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409화
2부 19장 9화 해상군신(2)
점점 더 거세지는 물살을 뚫고 천천히 나아가는 이순신의 판옥선에서 다시 깃발이 펄럭였다.
신호를 전달받은 후열의 선단이 조금 더 멀리 떨어지며 간격을 넓혔다.
전방에 단 세 척의 함선을 보내 적의 공격을 유도하며 차근차근 분쇄하여 적의 일제 돌격을 노린다.
하지만 압도적인 화력에 당한 적들은 살길을 찾아 느슨한 대열을 갖춘 후열을 돌파하려 하리라.
하지만 아무리 좋은 작전을 구상하여도 적이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도 화포에 두들겨 맞으며 나서지 않으니 이순신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스스로 사지로 진군하였으면서 믿는 수도 없었단 말인가? 적을 모른다 하여도 하늘을 알고 땅을 안다면 스스로를 보전할 수 있었을 것인데.”
“이대로 돌진할까요?”
“아니다. 후방의 함선을 조금 느슨하게 두어 놈들이 헛된 마음을 품게 만들어라. 내 함선을 격침시키지 못하더라도 물길을 따라 빠져나가면 살길이 열린다고 믿게 만들어라.”
적장이 얼마나 태만한지 이순신의 굳은 마음도 풀어지려 하였다.
하지만 이를 다잡고 들뜬 마음을 억누르며 이순신은 다시 전선을 보았다. 자신이라면 절대 저런 싸움을 벌이지 않으리라.
급변하는 전장에선 자신을 알고 상대를 알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늘을 알고 땅을 안다면 상대의 접근을 막고 자신의 퇴로를 확보할 수 있는 법이다.
설령 하늘도 땅도 자신이 모르는 장소이며 상대도 모르는 판국이라 하여도 온전히 정신을 잡고 수습하면 충분히 목숨을 보전할 수 있다 하였다.
하지만 상대는 자신이 몰고 다니는 배의 특성조차도 파악하지 못했다.
“이제 남은 길은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어서 오게나.”
모든 함선을 전방으로 배치하면 적들이 아예 수전을 포기하고 뭍으로 상륙하여 더 큰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자고로 적에게 숨구멍 하나를 틔워줘야 살길을 찾아 움직이는 법이다.
하지만 이순신의 생각을 거스르는 이가 있었다.
“저……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적들이 선회를 하여 그대로 도주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순신은 눈을 부라리며 얼마 전에 부임한 군관인 이영남을 노려보았지만 작년에 군문에 발을 들인 사람이니 차근차근 가르쳐 줘야 하리라.
이순신은 한 세키부네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그대로 도주한다 하였는가? 여기서 왜선이 선회할 방법이 없다네. 한두 척이라면 모르겠지만 저런 거대한 선단이 제멋대로 선회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다네.”
“네? 아국의 선박도 아닌 왜선에 대하여 어찌 아시는 겁니까?”
“왜인들은 잠재적인 적도(敵徒)이니 내 하주도의 왜인들을 고용하여 왜선 다섯 척을 사들여 알아보았다네. 왜선은 겉으로 보기에 이 판옥선과 닮아 보여도 상세가 완전히 다르지.”
조선의 함선인 한선(韓船)과 일본의 함선인 화선(和船)은 겉으로 보기에는 크기의 차이가 전부였지만 세부적으로 따지면 거의 다른 선박이나 마찬가지였다. 선체 형상은 둘째 치고 노의 형태가 완전히 달랐다.
격류 속에서 매끄럽게 선회할 수 있는 한선은 노의 각도가 매우 깊었다. 여러 명의 격꾼이 달라붙은 노는 수직에 가까운 각도로 바닷물을 밀어젖힌다.
이는 다른 선박처럼 배를 바로 밀어내지 않지만 각 노는 바닷물을 휘감으며 작은 와류(渦流)를 형성하였고 이는 우수한 선회력과 부족한 속도로 돌아온다.
하지만 일본에서 쓰이는 화선의 노는 45도에 가까운 얕은 각도였다. 속도야 빠르게 낼 수 있지만 자연스럽게 선회력이 부족해지니 선회반경이 커지기에 마련이었다.
이순신은 적진을 망원경으로 바라보며 말하였다.
“결국 적들이 관문 해협에 무턱대고 많은 함선을 집어넣은 순간부터 퇴로는 막힌 것이네. 설령 조함술이 뛰어난 군관이 지시하는 경우라면 내가 직접 분쇄하면 되겠지.”
