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397화
2부 18장 3화 이성과 감성(1)
고요한 혼노지(本能寺)의 정원에서 처음 만난 조선의 관료 유성룡.
자신보다 훨씬 더 다자이후소치, 아니, 하주도 관찰사로 적합한 사람은 날을 잔뜩 새운 채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가 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에 두지 않기로 했다.
조선과 친한 사람은 마귀 소굴인 교토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조선인답지 않게 작은 체격이니 문재(文才)가 빼어난 사람이 분명하였다.
“알겠소, 내일 진시부터 바둑을 두어보겠소.”
얻어낸 정보에 의하면 사람 여섯 명과 접바둑을 두어도 밀리지 않는다 했는데 실력 하나는 자신이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잘만 하면 바둑을 통해 속내를 전할 수 있을 것이니 감사한 마음에 절로 고개를 숙였다.
“그럼 내일 진시에 뵙겠습니다. 오늘은 날이 어두워졌으니 푹 쉬시고 편히 계시지요. 뭣들 하느냐! 어서 가마를 대령하여 숙소로 안내해 드려라!”
유성룡이 가마를 타고 돌아가자 자신이 타고 갈 가마가 도착하였다.
어울리지도 않는 화려한 은으로 장식된 가마에 오르자 헛웃음이 나왔다. 상대가 잔뜩 긴장하였지만 이미 예상한 일이었다.
“애초에 자신이 있던 자리에 떡하니 다른 나라 사람이 임명되었다 하면 친숙하게 대하는 것이 이상한 법이지. 저렇게 날을 세운 모습을 보여야 정상적인 사람이겠지. 나 같은 머저리만 아니라면.”
이미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뱃속에서는 계속 다자이노소치는 제 의지로 얻어낸 관직이 아닌 버림 패로 임명된 관직이라는 말이 돌아다녔지만 내뱉을 수 없었다.
후지와라 가문의 양자로 들어갔지만 자신은 거대한 감옥 안에 있었다.
교토 한복판의 거대한 저택은 사실상의 감옥이며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은 메츠케(目付: 보좌이자 감시요원)이라 마찬가지이라.
흔들거리는 가마를 타고 저택까지 오니 갑자기 가마가 멈췄다. 밖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가 들리니 대체 누가 자신의 가마를 가로막았단 말인가.
하지만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자 눈이 번뜩 뜨였다.
“토키치로 거기 있더냐? 나 아케치 미츠히데다! 네가 옛 주군의 아래에 있을 적에 많이 도와준 기억이 있지 않더냐! 잠시 이야기라도 나눠보자꾸나!”
다급히 가마에서 내리니 휘영청 뜬 보름달 아래에 달이 두 개가 더 떠올랐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예전보다 더욱 탈모가 심해진 아케치는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올렸다.
“예전에 흩어질 적에는 나 혼자 목숨을 보전한 것 같아 마음에 걸렸는데 이제는 출세하였구나. 종삼위라니 이 험악한 세상에서 대단한 일을 해냈다.”
“아케치 나…… 아니, 옛 주군이 멸망할 적에 조선으로 도주한 분이 아니시오?”
같이 가신으로 있을 적에는 교양이 많고 식견이 대단한 아케치를 우러러보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오히려 목에 힘을 주며 고개를 돌리고 억지로 거드름을 피웠다.
“같이 머리가 번들거리지만 목숨을 건지기 위해 머리를 다 밀어버릴 생각을 어찌하셨소. 머리를 밀어놓고 조선 사신에게 애걸복걸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역겹기 그지없구려. 나는 당시에 죽을 위기를 넘겼소.”
“주군께서 후손을 살리라고 명하셨으니 명을 따라야지! 그리고 대머리? 네 녀석은 스물이 되자마자 머리가 벗겨지지 않았더냐! 이제는 촌마게(상투)를 틀 머리가 부족할 지경인데 아교로 머리를 붙였더냐!”
“이미 종삼위의 품계를 받고 본성(本姓) 가문에 속한 나를 기껏해야 조선으로 야반도주한 사람이 윽박지르다니. 그나저나 옛 주군의 후손은 잘 챙겼소? 혹여나 귀찮아서 내버리고 다른 아이를 속여서 조선에 넘긴 것은 아니요?”
