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405화
2부 19장 5화 통곡의 벽(2)
히데요시의 본영은 그리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공성전은 공격자가 도저히 수를 쓰지 못해 전면 공세를 취하면 심각한 피해를 입지만 다른 수단을 동원하면 피해가 적게 마련이다.
“지금까지 구백여 명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해자도 토굴도 모조리 분쇄된 터라 다들 사기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차라리 장기전을 택하는 게 나을 겁니다.”
“조선이 바보인가? 오우치가 아무리 조선의 진격을 막고 놈들이 전쟁 소식을 늦게 알았다 하여도 삼월쯤에는 원군이 당도할 걸세. 그러하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몰살 외엔 없어.”
조선군의 훈련 수준을 감안하면 아마 20일 뒤인 2월 27일 정도에 원군이 육지로 도착하여 오우치가 틀어막은 간몬 해협을 뚫으리라.
히데요시는 생각을 잠시 정리하고 답했다.
“이 요새를 뚫는 것으로 전쟁이 끝나지 않아서 문제지. 아무리 상륙 저지가 쉽다 하여도 최소 오만 명에 달하는 조선군이 하카타 일대로 들어올 텐데 이를 막는 것도 감안해야지.”
“그러하면 지금 있는 팔만 대군 가운데 최소 절반 이상을 온존시켜야 하겠군요. 차라리 남쪽과 북쪽에 있는 성에 일만 정도의 병력을 보내 적의 시선을 돌려보면 어떻겠습니까?”
“평범한 장수라면 성동격서에 당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상대는 수성에 일가견이 있는 자이니 성동격서는 필요 없다네. 많은 병력을 앞세워 확실한 타격을 입혀야지.”
충분한 타격을 입혀 별동대를 움직이지 못하게 상대를 압박한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수가 제대로 효과를 발휘할 때까지 기다리면 승산이 있으리라.
히데요시는 양 산성을 보더니 2군 사령관 구로다에게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다.
“남쪽에 있는 성은 문구(紊具: 어지러움을 갖추다)성이니 뱅뱅 꼬이기라도 하였나? 그리고 북쪽에 있는 성은 겹(裌: 겹으로 된 옷)성이라 불린다고?”
“간자가 보고하길 본래 북쪽에 있는 성은 삼겹살(三裌殺: 세 겹으로 죽이다)성이라 불렸는데 유성룡이라는 자가 번잡하다고 겹성으로 줄여 부르라 하였습니다.”
“성의 상세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잘 알면 좋았겠는데 간자를 많이 보낼 수 없었으니 방법이 있나. 일단 삼겹살성은 후루타 자네가 담당하게!”
이미 붕괴한 3군 보병을 인솔하던 후루타 오리베(古田織部)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히데요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가 황진에게 당하지 않은 이유는 전장에 나선 적이 없어서다.
“후지와라 님, 저는 어디까지나 다인(茶人)으로 사에구사 님을 보좌하기 위하여 왔을 뿐입니다. 그런데 제가 군을 담당하라니 말이나 됩니까?”
“두 눈이 있고 입이 있으며 손과 발 모두가 달려 있지 않은가. 내가 빼어난 장수인 가토 기요마사를 붙여줄 것이니 군을 인솔하기만 하게. 그리고 구로다 자네가 아예 2군을 통솔하여 문구성을 공략하게.”
적이 함부로 증원을 보내지 못하게 자신은 계속 화포를 쏘고 무의미하게 해자를 파는 척 병사를 희생시켜야 하리라.
하지만 두 성 가운데 하나만 함락하여도, 아니, 함락하지 못하고 타격을 입혀도 충분하다.
다음 날이 되자마자 양 산성을 공략하기 위해 나선 별동대는 난관에 봉착하였다.
당대에 둘째가라면 서러울 지략가인 구로다는 멀리서 문구성을 확인하고는 한참을 확인하더니 황당하다는 듯 말하였다.
“저게 왜 문구성이지? 그냥 평범한 성인데.”
적의 화포가 닿지 않는 먼 거리에서 살펴보아도 평범한 성이다. 두 겹으로 만든 성문은 4개요, 성벽은 산세를 따라 올라가기 힘들게 축조하였지만 높이는 고작 여섯 보(일본 길이기준 7.2m)에 불과하다.
