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399화
2부 18장 5화 대비는 철저하게
각지의 명문가나 장수들 혹은 대신들에게 대접을 받은 조선 관료들이 다시 저택으로 집결하였다. 아직도 분노를 다스리지 못했는지 얼굴이 시뻘건 이이는 물론이요, 전체적으로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이는 좌찬성답게 가장 안쪽 자리에 앉더니 폭탄을 던졌다.
“왜국은 명백히 전쟁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설명을 듣자 기가 차고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선전포고를 해놓고 말을 돌린 다음 정상적인 회담을 유도하는 척 다시 협박을 한다고? 미쳤나?
이이는 한숨을 푹푹 내쉬더니 다시 폭탄을 던졌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는데 실세는 무전(다케다) 가문의 가주라 자청하는 무전승뢰(武田勝頼: 다케다 가츠요리)가 아닌 것 같더군요.”
“내가 말 위에서 살아온 사람이지만 무전승뢰는 실세가 아닐 것 같구려. 난쟁이(야마가타 마사카게: 山県昌景)가 말하기를 무전승뢰의 장기는 내치와 안정이라 했었지.”
정지운을 시작으로 각자 누가 왜국의 실세일지 예상을 하였는데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실세를 예측해야 대응책을 세우게 마련인데 그 실세를 분간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이렇게 의견이 갈리면 내부에서 권력승계로 인한 다툼이 치열하다는 뜻이다. 아마 히데요시는 어느 누군가가 키우는 차기 권력자겠지.
나도 직접 만나본 히데요시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등하 등길랑(후지와라 토키치로, 본래 역사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자가 핵심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놈이 아직 정계를 완전히 장악하진 못하였어도 후원하는 이가 후일 수뇌로 올라설 가망이 큽니다.”
“왜국은 막후(幕後: 막의 뒤, 여기서는 권력 승계 이후)에서 실세로 움직이는 일이 잦으니 실제 능력이 뛰어나지 않은 이가 재주가 뛰어나고 한미한 출신인 후계자로 등하 등길랑을 키우는 것이 분명하네.”
이제야 조각이 끼워 맞춰졌다. 히데요시는 단순히 실세라는 의미가 아니고 자신이 더 큰 세력에 연계되어 있다고 나를 압박하려는 의도를 보인 것이 분명하리라.
아마 일본 전체가 몰려올 것이니 순순히 큐슈를 내놓으라는 협박이겠지만 날 뭐로 보고 협박을 일삼는가?
이이는 여기에 한술 더 떠서 해석을 추가하였다.
“아마 전쟁이 발발하면 등하 등길랑이 선봉장이 되어 하주도와 육주성을 공격할 것이네. 영토를 얻어낸 뒤에 이를 뱉어내더라도 차기 권력자로 손색이 없는 치적을 쌓은 것일세.”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른 형태로 조선과 싸우게 되었지만 큰 문제는 아니다.
적이 얼마나 많은 병력을 보낼지 모르지만 보급 문제 때문에 20만 대군, 조선식으로는 10만의 정병과 10만의 보인을 보내는 것도 힘겨워하리라.
결국 히데요시를 앞세운 누군가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계속 논의가 이어지자 정지운은 코웃음을 치며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냥 쳐들어오는 대로 다 때려죽이면 되는 일이 아닌가. 내 앞에서 조랑말도 제대로 타지 못하는 그 대머리 난쟁이를 몇 번이나 죽이고 싶었는지 아는가? 내 호분위는 아니더라도 북인 기병 일만 명 정도를 하주도에 보낼 것이니…….”
“북방이야 부유한 고장이지만 하주도의 인구는 오십만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고장이지 않습니까. 그 많은 기병이 온다면 군량은 어떻게 댑니까? 하주도는 이미 병졸들로 미어터질 지경입니다.”
기병 일만을 추가로 파병한다. 말은 쉽지만 말(馬)은 끔찍할 정도로 전비와 곡식을 소모하는 생물이다. 기병 일만이면 예비 말이 3필이라 가정할 때 4만 필이 넘는 말이 하주도에 온다.
