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411화
2부 20장 1화 난민
사나다 마사유키가 담당하는 적의 상륙지인 가고시마에서 탈출한 유성룡의 제자들은 다섯 척의 배로 나누어 타고 도피처를 찾았다.
처음에는 먼 섬인 미시마(三島)로 항로를 잡으려 하였지만 이를 제지한 자는 가주였던 시마즈 요시히사였다.
“미시마는 분명 원숭이 놈이 넘보지 않은 작은 섬일세. 하지만 영민한 사나다라면 조만간 사태를 알아차리고 함대를 인근 섬과 해안의 각 촌락으로 급파할 것이네.”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습니다. 다들 피로에 시달리고 있으니 당장 경로를 정하여 휴식을 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반란이 일어나고 반란을 일으킨 이들이 도주하였으니 당연한 결과일세. 자네들이 도주한 덕분에 철두철미한 사나다 마사유키가 역으로 혼란에 빠진 것이지.”
본래 전국시대에 반란을 일으키면 가주를 몰아내고 가문을 차지하려는 목적으로 반란을 일으키지 반란을 일으켜놓고 도주하는 경우는 상식에서 어긋나는 일이었다.
사나다 마사유키는 탈주한 시마즈 요시히사가 돌아올 것이라 여겼으며, 진영 어딘가에 적과 내통한 반란군이 있다 가정하여 적이 주둔지로 쓸 수 있는 마을을 철저히 불태웠다.
덕분에 추격이 늦어졌지만 기껏해야 며칠에 불과하다.
“아마 며칠 뒤에는 우리가 반격을 생각하기는커녕 도주하였음을 알아차리고 모든 병력을 수색대로 파견할 것이네. 그러니 사력을 다하여 조선의 땅인 나가사키로 항로를 정해야겠지.”
시마즈 요시히사의 예측은 사실이 되었다.
사흘이 지나고 사태를 명확히 파악한 사나다 마사유키는 이백 척의 함선을 징발하여 추격에 나섰다.
항해에도 익숙하지 않고 격꾼조차 부족한 유성룡의 제자들은 교대로 잠을 청하고 노를 저어 여드레 동안 나가사키를 향해 나아갔다.
마침내 나가사키 인근까지 도착한 유성룡의 제자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거선(巨船)을 발견하였다.
“저게 무슨 배인가! 저런 거대한 배가 떠다닐 수 있다는 말인가? 아타케부네가 어린아이처럼 보일 지경이군!”
“저 함선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조선의 대장선입니다!”
어린아이처럼 펄쩍펄쩍 뛰는 타치바나 무네시게를 시작으로 살아남은 여섯 제자들은 제자리에서 껑충껑충 뛰며 환호성을 질렀다.
자그마한 왜선이 다가옴을 알아차린 대양도 수군절도사 이윤범은 이들의 면모를 살펴보다가 화들짝 놀라 밧줄을 내려주었다.
“자네 유 관찰사의 제자인 입화종무(立花宗茂: 타치바나 무네시게) 아닌가? 옆에 있는 자네는 육주성의 영주인 도진의구(島津義久)이고. 대체 여기까지 왜 왔는가? 그런데 제자 가운데 으뜸이라던 복도정칙(福島正則: 후쿠시마 마사노리)은?”
“후쿠시마 님은 반정을 알리기 위하여 화약을 터트려 자결하였습니다. 덕분에 아둔한 저희 모두가 소식을 듣고 주군을 구하고 탈출할 수 있었지요.”
“화약을 터트려 자결하였다고?”
자초지종을 털어놓은 타치바나 무네시게의 이야기를 다 듣자 이윤범은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이들을 쳐다보았다.
말은 반정(反正)이라 하였지만 실질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꼴이 아닌가.
“본래 의(義)를 지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였습니다. 하지만 작금의 의는 바닥에 떨어져 있으니 이 몸을 바쳐 희생하는 일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 그래, 틀린 말은 아닐세. 방법이야 조금 잘못되었지만.”
이윤범 또한 유학을 배웠기에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상식대로면 불의를 보면 동참하지 아니하고, 불의가 만연하여 견딜 수 없는 지경이면 항거하여 반정을 일으키는 것이 옳다 여겼다.
