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413화
2부 20장 3화 이주(1)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짓던 주상전하께서는 아니나 다를까 조약 이후의 질문을 퍼부었다.
조약 내용 자체야 마음에 들지만 궁금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테니까.
“시기가 너무 좋구려. 사절단을 보내는 일은 언제라도 할 수 있지만 하필 왜인들이 난을 일으킨 직후를 노려 보낼 방도가 있소이까. 설마 우연의 일치인가?”
“미리 계획하였지만 보름 정도 당도가 늦었을 뿐입니다. 이 년 전에 일본의 영주가 청하기를 오십만 두카트에 달하는 금은보화를 대가로 저희가 조선과의 전쟁에 용병으로 참가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를 거절하고 아국을 도운 것이군. 서반아의 왕이 마음을 정했으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지만 어찌하여 조선에 소식을 전하지 아니하였나?”
“조선은 강대한 국가이니 일본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다 여겼습니다. 또한 이러한 사실을 이미 조선과의 전쟁을 벌인 저희가 말해야 무슨 답이 돌아오겠습니까? 의심의 골이 깊어질 것이 아닙니까.”
당연히 스페인 놈들이 헛소문을 퍼트린다면서 두들겨 맞았겠지.
조선은 스페인과 무역을 중단하라는 만력제의 명령을 이행했지만 무역만 중단하고 스페인 함선의 보급과 수리를 막지는 않았다.
이 시대에는 레이더도 무전기도 없으니 견시(見視) 외에는 함선의 동향을 파악할 방법이 없다. 보급이 간절한 상단이 해적으로 돌변해 인근 마을을 터는 것을 모두 막을 수 없기에 차선책을 택했다.
하지만 스페인의 생각은 아니었나 보다.
“하지만 저희도 염치가 있으며 신의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실책으로 조선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지만 여전히 보급을 열어주시어 상인들의 활로를 틔워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일본의 청을 거절하고 조선에 협력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보답을 하겠네. 조약에 의거하여 인삼의 가격을 증액하라 하였는데 기존의 가격으로 유지하겠으니 앞으로 서반아와의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싶군.”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하는데 펠리페 2세는 백만 냥은 갚았다.
하지만 이렇게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 만력제가 분노할 테니 곤란하지 않나?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서서 간언을 올렸다.
“전하. 모든 일이 순조롭게 돌아가지만 아국에 당도하는 명국 상인들의 눈을 피할 방책을 마련해야 하옵나이다. 자칫 잘못하면 칩거한 명국 황상에게 언로가 열릴지도 모르옵나이다.”
“그것도 문제로군. 잠시 동안이면 은자를 좀 먹여 대처할 수 있겠지만 소식이 언제나 막혀 있지는 않은 법이지·.”
“스페인은 포르투갈과 동군연합(同君聯合)을 결성하여 펠리페 2세 전하를 섬기고 있으니 포르투갈의 깃발을 달고 포르투갈 사람이라 칭하면 큰 문제가 없을 겁니다. 저희가 입항할 때에도 포르투갈의 깃발을 달고 들어왔습니다.”
그럼 큰 문제는 아니니 넘어가도 되겠군.
주상전하가 궁금한 이야기를 모두 마쳤는지 조만간 사절단을 파견하여 조약을 다시 채결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의견을 수렴하였다.
“서반아가 아국에 손실을 입히고 무례한 행동을 하였지만 이를 반성하고도 남을 보답을 하였으니 서로 신의를 지키고 뜻을 존중하여 대할 것이다. 혹여나 다른 문제가 있는가.”
“신 이양원 진언할 것이 있사옵니다. 미주의 강역은 드넓다 못하여 동서로 일만 리(4,000㎞)에 달합니다. 사백 리를 양도한다면 이는 부잣집 곳간을 열어 한 됫박의 미곡만 받아가는 격이옵나이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조약에서는 조선 사람들이 기거하는 영역을 규정하였을 뿐 추후에 서로가 기거하는 영역을 다시 정할 것입니다. 이미 궁중에서 정하기를 최소한 저희의 거리로 이백 리그를 양도할 예정입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반드시 사절단을 보내야겠군. 이천 리(800㎞)를 양도한다는 말은 아국이 합당한 대가를 지불한다면 더 많은 땅을 아국의 강역으로 양도한다는 뜻이 아닌가.”
