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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조선-401화 (401/573)

근육조선 401화

2부 19장 1화 큐슈 전쟁

고니시가 수감된 감옥에 닿았지만 정작 감옥이 아닌 수용된 죄수들이 중병을 앓을 때 치료하는 의원이 고니시를 담당하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부상을 입었는지 보았는데 상태가 심각하다 못해 처참할 지경이었다.

“이보게 고니시! 자네 대체 무슨 일을 당하였는가!”

“제가 일궈놓은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지요……. 부친께서도 명을 달리하셨습니다.”

그나마 고니시의 아내와 자식들은 지나친 산행으로 피폐해진 것 같았지만 고니시는 일본인 치고 튼튼한 몸이 피멍과 핏자국으로 물들어 산송장이나 마찬가지였다.

대체 무슨 일을 당했기에 이런 몸으로 백 리에 달하는 산길을 걸어 도주했단 말인가.

옆에 걸터앉으니 고니시는 입술을 우물거리다 한숨을 내뱉고 말하였다.

“한 달 전부터 간자들을 색출한다고 막부에서 명령을 내렸습니다. 처음에는 간자들만 색출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키리시탄(가톨릭교도)들을 색출하더군요.”

“색출하여 대체 뭘 한단 말인가. 왜인 가운데 키리시탄으로 개종한 이들이 많으며 영주들이나 명가의 자제들도 키리시탄인데? 설마 자네를 비롯한 부유하고 신분이 한미한 이들을 색출하였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정말 간자를 색출하는 줄 알았는데 부친께서 포박당한 채 제 앞에 끌려오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갇혀 모든 재산을 토해내게 되었지요.”

고니시의 신세 한탄이 이어졌고 당사자 앞이라 표정을 철저히 관리했지만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만만한 계층인 키리시탄과 뒤탈이 없을 상인과 부유한 농민들의 곳간을 털어댔다.

일본이 악습이 이지메인데 이 본성은 과거부터 이어져 오던 전통이 아닐까.

“그나마 후지와라 나리가 저와 처자식을 구명해 주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나리께서는 배를 한 척 내어주시며 서둘러 안전한 조선으로 도주하라 하셨지요.”

“안전한 조선? 분명 계(사카이)나 경도(교토)는 키리시탄을 탄압하니 일대가 위험한 장소이지만 왜 하필 조선이 안전하단 말인가? 하다못해 오우치의 영토만 하여도…….”

“오우치가 위험하다고 딱 잘라 말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오우치에서 안면을 튼 오토모 소린(大友宗麟) 어르신에게 의탁하려 하였지만 말을 듣더니 애써 조선으로 향하라 하시더군요.”

히데요시가 뭔 변덕을 부렸나. 혹시 예전에 자신의 가능성만 보고 투자한 고니시를 살리려는 양심이 튀어나왔나? 양심이 아무튼 생성되었나?

고니시는 부르튼 발을 매만지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였다.

“당시에는 정말 정신이 없었습니다. 사방으로 탈출하는 키리시탄들이 순시 중인 무라카미 해적들에게 사로잡히고 끌려갔으나 제 배는 후지와라 나리의 명령장을 보여주며 해적들을 통과해 저를 부젠 해안가에 내려놓고 병량환을 잔뜩 주었지요.”

“결국 일백 리가 넘는 산길을 가족들과 함께 몇 날 며칠을 건너왔단 말인가. 고생이 많았네.”

병량환이라니 히데요시가 나름 생각을 하긴 했네. 조선의 전투식량과 비교하면 품질도 양도 형편없지만 나름 신경 쓴 전투식량도 잔뜩 내어주다니.

말을 끝내고 다시 혼절한 고니시를 내버려 두려 했지만 이상한 점이 있었다. 병량환은 곡물가루와 생선가루를 쪄서 대충 말린 떡이니 오래 보존할 수 없어 전쟁 직전에 대량 생산한다.

조선이야 빙의자인 수양대군이 개입해 일종의 육류와 지방을 섞은 일종의 에너지 바를 잘 말려 보관하지만, 이 시대의 전투식량은 육포나 말린 생선을 제외하면 여름철에 한 달을 보존하면 대단하다 여긴다.

권율은 일본의 사정에 대해 면밀히 알지 못해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었지만, 나는 고니시의 짐을 보관한 창고에 가서 병량환에 곰팡이가 슬어있는 것을 확인하고 권율에게 건네주었다.