말은 풀만 먹지 않는다. 전쟁을 위해 몸의 근육을 철저히 단련하는 말은 입신체비를 하는 사람처럼 콩과 귀리, 그리고 보리를 퍼먹으며 양만 따져도 사람의 세 배를 먹는다.
북방이야 인구 대비 농지가 넘쳐나니 감당할 수 있지만 좁아터진 하주도에서 인마 포함 17만 명의 식량을 댄다면 경상도의 환곡을 털어내야 하리라.
정지운은 입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숙이자 나는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왜인들이 어떤 모습을 보이건 간에 대내씨(오우치)가 앞길을 막고 육주성이 시일을 벌면 충분하겠지요. 왜인들이 미쳐서 십만 대군을 보낸다 하여도 하주도의 방비라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습니다. 이후의 일은 어떻게 됩니까?”
내가 고개를 돌리자 함대를 이끌고 두 달, 실제로는 한 달 만에 여송 인근에서 북상한 대양도수영 절제사 이윤범이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이후에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수영에서 함선을 파견하고 지방군을 들이부어 전선을 고착시킨 다음 제가 이끄는 대양도수영 함대와 정 수사께서 인솔한 경기수영 함대가 모조리 쓸어버리면 되는 일이지요.”
“하긴 유 관찰사쯤 되면 한 달의 시일 동안 십만 대군을 능히 상대하고 오히려 몰아붙일 수 있겠지. 다들 유 관찰사의 능력을 알지 않는가?”
모두 나를 잘 알고 있었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최악의 사태를 염려하여 방어체계를 개편해야겠지만 다들 군사 방면으로는 힘 좀 쓰는 사람들이니 추가 의견이 제시되었다.
“이번 기회에 대내씨와 상삼씨(우에스기)에게 조금 부담을 전가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보입니다. 수성에 능한 충무위를 더욱 많이 대내씨에게 파견하고 호분위 병력의 일부를 상삼씨에게 파견하면 어떻겠습니까?”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게 만들면 병력이 분산되니 참으로 좋은 일이오. 하지만 눈을 돌려도 왜인들의 병력이 줄어들 뿐 야욕을 거두진 않을 것이오. 그럼 대체 언제 쳐들어올 것 같소?”
답을 내리지 못하겠다.
1592년이라 하면 너무 늦을 것이며 놈들이 아무리 바보라도 남경에서 세 배의 병력을 갈아먹은 내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쳐들어오지는 않으리라.
이이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나를 바라보고 다른 무관들을 바라보며 임시로 결론을 내렸다.
왜국의 수뇌가 누구인지 모르니 보수적인 결론이 나왔다.
“유 관찰사가 후임자에게 자리를 넘기고 돌아오는 갑신년(甲申: 1584년) 이후이겠지요. 놈들도 농번기에는 군사를 움직이지 않을 것이니 그해 가을걷이가 끝난 뒤에 공세를 시작할 겁니다.”
정보가 부족하니 관찰사를 교체한 직후에 쳐들어오리라는 결론 외에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이는 코웃음을 치더니 나를 바라보면서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 유 관찰사는 갑신년 삼월에 도성으로 돌아왔다 다시 하주도에 몰래 들어와 방비에 힘쓰게. 놈들은 수성에 재주가 있는 이가 돌아갔다 여기고 방심할 것이야.”
근데 내 몸은 조선 관리들 가운데 왜소하고 체지방도 별로 없는 편인데 들킬 것 같은데?
생각해 보니 그냥 근육과 살을 동시에 찌우면 편한 일이다. 살이 좀 붙어 비대해진 나를 본 히데요시의 표정이 어떻게 일그러질지 궁금하군.
* * *
후지와라 가문에 소속된 히데요시, 정확히는 후지와라 토키치로의 저택의 침실에서는 악몽에 짓눌린 이의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사지를 허우적거리는 히데요시는 조선 사신이 돌아간 지 한 달이 지난 오늘도 악몽을 꾸고 있었다.
