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406화
2부 19장 6화 붕괴(1)
큐슈의 겨울이 따스하다 해도 결국 영상 5도에 근접한 추위이다.
괜히 옷을 훌떡 벗고 흑룡세를 취한 덕분에 콧물이 올라와 서둘러 웃옷을 챙겨 입고 따스한 차에 제대로 된 식사를 먹으려 하였지만 제대로 된 식사가 없었다.
“어휴, 등하 등길랑(히데요시) 저놈의 책략 때문에 비상식량을 까먹는 신세라니.”
히데요시가 보낸 난민 폭탄 때문에 일손도 식량도 모두 부족하다.
어쩔 수 없이 비상사태를 대비해 잔뜩 구워둔 건면포, 좀 커다랗고 더 딱딱한 건빵과 대나무 통 안에 보관한 비상식량이 식사로 나왔다.
“참으로 사특한 자입니다. 만약 아국에서 원병을 보내는 데 두 달이 걸린다면 꼼짝없이 굶주림에 시달리지 않았겠습니까.”
“두 달이 걸린다면 이 성채는 진작 뚫렸을 것일세.”
다른 관원들은 그럴 리가 없다면서 고개를 저으며 코웃음을 쳤지만 나는 지금까지 히데요시가 취한 수를 냉정하게 분석해 결론을 내리고, 아직도 웃는 관원들에게 냉정하게 답했다.
“만약 한 달만 시간이 더 있다면 실패한 토굴을 같은 장소에 두 번 더 파내 해자는 물론이요, 더욱 깊이 파고들어 해자를 넘어 아예 성 자체를 무너트릴 정도로 만들었을 걸세.”
“하지만 한 달의 시간이 없지 않습니까. 조만간 경상수영의 최 수사께서 박다(하카타)로 내려올 것이며, 며칠 뒤에는 전라수영의 이 수사께서 장기(나가사키)에 상륙할 것입니다.”
조만간도 아니다. 아마 내일쯤이면 최호가 이끄는 경상수영의 전력이 오우치를 믿고 까부는 일본 수군을 격멸하여 제해권을 되찾으리라.
더군다나 지금은 2월 17일이다. 여드레 뒤인 2월 25일이면 경상도 일대에서 소집된 2만의 병력에 미리 충청도까지 내려와 대기하던 최정예 의흥위 병력까지 5만 명이 내려온다.
다들 승리를 생각하고 있으니 여기서는 조금 기세를 북돋워 줘야겠다.
“박 수사가 구원병이 당도할 때까지 적도들을 몰아냄은 물론이요, 놈들의 내해로 향하는 길목인 관문 해협을 장악할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된다면 놈들의 퇴로도 막을 수 있을 걸세.”
“그건 조금 힘들 겁니다. 간몬 해협에는 오우치가 미리 망루와 포대를 만들어두었고 조선이 이를 더욱 강화하라 지시하지 않았습니까. 여기에 무라카미 수군이 힘을 보탤 겁니다.”
지금까지 일본 장수들이 가지고 있던 가몬(紋章: 가문을 나타낸 문장)을 분석하고 이들의 면모에 대해 조언을 보내던 아케치 미츠히데가 괜한 소리를 하였다.
하지만 놈도 일본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되물어 봐야지.
“간몬 해협이 그렇게나 험지인가?”
“물론입니다. 물살이 하루 두 번이나 격하게 변하고 험하여 어선조차도 사고가 빗발치는 장소입니다. 조선이야 물길이 약할 때를 택해 움직이지만 그런 곳에 수십 개의 망루에 수백 척의 적선이 더해졌으니 조선의 함대도 꽤 많은 피해를 입을 겁니다.”
어쩔 수 없군.
하지만 이순신이 놈들이 점령한 육주성의 성도인 웅본, 구마모토를 함락하여 허리를 끊고 최호가 제해권을 장악하여 배신한 오우치를 육로로 밀어낸다면 이 전쟁은 완벽한 승리이다. 물론 후유증은 어마어마하겠지만.
“솔직히 말해 며칠 뒤에 벌어질 전면전은 별걱정이 안 되는데 앞으로의 일이 더 걱정되는구려. 이 사람들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
히데요시 미친놈이 마을을 불태우고 장정들을 잡아간 덕분에 본영 인근에 12만이 넘는 피난민이 있다.
