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400화
2부 18장 6화 일촉즉발
본래 역사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여기서는 후지와라 토키치로라 부르는 자는 지난 1년 6개월 동안 필사적으로 전쟁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다케다 정부는 전쟁을 앞두고 실책만 거듭하며 자멸의 길로 접어들 지경이었다.
조선은 전쟁을 준비하며 무역 압박을 시작하였다. 철과 화약을 비롯한 군사 물품에 대한 거래를 원천 차단하였다.
하지만 상인들의 수는 줄지 않고 늘어났으며 도자기와 홍삼을 비롯한 사치품을 팔아댔다.
“애초에 저렇게 번성한 나라에 전쟁을 거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지.”
얼마나 많은 물량을 풀어댔는지 은의 3배에 달하던 홍삼의 가격이 은의 2배로 폭락할 지경이었다.
전쟁을 위해 모아둔 군자금은 삽시간에 고갈되기 시작했고 원정이 취소될 위기에 봉착하였다.
하지만 군자금을 만들 방법은 있었다.
수없이 이어지는 상인들의 물결 사이로 포승줄에 잡힌 채 끌려가는 이들이 있었고 히데요시는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다 혀를 내둘렀다.
“저자는 바테렌(선교사)이 아닌가? 저러다가 남만인들이 분노하면 어찌 감당하려고…….”
“남만인들이 화를 내지 않도록 추방한다 하였습니다. 그리 염려하지 마십시오.”
고개를 돌린 히데요시의 뒤에서 정중히 인사를 올린 이는 구로다 간베에(黒田官兵衛), 책사로 명성이 드높은 자이며 이번 원정의 작전 계획을 히데요시와 같이 수립하는 자였다.
구로다는 천주교 신자이며 시메온(Simeon: 시므온)이라는 세례명까지 받았지만 저렇게 포승줄에 엮여 끌려가는 신세는 아니었다.
애초에 다케다 정권이 바테렌과 천주교 신자를 탄압하는 이유를 아는 히데요시는 코웃음을 치며 손가락질을 해댔다.
“염려하지 말라고? 조선 물품을 가져오는 상인들 모두가 간자인데 정작 간자랍시고 애꿎은 바테렌과 천주교 신자들을 간자로 여겨? 그마저도 돈을 뜯어내기 좋은 상인이나 부호만 간자랍시고 잡아간다고?”
“제 지인들도 잡혀갈 지경이니 좋은 일은 아닙니다만 이번 사태만 넘어간다면…….”
“이번 사태만 넘어간다고 하였나? 지금 바테렌과 인연을 맺고 천주교를 믿는 각지의 다이묘들이나 가신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나?”
다케다 가츠요리는 우유부단한 자였다. 결국 정권의 속을 보면 각 세력의 이익에만 몰두하여 약한 세력을 핍박하길 좋아하고 정작 중요한 일에는 시선을 돌리는 결과물이다.
히데요시의 짐작대로면 선교사는 추방할 것이요, 천주교 신자들은 구타와 폭력으로 협박해 재산을 갈취할 것이지만 저기에 끌려간 사람 중에 자신에게 도움을 준 고니시 유키나가가 있다.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출병 전에 잠시 짬을 내어 고니시 유키나가와 그의 친인척들을 구해내는 것 하나이리라.
간베에가 재가(裁可)를 받은 서류를 내밀자 히데요시는 눈을 찌푸리며 미사여구로 점철된 명령문을 확인하였다.
“병력이 조금 부족한 것 같은데. 삼만 정도의 병력을 더 받아내면 어떠하겠는가? 고작 십육만의 병력 가지고는 뭘 해보지도 못하겠군.”
“더 많은 병력을 보내고 싶어도 보급이 문제이지요. 아시다시피 저희에게 배정된 천여 척의 함선을 사용한다고 가정해도 십여만의 병력에 보급을 대는 것이 한계입니다.”
“어차피 명나라의 영토인 육주성은 정복할 수 있으니 가급적 많은 병력을 한 번에 보내야 하는데 이 머저리, 아니, 명가라는 양반들이.”
최소 25만의 병력으로 사방을 찔러댈 계획을 수립했던 히데요시지만 과두정을 넘어 십여 개의 세력이 이합집산을 이룬 일본은 이 병력을 차출할 방법이 없었다.
북방의 영주들은 조선의 지원을 감안해도 고작 삼만의 병력을 다룰 우에스기 가문을 견제한답시고 10만에 가까운 병력을 북방에 배치해 두었으며 각지에서 변명이 솟구쳤다.