[내 이런 재미를 느끼고 싶구려!]
어느새 몇 배는 거대해져 평범한 근육덩어리 조선인으로 탈바꿈한 유성룡은 바둑판도 아닌 거대한 누각을 들어 올려 히데요시에게 내던졌다.
점점 더 거대해지는 근육과 누각에 질린 히데요시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아아악 살려줘!”
“여보! 여보! 어서 일어나세요!”
히데요시의 아내 네네(寧々)가 어깨를 잡아 흔들자 잠에서 깨어난 히데요시는 주전자의 물을 들이켰다.
벌써 한 달째 악몽에 시달리니 쥐새끼 같은 몰골에서 굶주리고 병든 쥐새끼의 몰골이 되었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목숨을 구할 수단이 철저히 무너져 내렸다. 오해를 넘어서 지독한 결례를 범했으니 상대는 자신이 뭐라 하건 믿지 않을 것이며 아마 자신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철저히 대응하리라.
일이 틀어진 이유는 자신의 방만함 때문이라 할 말이 없었다.
다케다 가문에서는 자신을 시켜 접대를 하라 했었고, 본래 계획대로면 한 번 지고 설욕전으로 이긴 다음 억지로 지면서 자신이 꼭두각시인 신세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하지만 상대가 그렇게 바둑을 잘 둘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일 층에서 대기하던 여덟 명의 기사가 처참히 패배하였고 닛카이(日海: 혼인보 가문의 당주, 당대의 바둑 명인)라 불리던 젊은 승려도 기보를 보더니 사람의 실력이 아니라 하였다.
히데요시가 머리를 쓰다듬으니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이 한 움큼 떨어졌다. 얼굴이 흙빛으로 변한 데다 지나친 담즙분비로 초록색 변이 나오니 사람 같지도 않은 구더기의 몰골이 아닌가.
그가 몸을 억지로 일으키자 아내가 고개를 숙이며 말하였다.
“조선 사람을 접대하는 일에 실패하였다고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하였습니까? 혹시 이 천녀(賤女)가 짐이라도 되신다면 당장 파혼하여도 괘념치 않을 겁니다.”
“일없소. 그나저나 이제 촌마게(상투)를 틀 머리조차 별로 남지 않았는데.”
아내도 상황을 짐작하고 있기에 파혼하고 도망치라 하였지만 히데요시는 억지로 참았다.
사람이라면 온갖 고생을 함께한 아내를 어찌 버리겠는가. 물론 히데요시도 젊은 시절에는 계집질을 조금 하였지만 적어도 아내를 보아 첩을 들이지는 않았다.
새벽닭이 울고 출근 시간이 다가왔다.
한숨을 쉰 히데요시는 시체나 다름없는 몰골로 인사를 올렸고 다른 누구도 아닌 다케다의 명신(名臣) 중 하나가 그를 불러냈다.
“네놈이 지금껏 가진 재주에 비해 한미한 출신이었다고 하지만 이제는 격에 맞는 가문에 들어갔으니 매사에 항시 주의하라 하였었지. 하지만 그 말을 지키려고 노력이라도 했어야지.”
“죄송합니다. 조선의 사람을 만나게 되니 눈앞이 깜깜해지고 앞의 일을 모면하려 중언부언(重言復言)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엉뚱한 오해를 사게 되었습니다.”
다케다 가문을 50년 동안 섬기며 80차례의 전쟁에서 한 번도 상처를 입지 않은 맹장 중의 맹장인 바바 노부후사(馬場信房)가 칠순이 다 되어 쪼글쪼글해진 얼굴로 히데요시를 나무랐다.
히데요시 입장에서는 그나마 말이 통하는 노신(老臣)이자 권신이라 편안히 대할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한 층 위에서 들리는 논의조차 아닌 서로를 탓하는 소리는 그의 마음을 더욱 심란하게 만들었다.