“자네가 보기에 미심쩍은 구석이 있지 않은가? 겨울철에도 보름 만에 곰팡이가 생기는 식량을 따로 만들어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지급할 연유가 있던가?”

“그렇긴 하군. 내가 같은 일을 겪는다면 찐 쌀을 잔뜩 만들어 줄 것이네. 만들기도 쉽고 남의 눈에 띄지도 않으니. 기껏해야 두 달을 보존하는 병량환이라는 녀석을 만들 연유가 없군.”

권율도 이상한 일이라 여겨 생각에 잠겼다.

히데요시가 고니시에게 많은 정보를 주지 않았지만 오우치가 위험하다는 말과 대량생산 제품이 분명한 병량환, 이 두 단서를 가지고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놓았다.

“혹시나 말일세. 왜인들이 대내씨를 먼저 점거하여 아국의 기휘를 범할 생각일지도 모르지. 전쟁을 대비해서 대량으로 만든 병량환을 조금 내어줬을 것이네.”

“그러하면 왜장의 수뇌인 등하 등길랑(히데요시)이 대내씨를 침략하며 소서행장을 따로 빼냈을 것이네. 대우종린(大友宗麟: 오토모 소린)에게 의탁한 사람이면 보호하기도 쉬울 것이야.”

듣고 보니 일리는 있군. 그렇다면 일본은 큐슈를 침략한다면서 정작 방향을 오우치로 돌렸단 말인가.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이래서야 히데요시의 말이 문제다. 놈은 오우치‘가’ 위험하다 했다.

오우치를 공략할 것이면 직설적으로 오우치와 전쟁을 시작하니 위험하다 경고만 했겠지.

그렇다면 고니시가 의탁할 오토모 소린이 담당하는 구역은? 서둘러 돌아와 지도를 보니 놈의 구역은 이와미 은광 인근이었다.

“이제야 알았네! 대내씨가 배신하였음이 분명해! 대우종린에게 몸을 의탁하였다간 아국의 병사들과 대우종린 간의 싸움에 휘말려 유명을 달리했을 것이네!”

“자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대내씨가 왜 배반한단 말인가!”

“아국이 대내씨에게 권유한 행동을 보게나. 지난 이 년 동안 대내씨에게 병사를 확충하라 말하고 화포를 사들여 방비를 철저히 하며 육천여 명에 달하는 아국 장졸을 먹여 살리라 하지 않았는가!”

얼마 전에 가주가 된 오우치 요시시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다. 가주가 되었더니 갑자기 전쟁이 일어난다며 조선에서 일방적으로 병사를 보내고 무기를 갖추라 말하였다.

경험이 많은 전대 가주라면 전쟁을 억제하는 조선에 감사를 표시했겠지만, 경험이 미숙한 젊은 녀석이면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소모되는 자금에 분노를 터트렸으리라.

여기에 지난 몇 달 동안 히데요시가 주도했음이 분명한 화친 제안까지 겹쳐진다면? 잔뼈가 굵은 사람이면 모르겠지만 성격이 급한 놈이면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대내씨가 배반한다면 대우종린을 비롯한 주변 가신들을 모조리 집결시켜 배후를 노릴 것이네! 하지만 아국에서 파견된 충무위(忠武衛: 오위 소속 부대, 특기는 수성전이다)도 만만치 않은 부대이니 적잖이 손해를 보겠지.”

권율도 생각을 정리하더니 내 의견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더군다나 지금은 음력 1월 13일, 정월 대보름이 코앞으로 다가와 거리에서는 축제 준비가 한창이다.

정월 대보름은 조선시대의 가장 큰 명절이며 전날인 음력 14일부터 음력 20일까지 총 6일 동안 조정이 쉴 정도의 명절이다. 심지어 병사들도 두 조를 나누어 14일부터 20일까지 첫 조가, 21일부터 27일까지 두 번째 조가 휴가를 받는다.

당연히 하주도 일대도 축제 분위기이지만 이 축제를 틈타 히데요시가 전면 공세를 실시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절반의 병사들만 소집한 채 전쟁을 치르라고?

“당장 병사들을 소집하고 관료들을 집결시키게! 놈들의 추이가 심상치 않으니 아마 지금 당장 쳐들어올 것이네!”