한숨을 쉰 히데요시는 어려운 한자를 더듬더듬 읽어가며 서류의 내용을 확인하였다.
“총대장 주제에 아시가루만 다룬다니 자존심이 상할 것 같지만 내가 군략을 많이 배우지도 않았고 잘하는 일이나 해야지. 이렇게 병력을 잘 배분하다니 자네의 공이 크네.”
“제가 보기엔 다케다 가의 기병은 어중간한 이들이고 토치키치로 어르신의 명령을 잘 듣지 않을 것 같습니다. 수효가 일만에 달하지만 차라리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이들을 다뤄야지요.”
16만의 병력은 각 가문에서 추려낸 병력이며 이미 군 단위로 분할되어 있었다.
조만간 시코쿠의 항구에서 출항할 병력의 면모는 다음과 같았다.
1군 - 후지와라 토키치로(히데요시), 총병력 2만4천
2군 - 구로다 간베에, 총병력 1만2천
3군: 사에구사 모리토모(三枝守友), 총병력 1만6천, 개중 기병 1만
4군 - 구키 요시타카, 총병력 1만6천, 수군
5군 - 사나다 마사유키, 총병력 1만2천
기타 - 보급 담당 및 함선 운용을 위한 보인 8만
히데요시 입장에서는 아쉬움만이 남았다. 자신의 계획을 확실히 성공시키려면 차라리 기병의 수가 더 늘어나서 큐슈 이곳저곳을 사정없이 날뛰게 만들어야 하니까.
계획을 확인하던 구로다에게 히데요시는 불안한 마음을 숨기며 물어보았다.
“지금까지 큐슈에 보낸 첩자들 가운데 들킨 이는 있었나?”
“아직까지는 없었습니다. 간혹 소식이 끊긴 녀석들이 있지만 다시 소식이 전해지는 걸 보니 명나라 장수인 진린에게 혹독한 훈련을 받고 있는 것이 분명한 것 같더군요.”
“녀석이 진실을 알면 소스라치게 놀라겠지. 얼마 전에 선심 쓰듯 이천여 명의 포로를 돌려주었는데 개중 절반 이상이 나에게 포섭된 첩자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조선에 보낸 첩자는 몇 돌아오지 못했지만 큐슈 남부의 첩자만 일천 명에 달하네.”
히데요시는 철저히 내부를 뒤흔들 계략을 수립하였다.
어차피 정면으로 싸워보았자 한 달 정도가 지나면 밀려올 조선군에 박살 나는 미래 외에는 없다.
그러니 단번에 상륙을 성공하여 큐슈 남부를 실효 지배 중인 시마즈 가문을 단숨에 집어삼킬 방법이 필요하였다. 그 방법을 찾던 와중 진린의 실책을 발견하였다.
진린은 자금소모와 훈련도 확충을 위해 장정 일만 명을 머나먼 북부의 다테 가문의 보인으로 파견하였고 이들 가운데 오천여 명은 포로 신세로 사방으로 팔려나가게 되었다.
구로다도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히데요시에게 맞장구를 쳤다.
“아무도 모를 일이지요. 그저 전쟁 이전에 화친을 취하는 척 선심을 썼다 여겼을 겁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 있는데 조선의 영토인 하주도에는 발을 붙이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다니 참 우스운 일이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여하튼 출병은 이번 일월 닷새(음력 1월 5일)이니 놈들에게 결행일은 일월 스무날(1월 20일)이라 전해주게.”
상상도 못 한 방면으로 상상조차 못 할 숫자의 병력이 쏟아지면 육주성은 간자들의 내분과 신속한 진격으로 조선에 소식조차 전하지 못한 채 함락당하리라.
이렇게 되면 조선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밀려나리라. 그나마 조선에서도 수를 써서 산성과 평지성을 축조한다 하였는데 중요한 평지성이 미완성 상태였다.
히데요시는 점점 눈앞에 보이는 승리를 확인하듯 지도에 손가락을 짚었다.
“명나라 영토에서 화포를 노획하여 닥치는 대로 쏘아 산성을 무너트리고 미완성된 평지성은 내가 이끄는 1군의 아시가루가 진격하면 되겠지.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다자이후소치께 서신이 왔습니다! 오우치 가문에서 보낸 서신입니다!”
시종의 손에서 편지를 낚아챈 히데요시는 끙끙거리며 서신을 읽었다.
기껏해야 천자문 정도나 읽을 줄 아는 히데요시에게 너무 난해한 내용이었지만 핵심은 간단하였다.