-대체 정보가 어디서 노출된 것이오! 지금 우리가 모을 수 있는 병력이 38만인데 조선에서 40만을 논했소! 이는 간자가 깊숙이 들어와 정보를 흘린다는 말이오!
-간자가 문제가 아닙니다! 주군께서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논의를 나누셨습니까! 본래 조선을 격노하여 부른 뒤 어르고 달래 군사를 파견하여 적을 정탐하는 일이 먼저가 아닙니까!
-쵸소카베(長宗我部元親: 쵸소카베 모토치카) 당신이 위협을 가해도 좋다 하지 않았소!
-그건 제 책임이 아닙니다. 저야 시마즈 놈들을 위협하라는 간언을 드렸지 그 이상은…….
“지금은 정국이 불안하니 네가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내가 다케다의 정수를 모은 군략을 지금껏 가르쳤으니 어서 솔선수범하여 선봉에 설 준비를 하여라.”
정국이 불안한 수준이라면 차라리 나을 것이다.
지금 교토 정계는 수뇌인 채 부하를 통솔하지 못하는 다케다 가츠요리의 방만한 태도와 서로 책임을 떠넘기려는 각지의 명가들이 한심한 작태를 드러냈다.
정치에서 관심을 돌리고 다케다 가문을 섬기는 무장이야 충성심이 대단했지만 그 이외의 영주들은 뜻을 결집하지 못하였다.
논의는 점점 더 격해져 아예 막돼먹은 소리가 들려왔다.
-남만인을 고용합시다. 한 노예 일만 명 정도를 잡아다 싼값에 팔고 금이나 은을 좀 쥐여주면 남만 놈들이 남쪽에서 난을 일으키겠지요!
-그건 좋은 생각이군. 당장 남만인들을 불러들여 이번 일에 대해 논의해보게.
히데요시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남만인을 불러들여 뭘 한단 말인가? 지금 막부에 자신보다 뛰어난 놈이 아무도 없단 말인가?
자신들이 조선과 전쟁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들으면 강대한 조선과 붙어 자신들을 털어먹지 왜 약소한 막부의 손을 들어준단 말인가.
그러자 바바 노부후사의 일갈이 들려왔다.
“네놈! 이런 중요한 자리에서 마음을 헛되이 두지 말라 하였다!”
“며…… 명! 명심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안색이 좋지 않은걸. 무언가 병이라도 생겼더냐? 근래에 들어 여색을 완전히 끊었다 하였는데 너무 참아도 곤란하다. 자고로 명가는 후손을 많이 남겨야 좋은 법이지.”
히데요시의 목 끝까지 원망의 말이 올라왔다 도로 삼켜졌다.
명가에서 후손을 많이 남기면 뭘 하는가? 자신처럼 가족을 아끼고 챙겨주기라도 한단 말인가? 이 시대의 가족은 소모품이다.
아들은 중도(동성애)를 위한 미동으로 보내고, 딸은 다른 유력자의 첩실로 보내며 어머니는 인질로 쓰는 이 삭막한 시대에서 뭔 소리를 한단 말인가.
하지만 병이라는 말에 숨통을 틀 기회라 여긴 히데요시는 고개를 숙이며 말하였다.
“요즘 섭생도 잠자리도 제 분수에 맞지 않아 계속 그르치는 것 같습니다. 잠시 예전에 근속하였던 사카이에 다녀와 마음을 풀고 오려 합니다.”
며칠 정도는 사카이에 다녀와도 괜찮으리라.
다녀오는 김에 어머니를 치료하였던 용한 의원에게 가서 침도 좀 맞고 평소에 시주하던 사찰에 가서 불공을 올리면 마음이 더욱 편해질 수도 있겠지.
아니나 다를까, 히데요시를 본 의원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어서 침을 맞으라 하고 약을 지으러 창고로 들어갔다.
사지의 기운을 보하는 침을 맞던 히데요시는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의원님! 작약과 천궁을 가져왔습니다. 아주 향이 강해 효험이 대단할 것 같군요.”