하지만 불쾌하게 속이 뒤틀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수많은 성을 공략하고 함락시키며 때로는 성을 축조하는 데 도움을 준 사람으로서 무언가 이상한 점이 느껴졌다.
구로다는 자신을 따라온 아들 나가마사(長政)를 보더니 조언을 시작하였다.
“앞으로 나서지 마라. 그 쓸데없는 카부토(투구)의 널판은 떼어버리고.”
“아버지! 본디 장수가 모범을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늠름한 투구를…….”
“놈들이 지금까지 움직이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느냐? 기껏 사천 명이 머물면 족한 크기의 성이 다섯 배의 병사를 상대로 침착하게 있다면 믿는 수가 있겠지! 전군! 공격하라!”
저돌적인 아들이 앞서 나가지 못하게 말린 구로다 간베에는 입술을 짓씹으며 적의 수비체계를 분석하기 위해 시선을 사정없이 돌렸다. 그리고 문구성의 실체가 드러났다.
선발대 가운데 정문을 공략하기 위한 부대가 ‘ㄷ’ 자 형태의. 적의 경로를 이리저리 꼬아대기 위한 성을 파고들었다.
자신들의 기세에 질렸는지 문 위의 누각에 있는 조선군은 화살을 몇 발 날릴 뿐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백여 명의 병사의 앞에는 성문이 없고 튼튼한 성벽만 보였다. 하지만 문이 없다고 공성을 못 하겠는가?
성벽을 오르기 위해 갈고리를 준비하며 달려간 병사들은 물컹한 감촉을 느끼며 발을 부여잡았다.
“이런 미친! 진흙에 마름쇠라고! 당장 뒤로 돌아가!”
“문이 있어야 하는데! 잠깐! 놈들이 뭔가를 던진! 크아아아아악!
애초에 문구성의 정문은 북쪽이다. 애초에 적이 공격할 방향이자 올라오기 쉬운 남쪽 성문은 꼭꼭 숨겨두었으며 성문이 있을 법 한 자리에는 문루만 두었다. 이 ‘ㄹ’ 자의 통로 안에 갇힌 오백 명의 왜병들이 들어차자 남상정의 명령이 내려왔다.
“기름 항아리를 던지고 불을 붙여라.”
진흙과 마름쇠에 허우적거리던 이들의 위로 고소한 기름이 떨어지고 횃불이 떨어지며 불기둥이 치솟았다. 건조한 겨울바람이 스치며 오백여 명의 병사들은 화로 안에서 구워지는 빵처럼 바짝 구워져 버렸다.
그나마 다른 성문은 드러나 있지만 공략 자체가 불가능한 끔찍한 난이도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동쪽 성문은 석축과 토대로 호리병의 목처럼 좁은 길을 마련해 두었다. 사람은 길을 따라 오르게 마련이므로 이는 조선군의 든든한 사로가 되었다.
이백 보 거리부터 운총의 사격이 장수들을 노렸으며, 화려한 투구로 자신을 뽐내려는 장수들은 하나같이 사지에 구멍이 송송 뚫리며 자리에 고꾸라졌다.
지휘체계가 무너진 병사들이 성문에 당도하였지만 도착해도 문제였다.
“이건 뭘 어쩌라고. 조선 놈들은 하늘을 날아서 성으로 들어가나?”
허공에 붕 뜬 성문을 보자 사다리를 들이대야 할지 갈고리를 던져 기어올라야 할지 몰랐지만 잠시를 지체한 대가는 혹독하게 돌아왔다.
보총은 탄환이 빠져나올 수 있어 성벽에 붙은 적을 쏠 수 없지만 다른 무기도 충분히 있다.
“이것은 비격뢰여! 까불지 말라고!”
비격진천뢰를 소형화한 수류탄인 비격뢰는 자주 쓰이지는 않았지만 만들기도 보관하기도 편했다.
남상정은 수성전을 대비하여 이를 잔뜩 만들었고 왜병들은 머리 위로 떨어진 쇳덩어리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도망쳤다.
“조선군의 포탄이다! 이 녀석은 잠시 뒤 터지니 어서 도망쳐!”
“안 터지잖아 멍청아!”