“그 입 닥치지 못할까!”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패용했어야 할 칼을 찾던 아케치는 삽시간에 달려든 호위병의 칼날에 에워싸였다.
자신이 고개를 까딱거리자 호위병들의 칼날이 일제히 칼집으로 빨려 들어갔다.
“일단 옛 주군의 후손이 조선에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더 이상 알아볼 가치도 없는 일이오. 무례한 행위를 하였지만 내 자비로 목숨을 보전하였으니 들어가 푹 쉬시구려. 아케치를 정중히 조선인들이 머무는 숙소까지 보내라!”
“토키치로! 정녕 출세를 하였더니 눈이 돌아가 머릿속에 뇌수 대신 소바(そば)라도 들어찼더냐! 토키치로! 이 가나(仮名: 분화 이전의 일본어)도 모르는 녀석아!”
“가나 정도는 뗀 지 몇 년 전이고 이미 한자도 읽을 줄 아니 염려하지 마시오!”
출세는커녕 한직을 전전하며 시일만 보내서 글을 배울 수 있었으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감옥이나 마찬가지인 저택에 들어서자 모든 시종들이 고개를 숙였지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침실로 들어서자 이미 나이가 찰 대로 찬 아내 대신 미색을 겸비한 첩과 슈도(衆道: 중도, 일본의 동성애 문화)를 위한 미동이 인사를 올렸지만 일언지하에 내쳤다.
모조리 후지와라 가문, 아니, 다케다 가문에서 정해준 이들이니 간자나 마찬가지였다.
자리에 누웠지만 아케치를 만난 덕분인지 잡념이 치솟으며 책을 덮었다.
머리 한 구석에 처박아 둔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며 옛 추억에 사로잡히기 시작하였다.
* * *
어린 시절에는 오 할이 넘는 세금에 시달리던 농민이었으니 배를 곪았으며 친아버지는 그런 생활을 모면하려고 아시가루(足軽)로 징집되어 전쟁에 나가셨고 시신도 돌아오지 못했다.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재혼을 택했지만 집안 형편이 나아지질 않았다.
누나와 이복동생들도 나이가 들며 몸이 커져 집안의 곡식이 부족할 지경이었고 열네 살에 집을 떠나며 이름을 히요시(日吉)에서 토키치로라 개명하였다.
미천한 출신인 데다 외모도 추레하여 이리저리 전전하였고 자신을 눈여겨 봐주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오다 노부나가였다. 외모와 출신은 부차적이며 오로지 천하인(天下人)에 오르고자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네 녀석이 어디 출신이건 어떠한 외모건 있는 힘을 다하면 충분한 법이다.’
덕분에 오다 노부나가의 아래에 있던 시절에는 보람찬 인생을 보냈다.
시골에서 여전히 고생하시던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형에게 손을 보탠다는 동생을 출세시켰으며 누나와 여동생을 제법 든든한 농가에 시집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출세를 거듭할수록 오다 노부나가는 수세로 몰렸으며 이윽고 대 오다 포위망이 형성되어 궁지에 몰렸다.
옛 주군은 조선에 시비를 걸며 전쟁을 일시 중단하기를 원하였지만 다케다의 움직임이 한 발 더 빨랐다.
오와리(尾張) 일대가 불타고 자신도 일천여 명의 아시가루를 이끌고 필사적인 항전을 거듭했지만 가까스로 진멸을 면하고 도주하였다.
사흘이 지나 가까스로 집에 돌아가자 약탈과 폭력이 휩쓸고 지나간 집 안에는 칼을 잡고 끝까지 싸운 동생의 시신과 굶주린 채 울고 있는 조카들 그리고 폭행을 당해 온몸에 피멍이 들어 혼절한 어머니가 계셨다.
어머니를 의원에게 모셔갔지만 의원도 손을 쓸 수 없어 다시 사카이의 명의를 찾아갔다. 조선 사람에게 의술을 배운 의원에게 치료를 받자 위급한 상황을 넘겼지만 어머니의 병세는 심각한 지경이었다.