[정말 약속한 내용을 보장한다면 내 반드시 호응하겠소. 결행할 시일을 알려주시오.]
“되었어! 되었다고! 요시시게(義重: 현 오우치 가주) 이 멍청한 애송이가 드디어 미끼에 손을 댔다고! 승산이 이제 오 할을 넘어서서 칠 할에 달하겠군!”
“정말 요시시게가 동의하였습니까? 자신은 물론이요, 가문을 몰락시킬지도 모르는 거래에 응했단 말입니까? 얼마나 멍청한 겁니까?”
“스물에 불과한 애송이가 세상 물정을 알아야 얼마나 알겠나? 조선과 명나라에서 거둬가는 은 삼 할이 명줄이나 마찬가지인데 고작 은이 아까워서 조선의 보호를 뿌리치려 하는군.”
백여 년 전 경인왜란에서 조선과 명나라는 오우치의 멸망을 막았고 이후 오우치의 영토에서 산출되는 은의 삼 할을 보호 비용 명목으로 거둬가는 협약을 맺었다.
오우치에게 손해는 없었다. 조선이 어려울 때에도 최소 이천 이상의 조선군이 화포로 무장한 채 오우치의 영토를 수호하였으며 지금은 수효가 더욱 늘어나 육천 명의 조선군이 파견되어 있다.
조선과 정면승부를 벌이기 싫은 다이묘들은 어마어마한 은이 소출되는 오우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니 이는 명줄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목숨 줄을 저버린 오우치의 미래를 상상한 히데요시는 미친 듯이 웃으며 탁자를 계속 내려쳤다.
“지난 백 년 동안 자신의 명줄을 책임져준 조선을 배신한다고? 그 거대한 이와미 은광이 있는데 기껏해야 이십 년이 지나기도 전에 내분으로 몰락하거나 협공을 당해 멸문당할 텐데?”
“그러하면 출병 계획을 변경하겠습니까? 오우치를 통해 진격하면 간자들을 활용할 방법은 없지만 훨씬 빠르고 효율적으로 공세를 취할 수 있을 겁니다.”
구로다의 의견에 눈을 굴리던 히데요시는 얻을 이득보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후방을 급습할 조선의 파견 병력을 고려했다. 조선의 정규군과 야전에서 싸운다면 승산이 없다.
단 한 번 싸워봤지만 뼈에 사무치게 알고 있었다. 삼천 기에 불과한 기병이 달려들자 자신이 인솔하는 병력을 포함해 일만에 달하는 돌격대가 말 그대로 세상에서 지워졌으니까.
아무 계책 없이 정면승부를 벌인다면 자살행위이다. 적을 철저히 분석하고 대응하면 승산이 있지만 덮어놓고 싸운다면 이긴다 하여도 어마어마한 피해를 각오해야 하리라.
만약 진격이 가로막힌다면 남쪽으로 진출할 길도 막힌 채 조선의 정규군에게 양면을 포위당해 몰살당하리라.
히데요시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말하였다.
“아니, 오히려 오우치가 극복해야 할 일이지. 주둔 중인 육천에 달하는 조선군을 섬멸하고 조선 수군의 진입을 시모노세키 해협에서 틀어막으라 하게. 어차피 멸망할 놈들이니 지금 타격을 많이 입혀두는 것이 좋지 않겠나.”
“조선 입장에서는 제대로 된 대응이라도 하면 다행이군요. 연락이 끊긴 남쪽에서는 삽시간에 시마즈를 정복하고 구마모토까지 밀려온 십만 정병이. 북쪽에서는 시일에 맞추어 배반한 오우치라니.”
히데요시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출병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기에 최종 점검에 들어가야 함은 물론이요, 지금도 감옥에 갇혀 온갖 고초를 당하고 있을 고니시 유키나가를 예전에 한 약속대로 구해줘야 하리라.
* * *
지난 1년 6개월 동안 할 일은 다 했다.
성을 완공하고 성에 걸맞은 수량의 화포를 마련하였으며 전시에 사용할 비상 물품을 기준 수량의 두 배나 만들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심지어 내 입맛에 맞는 인사들이 속속들이 배정되었다.
나보다 직급이 낮지만 박다목(하카타)의 목사로 파견된 이는 시가전의 명수인 권율이었고 부장으로 어떻게든 실책을 모면하고자 하는 이일까지 파견되었다,
하지만 정국이 점점 불안해지니 시마즈 가문에서도 한 명의 지휘관이라도 확충하고자 하였고 아쉬운 일이지만 1584년 음력 1월 10일, 제자들을 집결시켜 배움을 끝마치고자 하였다.