“그럼 이놈들이 돌덩이를 던…….”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던 왜병들은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진 쇳덩어리가 폭발하지 않았으니 다시 성벽 아래로 돌아가려 하였지만 오히려 성벽 바깥쪽에 떨어진 비격뢰가 폭발하며 밀집한 왜병들을 쓸어버렸다.
성벽 근처에 비격뢰를 떨구면 성벽 기초가 손상될 수 있으니 택한 방법이지만 혼란 속에서는 효과가 더욱 컸다.
각지에서 이어지는 보고를 들은 구로다는 성의 실체를 알아차리고 명령을 내렸다.
“당장 퇴각하라! 저 성을 고작 이만 명으로 함락시키라고? 미친 짓이다!”
뭐라 욕을 먹어도 괜찮다. 적에게 타격다운 타격도 입히지 못하고 삽시간에 천 명이 넘는 병사가 목숨을 잃거나 중상을 입었다. 아마 자신의 병력을 모조리 들이부어도 성을 함락시킬 수 없으리라.
한편 북쪽에 있는 성인 겹성, 삼겹살성을 향해 나아간 병력들은 더욱 끔찍한 고난에 시달렸다.
히데요시의 친척인 가토 기요마사는 젊은 애송이었고 혈기가 넘치는 지휘관이었다.
“내가 알기로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위태롭지 않은 법이라…….”
“사기가 떨어지니 그 입 닫으시오! 당신이 군문에 대해 뭘 안다고 따지고 드는 거요?”
후루타의 수염이 파들파들 떨리며 가토 기요마사의 뒤통수를 노려보았지만 가토는 코웃음을 치며 말을 무시하였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친척을 끔찍이 아끼는 사람이기에 그를 앞세워 육주성의 성을 공략하게 만들었다.
기습으로 인하여 제대로 대비하지도 못한 육주성의 방어체계는 하루를 버티지도 못하고 함락당했다.
지금까지 쉬운 전쟁만 치른 가토 기요마사의 자만심은 부풀어 오른 풍선처럼 커져갔다.
“보아라! 저 성이 뭐가 대단하더냐! 그냥 산노마루(세 번째 구획)까지 두어 방비를 제대로 하지도 않고! 혼마루(본성, 영주의 거주지)가 없을 뿐이지 않더냐! 내가 맨 앞에 나설 것이니 다들 내 뒤를 따라오너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토의 거대한 고깔 투구에 무언가가 틀어박혔다. 대략 투구 맨 위에서 다섯 치 정도 아래에 편전(片箭)이 쑤셔 박히며 가토의 투구가 뒤흔들렸다.
“이게 또 뭐야! 저기 적장이다! 여기까지 이백오십 보(300m)나 떨어져 있는데 화살을 쏜다고!”
만약 가토의 투구가 위로 길쭉한 형태가 아니고 평범한 투구였다면 미간쯤에 쑤셔 박혔을 화살이었다.
머리가 뒤흔들린 가토는 잠시 뇌진탕에 빠졌고 후루타는 편전이 한 발 더 날아와 뒤로 물러난 가토의 발치에 쑤셔 박히는 것을 확인하고 명령을 내렸다.
“전군 공격! 적장이 맨 앞에 나서서 화살을 쏘아대고 있다!”
“대체 왜 공격명령을 내렸소! 내가 총대장이란 말이오!”
“닥치게! 자네 지금 목숨을 두 번이나 건졌단 말이네! 그냥 카부토를 패용했다면 미간에 한 발을 맞았을 것이요! 골이 흔들려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면 명치에 화살이 박혔을 걸세!”
투구에서 편전을 뽑아낸 가토는 얼굴이 창백해지며 튼튼한 카부토를 벗고 머리에 천을 둘렀다.
아니나 다를까, 성을 향해 돌격하는 병사들 가운데 투구가 화려한 이들은 모조리 사지에 화살과 운총 탄환이 틀어박혀 땅을 뒹굴었다.
“저런 놈이 세상에 어디 있어! 대체 뭘 하다 온 놈이야!”
삽시간에 움츠러든 가토는 후루타의 손에 들려있던 망원경을 빼앗아 문루를 확인하였다. 문루 안에는 시커먼 갑주를 입은 장수 한 명이 호흡 한 번을 마칠 때마다 화살을 마구 쏘아댔다.