“옳으신 말씀입니다. 사실 조선에서 거둬들이기 힘든 땅이 저희에게는 보배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저희가 거두기 힘든 땅이 조선에 보배가 되는 법이지요. 서로 합의를 보면 원만하게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후안 마르티네스가 다시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고 주상전하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쯤 되면 더 이상 할 이야기도 없으니 다시 나라의 일로 돌아가야겠지.
스페인 사절단은 간혹 명나라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도성 대신 강화도에서 쉬라는 명령을 받고 세스페데스와 함께 이동하였다.
다시 시작된 논의의 중핵(中核)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였다.
“이제 십만 명에 달하는 하주도, 아니, 아국의 백성이 된 이들을 이주시켜야 하네. 하지만 이들이 머물 집과 개간할 농토를 빠르게 정해야 할 것이네. 유성룡 자네는 본디 하주도 관찰사로 일하였으니 이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네.”
“신이 부족한 재주를 오로지 백성들을 평안하게 만드는 데 사용할 것이옵나이다.”
“자네를 중핵으로 삼아 임시로 기관을 만들 것이네. 기관의 명칭은 이주(移駐)도감으로 정하고 이전에 하주도 관찰사나 관리로 있던 이들을 소집할 것이니 부디 이전에 다루었던 백성들을 잘 통솔하여 주게.”
전임 관찰사가 최소 셋은 모였으니 거의 비변사(備邊司)에 가까운 기관이 아닌가. 훗날이 되면 미주와 호주에 백성들을 사민 하는 이주사(移駐司)로 개칭되지는 않을까.
아직 구성되지도 않은 기관이니 주상전하께서는 명령을 하나하나 하달하였다.
“먼저 유홍(俞泓)을 이주도감의 제조(提調)로 임명한다, 충청도부터 전라도까지의 모든 간척지에 개간되지 않은 땅의 목록을 산출하여 백성들을 얼마나 보낼 수 있는지를 계산하게.”
“신이 분골쇄신하여 이주할 백성들이 굶주릴 일이 없게 노력하겠나이다.”
“부제조 두 명은 각각 유성룡과 구사맹으로 임명한다, 유성룡은 벽란도에 있는 상선을 공출하여 백성들을 운송할 준비를 마치며 서반아로 돌아갈 세스페데스를 전송하도록. 구사맹은 먼저 하주도로 내려가 백성들이 이주 준비를 마치도록 힘쓰게.”
“주상전하의 명을 필히 수행하겠나이다.”
유홍이야 60줄에 가까운 관료이고 구사맹도 50이 훌쩍 넘은 사람이다. 반면 나는 43세에 불과한 애송이이지.
아마 실무적으로 나에게 시킬 일이 많아 보이지만 나 외엔 할 사람이 없다.
인구가 폭증함에도 제대로 작동하는 네 개의 신도시를 만들었으니 실무 능력은 검증된 것과 다름없고, 이역만리는 아니지만 새로운 고장인 파양군을 온전히 돌아가게 만들었다.
앞으로 일이 넘쳐나겠지만 수미상관이라고 큐슈 전쟁을 시작한 사람도 나이고 전쟁의 피해를 최소화시킬 사람도 나이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
* * *
세스페데스는 이제 돌아갈 시기이다. 아직 십 년을 온전히 채우지는 못했지만 거의 십 년에 달하는 시일을 조선에서 보냈으니 배울 만큼 배웠지.
하지만 세스페데스도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제독님! 송구한 말씀이지만 일본의 신도들이 박해를 받아 큐슈 일대로 몰려온다 합니다. 살길을 찾아 머나먼 바다를 거쳐 조선의 품으로 뛰어들지 않습니까!”
“그것참 곤란한 일이구려. 펠리페 2세 전하의 명으로 당신을 본국으로 돌려보낼 방침이었는데 이를 어찌하면 좋을지. 그리고 그 신도들은 어떻게 할 거요?”