하지만 불의가 있다고 덮어놓고 폭약을 터트려 자폭하고 목숨을 도외시하고 의를 실현한다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무네시게는 눈치가 부족한 편이라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잘못된 일이 맞습니다. 본래 주군의 잘못된 뜻을 즉석에서 바로잡았어야 했는데 의인이 목숨을 잃을 때까지 가만히 두고 본 제 배움이 부족한 것이지요.”
이들은 분명 유학을 배우긴 했지만 방법이 과격하여도 지나치게 과격했다.
전국시대의 험난한 삶을 살아온 이들에게 거의 세뇌에 가까운 방식으로 유교 사상을 주입하였으니 기본적인 성품이 변하지 않은 탓이었다.
아마 과격하기로 소문난 선비 중의 선비 조헌조차 이들의 행적을 보면 학을 떼리라.
이야기를 마친 무네시게는 거대한 대양도수영의 선단에 더욱 많은 배가 추가되었음을 확인하고 고개를 돌리며 물어보았다.
“그나저나 선박이 더 늘어난 것 같습니다. 혹여나 여송 수영이라는 함대가 합류한 겁니까?”
“아닐세. 뒤에 있는 함선은 서반아의 사절단이라네. 자초지종을 듣고 왜인들을 도륙하는데 합류하기로 하였지. 함대를 절반으로 분열하여 한 함대는 웅본(구마모토)을, 다른 함대는 녹아도(가고시마)를 공략할 것이네.”
만약 평상시라면 여송도 수영이 적의 반격에 시달리며 역으로 피해를 입었을 과감한 작전이지만, 유성룡의 제자들이 탈출한 덕분에 수십 척 규모로 분열한 함선들이 즐비한 실정이었다.
더군다나 스페인 사절단은 조선이 어떤 결정을 내리건 간에 이를 따르기로 하였다.
펠리페 2세가 이들에게 내린 명령은 아주 간단하였다.
-조선에 큰 무례를 범한 일을 사죄하여 화친을 맺고 추후 협정을 진행하려 하니 가급적 손해를 보지 않는 선에서 적극적으로 이들을 도와 일본을 공격하라.
가급적 손해를 보지 말라는 말은 충실히 일대를 약탈하여 군비를 수급하라는 말과 같았다.
마지막까지 큐슈에 남아 항전을 거듭하던 사나다 마사유키의 5군은 마지막으로 육로로 밀려온 조선군에 의해 궤멸당하였다.
* * *
히데요시를 사로잡는 데 실패하였지만 포로는 잔뜩 잡았다.
당장 돌아가려면 이순신의 배를 타고 돌아가는 것이 빠르니 잠시 배를 얻어 탔고 하카타에 내린 직후 해안을 빼곡히 메운 병사들이 보였다.
“자네가 적도를 추적한다 하여 참으로 걱정이 많았다네. 하지만 배를 타고 돌아오다니 적도를 모조리 추포하는 데 실패하였나 보군.”
“적장이 보통 사람이 아닌지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도원수께서 먼 길을 오셨지만 왜적들이 종적을 감추었으니 남은 일은 잔당을 소탕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혹여나 힘을 보태드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보태드리겠습니다.”
도원수로 부임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박순이었다. 한때 병조판서를 지냈으며 지금은 우의정의 자리에 있으니 예순이 넘은 늙은 나이를 제외하면 도원수로 임명할 인재이지.
예정대로 일본의 침공 사실을 전한 지 한 달이 지난 2월 24일, 삼남도의 지방군과 긴급 징발된 보인들로 편성한 지방군이 도착하였고 나흘이 지나자 상륙 작업도 종료되었다.
히데요시가 설령 한 달을 더 버텼어도 단숨에 4만의 병력을 오로지 정병으로 추가하는 조선의 동원력에 덜미를 잡혔으리라.
박순은 전장을 확인하더니 내 손을 맞잡고 거세게 흔들었다.
“참으로 대단하네. 적도가 정병만 따져도 사만 명이 넘는데 이를 삼분지 일도 안 되는 병력으로 모조리 격퇴하였으며 심대한 피해를 입히지 않았는가.”
“적이 다급하게 나선 덕분에 피해를 입힐 수 있었습니다. 만약 도원수께서 급박히 당도하지 아니하였으면 여전히 적도를 막아내다 역으로 피해를 입었을 것입니다.”
“괜한 칭찬은 하지도 말게. 그나저나…… 왜 이리 난민들이 많은가?”