하지만 한 발의 화살이 날아올 때마다 장수 하나가 목숨을 잃으니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神將)에 버금가는 맹장이 분명하였다.
그리고 그 장수의 정체는 신립이었다.
“왜놈의 새끼들! 감히 나를 함정에 빠트려! 모조리 죽이고 말겠다!”
본래 역사의 신립은 전략적 식견이 지극히 부족하였지만 일신의 무력만큼은 드높았다. 더군다나 역사가 변하며 입신체비가 생겼고 장수들은 이를 개량한 훈영제식법을 배웠다.
장수의 덕목은 활이라 여겨 등근육을 발달시키는 훈영제식법에 몰두한 신립은 단병(短兵) 기술은 임차손에 비해 조금 부족했지만 그의 궁시(弓矢)는 조선에서도 견줄 자가 없었다.
“운총보다 내 편전이! 정확하고 빠르다! 여기서 쉰 명은 도륙해야! 직성이 풀리겠구나!”
말이 한 번 끊길 때마다 화살 한 발이 날아가 왜장의 급소에 틀어박혔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신궁으로 명성이 자자하였지만 이미 그의 궁술은 이성계에 버금갈 경지에 달했다.
“놈들이 충차를 앞세운다! 장군님! 화약을 담은 충차이니 저격해 주십시오!”
“충차라 하였더냐? 아예 노포를 쏘면 충분하겠구나!”
그것은 쇠뇌라 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물건이었다.
본래 성벽 위에 고정하여 쏘는 공성병기에 버금가는 물건이었지만 신립은 거대한 불화살을 올리고 활줄을 당겨 고정하더니 거침없이 쏘았다.
“으럇차아아아아아!”
신립의 튼튼한 몸은 거대한 화살을 발사한 충격을 감당할 수 있었다.
수양대군이 쏘았던 육량전의 두 배나 되는 불화살이 충차의 앞을 꿰뚫었지만 화약까지 닿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음 불화살은 부서진 판자의 틈으로 틀어박히고 충차가 폭발하며 폭연이 치솟았다.
“보총을 쏘면 맞더냐! 내 활은 백발백중이니 태조대왕께서 흡족할 솜씨가 아니더냐!”
태조 이성계가 있었다면 자신과 대등한 무력을 갖춘 신립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활 솜씨를 겨뤘겠지만 이성계는 이미 이백 년 전의 인물이기에 서로의 실력을 비교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신립 한 명이 뛰어난 무용을 보인다고 이길 수 있으면 전쟁의 의미는 없으리라.
장수를 잃고 피해를 입으면서 착실히 다가온 왜병들은 성 위를 향해 조총을 쏘아댔고 누각에도 탄환이 박히기 시작했다.
“작전대로 퇴각하시면 됩니다! 다음 장소에서 다시 궁시로 적장을 격멸해 주십시오!”
“알겠네! 그나저나 그놈의 난쟁이 새끼 머리통을 날려 버렸어야 하는데!”
신립은 처음에 가토 기요마사를 저격했으나 실패하였다. 키가 작달막하고 투구가 높으니 조선군처럼 키가 크고 듬직한 체형이라 여겨 조준을 약간 높게 잡았던 것이다.
신립의 눈이 마지막으로 전장을 훑었지만 그 장수는 목숨이 경각에 달림을 알고 투구를 벗어 던진 것이 분명하였다.
하지만 다음 장소에서 또 왜인을 죽일 수 있으니 지시에만 따르면 실책을 무마할 공을 쌓을 수 있으리라.
결국 겹성의 두 번째 구획에서 퇴각한 가토 기요마사의 별동대는 이만에 달하는 병력, 조선식으로 일만의 정병과 일만의 보인 중 삼천 명을 잃는 끔찍한 피해를 입었다.
* * *
연이은 패전의 소식에도 히데요시는 침착하였다. 지금 아군을 윽박지른다고 뭘 어떻게 할 수 없었으니까.
구로다와 가토의 몰골을 본 히데요시는 한숨을 쉬며 명령을 내렸다.
“적이 수성에 일가견이 있다 하였는데 세 성 모두가 저렇게 튼튼할 줄은 몰랐군. 들어가 잠시 쉬게나. 며칠 동안 병사들을 다독여 사기를 다시 끌어올리게.”
“하지만 이대로 시일을 보내면…….”