“하지만 만약 적도가 기만전술을 벌였다면 자네도 크나큰 손실을 입을 것일세.”

“아국의 백성들이 우선이니 염려하지 말게! 자네도 어서 박다 목으로 올라가 내 명령을 전달하게. 그리고 조정에 장계…… 는 적도가 엄습한 이후에 장계를 올려도 충분할 것이네.”

조정에서 명령을 내리기로는 ‘적도가 엄습한 뒤’에 소식을 전달하라 하였다. 당연히 지금 소식을 보내봤자 적이 이상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경고만 전달할 수 있지.

어차피 병사들의 준비가 갖춰지면 히데요시가 이끄는 10만 대군, 임진왜란 규모의 전력에다 오우치와 시마즈 모두가 배신해도 막아낼 수 있다.

올 테면 와보라지.

* * *

하현달이 떠오른 음력 19일, 밤하늘 아래의 망루에선 오늘도 명나라 출신 병사들이 사방을 감시하였다.

명나라 영토인 육주성의 도지휘사 진린은 부패한 관리였지만 상식은 있는 관리였기에 방비체계를 온전히 갖추는 데 주력하였다.

대규모 침략에 대응하기 위한 신호전달체제는 수많은 이민족을 상대로 싸우던 명나라의 것이 우수하였으니 이는 상식적인 대응이었다.

하지만 병사들은 불만을 털어놓았다.

“도지휘사 양반 대체 뭘 어떻게 하라고 우리를 죽어라 두들겨 패고 굴리는지 모르겠어. 아니, 우리가 못 싸우는 것이 우리 탓인가? 자기도 잘 알면서 굴리니까 열이 뻗쳐 죽겠네.”

문제는 상식이 있었지 자신의 상식 이후에 벌어질 일을 감안하지 않는 독선적인 성격이었다.

본래 역사에서 병사들을 매몰차게 다루고 인색하게 굴어 병사들의 반란을 일으킨 성격은 역사가 변해도 변하지 않았으니까.

그는 병사들을 매섭게 훈련하여 명나라 기준 정예병-조선 기준 지방군 평균- 수준으로 끌어올렸으나 이 과정에서 추가 급료를 비롯한 혜택을 내린 적이 없었다.

당연히 병사들은 불만을 털어놓으며 먼바다를 바라보았다.

“자기도 일 년 정도 쫄쫄 굶어보면 눈이 뒤집혀서 왜인 집의 머슴으로 기어들어 가겠지. 고생을 안 해보니까 사람 다룰 줄 모르는 거라니까?”

“왜인들 꼴 보았나? 조선에서 보내온 묵은쌀을 이가(李家)미라 해서 신줏단지처럼 다루는데. 차라리 이모작을 실시하게 하고 짬을 내서 훈련시키면…….”

“거기 조용히 해라 좀! 가뜩이나 불안한 시국에 잡담을 나눠서야 되겠나?”

상관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은 병장기를 느슨하게 잡고는 휘적거리며 대들었다.

병사들 입장에서도 불만이 쌓여가는데 혜택이 없으니 화를 풀 장소가 필요했던 것이다.

“불안한 시국이라 하셨습니까? 한 이 년 전에 왜인들이 조선에 시비를 걸었다가 지금은 태도가 돌변하여 왜국에 잡혀갔던 백성들을 돌려주지 않았습니까?”

“놈들이 전쟁을 벌이기 직전에 화의를 내세울 수도 있지. 북쪽의 조선 영토인 하주도는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 전쟁을 준비한다 하던데 천병(天兵)으로 모범을 보여야 하지 않겠나.”

“모범도 급료를 많이 줘야 보이는 법이지요. 조선 병사들은 은자 열 냥을 받고 훈련을 맹렬히 하면 포상으로 다섯 냥을 더 받는다던데 우리는 여덟 냥 고정이지 않습니까.”

언제나 문제는 돈이었다. 부패한 명나라 조정을 거친 군비는 진린의 속을 태울 정도로 아슬아슬한 양이 도착하였으며 덕분에 명나라 조정의 친조선 관료들은 사재를 조금씩 털어내 손을 보탰다.

진린조차 넋 놓고 당하기는 싫어서 그동안 축적한 막대한 재산을 풀어 장교들의 급료를 대고 조선의 도움을 받을 지경이다.