“뭘 그리 걱정하는가? 교역로가 열렸으니 구주의 항구에 서반아의 함선이 드나들 수 있을 것이며, 몇 달 정도 구주에 머물며 박해를 피한 천주교 신자들을 거둬들이면 충분하지 않겠소.”
어차피 너희들도 몇 달 동안 머물면서 다른 기술들을 토해내야지. 내 의견을 들은 후안 마르티네스와 세스페데스는 서로 시선을 교차하더니 나름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이미 일본을 저버리기로 하였는데 잘된 일입니다. 동방의 신도들이 펠리페 2세 전하의 품으로 귀의(歸依)한다면 기뻐하시겠지요. 다만 지나치게 오래 머물면 곤란할 겁니다.”
“저도 평생 동안 구주에 머무를 수 없으니 프로이스를 비롯한 다른 형제들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만 머물러 있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석 달은 거주해야겠군요.”
세스페데스의 첫 스승인 내가 그의 배웅을 주선하였다.
아직도 도성이 왜인을 근육 하라는 유생들로 넘쳐나는 가운데 세스페데스는 사절단의 기함의 올라타 머나먼 지평선 너머까지 손을 흔들며 조선을 바라보았다.
함선을 징발하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봄이 되어 물길이 트여서 각지의 물산을 운송하는 상인들에게 보상을 지급하고 짐을 최대한 비워 필요한 식량만 지니게 하고 내려보내니 폭풍 직전의 고요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업무의 반복이었다.
이 와중에 벽란도에 온 스페인 사절단, 공식적으로는 포도아(포르투갈) 상단은 함선의 수리를 위해 나를 찾아왔다.
아무래도 서양인과 접촉하지 못한 벽란도 관리가 나에게 일을 떠넘겼지만 차라리 잘된 일이다.
“펠리페 2세 전하께서 명하신 바를 이루었으니 이제 함선을 수리할 때가 되었군요. 그나저나 쓸 만한 재목이 좀 있습니까? 저희가 왜인들을 공격하는 중에 배가 제법 손상을 입었습니다.”
“거의 같은 규모의 함선을 운용하는데 재목이 왜 없겠소. 본디 큰 배의 수리는 경원까지 나아가 시행해야 하지만 벽란도에도 재목은 충분히 있소.”
함대의 보수를 담당하는 목공장(木工匠)은 내 안내를 받아 보수용 목재가 쌓인 제재소에 도착하였다.
대양도에서 운반되어 산더미처럼 쌓인 목재를 거대한 톱으로 쉴 새 없이 치목(治木)하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이런 좋은 품질의 목재면 용골로는 쓸 수 없어도 늑골로 쓰고 남을 정도입니다. 더군다나 이 목재는 느티나무가 아닙니까? 참으로 쓸모가 많은 목재이죠. 강도는 조금 부족하지만…….”
“그래도 소나무보다 강도는 충분히 강하고 물을 만나도 목재가 잘 썩지 않으니 배를 오래 쓸 수 있을 거요.”
“참으로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나저나 수력 제재소는 어디 있습니까? 스페인에는 곳곳에 있는데 왜 다들 몸으로 나무를 켜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이거 참 곤란한 일이군요.”
이 양반이 말한 수력 제재소는 중세 유럽 영화를 보면 간혹 등장하는 목재 가공의 시작과 끝이나 마찬가지인 물건이지. 거대한 수차(水車)와 연결하여 돌아가는 거대한 원형 톱이다.
처음 관원이 되었을 때 수력 제재소를 만들려 했지만 기반 기술이 소멸하였다.
조선의 환경이 워낙 좋지 않아 수차 계열 중에 살아남은 녀석은 발로 밟아 물을 끌어올리는 용골차(龍骨車) 한 종류 외에는 없었다.
결국 서양인들이 보기에는 자신들이 로마 시대부터 사용했던 도구가 없는 상황이다. 물론 근육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톱질은 근육 발달에 큰 도움이 안 된다.