자신이 출세하기 전부터 가능성을 보고 투자한 젊은 상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목소리였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더니 따라붙은 시종을 본 히데요시는 한참을 고민하다 고니시를 불렀다.
“유키나가 자네인가? 이런 먼 곳에서 만나게 되다니 참으로 기쁜 일일세. 그렇지 않아도 자네와 같이 상재(商才)가 뛰어난 이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네.”
“키…… 아니, 후지와라 나리가 아닙니까? 미천한 상인에게 뭘 물어볼 것이 있으신지요.”
키노시타에서 후지와라가 되어 나리라는 존칭이 붙었지만 아는 사람을 만나니 반가웠다.
조선에서 입체신비인지 신비입체인지 뭔지 하는 고난을 겪은 고니시는 그 거대한(일본인 기준으로) 체격으로 인사를 올렸다.
자리에서 목만 까닥거리며 여전히 흙빛이 맴도는 얼굴로 고니시를 맞이한 히데요시는 잠시 고민하다 자신의 사정을 빙빙 돌려가며 이야기했다.
“후지와라 가문에 양자로 들어오며 큰 어른이 되었으니 온갖 친척들이 손을 벌리게 되었다네. 더군다나 내외가 육촌이 난해한 문제를 겪고 있어 도움을 주려 하는데 조언이 필요하군.”
“제가 의원은 아니지만 약종상으로 여러 해를 살고 보니 무슨 일인지 알겠습니다. 낯빛만 보아도 심화(心火)가 뼈에 스미실 지경이시군요. 대체 무슨 문제입니까?”
히데요시는 잔머리 하나는 좋았다. 오다 아래에서 출세할 적에 대국을 보는 눈은 부족해도 순간적인 재치는 제일이라 칭찬을 받았던 적이 많은 사람이었다.
자신의 처지를 한 상인의 처지로 치환한 히데요시는 제발 들키지 않기를 빌며 큰일은 아니라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말하였다.
“내 육촌이 겪는 문제가 복잡하다네. 뼈 빠지게 일하여 상회를 차리고 큰 거래 하나를 성사하였다네. 문제는 그 거래가 대상(大商)이 담당하는 남만의 물품을 사들이는 일인데 시세를 몰라 거래를 성사하면 애물단지만 떠안게 되는 꼴이라네.”
“그러하면 거래를 끊어버리면 되는 일이 아닙니까?”
“내 말이 그 말일세. 하지만 거래를 끊으면 상회에 출자한 육촌의 친인척이 어떻게 되겠나? 신의를 지켜 거래를 성사하면 조만간 손해를 입고 자신이 파산하며, 신의를 지키지 않으면 출자한 친척들이 파산하네. 이 문제를 어떻게 하겠나.”
큐슈를 공격하면 자신이 죽으며, 큐슈를 공격하지 않으면 친척과 가족이 화를 입는다. 여기서 관계만 바꿨으니 들킬 염려는 없을 것이다.
시종이 괜한 소리를 한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는 소리를 듣자 히데요시는 안심하며 고니시를 바라보았다.
한참 눈을 굴리던 고니시는 한숨을 쉬며 말하였다.
“후지와라 나리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자고로 무상(無償)의 행복은 없는 법입니다.”
“무상의 행복이 없다 하였는가?”
“그렇습니다. 행복을 얻으려면 언제나 근면히 노력해야 하는 법이지요. 사실 가장 간단한 해결책은 후지와라 나리께서 나서서 거래를 끊어버리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명가의 양자가 권력을 휘두를 수 없는 노릇이지요.”
“바로 그게 문제라네. 하지만 녀석이 나에게 어찌나 사정하는지 피가 마를 지경이군.”
“하지만 돌파할 방법은 있습니다. 애초에 그 대상이 사특한 마음을 품고 후지와라 나리의 육촌에게 물건을 비싼 값에 떠넘긴 꼴이 아닙니까. 신의를 들먹이며 패악을 부린 것이지요.”