“염려하지 말게. 남쪽에서 사나다가 계속 보급을 보내고 있으니 후방도 큰 문제가 없고 아직 조선 수군은 출병을 준비하고 있겠지. 며칠 정도는 여유가 있으니 푹 쉬게나.”
결국 우회도 실패하였다. 며칠 동안 병사들을 다독이며 다시 한번 거대한 성형요새를 바라본 히데요시는 전면전에 나설 경우 얼마나 많은 병력이 목숨을 잃을지 고민하였다.
요새에 있는 팔천 가량의 병력 중 이천 이상은 조총수가 분명하리라.
아마 40장(48m)이 넘는 해자를 넘어가며 오천 명, 다시 해자에 다리를 설치하며 오천 명, 이후 백병전에 돌입해도 오천 명이 목숨을 잃으리라.
이마저도 긍정적인 분석이고 남쪽과 북쪽에 있는 성에서 지원병이 내려오면 후방이 습격당해 최소 일만 명이 죽어 나갈 것이다.
십만 대군이 순식간에 육만 이하로 줄어들 게 분명하다.
“결국 전면전은 미친 짓이야. 설령 이긴다 해도 후발대를 막아낼 방법이 없으니까.”
하지만 아직까지 드러내지 않은 수가 있다. 다케다 가문의 기반인 가이(甲斐: 현 야마나시) 일대에는 금광이 많았다.
이 금광은 규모가 크지 않았지만 제대로 채굴할 수 있다면 많은 금을 산출해 낼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다케다 가문은 금광을 효과적으로 캐내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였다. 심지어 서양인을 싫어하는 전대 가주들도 많은 급료를 주고 채굴 기술을 터득하기에 이르렀고 당대에는 일본 제일의 광부들이 모인 고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 광부들은 정복 전쟁에 나선 다케다 가문에서 공성 기술자로 다시 고용되었다.
히데요시는 본영 구석에 있는 거대한 토굴 입구를 가린 군막을 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대체 무슨 수를 써서 토굴을 찾아냈는지 몰라도 깊이가 다섯 보(6m)에 달하는 토굴을 폭탄 따위로 격파할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파놓은 해자와 토굴이 모조리 격파되었다 해도 상관없다. 아쉬운 일이긴 해도 가장 크고 튼튼한 토굴을 해자까지 닿게 만들면 충분하니까.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무의미한 토공사를 계속 진행했다. 하루에 60보(72m)나 진격하는 거대한 토굴은 조만간 저 기괴한 해자의 끄트머리에 도달하리라.
군막에 들어가니 허리가 굽은 노인이 히데요시에게 보고를 올렸다.
“아마 내일쯤에는 해자 근처까지 닿을 겁니다. 지난 보름 동안 구백 보를 나아갔으니 이리저리 암반을 피해 돌아간 거리를 감안하면 얼마 남지 않았지요.”
“혹여나 방향이 틀어져 엉뚱한 곳으로 나아가면 해자에서 벗어날 텐데?”
“저희가 그런 멍텅구리는 아닙니다. 어두컴컴한 땅속에서 거리는 가늠하기 힘들어도 방향만큼은 제대로 정해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잠시? 뭐! 당도했다고!”
예상보다 빠른 진격속도이니 히데요시의 입이 헤벌쭉하게 벌어졌다.
잠시 뒤 토굴 속에서 흙투성이의 중년 남성이 튀어나와 무릎을 꿇고 보고를 올렸다.
“도합 구백 보를 나아가기 직전 석회 덩어리를 만났습니다. 생석회를 굳힌 물건이지만 지나치게 단단해 곡괭이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더군요. 분명히 사람 손으로 만든 녀석입니다.”
“해자 석축에 닿은 것이 분명하군! 참으로 잘했네!”
첩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저 성의 해자 외곽에 있는 석축은 생석회를 뒤에 발라 단단한 돌덩어리나 마찬가지라 했었다. 깊은 땅속에서 곡괭이질로 무너트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라.
하지만 화약이 있다. 아무리 단단한 석축이라도 화약이 터지면 충격으로 갈라지며 삽시간에 무너지리라.
히데요시는 중년 남성의 몸에서 흙을 털어내 주더니 다시 한번 물어보았다.