“이제 정월 대보름이 코앞으로 다가왔구나. 두 달 뒤에는 인수인계를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조만간 일어날지 모르는 변란에서 너희의 몸을 지킬 수 있게 선물을 줄 것이다.”
제자들의 교육도 마쳤다. 육체도 정신도 완벽하게 조선 사람으로 개조되었으며 평균 신장만 따져도 표준척인 황종 척으로 5척, 173㎝에 삼대운동 평균 600근(384㎏)의 근육덩어리가 되었다.
제자들이 인사를 올리자 나는 수레를 불러 조정에서 보낸 선물을 하사하였다.
이미 사서삼경을 거의 다 외우고 근육적 사고방식과 효도 그리고 충성으로 가득 찬 제자들은 선물이라는 말에 고개를 꾸벅 숙였다. 사실 선물도 아니고 돈 받고 팔아야 하는 물건이지만 이미 주상전하의 재가도 내려진 물건이다.
배신할지도 모른다고? 이 년 반 동안 세뇌되다시피 했는데 어찌 배신을 하겠나.
조정 관리들도 비슷한 사례는 예전 여진족을 복속시킬 때부터 수도 없이 많았기에 아마 열두 제자 가운데 많아야 두어 명 정도만 배신하리라 예측했다.
그마저도 침략하는 장수가 친인척이어서 어쩔 수 없이 따를 것이라 예측하였다. 이미 도성을 다녀와 조선의 강대함을 보았기에 배신하면 돌아올 것이 파멸뿐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는 녀석들이다.
나는 수레에 쌓인 칼을 들며 말하였다.
“본디 날붙이를 주고받는 것은 삿된 짓이니 쉬이 행할 수 없는 법이다. 하지만 이 검이야말로 아국의 정수가 깃든 보배 중의 보배이며 주상전하께서 명하여 제작하신 벽사검이다.”
가장 먼저 나선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칼을 받고 패용하더니 숨을 집어삼켰다. 개나 소나 칼을 휘두르는 험악한 시대의 사람인지라 범상치 않은 칼임을 알아차렸다.
완전한 서양 양식의 생소한 검이 손에 착착 감긴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제자들은 나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고 나는 아예 시험까지 해보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나무 더미도 가져왔다.
어리둥절한 제자들은 검을 뽑아보더니 궁금한 듯이 물어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검인데도 균형이 완벽하고 날이 전혀 어긋나 있지 않습니다. 저희가 본디 사용하던 칼은 쉽사리 망가져 여러 자루를 패용해야 했는데 믿기지 않는군요.”
“당연한 일이지. 너희들이 즐겨 사용하던 아국의 강철은 본디 하품으로 취급하던 강철이다. 이 강철 중에 최상품을 남만 장인의 제자가 제련하여 만든 벽사검이다.”
조선에 포로로 사로잡힌 스페인 원정대는 군대이며 보급과 수리 업무를 도맡아 하는 장인들도 몇 명 소속되어 있었다. 당연히 이 장인들은 북한산성에 포로로 잡힌 신세가 되었다.
군사 관련으로는 전술이 제각각이라 큰 소득이 없었지만 장인들은 달랐다. 장인들은 철의 질이 유명한 하마 니씨 가문에서도 좀처럼 만들기 힘들다는 최고급 강철을 보자 눈이 돌아가 정신없이 망치를 놀리면서 한탄했다던가.
장인은 조선의 기술이 부족하여 좋은 강철을 썩힌다며 돌아가는 길에 조선산 강철이나 인도산 우츠 강 일천 근을 받아가는 조건으로 아예 군기시에 나아가 칼 만드는 비법을 전수하였다.
기술을 배운 조선 장인들이 만든 시제품이 지금 제자들에게 주어진 벽사검이었다.
대나무 더미가 썰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리고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혀를 내두르며 검을 확인하였다.
“본래 저희가 쓰던 검은 대나무 더미를 자르면 이가 빠지고 칼이 휘는 일이 잦습니다. 하지만 이 벽사검은 정말 삿된 물건을 단번에 베어낼 수 있겠군요.”
“삿된 물건이 아국의 사람이 아니길 빌 뿐이지. 조만간 변란이 일어나도 이 칼과 함께라면 너희 앞에 놓인 모든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가장 검술이 빼어난 타치바나 무네시게가 괴성에 가까운 기합을 지르며 대나무 더미를 베었는데 내 눈을 의심했다. 대나무 더미의 중간을 베고 무너져 내리려는 놈을 다시 반대편으로 올려쳐 베어버렸다.