첨저선인 세키부네는 이순신의 말대로 거대한 반경으로 선회하였다. 속도가 빠를수록 선회반경이 커지기 마련이며 화선에서 사용하는 노는 이 선회반경을 더욱 넓게 만들었다.
기껏해야 60척(일본 단위기준 약 18m)에 불과한 세키부네의 선회반경은 선체 길이의 10배가 넘을 수준이었다.
앞으로 나서는 함선과 어떻게든 노를 거꾸로 저으며 제자리에 머무는 함선에 급선회를 취한 함선까지 섞이니 이미 일본 수군은 자멸하기 시작했다.
* * *
어떻게든 전방으로 나아가 공간을 확보하고 선회하려던 세키부네 한 척이 이순신의 포화를 맞고 제멋대로 뒤흔들리며 조선 진영으로 밀려가자 일본 수군의 함선들은 통제에서 벗어나 자기 멋대로 움직였다.
“이 경로대로라면 노가 엮인다! 당장 배를 틀어!”
“이걸 어떻게 틉니까! 이대로 경로를 급변하다가는 침몰합니다!”
겁에 질려 억지로 역주하던 세키부네가 다른 세키부네와 충돌하여 노가 엮이며 갑판 위에 머물던 격꾼들이 자빠지고 사지가 꺾이며 중상을 입었다.
와키자카는 분통을 터트리며 이 몰골을 돌아보다 명령을 내렸다.
“이 머저리 새끼들아! 밥만 먹고 숨만 쉴 줄 알더냐! 전 함선! 적의 대장선을 노려 돌격하라!”
“전 함선! 돌격하라! 니혼마루가 최전선에 설 것이다!”
“이 미치…… 아니다! 살길을 찾으려면 그 방법 외에는 없지!”
본래 일본의 전쟁에서 장수는 전방에 나서는 일이 극히 드물다. 승기를 잡기 전까지는 후방에서 철저히 보호받으며 패색이 짙어질 경우 부하를 신가리(후위대)로 희생시켜 자신의 목숨만큼은 보전한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멋대로 퇴각하다 아예 싸우지도 못하고 자멸하리라.
와키자카는 다시 한번 도망친 구키를 원망하며 니혼마루를 돌격시켰다.
“으아아악 이런 니X럴!”
니혼마루의 돌격과 함께 삼십 척가량의 세키부네와 세 척의 아타케부네가 호응하였지만 니혼마루는 다시 정밀한 사격에 얻어맞아 뒤흔들렸다.
사방으로 솟아오르는 물기둥에 온몸이 홀딱 젖은 와키자카가 본 광경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희생이 크겠지만 포격을 뚫고 근접전까지 성공한다면 대여섯 척의 세키부네로도 남만인의 흑선(타르를 칠한 선박, 일반적으로 소형 갤리온)을 나포할 수 있다.
하지만 이순신의 대장선 위에서는 일방적인 학살이 시작되었다. 명장 아래 약졸은 없는 법이지만 이순신의 혹독한 훈련을 거친 병사들은 인간 흉기나 마찬가지였다.
사방으로 빙글빙글 돌며 화포를 쏘아대는 판옥선에 어떻게든 접근한 세키부네는 이순신 단 한 명을 죽이기 위해 갖은 힘을 다했다. 갈고리가 판옥선의 선체에 걸리고 왜병들 대여섯 명이 밧줄을 부여잡고 기어올랐다.
개중 많은 갈고리가 뽑혀 나가며 왜군들이 물속으로 빠졌지만 판옥선의 갑판으로 올라오는 데 성공한 병사도 있었다. 하지만 얼굴을 내밀기 무섭게 날아온 산탄에 얼굴이 쑥대밭이 되었다.
“나팔총은 두 정씩 준비하라 하였다! 쏜 나팔총을 곤봉 삼아 놈들의 골통을 부숴버려라! 화포는 자율 방포하라! 산더미보다 커다란 적선을 맞추지 못할 바보는 이 자리에 없으렷다!”
“후방의 두 선박으로 향하는 놈들 모두를 두들기고 있으니 염려 마십시오!”
이순신도 사방을 주시하며 작전을 하달함과 동시에 적장으로 보이는 자에게 화살을 날렸다.
무예가 다소 부족하여 필중(必中)은 아니었지만 훈영제식법으로 단련된 몸은 어중간한 갑주를 관통할 위력을 발휘하게 만들었다.