“이를 어쩌나. 익숙한 수력 제재소가 없으면 가공에 시일이 들지요. 만들려 해도 비용이 많이 들어가고 적어도 한 달 이상이 걸려야 만들 수 있는데. 어쩔 수 없으니 일단 인력으로…….”
“지금 뭐라 하였소? 수력 제재소를 만든다 하였소?”
“제 출신이 빌바오입니다. 빌바오는 비스카야(스페인 북부 바스크 주) 북부의 도시인데 큰 강이 있어서 수차가 많이 있고 수리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처음 나무를 다룰 적에 제재소를 보수하였지요.”
이 사람이 수차는 물론이요, 내가 원하는 제재소를 만들어봤다고?
생각해 보니 사절단이면 어지간한 사고를 견뎌내고 서신을 전해야 하니 나름 능력 있는 사람들을 소집해야 하리라.
이 목공장은 모르고 있지만 조선에 반드시 필요한 보배나 마찬가지이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지!
렇지 않아도 이만 호에 달하는 집을 만들어야 하는데 내가 원하는 방식의, 정확히는 한옥의 틀을 벗어난 목조 주택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하면 당장 만들어주시오. 내 주상전하께 청하여 필요한 물자를 모두 주겠소.”
“네? 정말입니까? 이역만리에서 필요한 물건이 있다고 바로 내어 주신다는 말씀입니까? 하지만 조선의 강이 어떠한지 저는 모르고 있습니다. 빌바오의 강이야 사시사철 유량이 풍부하지만 이게 개천인지 강인지…….”
“이건 개천이 아니고 강이오. 아국의 강은 가물 때와 불어날 때의 차이가 일백 배에 달하는 경우도 많으니 이를 염두에 두시구려.”
“그러면 가물 때는 수차를 돌리지 못하고 물이 불어날 때는 수차가 박살 나는뎁쇼. 말이나 소로 축력(畜力)을 동원해도 효율이 매우 부족해지지요.”
맞네! 이놈의 강과 빌어먹을 장마!
한강만 해도 현대 토목기술을 결집하고 수많은 댐을 상류에 만들어 뒀음에도 밥 먹듯이 범람해 수재를 일으키는데 조선시대에 이걸 감당할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에겐 근육이 있다. 지금도 왜인들이 변고를 일으켰다며 지방에서 올라온 유생들이 넘쳐나는 판국에 뭘 못 할 일이 있는가.
나는 목공장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하였다.
“그러하면 수차 대신 사람이 발로 밟아 돌리는 방식을 채택해 보시오.”
“네? 조선에 그렇게 노예가 많습니까?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노예가 수십 명이 죽어 나갈 겁니다!”
“노예 수십 명보다 근육을 갖춘 유생 다섯 명이 더 뛰어난 법이오. 여하튼 만들어보시오!”
이게 성공한다면. 만약 조선 곳곳에 수력 제재소, 아니, 근력(筋力) 제재소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통나무를 사용하는 한옥 대신 목재의 효율을 최대한 끌어올린 경량 목구조를 만들 수 있으리라.
조선에서 서양의 영향을 받아 만드는 이 층 상가들은 대부분 치목을 적게 한 통나무를 사용한다.
하지만 경량 목구조는 통나무를 세로로 켜서 만든 각목을 쓰니 나무를 적게 쓰는 녀석이다.
“한옥 한 채를 지을 수 있는 목재면 경량 목구조는 두 채를 만들고 목재가 남지. 추위에 엄청 약하지만 남부 지방이니 무슨 문제가 있겠어.”
수많은 각목을 엮어 만드는 경량목구조는 내가 한창 일에 몰두할 때 수도 없이 시공해 보았다.
한국에서 처음 시공하는 방법이니 현장에 많이 나가 보았고 필요한 물자도 많으니 큰 문제는 없으리라.
물론 합판이나 현대식 방수시트가 없으니 이런저런 문제가 많겠지만 임시 주택으로는 차고 넘친다.
한 십 년 정도 지나면 한옥을 지어서 쓰면 되잖아?
-미역이 미역한 이야기-
와키자카를 비롯한 니혼마루의 생존자들이 해류에 떠밀려서 머나먼 섬에 도착한 것이 벌써 20일 전이었다.