어머니의 기가 쇠할 대로 쇠하였으니 녹용과 인삼을 잔뜩 넣은 한약이 필요한데 부르는 것이 값이리라.
결국 원수인 다케다 가문의 문을 두드려 배배신(가신의 가신의 가신)이 되어버렸다. 당시의 일을 떠올리자 저절로 눈물이 나왔다.
“그때 할복해서 세상을 떠났어야 했는데. 어머니를 뵐 면목이 없어서 이 꼴이 되었군.”
조카들을 키우고 어머니에게 약을 대며 계속 채무를 쌓아갔지만 어머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혼절하시고 결국 명을 달리하셨다. 언젠가 출세하여 어머니에게 보답하려 하였지만 어머니는 뼛가루가 되어 고향에 뿌려지게 되었다.
원한이 솟구쳐 다케다 가문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싶었다. 마침 조선의 편에 선 우에스기 가문과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전열을 담당하여 자살에 가까운 무의미한 돌격으로 전투를 헝클어트리려 하였다.
하지만 그 무의미한 돌격은 제대로 적중하였다.
병사들을 돌격시키기 위해 한 달 전에 우에스기 겐신이 병사하였다는 거짓말을 하였는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 버렸고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조선군이 신가리(후위대)를 담당하고 있었다.
고작 삼천 명의 조선군에게 자신의 부대를 포함한 일만 명의 병사가 갈기갈기 찢겨나갔지만 조선군도 사태를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이후에는 공을 인정받기는커녕 한직을 전전하며 창고지기나 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석 달 전, 느닷없이 사카이에 머물던 자신에게 임명장이 내려진다 하였다. 당시에는 조카들 뒷바라지를 더 할 수 있다 여겨 한달음에 다케다 가문에 나아가 임명장을 받들려 하였다.
그러나 거대한 함정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내 인생이 왜 이따위로 꼬였는지.”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자신에게 배정된 저택임에도 목소리를 낮춰 이불 속에서 속삭일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자신을 큐슈의 전권을 통치하는 다자이후소치에 임명한다는 명령이 떨어졌다.
임명장을 받은 직후의 상황이 더 가관이었다. 본성가문에 속하는 후지와라 가문에서 자신을 양자로 삼겠다고 한 시점에서야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이대로 있으면 죽거나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신세라고. 이 일을 어찌 모면해야 할지.”
서둘러 가족과 함께 도망치려 하였지만 다케다의 명령이 한발 빨랐다.
조카들은 격식에 맞춘다며 후지와라 가문 아래의 고셋케(五攝家: 섭정을 배출하는 가문)의 양자와 양녀로 입양되었고 누나와 여동생조차 강제로 파혼당하고 이름 있는 가문과 혼사를 추진하였다.
삽시간에 닌교조루리(人形浄瑠璃: 인형극)에서 쓰이는 인형의 신세가 되었다.
아마 자신을 앞세워 큐슈에 있는 조선과 명나라 영토를 공격할 것이며 여기에 응하지 않고 배반하거나 실패하면 가족이 몰살당할 것이다.
설령 승리하여 큐슈를 병탄하여도 외교적 마찰이 벌어지는 순간 자신의 신세는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추락하리라. 미천한 시절의 이름인 토키치로 대신 새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으니 후지와라 가문은 자신을 단번에 내쳐 버릴 게 분명하다.
오로지 출세욕에 미친놈에게 권력을 주어 미안하다고 변명하며 자신의 목을 잘라 조선에 보내거나 아예 머나먼 오지로 유배를 보내 조선과 명나라를 달래는데 사용하리라.
이미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오로지 자신의 속내를 조선에서도 빼어난 수재(秀才)인 유성룡이라는 자가 알아차리기를 빌며 미리 준비한 가락지들을 쓰다듬었다.
“내가 꼭두각시 신세라는 사실을 알면 어떻게든 협의를 보아 계책을 마련할 수도 있겠지.”