“적도가 배 위로 올라왔습니다!”
“당파(钂鈀)로 놈들을 밀어버려라! 화전이 선체에 닿지 않게 조심하여라!”
척계광의 저서인 기효신서에는 수많은 무기가 있었다. 어중간하게 긴 창인 당파는 적을 밀어내는 방법으로 쓰이지만 척계광은 이 당파에 화전(火箭)을 매달아 발사대로 사용한 뒤 적에게 돌진하라 하였다.
하지만 충분히 많은 근육은 무거운 병기를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당파에 매달린 신기전에 불을 붙인 조선군 병사는 도화선의 길이를 가늠하며 아예 밧줄을 잡고 올라오는 적을 향해 발사하였다.
“이 미친놈들이 창을 터트린다!”
밧줄을 잡고 기어 올라오던 왜병들이 신기전의 폭연에 휩쓸리며 다시 배 위로 내동댕이쳐졌다.
판옥선 특유의 두꺼운 판재, 적의 사격을 막기 위한 장치에 박힌 총알에 몸을 움찔거리던 군관은 사력을 다하여 비격진천뢰를 집어 던졌다.
“저건 또 뭐야! 조선 놈들이 쇳덩이를 내던진다!”
비격진천뢰가 선체 하부에서 격발되며 거대한 물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이순신의 함선에 탑승한 백병전 담당 선원은 마흔 명에, 각 화포에서 차출된 인원을 합쳐 육십 명에 불과하였지만 다섯 배에 달하는 왜군을 쉽사리 막아냈다.
“이런 씨부럴! 이 미친놈이 우리를 노리네! 우리는 격꾼이야 야! 인마!”
“그래 우리는 격꾼이지! 거기 몽둥이 가져와! 저 비실비실한 놈 팔모가지를 분질러야겠어!”
차선책으로 격꾼들이 머무는 갑판 아래를 공격해 기동력을 떨어트리려 하였지만 격꾼들 또한 악이 올라 있었다.
한 격꾼은 몽둥이를 들고 창문 틈새로 휘적거리는 일본도에 몽둥이를 내리쳤고 일본도는 청아한 소리를 내며 박살 났다.
“이 칼은 뭐 이리 약하지?”
“저놈들은 대체 뭘 먹었기에 힘이 이다지도 세더냐!”
부러진 일본도를 확인하는 일본 사무라이와 몽둥이에 잘려나간 칼날을 확인하는 격꾼은 여기가 전장이 아닌 듯 잠시 싸움을 멈추고 창문으로 눈빛을 교환하였지만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딜 빤히 쳐다보나! 이 망할 놈이!”
격꾼에게 목이 잡힌 왜장이 컥컥거리며 손을 풀려 하였지만 지난 삼 년 동안 이순신 아래에서 훈련받은 격꾼의 완력은 어지간한 입신체비사의 완력과 흡사하였다. 나름 힘이 센 자여서 격꾼의 팔이 뒤틀렸지만 완력 차이가 두 배는 넘었다.
거친 손길에 끌려간 사무라이는 판옥선의 선체에 거세게 얼굴을 부딪쳐 코피를 터트리며 실신하였고 격꾼은 대수롭지 않게 손을 풀었다.
판자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며 저 아래에서 병사들의 탄식이 들려왔다.
“게야무라 님이 돌아가셨다! 적장에게 사로잡혀 목이 꺾이셨다!”
저 아래에서 들리는 고함을 들은 격꾼은 대수롭지 않게 돌아와 지시를 받으려 하였다.
옆에 있던 격꾼은 어느 정도 일본말을 아는지 귀를 쫑긋거리다 군관에게 보고를 올렸다.
“이 친구가 왜장을 죽인 것 같습니다?”
“왜장이라 하였는가? 여하튼 왜인 하나를 죽였으니 이에 대한 포상은 충분히 하겠네.”
한 왜병이 격꾼에게 죽었다. 게야무라 로쿠스케의 죽음을 열한 글자로 축약한 군관은 한숨을 쉬며 창문을 판자로 틀어막았다.
아마 이번 일을 보고하면 대응을 태만히 한 죄로 공좌를 잔뜩 당하겠지만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몸이다.
이순신의 함선을 격침하려던 세키부네는 다시 이억기와 이운룡의 함선으로 경로를 변경했지만 세 함선에 포위당한 형상이니 집중사격을 얻어맞고 반송장 몰골이 되어 억지로 두 함선에 백병전을 시도하였다.
