 2군 지휘관인 구로다와 4군 지휘관인 구키, 그리고 5군 지휘관인 사나다 마사유키와 면담을 하고 싶습니다.”

“사나다 마사유키는 적에게 포로로 잡혔거나 살해당했다네. 5군에서 도주한 생존자는 보인을 포함해 사천여 명에 불과하고 모두 나룻배를 훔쳐 시코쿠로 도주하였지. 하지만 나머지 둘은 내가 연통을 넣어보겠네.”

보름이 지나기도 전에 큐슈 원정대에 속한 세 장수가 한자리에 모였다.

다들 패전의 책임을 지고 한직으로 발령받은 가운데 히데요시는 구키 요시타카의 멱살을 잡고 고함을 쳤다.

“마흔 척에 불과한 적의 함대가 무서워 일천여 척이 넘는 배를 모조리 퇴각시켜! 자네가 한 번만 용기를 내어 적과 싸우고 병사를 더 퇴각시켰다면! 이만 명이 넘는 이들이 목숨을 건졌는데!”

“그 마흔 척의 함대 중 스무 척이 뭔 일을 벌였는지 알기나 합니까? 제 부장인 와키자카가 니혼마루를 선두로 세워 삼백 척의 함선으로 유리한 위치를 잡고 공격하였는데 단 한 척의 배도 침몰시키지 못하고 몰살당했습니다!”

퇴각 당시에는 설득할 시간조차 아까워 길길이 날뛰는 히데요시를 포박하여 선창에 가두고 억지로 출발한 구키지만 이제는 할 말이 차고 넘쳤다.

그는 지도를 하나 가져오더니 붉은색으로 칠해진 항구를 가리키며 오히려 성을 내었다.

“조선의 함대가 일흔 척으로 불어나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십니까? 각지에 보이는 항구와 모든 선박을 부수고 불태워 버렸습니다. 이런 괴물들과 싸우라니, 제정신이십니까?”

“적장은 사람일세. 사람은 텟포(조총)로 쏘면 죽는 법이고 칼을 맞아도 죽는 법이지.”

“제가 보기에 다른 장수는 다 그러한 방식으로 죽일 수 있어도 와키자카를 박살 낸 장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간몬해협에 설치한 망루를 단 한 척의 손실도 없이 걷어낸 자이지요.”

간몬해협이 얼마나 위험한 장소인지는 히데요시도 알고 있었다. 만약 일천여 척의 배가 지나가면 이 할이 넘는 손실을 보리라.

구키는 히데요시의 멍한 표정을 보더니 손가락 세 개를 펼치고 말하였다.

“제가 보기에 놈을 죽일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오십 년 정도를 기다려 늙어 죽게 하는 법, 하늘에 기대 놈의 함대가 태풍에 휩쓸리게 만드는 방법이지요. 솔직히 말해 태풍도 정면으로 뚫을 것 같아서 두렵습니다.”

“그게 사람인가?”

“그나마 놈도 일천여 척의 함선을 상대로는 섣불리 나서지 않았기에 퇴각할 틈을 노릴 수 있었지요. 하지만 잘못하다가는 덜미를 잡혀 크나큰 손실을 볼 게 분명하지 않습니까. 제가 얼마나 잘못을 했습니까?”

히데요시는 수전(水戰)에 대해서는 많은 지식이 없었기에 현장 지휘관인 구키의 판단을 존중하였다.

바다에서 싸운다면 무조건 진다. 아니, 패배하다 못해 말 그대로 몰살당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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