나도 모르겠습니다! 난민들이 계속 늘어나는데 이제는 장정까지 늘어나 미칠 지경이다.
미리 만들어둔 도개교를 운반해 설치하고 난민들을 받아들이니 이제는 점입가경(漸入佳境)이 따로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남만인들이 쳐들어왔습니다! 남만인의 진공을 막겠다고 사나다 님이 마을을 불태웠습니다!”
“무슨 남만인이란 말인가! 왜 진공을 막겠다고 마을을 불태우나!”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열흘 전에 갑자기 사나다 님이 병력을 보내 마을을 불태워 거지 신세가 되었는데 남만인들이 몰려온다면서 도망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지요.”
심문 결과가 중구난방이니 뭣도 모르는 난민이기에 인과관계가 잔뜩 헝클어진 것이 분명하지만 명확히 정황을 파악하려면 사나다 마사유키를 잡아다 두들겨 패서 알아내야 하리라.
박순은 한숨을 내쉬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자네도 힘들 시기인데 괜한 힘을 빼지 말고 이 난민들을 어떻게 돌려보낼 궁리를 하게. 나는 남쪽에서 여전히 기세를 올리는 왜장을 잡아 올 것이네.”
이후 보름 동안은 끔찍한 전후처리의 반복이었다. 사상자를 수습하고 적을 추적하면서 낙상(落傷)을 당한 이들을 큐쥬산에서 본진으로 복귀시켰다.
어찌나 일손이 부족했는지 권율도 어쩔 줄을 모르며 업무에 임했다.
“군량이 바닷바람을 맞아 썩어갈 지경입니다!”
“입신체비사를 부르게! 하주도의 토관들은 하나같이 유학을 익히고 입신체비를 배웠다네!”
나름 잘나가는 토관들을 불렀지만 이걸로도 부족하다. 업무는 차고 넘치며 농번기가 다가오니 딱히 하주도 백성들을 징발하여 업무에 참가시킬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 난민을 활용하려 했다.
“지금은 손이 바쁜 시기이니 나라의 업무를 돕는 이들에게 적절한 포상을 내릴 것이다. 너희가 명국의 강역인 육주성의 백성들이니 혼란을 수습하는 동안 아국의 보호를 받는 일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간단히 말해 멍하니 놀고 있지 말고 빨래나 물자 운반 그리고 전장 정리를 도우라는 말을 했다. 어차피 난민 신세니 일하지 않는 사람은 굶지 않을 정도로 밥을 주면 적당하다 여겼다.
그리고 내 오판을 한탄하다 못해 절망할 일이 벌어졌다.
이 미친놈들은 일을 하라는 명령을 듣자 자기 멋대로 산속으로 기어들어 가더니 패잔병을 추격해 목을 베어다 바친 것이다!
“관찰사 영감님! 난민들이 또 왜병의 수급을 가져와 상을 달라 보채고 있습니다!”
“이 미친놈들 진짜 수급 가져온 것이 맞나? 혹여나 길거리를 다니던 사람의 목을 베어서 수급을 가져온 것이 아닌지 면밀히 확인하여 보게!”
“왜투구(진가사)를 쓰고 있으며 행색이 파리하고 며칠 굶주린 것이 분명한 수급입니다!”
오늘도 관아에는 수급 오십여 개가 배달되었다. 내가 일하라 했지 사람 죽이는 일을 하라 한 적은 없는데 이 미치광이들을 보았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들에게 보상으로 은자를 지급했는데 다른 보고도 들어왔다.
“박다에서 난동이 벌어졌습니다. 하주도 백성과 육주성에서 올라온 난민이 시비가 붙어 난장판이 벌어졌습니다. 다행히도 크게 다친 이는 없지만 난민들이 은자를 소모하려고 지정된 자리를 벗어나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한 번 경고하고 두 번째는 목을 베게! 내 참을 만큼 참았지만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군!”
이 난민들이 어떻게 되건 간에 죄다 창칼로 내쫓으려 했지만 참았다. 그런 짓을 저지르면 난민들이 굶어 죽거나 도적이 될 것이다.
도적을 만들어냈으니 파면은 당연한 일이요 아무리 친조선파 관료라도 참지 못할 정도로 끔찍한 일이다.
머나먼 남쪽에서 마지막까지 항전을 이어가던 사나다 마사유키가 사로잡힌 사소한 일 따위는 내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사로잡힌 왜병들의 무장을 해제하여 조선으로 압송하는 일에 골머리를 썩였다.