이 문제의 핵심을 알고 있는 장교는 목을 가다듬으며 말하였다.

“도지휘사께서 백성들을 지나치게 몰아세운다 하여도 필요한 일이다. 왜인들이 정말 기세를 물린다면 백성들에게 은덕을 베풀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

“하지만 은덕이라 해도 당장 먹고 사는 것이 문제지 않습니까. 겨울 농사를 못 하니 식량은 부족하고, 세금은 높고, 몸을 놀려서 먹는 것은 많아지죠. 이래서야 민란이 벌어질 지경인데요.”

“나리들! 오늘도 고생이 많으십니다! 제가 맛난 식사를 준비하였으니 어서 드시지요!”

불만을 털어놓다 보니 하현달이 어느새 새벽하늘의 남쪽에 머물고 있었다. 조금 뒤에는 어스름이 걷히고 아침 해가 떠오르니 다들 배가 출출할 시간이었다.

망루나 봉수대에 근무하는 병사들의 식사는 주변 농민 가운데 차출된 이가 만들어 오게 마련이었다.

지게에 제법 커다란 가마솥을 짊어지고 온 왜인 청년들을 본 장교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물어보았다.

“자네들 평소에 오던 사람이 아닌데? 여기에 왜 왔는가?”

“이번 달에 식사를 도맡아 하는 이웃들이 축성을 하다 변을 당했습니다. 흙이 무너져 내려 멍이 심하게 들었는데 제가 며칠 동안 대신하게 되었지요.”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육주성 백성들에겐 흔한 일이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청년이 국자를 휘적거리니 탕국 냄새가 올라오며 병사들의 입에 군침이 돌았다.

“생선 장국이군. 왜된장에 섞어서 잘 우려냈으니 맛이 일품이겠어.”

“제가 많이 신경을 써서 생선살도 알도 잔뜩 넣었습니다. 어서 자시지요.”

깔끔히 비워진 가마솥을 보자 청년들은 흐뭇한 표정으로 식기를 받아둔 물로 씻으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장교는 풍족한 식사를 가져온 청년들을 칭찬하려고 손을 뻗었지만 손가락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체했나? 목도 뻐근한데 두통도 밀려오고 대체 왜 이러는지.”

“저도 머리가 빠개지듯이 아프고 혀끝이 말려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병사들 모두가 통증과 마비증상을 호소하자 장교는 눈을 굴리다 말끔히 비어버린 가마솥을 떠올렸다. 남경 출신인 장교는 간혹 부자들이 먹다 독에 당해 죽어나가는 복어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놈의 새끼들! 감히 우리에게 독을 먹여! 다들 속을 게워내라! 식사에 독이!”

“참으로 무골이시구려. 텟포(복어) 간과 알을 한 수저는 드신 양반들이 뭐 이리 잘 움직이시나? 어차피 숨이 막혀 죽을 것인데 그냥 지금 죽어 서로 편해집시다.”

중독되어 사지를 허우적거리는 장교의 머리에 몽둥이가 날아오고 피가 솟구쳤다. 마흔 명에 달하는 명나라 병사들은 사지를 가누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며 무의미한 저항을 이어갔고 이내 명을 달리했다.

필사적으로 대포를 쏘아 신호를 보내려던 병사도 손발이 마비되어 불을 붙이지 못한 채 명을 달리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망루를 장악한 첩자들은 횃불을 들고 사방을 뛰며 신호를 보냈다.

신호를 봉수대의 불꽃도 두 번 꺼졌다 켜지니 첩자들에게 장악당하였다. 사방에 위치한 망루 가운데 절반 이상의 망루가 같은 신호를 보냈으니 망루의 절반 이상이 장악당한 상황이다.

정상 작동하는 망루도 신호가 전달되지 않았음을 한참 뒤에 알아차리고 사람을 봉수대로 보내겠지만 이미 늦었으리라.

청년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남쪽 바다를 바라보았다.

“일을 성사시켰으니 후지와라 가문의 배배신(가신의 가신)으로 임명한다는 약속을 지키시겠지? 그냥 소모시키는 것 아닐까?”

“어차피 머나먼 서역으로 팔려갈 우리를 구해준 사람이니 뭐라도 믿어야 하지 않겠나. 설령 가신의 가신이 아니더라도 명문가에서 약속했으니 땅이라도 하나 내어주겠지.”