이쯤 되면 내 제자지만 너무 강해진 것은 아닐까. 근력도 제대로 성장하였지만 훈영제식법을 죽어라 굴린 덕분에 심부근육(코어근육)이 엄청나게 강화되어 조선 기준으로도 빼어난 무관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녀석의 성격을 잘 알고 있으니 개의치 않았다. 설령 자신의 아버지와 동료들이 배반을 종용해도 두들겨 패서 여기까지 끌고 올 성격이다.
제자들을 돌려보내고 관아로 돌아오는데 웬 농민이 나를 보더니 인사를 올리고 쭈뼛거리며 물어보았다.
“관찰사 나리께 여쭈어볼 것이 있습니다. 대체 변란이 언제쯤 일어납니까?”
“조만간 일어날 거라네. 변란이 일어나길 기대하고 있는 것 같은데 대체 뭔 꿍꿍이인가?”
“나쁜 마음을 품지는 않았습니다! 변란이 일어난다며 준비를 하시기에 여유를 부려 배를 한 척 구매했습죠. 그 배로 조선으로 오가며 군량을 가져오면 벌이가 쏠쏠하지 않겠습니까.”
생각해 보니 나쁜 방법은 아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지푸라기조차 아껴 써야 하니 민간 상선을 징발해서 물자를 날라야 하리라.
세금을 현상유지한 채 성을 쌓는 품삯을 은자와 곡식으로 넉넉히 지불하니 축성 사업이 끝난 지금도 여유가 생겼다는 증거이다.
결국 민간인 차원에서 전쟁대비에 나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 길거리에 엿을 비롯한 비상식량을 파는 이들에 제법 보이니 최악의 경우엔 민간 상선을 동원해 하주도 백성들을 조선으로 피난시켜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였다.
“내 품삯은 충분히 쳐줄 것이니 큰 염려를 하지 말게. 자네도 호패를 가지고 있을 것이니 호패를 찍어 증좌를 남기면 훗날 크나큰 보상으로 돌아올 것이네.”
“아이고 감사합니다! 솔직히 말해 변란이 무섭지 않지만 육주성 사람들이 무서워서 요즘 잠을 설칠 지경이었습니다. 그렇게 굶주리고 난폭한 사람들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명나라 육주성? 진린이 어느 정도 상식적인 대처를 했지만 그놈의 부패 때문에 일이 대차게 꼬여 버렸다. 가장 큰 문제는 세금을 4할로 증가시킨 것이다.
여기에 겨울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고 훈련만 일삼으니 식료품 물가가 폭증하였다.
오죽하면 폭동이 일어날까 염려해 환곡을 원가에 가까운 가격으로 매해 십만 석이나 보냈다. 육주성 백성들도 바보는 아닌지라 이 쌀을 이가(李家)미라 부르며 먹는다더라.
“이쯤 되면 히데요시 놈이 쳐들어왔을 때 내부에서 호응하는 세력이 생겨날 지경인데. 그나마 제자들을 보냈으니 어느 정도 믿어볼까. 아니야, 애초에 믿을 수 없는 상황이야.”
관아에 들어와 생각을 정리했지만 솔직히 말해 히데요시가 뭔 수를 쓸지 모르겠다.
심지어 이순신에게 적이 어떻게 침략할지 모르겠다고 하소연을 담은 서신을 보내봤는데 이순신의 답변은 참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답이었다.
[적도가 기습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장수가 갖춰야 할 덕목일세. 설령 적도가 자신보다 아득히 군재가 뛰어난 이라 하여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네.]
일본 수군을 돼지 도륙하듯 처리한 이순신이 하는 말이라서 설득력이 있으면서 없다.
이순신을 상대로 정신을 똑바로 차리면 피해를 모면할 수는 있겠지. 문제는 이순신 기준으로 보통 사람들은 다 뇌수가 비었으니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못한다.
희대의 천재에게 수학문제를 물어보니 몇 초 만에 답하고 ‘그 공식을 이해 못 하겠다고? 난 보자마자 암산으로 해결했으니 암산은 어때?’라고 답한 꼴이다.
그래서 나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택하였다.
“그냥 초심으로 돌아가자. 히데요시의 십만 대군이 열흘 뒤에 쳐들어온다 했을 때 병사들을 소집해 즉각 방어할 수 있으면 충분하겠지.”