감기지 않는 눈을 억지로 감았지만 가슴이 콩닥거려 제대로 마음이 정리되지 않았다. 아마 이번 방법이 실패하면 정말 큐슈로 군을 이끌고 공세를 취해야 하리라.
어떤 방법이든 자신의 파멸 외에는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다.
* * *
지정된 사찰에 한 시간 가까이 빨리 도착하여 연못을 보자 마음이 평안해졌다. 놈이 무슨 수작을 부리건 간에 바둑으로 살살 약을 올리며 마음을 흔들면 속내가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 자리에는 나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이는 아마 지금쯤 일본의 실세인 다케다 카츠요리를 만나 서로의 속내를 주고받으리라. 더욱 힘든 싸움을 하는 이이를 생각하니 나도 용기를 내야지.
그래서 아예 마음을 헝클어트리려고 소역기까지 구해왔다. 이황에게 배운 입신체비와 바둑이 결합한 운동을 하면 녀석이 아무리 대단한 놈이라도 저절로 속마음을 뱉으리라.
가만히 정원을 보니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이거 은각사 아닌가? 형태가 조금 다른 것 같은데.”
“옳은 말씀이십니다. 옛적에 세워진 사찰이지만 한 번 불에 탄 것을 쇼군께서 어여삐 보아 고쳐 지으셨습니다. 다행히도 조선에서 보내온 명화는 화재를 모면해 남아 있습니다.”
어느새 다가온 히데요시의 설명을 듣자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게 은각사라고? 역사가 변하면서 교토에 있던 문화재의 형태도 조금씩 변한 것이 분명하였다.
내 기억 속의 모습과 약간 달라진 정원을 히데요시와 함께 거닐며 은각사의 누각으로 향하였다.
하지만 누각 일 층이 아니고 누각 이 층에 바둑판이 있다니?
“긴가쿠지(은각사)는 볕이 올라오면 땅이 더워져 습기가 차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이 층에서 창문을 열고 경치를 보시며 바둑을 두시지요.”
손을 싹싹 비비며 비굴한 표정을 짓는 히데요시를 보니 품속의 소역기로 머리통을 두들기고 싶었지만 맨손이라면 모를까 나름 칼 좀 쓰는 놈이니 몽둥이만 들어도 내가 패할 것이다.
삐거덕거리는 계단을 밟고 이 층으로 올라가니 여름이라 다다미도 치워져 있고 허술한 마룻바닥이 있었다.
히데요시는 인사를 올리고 나를 먼저 앉히더니 여름치고는 치렁치렁한 옷을 조심스럽게 접고 반대편에 앉았다.
“처음에는 가볍게 두어봄은 어떠하십니까?”
“알겠소.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한번 겨뤄봅시다.”
가볍게 두기는. 녀석의 실력에 맞추어 야금야금 집을 갉아먹으며 속기(速棋)를 두었더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150수가 넘어가기 전에 승부가 갈렸다.
히데요시는 오른손으로 머리를 탁 치더니 바둑돌을 정리하였다.
“유성룡께서도 국수라 불리기에 충분한 분입니다. 저도 어디 가서 기력(棋力)이 약하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으니 심혈을 기울여 생각하고 두겠습니다.”
실력을 보면 대충 바둑학원에서 이 년 정도 배운 수준인데 뭘.
실력을 숨기는 사람과 허세를 부리는 사람은 구분할 수 있는 경지니까 상관없다. 날 이기려면 이지함의 영혼 정도는 불러와야 할걸?
하지만, 삽시간에 실력이 늘어났다.
“보십시오! 제가 방심하는 사람인지라 첫 대국에서는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이거 기력이 늘어난 수준이 아닌데. 아예 두는 방법이 달라졌군.”
소역기를 들었다 내리며 히데요시가 두는 방법을 보니 어딘가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바둑 프로그램도 아니고 마치 생각이 여러 번 바뀌는 것 같이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실력이야 나보다 아래지만 이렇게 갈피를 잡기 힘든 기보를 보이는지라 쉽사리 이길 수 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쩍 무의미한 수를 두니 녀석은 눈을 한참 동안 굴려댔다.