그리고 모든 전후처리가 끝날 무렵인 삼월 초, 이십여 만에 달하는 난민들을 아직도 돌려보내지 못하고 하루하루 업무를 처리하는 와중에 명나라 관원들이 다자이후로 올라와 논의할 것이 있다 하였다.
“혹여나 명국에서 지원이라도 왔습니까? 곡식도 은자도 지금은 부족한 실정입니다.”
솔직히 말해 부족하지는 않고 일손이 부족할 뿐이지만 지원을 얻어낼 수 있을 때 최대한 얻어내야지!
만력제가 또다시 수백만 냥의 은자를 하사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만력제가 하사한 물건은 상식을 초월한 물건이었다.
“지원이 오긴 왔다네. 석 달 뒤부터 육주성은 조선의 영토일세. 실질적으로는 지금 이 순간부터 조선의 영토가 되었지만 업무를 인수인계하려면 석 달은 걸리겠지.”
“육주성이 조선 영토가 되었다니 뭔 개가…… 아니, 개탄스러운 소리입니까?”
“지엄한 황명일세. 황상께서 무슨 뜻을 품으셨는지 모르지만 석 달 이내로 파견된 모든 병사들과 관리들을 철수시키고 조선에 육주성을 할양하라 하셨네.”
섭몽웅도 말이 안 되는 소리라 생각했는지 한숨을 내쉬더니 본래 보여주지 말아야 할 만력제의 칙서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미사여구를 다 제외하면 정말 석 달 이내에 조선에 육주성을 할양하라는 지엄한 황명이 적혀 있었다.
순간 몽둥이로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멍해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만력제의 무심한 명령에 대한 분노와 앞으로의 고난을 생각하니 히데요시에게 기습을 당했을 때보다 더욱 심각한 상황으로 여겨졌다.
“적도에게 침습당해 이렇게 엉망이 된 육주성을 아무 말도 없이 할양하다니…….”
“자네가 왜구의 준동을 물리친 공을 생각하여 나도 석 달 동안 최대한 많은 일을 해보겠네. 병사들을 수습하고 백성들을 돌려보낼 수 있도록 마을을 온존할 것이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육주성의 할양에 대한 소문을 퍼트리지 않게 노력해 주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려 조선에서도 감당하기 힘든 일입니다.”
전쟁에 휩쓸린 이십만 명에 달하는 난민이 생긴 데다가 남만인이 쳐들어온답시고 마을을 불태운 육주성을 당장 넘겨받으라고? 몇 년 정도 준비한 뒤 넘겨준다 하면 아주 감사한 일이지만 지금은 최악의 시기이다.
지금도 동맹국 백성이라면서 엉덩이를 뭉개고 있는 난민들인데 조선 백성이 되었다는 소문을 들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엉덩이를 뭉개는 것을 넘어서서 아예 이런 소리를 하겠지.
‘아니, 하주도 출신 사람들은 저렇게 잘 먹고 사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삽니까?’
제발 일 년이라도 할양을 미루거나 할양 사실을 알리지 말아야 한다. 호의가 넘치면 권리인 줄 아는 법인데 이놈들은 이미 권리를 행사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섭몽웅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애석한 일이지만 육주성의 백성들은 바보천치가 아니라네. 모든 병사들이 빠져나가고 관원들도 자취를 감춘다면 상황만 보아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겠지.”
“하다못해 미곡이라도 지원해 주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당장 남경에 있는 곡식을…….”
“남경의 곡식이라. 황상께서도 은자를 지원해 주시려다가 육주성의 한 해 조세 수익이 오십만 냥이 넘는다는 간언을 듣고는 육주성의 할양으로 못을 박으셨다더군.”
그 조세 수익이 온전히 중앙까지 올라온다는 전제하에 오십만 냥이 넘겠지!
결국 육주성이 망가진 김에 망가진 물건 수리하기 귀찮으니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수리해서 쓰라고 넘겨준 격이다.
아무리 값진 물건이라도 힘든 시기에 수리가 필요하다면 고난이나 마찬가지이다.
더 이상 이야기를 해봤자 지엄한 황명을 무를 방법도 없으니 감사 인사를 올리고 다자이후의 관아로 돌아가 관원들을 소집하였다.
