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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조선-396화 (396/573)

근육조선 396화

2부 18장 2화 임명장

진해대군은 서른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매우 순수한 사람이다. 순수한 사람이라는 말이 빈말도 아니고 이래저래 이득을 취하려는 놈들에게 이용당한 적도 있다.

하지만 지식이 늘어났으니 순수한 성품을 가진 지식인이 되었고 그간 쌓아온 지식을 사용하려는 순수한 욕구가 엿보였다.

내가 설계한 성형요새를 보조하는 두 산성의 설계를 보자 절로 구역질이 나왔다.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설계하셨다니 참으로 대단합니다. 하지만 북쪽에 있는 이 성은 대체 뭡니까? 이거 혹시 왜성의 구조 아닙니까?”

“바로 보았소. 내가 성에 대한 서적을 일 년 넘게 탐독하였는데 세상에는 별의별 성이 많더구려. 왜성은 여러 겹의 환(丸: 마루)이라는 구역을 두어 적을 방호하였소. 이걸 아국의 축성술과 결합하니 제법 좋은 성이 되더구려.”

일본의 산성은 성벽이 낮고 어중간한 경사로 축조하는 데다 여러 구획으로 나눈다. 만들 때는 편하지만 사람이 밧줄을 걸 필요도 없이 뛰어 올라갈 수 있다더라.

결국 한 구획이 함락당하면 적이 재정비할 거점을 마련하는 것이며, 재정비한 적의 군대는 바로 다음 구획으로 진군하는데 이를 막을 방법이 없다. 홍윤성이 이런 방식으로 성을 많이 함락시켰고 약점이 만천하에 공표되었다.

반면 이 산성은 일본 성과 비슷하지만 한 구획마다 사람을 죽이기 아주 좋은 대량살상지대가 끼어 있었다. 각 구간을 크게 ‘ㄷ’ 자로 구획하여 적이 재정비할 장소 대신 아군이 공격할 위치를 마련한 것이다.

진해대군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였다.

“내가 단면도(斷面圖)를 비롯하여 각 도본(도면)을 여러 방면에 걸쳐 생각해 보았소. 적의 시야를 가리고 아군이 훤히 볼 수 있는 장소에서 화살과 보총을 쏘면 적의 시체가 성벽을 쌓고도 남을 지경일 거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홍윤성의 전기(傳記)를 떠올리자 공략법이 나왔다.

간혹 방어력이 좋은 산성이 나오면 충차(衝車)에 화약을 넣어 돌격시켜 성을 무너트렸다더라. 이럴 경우 살상구획이 붕괴할 거다.

“혹여나 적이 화포를 사용하거나 충차에 화약을 잔뜩 넣어 돌격하면 어찌 대응하실 작정입니까? 제가 보니 보총을 쏘긴 적합하지만 화포를 쏠 거리는 나오지 않습니다.”

“화포라 하였소? 그럴 경우에는 적도가 엄습한 구획의 성벽을 무너트려 진격을 막으며 산 정상에서 쏘는 화포가 닿을 길을 마련하면 충분하지 않겠소?”

나는 상상조차 못 한 발상이다. 내 입장에서 성은 언제나 튼튼하게 자리를 지켜야 하며 성이 무너지면 그걸로 성의 기능이 끝났다 여기고 있다. 하지만 진해대군은 순진한 시선으로 이를 분석했다.

성이 무너진다고? 무너지면 적의 진군도 막히고 무너진 성이 새 사로(射路)로 변하니 좋지 않나?

진해대군은 멋쩍은 듯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하였다.

“어차피 성이 무너지는 일은 흔한 법이오. 또한 왜성은 여러 구획을 나누어 축성하니 맨 위의 본성이 함락되지 않으면 복구하는 일은 큰 문제가 아니지 않소. 하지만 다른 성은 사방에서 에워싸일 수 있으니 삼년산성을 참고하였소이다.”

다른 성 또한 구역질이 치솟기는 마찬가지이다. 남쪽의 성은 삼년산성 축소판인데 크기가 작아졌을 뿐이며 북쪽을 제외한 세 성문은 모두 현문(懸門)으로 지면에서 3m 넘게 띄워두었다.

여기에 각 성문마다 다른 방어체계를 만들었으니 공격자는 죽는 방법을 고를 지경이리라. 내가 더 이상 개입할 방법도 없으니 홀가분한 마음으로 진해대군에게 설계도를 넘겨주었다.