오늘도 생존자들은 숲속에 움집을 짓고 해안에서 건져온 해산물을 꾸역꾸역 삼켜댔다.
“이제 어찌합니까. 조선 놈들이 오히려 점점 더 많아지는데 이래서야 탈출할 수는 있겠습니까? 불을 피웠다가 들통 날 수 있으니 불조차 피우지 못하는군요.”
“그래서 내가 뭘 어쩌라고! 내가 원해서 여기까지 떠밀려 왔나!”
와키자카를 비롯한 생존자들이 해류에 떠밀리다 필사적으로 헤엄쳐 도착한 섬은 무인도였다.
기껏해야 사람 스무 명이 마실 정도로 작은 샘과 개천이 있는 섬이니 전략적 가치가 없어 버려진 장소였다.
현대에는 아카시마(赤島)라 불리는 작은 섬이고 병사들이 머물 수 없는 장소이기에 조선에서도 방치하다시피 버려둔 섬이다.
하지만 동쪽으로 2㎞ 정도 떨어진 마다라 섬(斑島)에는 조선의 포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깊은 한숨을 내쉰 와키자카는 뻣뻣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는 사지를 억지로 놀리며 미역을 주어 삼켰다.
그러더니 한숨을 내쉬고 이틀 전에 애써 해산물을 가져온 부하를 타박하였다.
“이 망할 놈아! 네가 가져온 소라에 독이 있었잖아! 세상에 소라 회를 먹고 이렇게 사지가 굳어지고 아플 줄은 몰랐는데. 네 녀석 눈은 장식이냐! 얼굴 가죽이 부족해 뚫렸어?”
“저도 아파 죽겠습니다! 세상에 소라가 그렇게 독을 품을지 누가 알았습니까.”
일본 내해에서 잡히는 소라는 침샘에 독이 없는 온순한 종류이지만 동해안 일대에 서식하는 소라 가운데 일부는 침샘에 다량의 독을 품고 있었다. 당연히 침샘을 제거하지 않고 날로 먹은 와키자카와 생존자들은 독을 잔뜩 삼켜 버렸다.
평상시라면 이 독을 견뎌내고 약간의 복통으로 넘길 장정들이지만 다들 굶주리고 피폐하였으니 심각한 근육통과 마비 증상에 시달렸다.
심지어 눈이 쏙 들어간 한 부하는 거의 기어오다시피 와서는 미역을 씹어 먹으며 말하였다.
“아프다 하시니 저도 곽란이 멈추지 않습니다. 조선 놈들이 심어둔 토란에 독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조선 놈들은 이걸 어떻게 먹는 걸까요.”
이들이 토란이라고 부르는 작물은 감자였다. 예전에 유성룡이 산성을 보수하며 감자 씨앗을 뿌려 비상 상황을 대비하였기에 너 나 할 것 없이 감자 씨앗을 뿌려대기에 이르렀다.
몇 대에 걸쳐 자연스럽게 번식한 감자는 어느새 더덕이나 도라지를 대신하여 섬을 뒤덮었지만, 감자는 솔라닌을 품은 녀석을 잘 골라내야 했고 이들은 싹이 튼 감자를 구별할 방법을 배우지 못하였다.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밤중에 달빛에 의지해서 잡을 수 있는 게나 조개, 그리고 해안으로 떠밀려온 미역으로 제한되었다.
와키자카는 미역을 부하에게 집어 던지더니 괜히 화를 내었다.
“구워 먹거나 삶아 먹으면 독이 빠지겠지. 그런데 여기서 부싯돌로 불을 피웠다간…….”
“반드시 들킬 겁니다. 저희도 한가롭게 갯바위에서 낚시를 하고 싶지만 조선 놈들의 배가 계속 지나다니니 어쩔 수 없습니다.”
수부나 병졸에 불과한 와키자카의 부하들은 당장 불을 피우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항복을 청하고 싶었다. 비록 조선에 잡혀가 몇 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겠지만 뭐가 대수인가.