어디로 올지 몰라서 졌다? 적이 예상보다 많은 규모라 졌다? 죄다 약한 사람이 내놓는 변명거리이다.
그냥 하남도를 강하게 만들어서 임진왜란 수준의 침략이 어느 방면에서 들어오건 한 달을 버티게 만들면 충분한 일이다.
그리고 두 가지 요소를 더 계산해야 한다. 시마즈가 완전히 배신했을 경우와 오우치가 배신했을 경우이지.
만에 하나라도 오우치가 배신할 경우 권율이 있는 박다목을 공격하겠지. 그러니 권율을 불러 억지로 대응하라 명령 아닌 부탁을 하였다.
“자네가 박다의 방비를 확실히 행하는 일은 잘 알고 있다네. 하지만 내 관찰사가 아닌 벗으로서 말하겠네. 대내씨가 배반할지도 모른다네.”
“대내씨가 배반할지도 모른다니. 자네 그 근거는 어디에 두고 말하는 건가?”
갑자기 호출되어 이상한 소리를 들은 권율은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지만 솔직히 말해 근거가 없었다.
근거가 있다면 관찰사의 입장에서 말하겠지만 지금은 근거가 부족해 친구의 입장에서 말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지만 언신(권율의 자字) 상대가 어찌 나올지 모른다네. 지금 대내씨의 당주는 갓 스물을 넘긴 대내의중이라네. 내 무전승뢰(다케다 가츠요리)가 부하에게 휘둘리는 꼴을 보니 잘못하면 반역을 저지른 부하에게 정권이 넘어갈 수 있음을 염려한다네.”
“반역을 저지른 부하라 하여도 단번에 정권을 장악할 순 없을 것이며 그러한 일을 저지르면 아국의 병사들에게 소문이 퍼져도 벌써 퍼졌을 것일세.”
권율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여겼지만 상대는 조선을 침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다. 본래 역사에서 어떤 방법을 택했건 일본을 집어삼킨 괴물이란 말이다.
나는 눈을 감았다 뜨며 권율에게 말하였다.
“아무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닐세, 관문 해협(시모노세키 해협) 일대를 통솔하는 대내씨의 가신은 삼조실강(三条実綱: 산조 사네츠사)일세. 왜국에서 명가로 칭송받는 가문의 후예이자 적의 수괴인 무전승뢰와 육촌지간이지.”
“듣고 보니 일리는 있는 말이군. 생각해 보니 관문 해협의 가장 좁은 폭은 기껏해야 사백 보(640m)에 불과하며 여기의 포대만 장악하여도 아국의 수군이 드나들 길목이 막히겠지.”
근거랍시고 생억지를 부렸고 권율도 이를 알아차렸지만 내 눈을 한참 바라보고 친구의 부탁이라 여겼는지 알겠다는 눈치를 비추었다.
상대가 히데요시이니 예측할 수 없는 수단을 쓸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예측하지 못한 수단에 대응하는 과도한 대응이 필요하리라.
권율과 오우치에 대한 대응을 논하는 중에 한 무관이 달려와 보고를 올렸다.
“보고 올립니다! 대내씨의 영토인 풍전(豊前: 부젠)에서 아국의 강역으로 잠입한 왜인이 관찰사님의 지인이라며 통사정을 하고 있습니다. 가족이 모조리 넘어왔는데 일단 간자인지 모르니 옥에 가둬두었습니다.”
“간자일지도 모르니…… 잠깐? 왜 풍전에서 아국의 강역으로 넘어왔단 말인가. 풍전의 해안에서 아국의 강역인 하주도로 잠입하려면 일백 리가 넘는 산길을 건너야 하지 않는가?”
아무리 호랑이나 늑대가 없다지만 산길 100리는 어지간한 장정도 며칠이 걸리는 험난한 길이고 순찰도 수시로 돈다. 간첩이라면 아예 작정하고 산을 넘어오지 산길을 따라오지 않는다.
간혹 히데요시가 간첩을 보내왔지만 대부분 병사들에게 사로잡혔고 성공한 사례는 몇 없기에 그런 멍청한 짓을 저지르지는 않았으리라.
권율도 이상하다 여겼는지 나를 뚫어져라 보았고 가장 중요한 이름을 물어보았다.
“그자의 성명이 뭐라 하던가?”
“고니시 유키나가라는 자입니다.”
고니시가 여기 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렇게 필사적으로 움직였다면 분명 반드시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움직였으리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권율과 함께 태재부(다자이후)에 있는 감옥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