내 말이 그 말이다. 빙빙 돌려 말했지만 가슴속의 응어리가 풀린 히데요시는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고니시를 보았다.
하지만 고니시는 의외의 결론을 내렸다.
“참으로 험난한 일이지만 거래를 성사한 이후 상대를 배반하여 손실을 입히면 될 것입니다. 손해를 입을 것을 알면서 신의를 지킨 사람이니 주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다면 상인으로 명성을 떨치겠지요.”
“지금 뭐라 하였나? 거래를 성사한 이후 배반하라고?”
듣고 보니 그럴싸한 말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큐슈를 공략하는 데 성공해도 훗날 외교 문제가 터지면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이었는데 애초에 배신을 전제로 움직이면 큰 문제가 아니다.
큐슈를 전력을 다하여 공략하고 조선인들을 쫓아낸 다음 가족들을 큐슈로 불러들여 결사항전을 제창하다 다케다를 배신하고 조선에 큐슈를 넘긴다면?
조선 입장에서도 떨떠름하지만 능력이 검증된 자신을 신하로 받아들이리라.
“되었어! 그런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었군!”
“간단한 방법이 아닙니다. 상대가 얼마나 큰 상인인지 모르겠지만 갓 출세한 상인이 잔뼈가 굵은 상대에게 저러한 방책을 취하기는 참으로 힘든 일이 아니겠습니까. 혹여나 실패하면 이도 저도 못하고 살해당할 겁니다.”
“그 일이야 내가 힘을 조금 쓰면 될 것이네! 내가 잔재주에 능한 사람인 것을 잊었나!”
흙빛으로 질려가던 히데요시의 피부에 혈기가 넘쳐나고 뒤틀린 내장이 제자리를 찾는 것 같았다.
손을 놀려 온몸에 박힌 침을 뽑아낸 히데요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니시의 손을 맞잡고 흔들어댔다.
“이제야 마음의 울화가 풀리는 것 같군! 자네와 잠시 대화를 나누었음에도 해답을 찾다니! 자네가 혹여나 궁지에 몰려 목숨이 위태롭다 하여도 내 반드시 자네의 목숨을 구명해 주겠네!”
“목숨? 구명이라니요? 저기 나리!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설명을…….”
어깨를 잡으려던 고니시를 뒤로하고 껑충껑충 경박한 발걸음으로 뛰어나온 히데요시는 팔을 벌리고 장마로 우중충해진 하늘을 보며 웃어댔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했었다.
교토 일대에 거주하는 친척도 재주만 있다면 모조리 끌어다 전쟁에 참가시키면 큐슈에 남아 있게 만들 수 있으리라.
어느새 옷가게에 들어간 히데요시는 검은색에 촌티가 날 정도로 애매한 서양식 복장을 입고 주변 여인들에게 추파를 던지며 춤을 추었다.
“저런 머저리를 보았나.”
한 여인이 기가 차서 뭐라 하였지만 히데요시는 박수를 치고 팔을 돌리며 사타구니를 실룩거리더니 흥에 겨운 미소를 지었다.
사지의 힘이 들어가고 새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인 히데요시는 저 멀리 보이는 거리로 향하며 웃옷을 시종에게 집어 던졌다.
“홍등가에 다녀올 것이니 내일 진시쯤에 보자꾸나.”
앞으로 시간 여유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정말 최선을 다하여 가급적 아군, 정확히는 자신을 따라온 다케다 가문 세력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자신의 세력과 조선 백성들을 온존할 작전을 계획을 세워야 하리라.
#작가의 말
일본의 실세를 예측하지 못한 조선이지만 실세는 없습니다. 일본은 과두정이자 혼돈의 카오스이며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아수라장입니다.
쉽게 말해 개판인데 대장 개가 숨어 있는 게 아니고 대장도 없는 개판입니다.
이제 할 일은 다 했으니 다음 주부터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하겠습니다.
히데요시는 행복을 쟁취할 수 있을까요? 이 히데요시가 행복을 알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