이들이 머무는 장소가 어디냐고? 겨울 농사를 짓던 논밭이다.
비축해둔 식량도 날아가고 겨울 농사도 수포로 돌아갔다. 이들은 왜인이지만 자신들을 명나라의 육주성에 속한 백성들이라 우겨대서 함부로 쫓아낼 수도 없다.
삼 년째 칩거한 만력제가 이들을 몰아내라고 명령서를 보낼 리도 없지 않은가.
“최악의 상황은 만력제가 구주(큐슈)를 아예 조선 영토로 양도하는 건데.”
“큐슈를 조선 영토로 양도한다니요? 자신의 강역을 포기하고 번국에게 하사하는 황제라니 그 황제는 명국의 천자입니까 고려의 천자입니까?”
만약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다가올 결과에 소름이 돋는다.
전국시대의 폭력과 혼란에 길든 팔십만의 육주성 백성을 다스리라고? 이미 전쟁에 휩쓸려 조선 영토인 하주도로 몰려올 게 분명한데? 설마 아니겠지?
지금은 전쟁에 집중할 때이다. 놈들이 후방부터 소란을 피우며 뭔 꿍꿍이를 벌이니 내일쯤이면 전면 공세에 나서리라.
* * *
아니나 다를까 내 예상이 적중하였다. 사실 예상이라 할 것도 없고 전면전을 치르기 전에는 사기를 끌어올리려고 배불리 먹고 마시며 병장기를 점검하는 법이다.
“놈들이 보인은 물론이요, 병력의 육 할 이상을 동원하였습니다!”
“미리 훈련한 대로 응하면 십만 대군도 능히 막아낼 수 있는 성이다. 애초에 이 성에 십만 대군이 달라붙어 봐야 효과가 없겠지만.”
지금까지 요새의 화포 가운데 화력을 쏟아낸 녀석은 여섯 문의 천용포, 마흔 문의 천자총통이 전부이다.
아직 예순 문의 현자총통과 백여 문의 황자총통 그리고 이천 정이 넘는 보총 계열은 침묵하고 있다.
히데요시가 지금까지 전면 공세를 취하지 않았고 나도 모든 화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녀석은 지금까지 우리가 보여준 화력을 바탕으로 손실을 계산한 것이 분명하다.
지금까지 수성전에 특화된 충무위 병사들 가운데 화포를 제대로 쏜 병사는 4할에 불과하다. 운총수를 비롯한 대인화기나 소구경 화기들은 아직도 불을 뿜은 적이 없다.
“놈들이 진격합니다! 사 만에 달하는 정병 가운데 절반 이상이 전선을 향해 몰려오고 있습니다! 명나라 포로들이 화포를 쏠 준비를 마쳤습니다!”
“아직 대기하라! 놈들이 유효 사거리로 들어오기 전에는 천용포만 쏘며 대응하라! 명나라의 화포는 철저히 무시하라!”
네 배에 달하는 적이 몰려와 벌판이 빼곡하게 메워질 지경이지만 다들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응하였다.
다들 이 요새의 방어력을 알고 있으니 사기가 오히려 솟구치고 있다.
적에게 피해를 입히고 싶을 때는 모든 힘을 드러내지 않는 법이다.
적이 우리의 화력을 얕잡아 보게 만들어 적이 함정으로 깊숙이 들어온 순간에 최대한의 화력을 쏟아내는 법이다.
“어디선가 들은 말인데 적당히 놀아주다 세게 때려준다는 말이 있었지.”
“놈들이 인근에서 수레를 징발하여 수레와 목책을 결합한 물건을 만들었습니다!”
“머리가 없지는 않군. 아마 수레 뒤에는 죽속(竹束: 타케타바)이라 하여 큰 대나무를 엮어 만든 다발을 두었을 걸세. 그럼 뭘 하나! 현자총통을 준비하라!”
망원경으로 확인하니 제법 큰 수레 앞에 해자를 넘을 뗏목을 목책 대용으로 엮어두고 왜병 십여 명이 소처럼 달라붙어 밀고 있다. 이런 물건이 삼백 개는 넘는다.