“잡담은 그만두라고. 진린 그 미치광이에게 겨우 내내 훈련을 받다 여름 동안 뼈 빠지게 농사를 지어 사 할의 세금을 내라고? 차라리 세금 오 할을 내고 겨울 농사를 짓지!”

머나먼 동쪽 바다에서 태양이 솟아오르며 어둠을 몰아내자 남쪽에서 천여 척에 달하는 선단이 물결처럼 밀려왔다.

거대한 가고시마만을 가득 메울 기세의 선단은 사쿠라지마 섬을 지나 삽시간에 상륙하였다.

“망루! 망루가 왜 신호를 보내지 않았나! 적의 습격이다! 적의 군선 천여 척이 습격하였단 말이다! 당장 병장기를 갖추고 봉수대에 사람을 보내 봉화를 올려라!”

절반 이상의 망루가 장악당한 상황을 모르는 명나라 장교들은 목소리를 높이며 사람을 보내라 하였지만 해안 수비를 담당하는 아리마 요시사다(有馬義貞)는 이를 악물며 적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고작 이천 명의 병사를 통솔하는 자신도 승산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럴 경우 무조건 적에게 항복하거나 도주하는 것이 상례(常例)나 마찬가지인 전국시대의 일본이지만 그는 달랐다.

“제가 신가리(殿軍: 후위)를 담당할 것이니 어서 병사들을 인솔하고 도주하십시오!”

며칠 동안 약관(弱冠)도 안 된 아들인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에게 배운 점이 있었다. 한낱 미물인 개마저도 밥을 준 사람을 위해 승냥이에게 달려드는데 사람으로 태어나 충의가 없으면 무얼 하겠냐고.

천여 척이 넘는 세키부네에서 쏟아져 나온 이만사천에 달하는 선발대를 향한 무의미한 저항이 시작되었다.

목책은 삽시간에 꿰뚫리고 조총 탄환이 빗발쳤으며 적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는 병장기라고는 명나라 병사들이 버리고 간 화포가 전부였다.

하지만 이천 대 이만사천의 싸움은 한 시진이 지나기도 전에 끝났다. 아직도 포연이 맴도는 백사장 위에 내려온 후지와라 토키치로, 본래 역사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장을 돌아보면서 명령을 내렸다.

“중과부적에도 후퇴하지 않고 맹렬히 맞서 싸웠으니 칭찬해야 마땅하다. 본대는 어서 시마즈의 영토로 진군하라! 분견대는 각지의 봉수대를 파악한 이들과 접선해 봉화가 올라가지 못하게 막아라!”

첫 목표인 명나라의 육주성까지 앞으로 40리(일본 리 기준 160㎞)나 진군해야 하지만 히데요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근처의 봉화가 피어오르지 않았으니 자신이 파견한 간첩들이 들키지 않은 상황이다.

앞으로 10일 이내에 시마즈를 굴복시키고 명나라 영토인 육주성을 함락하며 조선의 영토인 하주도에 공격을 실시해야 목표를 달성할 수 있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히데요시는 아시가루로 전장을 떠돌던 기억을 떠올리며 혼잣말을 하였다.

“내가 아시가루로 있어 봐서 아는데 하루에 다섯 리(일본 리 기준 20㎞) 넘는 거리는 너끈히 행군할 수 있는 법이지. 보급이야 후발대로 들어올 구로다와 사나다가 알아서 할 일이고.”

주변 병사들이 말을 듣고 움찔거리며 히데요시가 탈 말을 가져왔지만 히데요시는 손사래를 치며 이를 거부하였다.

자신이 모범을 보여야 병사들 모두가 불만을 토하지 않으리라.

#작가의 말

작전 지도입니다. 앞으로 몇 번에 걸쳐서 업데이트하겠습니다.

히데요시가 계획한 하루 20㎞ 진군은 지독한 험지이거나 격전을 거듭할 때 기준으로 과도한 행군거리이며 평범한 전투를 몇 번 할 때 기준으로 적당한 행군거리입니다.

실제 사례로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는 부산 - 동래 - 경상도 - 상주 - 탄금대 - 한강까지 6회의 전투를 거듭하며 하루 평균 23㎞의 행군거리를 달성했습니다.

조선군의 경우엔 오위 기준 하루 행군거리가 40㎞, 급속행군을 달성해야 할 경우 55㎞까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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