“어허, 바둑 두는 사람 어디 갔소? 내 이두박근을 파열시킬 작정이시오?”
“이런 신묘한 수를 보았나! 일단 여기에 두겠습니다.”
무의미한 수에 엉뚱한 수로 응한다고?
다시 정상적인 수를 두자 곧잘 반응하는데 혹시나 몰라 천천히 밀리는 척을 하며 전체적인 포석을 정비하고 반격을 준비했다.
자신이 승기를 잡았다 생각하는지 히데요시는 싱긋 웃으며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게 제 실력이 아닙니까? 자고로 싸움에서 이기는 법은 한곳 한곳에서 이득을 보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싸움에서 이길 필요는 없소. 전쟁도 마찬가지지. 진정한 승리는 승패로 논하는 것이 아니요.”
히데요시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뭔 미친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으로 변하였다.
내 말이 이해가 안 되지? 근데 나도 조카 녀석이 하는 게임을 보면서 진정한 승리 방법을 배운 적이 있다.
“승패에 집착하면 아니 되는 법이지. 싸움도 전쟁도 바둑도 이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이 격노하여 혼절하게 만들면 이기는 법이라네.”
중학생인 큰조카 녀석이 오른쪽! 하면서 스마트폰을 집어 던진 게임이 있었다.
듣자 하니 인사성이 바른 캐릭터가 인사를 계속하며 상대를 격노하게 만들면 상대는 스마트폰을 집어 던져서 자연스럽게 이기게 된다던가.
각 구간의 싸움에서 이득을 점했던 히데요시지만 몇 수가 더 지나가자 삽시간에 대국적으로 포위당해 수세에 몰렸다.
더 이상 이길 방법이 없는 히데요시는 결국 돌을 두 개 떨구며 불계패를 선언하였지만 표정이 여전히 좋지 않았다.
“상대방을 격노하게 만들어 이기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나는 된다네. 지금부터 그 방법을 보여주겠으니 염려하지 말게.”
확실히 알았다. 대국을 보지 못하고 각 국면의 싸움을 잘한다고? 이놈은 지금 사기바둑을 두고 있다.
일 층에는 히데요시에게 어떠한 방법으로 수를 알려주는 바둑 기사들이 여럿 있겠지. 그리고 바둑판의 각 구획을 담당하며 최선의 수를 제공할 것이다.
그러니 대국적인 싸움을 못 하는 법이다. 여러 기사의 의견이 충돌하면 악수(惡手)만 면할 뿐 묘수를 두지 못하니까.
다음 대국도 천천히 히데요시를 고립시키고 야금야금 갉아먹으니 놈의 눈이 사방으로 돌아가며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잠시 소피가 마려워 측간에 다녀오겠습니다. 이거 제가 도저히 이기지 못하겠군요.”
놈이 일어서자 나도 허리가 뻐근해져서 자리에서 일어나 공좌(스쿼트)를 하였다. 이미 네 시간이 넘게 바둑을 두었으니 출출한 지경이 아닌가.
하지만 히데요시가 앉아 있던 자리에는 이상한 반지가 있었다.
사람의 피부색과 유사한 색의 반지에는 고래수염으로 만든 반투명한 끈이 엮여 있었고 그 끈은 마루의 나무 틈 아래로 연결되어 있었다.
히데요시가 대국을 시작할 때부터 왼손을 바둑판에 올리지 않았는데 이유가 다 있었다.
놈은 왼손으로 꼭두각시 인형을 조종하듯 아래에 자신의 대국 상황을 알려주고 답을 받는 방법으로 나와 바둑을 겨뤘던 것이다. 주변의 시종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내색하진 않았지만 저절로 침이 삼켜졌다.
아마 이 자리에 불러온 이유도 자신이 인형극의 주인처럼 일본 전체를 거머쥔 실세, 혹은 실세가 될 예정으로 권력구도를 개편했음을 드러내는 뜻이 분명하다.
이건 편견이 아니고 철저한 이성에 입각한 결론이다!
#작가의 말
철저한 이성에 입각한 결론이라 생각했지만 철저한 감성적 결론입니다. 애초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보고 의심 안 할 한국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