전략적으로는 쓸 만한 수다. 거대한 엄폐물을 밀고 오니 화포가 발달하지 않은 일본 기준으로는 저걸 뚫을 방법이 없겠지.
하지만 한 병사는 괜히 멍청한 소리를 중얼거렸다.
“왜 열 명이 넘게 달라붙어서 밀지? 다섯 명이면 충분할 텐데? 저놈들 왜 저리 힘이 약해?”
조선군의 최정예인 오위 기준으로 생각하니 그런 소리가 나오지!
생각해 보니 오위 출신 병사들이 여기를 공략한다고 가정하면 제법 위험하다. 하지만 놈들은 오위가 아닌 왜병이다.
이런 말을 하면서도 충무위 병사들은 지금까지 침묵하였던 현자총통, 본래 역사의 천자총통을 장전하기 시작했다.
내 명령을 이해한 무관들은 상세한 지시를 하달했다.
“놈들이 끌고 다니는 물건을 나무뭉치라 생각해라! 현자총통에 수철연의환 대신 목재를 짓이길 수 있는 장군전을 준비해라! 바닥에 말뚝처럼 박혀 놈들의 경로를 뒤틀어 버려라!”
“잘만 하면 열 놈이 한 번에 죽겠군요! 아예 천자총통으로 쏘면 아니 되겠습니까?”
“천자총통?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면 뭘 하겠나!”
말이 천자총통이지 화포 구경이 두 번이나 커져서 서양 기준으로 컬버린으로 분류하고 명나라 기준으로 홍이포라 분류하는 화포를 사람에게 쏘려 하다니 대퇴근이 웅장해진다.
하지만 지금 쏘는 현자총통도 본래 역사에서는 이순신도 많이 쏠 수 없어서 아껴 사용한 천자총통이다. 화력에 미친 조선인지라 역사가 변하면서 대인용 화포로 쓰이고 있어서 문제지.
예순 문의 현자총통이 사방에서 몰려오는 왜병들을 향해 대장군전, 아니, 크기가 작아서 이름이 장군전으로 변한 발사체를 뿜어댔다.
놈들도 필사적으로 달려와서 명중률은 낮았지만 명중률은 더 많은 사격으로 메꿀 수 있는 법이다.
“장군전을 지정한 장소에 먼저 쏘아라! 아예 바닥에 말뚝을 박아 놈들의 진로를 막아버려라! 현자총통은 작은 화포라 화약 두 근도 사용하지 않는다! 계속 쏘아라!”
“화망을 형성하라! 놈들이 요새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양면으로 좁혀가며 타격하라!”
본래 역사에서 적의 함선을 타격하는 데 쓰였을 천자총통에서 발사한 대장군전은 훨씬 작은 목표물인 뗏목과 대나무 방패를 산산조각으로 분해시켰다.
거대한 대장군전이 쑤셔박힌 뗏목 겸 수레는 앞에 세워둔 통나무가 관통당하고 대나무 뭉치가 터져나가며 산탄처럼 주변을 찢어버렸다. 더군다나 빗나간 장군전은 말뚝처럼 바닥에 쑤셔 박힌다.
길이 막힌 수레의 물결은 차츰 안전한 장소를, 단번에 수레를 터트리는 거대한 화살이 날아오지 않는 요새 중앙부로 몰려왔지만 이 또한 미리 계획한 죽음의 도가니이다.
지금 왜군은 성형요새의 ‘V’ 자 골짜기로 들어와 측면을 드러낸 형태이다. 현대에서 게임을 하던 조카도 ‘양각!’인지 뭔지를 당할 때마다 괴성을 질러댔는데 일본군 전체가 이 양각 속으로 빨려드는 격이다.
“황자총통에 포도탄을 잔뜩 넣어 쏘아라!”
드디어 백여 문에 달하는 황자총통의 사격이 시작되었다. 닭 잡는 데 닭 잡는 칼을 쓰면 충분한데 황자총통은 작은 구경이지만 연사속도가 빠르고 대인용으로 위력이 부족함이 없다.
왜병들은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 수레 뒤에 실린 대나무 덩어리를 부여잡고 사방을 막았지만 황자총통에서 발사되는 포도탄을 맞고 자빠지는 이들이 생겨났다.