“이제 이백 근 정도의 화약을 설치하고 석축의 뒷부분을 무너트리면 되겠군. 혹여나 폭약을 설치하고 무너트리면 토굴도 같이 무너지는가?”
“토굴도 같이 무너지지만 큰 문제는 없습니다. 무너진 흙 사이로 물이 밀려오면 자연스럽게 흙이 깎여나가며 물이 빠져나오는 길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럼 이백 근의 화약으로도 부족할지도 모르겠어. 삼백 근으로 화약을 늘려 설치하라! 놈들의 성은 해자가 사라지면 둔덕이나 마찬가지이지.”
보름동안 유성룡 저 괴물 같은 놈에게 휘둘렸지만 이제 공세를 취할 시기가 되었다.
시일이 촉박해 해자 아래를 관통해 아예 요새를 무너트릴 방법을 마련하지 못했지만 해자만 없어져도 충분하리라.
화약과 도화선이 토굴 안으로 들어가자 히데요시는 싱글벙글 웃으며 천막 밖으로 나와 물이 빠져나가는 해자의 모습을 지켜보려 하였다.
이윽고 둔한 폭음이 들리고 군막에서 포연이 솟구쳤지만 히데요시의 눈은 해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뭐지? 왜 물이 줄어들지 않느냐! 혹여나 네놈들이 방향을 잘못 잡았다면 당장 목을…….”
“저희는 방향을 잘못 잡지 않았습니다. 해자 앞쪽을 보십시오.”
해자에서 출렁거리는 물 높이만 주시하던 히데요시가 시야를 돌려 해자 앞에 있는 땅을 보았다. 여전히 멀쩡한 석축과 달리 해자 앞쪽 15보(약 18m) 지점의 땅이 쑥 꺼져 버렸다.
“상대가 해자의 석축 앞에다 가짜 석축을 미리 설치해 뒀습니다. 저희가 폭파시킨 석축은 가짜 석축이니 진짜 석축에 타격을 입히지 못하였습니다!”
“그게 말이나 되나! 이 미치광이가 전쟁이 벌어질 것을 예상하고 땅을 파냈다면 겉의 흙만 보아도 알아차릴 수 있거늘. 잠깐! 이 해자가 만들어진 것이 이 년 전이라 했지?”
상대는 전쟁이 언제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이 년 전에 이 성을 새로 축조할 무렵부터 수를 썼다. 토굴을 파서 해자를 무력화시킬 것이라 예측했고 그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했다.
덕분에 지난 보름 동안 무던히 애를 써서 만든 토굴이 흙더미가 되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들어간 광부들도 고개를 흔들더니 토굴을 복구하려면 열흘 이상이 소모될 것이라 하였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있는데 적진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보았느냐! 진정한 명장은 싸우기도 전에 승패를 장담할 수 있는 법이다! 싸우기도 전에 이겼으니 이 또한 승리가 아니겠느냐! 패장은 들었느냐! 명줄을 붙잡으려면 어서 도망쳐라!
“머릿속에 전쟁대비와 수성만 들어있는 새끼…… 저건 뭔 노루 얼굴을 형상화했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린 유성룡은 웃옷을 벗더니 팔을 뒤틀어 머리 위로 올리고 가슴 근육을 부풀려 거대한 노루 얼굴 같은 자세를 취했고 다른 병사들도 이를 따라 하였다.
이제 유일하게 남은 공성 방법은 절대 사용하기 싫으며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는 정면 돌격 외에는 없다.
히데요시는 머리를 마구 긁더니 극도의 스트레스로 삽시간에 뽑혀 나온 머리카락을 바닥에 던지고 외쳤다.
“모두 장비를 점검하고 공세에 나선다! 해자를 건너기 위한 뗏목을 마련하라! 놈들의 성은 거대한 둔덕이니 해자를 넘어가면 달려 올라가 제압하면 충분하다!”
결국 마지막 수단인 전면전에 돌입하는 방법 외에는 없다.
정말 미친 짓이고 끔찍한 피해를 입겠지만 여기까지 몰린 상황에서 시간을 더 지체해 봤자 조선군에게 사냥당하는 미래 외에는 없으리라.
#작가의 말
신립은 조선 최강의 ‘무력’을 가진 장수입니다. 다만 전략적 시야가 없고 지략을 안 써서 문제지요.
이순신 도착까지 4일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