“명국 황상의 칙서가 발부되었네. 조정에서도 소식을 보내올 것이지만 이제 육주성이 아국의 영토가 되었는데 가장 큰 문제인 미곡을 어떻게 해야겠나. 혹여나 조정의 환곡을 받아오면 해결할 수 있는 일이던가?”
“환곡을 받아와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지금 하주도에 파견된 병력은 도합 육만여 명에 달하며 보인 또한 육만여 명이 배정되었습니다. 애초에 보인들은 농군(農軍)이 아닙니까?”
“그래, 농사를 짓던 장정 육만여 명을 보냈으니 삼남 지방은 올해 흉년이나 마찬가지이지. 각자 한 결씩 농사를 짓는다고 가정해도 최소 백만 석의 미곡이 부족해지지.”
전쟁이 이래서 무서운 법이다.
병사를 속 시원하게 파견하면 뭘 하나? 전쟁을 하면 쌀이 나오지 않고 오히려 쌀이 두 배로 줄어든다!
십만 명의 병사를 다룬다 치면 십만 명의 보인이 필요하다, 농사를 지어서 적어도 25석의 쌀을 생산할 수 있는 장정들이 오로지 짐을 나르는데 노동력을 투자하면 이들의 생산량은 절반 이하로 줄어드는 격이다.
한숨을 쉬고 다시 물어보았다.
“결국 전후정리가 끝난 이후 농사를 시작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겠군. 난민들을 돌려보낸다 가정하면 곡식이 얼마나 부족하겠는가?”
“구주 일대의 모내기가 늦어지면 작황이 감소하겠지요. 벼가 껑충껑충 자라서 이삭이 적게 생기고 거름도 많이 주어야 합니다. 더군다나 잡초도 무성하게 자라지요.”
“만약 5월 초순에 모내기를 시작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작황이 얼마나 감소하는가?”
“최소 삼 할은 줄어들 겁니다. 그리고 5월 초순 모내기도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 지금 하주도로 몰려온 난민들이 돌아가서 자리를 잡고 농사 준비를 한다면 작황 손실이 오 할이 넘겠지요.”
뒷이야기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
겨우 내내 다음 해 농사 준비를 하다가 히데요시에게 쫓겨난 상황이라 아무리 빨라도 집으로 돌아가 두 달 넘게 시간을 들여 농사를 준비해야 한다는 말이다.
“결국 명국의 옛 땅인 육주성에서 기껏해야 앞가림을 할 정도의 작황을 거두는 게 전부이군.”
“그나마도 마을이 멀쩡하게 보존된 경우에 한해서 작황을 거둘 수 있습니다. 하지만 등원 등길랑(히데요시)이 진군하며 마을을 불태우고, 다시 진전창행(사나다 마사유키)이 간자를 잡는다며 마을을 불태우지 않았습니까.”
“이런 미친 상황을 어떻게 감당하라고!”
다 때려치우고 관찰사 임기가 끝났다고 징징거리며 조정에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간다면 업무를 저버리는 꼴이다.
머리를 벅벅 긁다가 우수수 떨어진 머리카락을 보니 진짜 미친 생각이 떠오르기는 했다.
“전라도 일대에서 부임한 왜인들의 후손들이 말하기를 간척지가 지나치게 넓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이 많다 하더군. 하주도의 백성들 가운데 십여만 명을 임시로 이주시키면 어떻겠는가?”
잠시 하주도 백성들을 전라도 일대로 보낸다. 드넓은 간척지를 경작하게 만들어 일이년 정도 곡식 생산량을 늘리고 하주도 땅은 육주성 백성들이 경작하게 만드는 것이다.
한 관원이 눈을 굴리다가 괜한 질문을 했다.
“관찰사 영감께 죄송한 말씀이지만 차라리 새로 백성이 된 육주성 사람들을 보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습니까?”
“저렇게 난폭한 이들을 간척지로 보낸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나? 혹여나 아국 사람들을 해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네.”
그나마 조선화가 많이 진행된 하주도 사람들이라면 큰 문제는 일으키지 않겠지. 정말 미친 짓인지라 다들 침을 삼키며 눈치를 보았다.
이건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조정에 문의라도 해봐야겠군.
#작가의 말
만력제는 조선에 비료를 주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3년간의 파업을 마치고 돌아오니 일할 생각이 없었지요.
그래서 비료의 원료인 똥을 무더기로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