하지만 와키자카는 장수이다. 조선으로 끌려가면 높은 확률로 목이 베일 것이요 그렇지 않더라도 평생 형무소라는 곳에 갇혀 돌아오지 못하리라.
괜히 화를 내서 머쓱해진 와키자카는 다시 미역을 뜯어 먹으면서 말하였다.
“하지만 놈들의 경계도 풀릴 것이다. 우리는 놈들의 경계가 풀린 다음 풍랑에 휩쓸려 난파한 어부라 말하면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그게 언제일지 어떻게 압니까. 인근에 어부들이 좀 다녀야지 변명이 통하는 법 아닙니까.”
생각 같아서는 당장 바다로 뛰어들어 팔뚝만 한 도미를 잡아 구워 먹고 싶지만 그건 소원에 불과하였다.
미역을 먹다 뱉어버린 와키자카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제풀에 지쳐 잠을 청하였다.
“염병할. 달 한번 우라지게 밝군.”
오늘도 부하들을 데리고 달빛에 의지해서 게를 주워 먹어야 하리라.
하지만 모래가 으적으적 씹히고 물컹거리는 날 게를 계속 먹었다가는 무슨 병에 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와키자카가 다른 움집에서 여전히 자고 있는 부하들을 걷어차려 했지만 부하들이 보이지 않았다.
열 명에 달하는 사람 모두가 자리를 비웠으니 와키자카는 자연스럽게 사지의 털이 곤두서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설마…… 나를 배신했나? 조선 놈들과 붙어서 나를 팔아먹으려고!”
한밤중에 달빛에 의지하지 않으면 식량조차 구하기 힘든 섬이다. 와키자카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몸을 낮추어 해안으로 향하였다.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놈들은 낮을 틈타 여기까지 몸을 의지한 나무판자를 타고 조선의 요새로 향했으리라.
“이런 개새끼들. 내 이럴 줄 알았다.”
혹시나 몰라 해안 근처 숲속에 숨겨둔 나무판자 중 상당수가 사라졌다.
이미 몇 번이고 조선 놈들과 접촉한 것이 분명하다 여긴 와키자카는 개중 가장 튼튼한 판자를 집어 바다 위로 몸을 던졌다.
“내가 잡혀서 모가지가 잘리느니 네놈들을 엿 먹이고 말겠다! 내가 물속의 원귀가 되더라도 네놈들이 먹고살 은자가 되는 것보다는 낫겠지!”
파도를 역류하여 쉴 새 없이 팔다리를 놀린 와키자카는 다시 정처 없는 표류물의 신세가 되었다.
다른 무인도에 도착한다면 목숨을 건질 수 있겠지만 그건 소원에 불과하리라.
하지만 와키자카의 생각과 반대로 부하들은 어느새 섬 반대편에서 움집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부하들의 손에는 구운 감자가 잔뜩 들려있었고 바닷물을 졸였는지 시커먼 소금까지 있었다.
“그것 보라고! 나무면 몰라도 얇은 판자를 잘 말려서 불을 붙이면 연기가 거의 나지 않는다니까. 와키자카 님에게는 된통 두들겨 맞을지 몰라 망설였는데 참 잘되었어.”
“이 토란 정말 맛있는데? 고소하고 퍽퍽한 맛이 일품인 데다가 진가사(투구)에 바닷물을 끓여 만든 소금을 찍어 먹으니 더 일품이야! 와키자카 님! 어디 계십니까?”
장수를 위해 목숨을 걸고 감자를 구워온 부하들이 와키자카를 찾아댔지만 그의 모습은 섬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사흘이 지나 와키자카가 자결하였다 생각한 부하들은 조선에 항복하였다.
“다음 섬은 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
하지만 강렬한 해류에 밀려 서쪽으로 끝없이 밀려간 와키자카는 부하들이 희멀건 죽으로 속을 달래는 중에도 굶주림과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
#작가의 말
성룡이가 원하는 제재소는 이런 녀석입니다.
수차는 동서양에서 널리 쓰였지만 하상계수가 크고 물이 말라붙는 지역에서는 효율이 부족해 쓰이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조선의 중부, 북부지방이나 중국의 화북지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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