“놈들이 해자에 닿았습니다! 보총을 들고 쏘아대려 합니다!”
“염려하지 말고 마음대로 쏘아라! 보총수 사격 개시!”
보총 특유의 콩 볶는 소리가 들리며 서로 사격을 주고받았지만 전열에서 보총 사격을 실시하는 병사들은 일방적으로 화력을 쏟아내며 적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간혹 머리에 조총 탄환을 맞은 병사는 투구를 감싸 쥐고 뒤로 자빠진 다음 다시 보총을 장전하여 사격을 이어갔고 운 없는 병사들은 손이나 팔이 조총에 꿰뚫려 후방으로 이송되었다.
하지만 왜병 열 명이 죽어 나갈 때 충무위 병사는 한 명이 부상을 입는다. 한 병사는 조총 탄환이 스치고 가 흠집이 남은 투구를 고쳐 쓰고는 괜히 사람을 띄워주었다.
“관찰사님께서 만드신 요새는 참으로 대단합니다! 놈들은 언덕 위를 쏘느라 몸을 훤히 드러내는데 우리는 머리통만 드러내 놓고 쏘면 되는군요!”
“계속 쏴라! 나는 벌써 두 놈을 죽였다고! 그리고 뗏목이야 좀 보내도 괜찮아!”
놈들의 계획은 서로 사격을 주고받으며 뗏목을 여러 개 띄운 뒤 엮어 부교(浮橋)를 만드는 것이다.
해자를 넘고 성형요새의 둔덕을 뛰어올라서 백병전을 시도하려는 거다. 히데요시가 생각이 없지는 않았지만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뗏목 대여섯 개를 물 위에 올린 대가로 벌써 왜병 오백 명 이상이 시체가 되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이런 노래를 들은 적이 있는데 놈들은 전우의 시체를 넘어도 앞으로 가지 못 한다.
“왜 뗏목을 못 움직이는데! 제발! 좀! 부교만 만들면 놈들을 베어 죽일 수 있다고!”
“안 움직인다고! 움직여! 움직이란 말이다! 이게 뭔 일이야! 뗏목이 왜 으아악!”
“아래에 나무 말뚝이 있다! 나무 말뚝이 뗏목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다고!”
왜병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물장구를 치고 뗏목을 밀려 했지만 밀리지 않았다. 이 해자는 폭이 30보(48m), 깊이가 10자(3.4m)에 달한다. 여기에 미리 진흙을 깔아둬 걸쭉한 진흙탕이 되었으며 한 가지 수를 더 써뒀다.
“해자 안에 울타리를 왜 엮어두나 하셨는데 관찰사님께서 다 생각하신 바가 있군요.”
“자고로 예산과 시일이 충분하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법이네. 적들이 뗏목을 마음대로 움직이고 싶다면 물속으로 잠수해 튼튼한 나무울타리를 베어내야겠지.”
부교를 만들려면 사방에서 띄운 뗏목을 움직여 결합해야 한다.
그런데 이 걸쭉한 진흙 속에 튼튼한 나무를 엮어 울타리를 만들었다면? 뗏목이 울타리에 걸려서 움직일 수 없다.
그렇다고 이 왜병들이 톱을 준비해 왔겠는가? 결국 잠수해서 팔뚝만 한 나무기둥을 칼로 수십 번 내리쳐서 썰어내거나 진흙 속에 박힌 거대한 목재를 뽑아내야 한다. 당연히 뭘 해도 사람이 죽어 나간다.
“우리였다면 몇 명만 있어도 울타리 위로 뗏목을 들어 올렸는데 저놈들은 열 명이 달라붙는군. 역시 몸이 약하면 머리가 고생이라니까.”
그래도 명령이 하달되었는지 몇몇 왜병들이 밧줄을 엮어 뗏목을 뭍에서 들어 올리고 물속에서 밀어 올리며 어떻게든 부교를 만들려 애썼다.
하지만 충무위 병사들은 내 지시가 하달되기도 전에 바로 대응에 나섰다.
대완구에서 가볍게 발사된 비격진천뢰 몇 발이 떨어졌고 부교에 명중한 물건은 없었지만 해자 속으로 가라앉았다.