이순신은 주변의 적이 자취를 감췄으나 여전히 거대한 대장선이 남아있음을 확인하고 눈길을 돌렸다.
지금이야 대장선이 전열에 있으니 놈들이 살길을 찾아 밀려오지 않지만 저 대장선만 격파한다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리라.
“적장이 머무는 대장선이 이미 침묵하여 움직이지 않으니 돌진하여 충파(衝破)로 뒤흔들고 백병전을 실시할 것이다! 전원 등선을 준비하고 적의 대장선을 향해 침로를 변경하라!”
자세히 보니 형편없는 선박이었다. 판옥선처럼 장대(將臺)를 만들어 장수가 머물게 한다면 모를까. 선체 위에 튼튼한 기와를 올린 집을 지어두었으니 선체를 부딪쳐 거세게 흔들면 기와가 무너져 곤경을 겪으리라.
본래 같은 규모의 함선에 충파를 실시하면 자신의 함선도 타격을 입으니 사장된 전술이다. 또한 판옥선에는 충파를 위한 충각도 따로 마련하지 않았다.
“충파라 하셨습니까? 하지만 충각이 없으니 충파를 하여도 적선이 단번에 무너지진 않을겁니다. 또한 전력으로 충파를 행하면 이 함선이 뒤틀릴 겁니다!”
“적선을 무너트리려는 계책이 아니다. 중간 정도의 속력으로 충파를 실시하면 적선을 뒤흔들어 기와를 떨구고 집을 무너트리면 백병전을 벌이기 좋겠지.”
수리는 필요하겠지만 이 배는 대장선도 아니고 수십 척의 함선 중 한 척일 뿐이다. 기껏해야 판재를 좀 갈아 끼우면 충분하리라.
이순신의 함선이 접근하자 와키자카는 자신이 당할 때가 되었음을 직감하고 눈을 질끈 감으며 명령을 내렸다.
니혼마루는 나름 대장선인지라 10여 문의 화포를 장착하고 있었으니 최소한 적의 돌격을 저지할 수 있으리라.
“놈이 돌격한다! 대장을 죽이면 모든 전투가 끝나니 화포를 때려 부어라!”
거세게 뒤흔들리는 배에서 어떠한 계획도 없이 발사한 화포가 명중할 리가 없었다.
이순신의 배에서 일백 보(일본 거리, 120m)나 떨어진 물기둥을 보고 분통이 치밀어 오른 와키자카지만 자신이 악수를 두었음을 깨달았다.
“아…… 맞아, 이러면 더 가까워지잖아?”
거대한 아타케부네가 선회하며 이순신의 배로 더욱 접근했고 선체의 연약한 측면을 드러내는 꼴이 되었다. 서둘러 사태를 수습하려 하여도 오히려 물살에 떠밀려 선체 후방을 드러낼 수준이었다.
굉음이 울리며 이순신의 판옥선이 니혼마루의 측면을 파고들었다.
모든 목재를 튼튼한 참나무로 만든 판옥선은 본래 역사보다 내구성이 더욱 뛰어났고 삼나무 판재로 만든 아타케부네는 거세게 뒤흔들리며 상부의 누각이 무너져 내렸다.
“진입하라! 신기전을 쏘고 비격뢰를 던져라! 적장을 가급적 추포하라!”
날아온 조총 탄환은 거의 없었다.
상상조차 하지 못한 충파 전술로 인해 조총수가 바닥에 자빠져서 화약과 탄환이 흩뿌려진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이 화약은 다른 폭발을 만나며 더욱 큰 혼란을 야기하였다.
다케다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니혼마루는 이순신의 판옥선에서 쏟아진 병사들에게 유린당하였다.
사방에서 폭연과 불길이 치솟는 가운데 한 왜장은 무기를 걷어내며 결사 항전을 제창하였다.
“도망치지 마라! 우리가 신가리가 되어 와키자카 님이 도주할 시간을 벌어라!”
“놈들을 닥치는 대로 죽여라! 왜장은 갑주가 튼튼하니 쉽사리 죽지 않는다! 왜장을 찾아라!”
왜군을 도륙하며 이 잡듯 선체를 헤집은 이순신의 병사들이었지만 와키자카는 어디에도 없었다.
임해도감 출신의 장교는 바닥에 피와 먼지가 섞인 침을 내뱉으며 누각의 잔해를 거세게 걷어차고 돌아와 보고를 올렸다.
“왜장이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적도들이 결사 항전을 벌이고 있었으니 아마 나룻배를 타고 다른 적선으로 도주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는 제 불찰입니다.”
“아쉬운 일은 아니라네. 다른 적선으로 도주하였다고? 모든 적선을 궤멸시키면 왜장을 추포할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겠는가.”
이미 수십 척의 함선을 포격으로 격침하였으며 다시 십수 척의 함선을 백병전으로 몰살시키고, 마침내 니혼마루를 격침하고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이순신의 함선을 확인한 왜병들은 퇴각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전력을 다해 적진을 뚫고 도주하려 하였다.
“신호를 보내고 가게 내버려 두어라. 이 수사에게 합류하여 적들의 후방을 틀어막는다.”
신호용 대신기전이 솟구치며 후방에 신호를 보냈고 느슨한 대열의 일자진을 형성하던 27척의 선박은 앞으로 나아가며 적을 포위하기 위한 조밀한 학익진으로 돌변하였다.
일제사격 한 번마다 수십 개의 물기둥이 솟구치고 왜선들이 격침당했다. 지금까지 단 3척의 화력을 받아내던 왜선들은 27척의 함선이 만든 학익진에 철저히 분쇄되었다.
여기에 후방에서 병사들을 다스리던 최호가 합류하였다.
80척가량의 적선이 이순신이 형성한 학익진을 돌파하였지만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왜인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거함, 순주선이었다.
경상수영도 후방에 대기하며 일제 포화를 쏟았고 가까스로 포위망을 빠져나간 배는 서른 척에 불과하였다.
“참으로 훌륭한 일이군! 본래 생각대로라면 나포한 적의 대장선에 올라 흑룡세를 취하려 하였건만 아쉬운 일일세. 대신 최 수사의 기함과 함께 흑룡세를 실시한다!”
적을 온전히 짓밟은 승리를 기념하려 하였지만 니혼마루는 충파와 포격에 손상을 입고 천천히 물 아래로 가라앉았고 이 거대한 함선의 잔해에 선체를 손상시키지 않으려 학익진이 열렸다.
전라수영의 학익진과 경상수영의 일자진을 통과한 니혼마루의 선체가 마침내 가라앉았고 이순신은 니혼마루에서 튀어나온 생존자들이 있음을 확인하고 수염을 쓰다듬었다.
“저들을 구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긴 배 구석구석에 숨어 있던 비겁한 자이니 구할 필요도 없으며, 설령 구해내려 하여도 병사들이 지치고 유속이 지나치게 빠르니 문제로군.”
“저놈들 살길은 있습니까? 이대로 흘러가면 오도열도(고토열도)까지 흘러갈 텐데요.”
“오도열도에 당도하면 다행이라네. 거길 지나치면 탐라까지 내려갈 것이요, 자칫 잘못하면 유구나 남경까지 떠밀려 갈 신세지.”
적장을 잡지 못해 아쉽지만 승리는 승리이다. 경상수영과 전라수영 양 수영은 앞으로 차근차근 오우치가 형성한 해협의 망루를 걷어내는 것 하나이다.
이순신은 최호와 손을 맞잡고 앞으로의 일정을 논의하였다.
“앞으로 사흘, 늦어도 나흘 안에 망루를 모조리 걷어내고 재차 적을 분쇄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적을 모조리 격멸할 수 있겠지요.”
“옳은 말이네. 적도가 당장 도주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독 안에든 쥐 신세야!”
석양이 내려앉으며 양 수영의 병사들은 승리를 치하하러 하카타로 돌아가 하루를 푹 쉬었다.
한편 니혼마루의 파편을 부여잡은 이가 있었으니 전투에서 실종된 와키자카 야스하루였다.
“대체 어디에 계셨다 지금 나타나셨습니까! 왜 전투가 한창일 때 나서지 않았습니까!”
“야 이 망할 새끼야! 누각이 무너져서 기왓장에 깔린 바람에 죽다 살아났다!”
격꾼과 병사 그리고 장수인 와키자카를 비롯해 십여 명 남짓한 니혼마루의 생존자들은 하나같이 널판을 부여잡고 발을 놀렸다.
조선 수군이 들끓는 일대에서 살아남으려면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을 찾아가야 하리라.
#작가의 말
미역의 미역일대기는 미역같이 기다랗게 쓰겠습니다.
미역을 잘게 잘라 먹듯이 시간흐름에 맞추어 권말부록 형식으로 조금씩 쓰도록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