단단히 밀폐된 녀석인지라 물속으로 가라앉아도 폭발했고 해자에서 거대한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물속에서 비격진천뢰를 터트리면 효과가 없지 않나? 파편이 퍼져나가지 않는 법인데?”
“개천에서 물고기를 잡을 적에 커다란 돌을 다른 돌 위에 내리찍어 기절시키는 방법이 있지 않습니까? 폭발한 충격이 사방으로 퍼지며 내장을 터트렸을 겁니다.”
충무위 군관이 자랑스럽게 말하니 이해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 와서 어린 시절 천렵을 했을 때 저런 방법이 있긴 했지.
잠수해서 울타리를 잘라내고 뗏목을 들어 올리려던 왜병들은 충격파에 내장이 다 터졌는지 죄다 둥둥 떠올라서 움직이지 않았다.
“우욱!”
내 뒤를 보니 일방적인 학살을 본 아케치가 바닥에 아침에 먹은 식사를 게워냈지만 나는 전장으로 눈을 돌리고 속을 가다듬었다. 내가 없었다면 히데요시는 큐슈를 정벌하고 조선으로 쳐들어왔을 거다.
아마 지금 죽어 나간 왜병의 몇 배나 되는 조선군과 조선 백성들이 죽어 나갔겠지.
이렇게 생각하니 놈들이 흩뿌리는 피와 시체는 오히려 내가 일궈낸 작품이나 마찬가지다.
“계속 몰아쳐라! 놈들이 부교를 만들기 직전까지 그대로 뒀다 비격진천뢰를 떨궈라!”
“관찰사님! 겹성에 머무는 병사들이 적도의 후방을 유린하고 있습니다!”
저 멀리 후방을 망원경으로 보니 겹성에서 내려온 신립의 기병대가 후방의 틈을 짓쳐들어왔다.
지나친 공격성으로 몇 번이나 주의를 받은 신립은 놈들의 병사들과 전면전을 치르지 않고 있다.
“신 호군이 잘하고 있군! 무재(武才)야 대단하다 칭찬받은 자이니 당연한 일일세!”
신립이 판단 착오로 조금의 피해를 입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기병 일백여 기를 날렸을 뿐이다.
본래 역사처럼 ‘탄금대’ 하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디인가. 더군다나 적장이 히데요시였으니 살아 돌아온 게 다행이지.
희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사방을 유린하던 신립의 기병대는 어느 장소를 빙빙 돌며 집중 타격하였고 아마 불화살로 보이는 물건을 쏟아 부으며 기세를 올렸다.
그리고 신립이 타격한 장소를 확실히 알 신호가 들려왔다.
-투쾅!
“적도의 화약고를 터트렸다! 신 호군이 놈들의 군량과 화약을 일소하였다!”
아마 신각이 적의 진영을 염탐하여 화약고의 위치를 알아내고 판단력이 좋은 황진이 신립을 보조한 결과물이겠지.
적진에서 솟아오르는 폭연을 확인한 우리 병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사격에 열을 가했고 결국 왜병들의 사기는 완전히 붕괴하였다.
“이게 뭐야! 뭐냐고! 어서 도망쳐! 조선 놈들이 우리를 다 죽이러 온다!”
“후방! 누가 좀 후방을 사수하라고! 신가리(후위대)는 어디에 있나!”
그나마 후위대가 어떻게든 대나무 뭉치를 들고 버티며 동료들을 퇴각시키려 하였지만 놈들의 머리 위로는 비격진천뢰가 떨어지고 천자총통마저 적의 밀집지대로 포도탄을 쏟아댔다.
해가 저물고 병사들이 장계를 올렸다. 히데요시가 말하길 10만 대군, 조선 기준으로 4만의 정병과 4만의 보인은 이번 전투 한 번으로 최소 1만5천 명이 목숨을 잃거나 중상을 입었다.
“보고 올립니다. 충무위 장졸 가운데 일백오 명 전사, 칠십육 명 중상, 삼백사십 명 경상입니다. 화포 대다수를 온존하였습니다!”
이제 히데요시에게 남은 길은 한 번 더 공격하거나 아예 퇴각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과연 놈이 뭘 택할까? 보급을 믿고 한 번 더 들어오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