진해대군이 데려온 인부들과 새로 징발된 하남도 주민들은 겨울 동안 산성을 쌓아 올렸다. 심지어 조정에서 얼마나 많은 예산을 보내는지 은자 일만 냥 정도는 진린을 위해 보낼 수 있었고.

시일이 지나 하주도 관찰사에 부임한 지도 1년이 된 1582년 3월이 되자 모든 일이 순탄하게 풀릴 것 같았다.

조정에서 내려온 장계와 하주도까지 전달되는 조보를 받아드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독고율인가 이놈은 제정신이군. 그나마 요동 일대에서 제대로 된 사람 행색을 하니 얼마나 좋아. 제대로 미치지 않으면 두들겨 맞고 대부분 정신을 차린다니까.”

조정 대신들이 보내온 여러 문서를 보니 요동 일대가 안정화되었다는 소식이 있었다.

도적 우두머리 가운데 유일하게 생존한 독고율은 도적들을 인솔하여 밭을 갈고 제대로 된 도시를 만들며 약탈을 엄금한다더라.

심지어 조선에 사람을 보내 말을 팔고 농기구와 각종 물품을 사들이고 입조(入朝)의 의사를 표시하였으니 조정에서는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난데없는 서신이 전달되었다.

“막부에서 뭔 서신을 보냈나. 분류로 따지면 서신이 아니고 국서(國書)에 가까운데. 뭐? 임명 통지문?”

임명 통지문이라는 글귀를 본 순간 정신이 번쩍 들며 등골이 싸늘해졌다.

여기에 어느 누구를 임명하려고 통지문을 보내? 사람을 불러 알아보니 이 서신을 전달한 사신조차도 전달만 했을 뿐 바로 도망갔다는 이야기를 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여니 그 안의 내용물은 내 상상을 뛰어넘다 못해 다케다 가문에 속한 놈들의 두개골을 개봉해 머릿속을 확인해 보고 싶어질 수준이었다.

“이놈들이 지금 미쳤나? 하주도 관찰사인 내가 두 눈 뜨고 똑바로 살아 있으며! 명나라에서 파견된 섭 포정사 대감도 있는데 감히 새로운 관찰사를 임명해!”

머릿속에 피가 몰려오다 못해 뒷골이 당기고 숨이 가빠올 지경이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혈압을 낮추려고 애쓰고 다시 문서를 확인하였다.

[큐슈 단다이(探題) 직을 역임한 시부카와 가문의 후예가 자취를 감춘 지 110년이 지났다. 이로 인해 큐슈의 기강이 흐트러졌으니 금년부터 다자이노소치(大宰帥: 대재수)로 후지와라 토키치로를 임명할 것이며 추후 새 단다이를 부임시킬 것이다.]

[또한 신임 다자이노소치 휘하 장수와 신료들을 선별하여 부임시킬 것이니 이에 대하여 논할 용의가 있다. 서로의 신뢰를 표하는 일이니 통신사(通信使: 믿음으로 통한다는 뜻)를 파견하길 촉구하는 바이다.]

“미쳤군! 아주 제대로 미쳤어! 아국과 명국에게 할양하고 백 년이 넘게 지난 구주에 뭔 행패란 말인가! 뭐? 옛날에 실종되어 남은 고손(高孫)이 있어도 마흔이 되었을 가문이 어쩌고 어째!”

주먹질에 책상이 무너지고 서류들이 산더미처럼 흩날리며 방을 메웠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의자 손잡이를 분질러 버리자 밖에 있던 아케치 미츠히데가 서둘러 달려와 나를 진정시키려다 내 힘에 저 멀리 날아가서 뒹굴어 버렸다.

“미안하게 되었네. 내가 체격이 작아도 힘이 좀 강해서 말이야.”

“옛 주군이었으면 발로 걷어차고 몽둥이로 두들겼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집어 던져졌으니 크게 상하진 않았군요. 잠시 진정하시고 서신을 보십시오. 이 서신이 아주 짧은 것 같아 보여도 많은 내용을 담고 있군요.”

“많은 내용이라 하면 어디 설명이나 해보시오.”

잠시 진정하자. 숨을 고르고 있자니 일본에서 나름 명망 높은 귀족 가문 출신인 아케치 미츠히데이니 내가 모르는 속 내용을 알 수 있겠지.

미츠히데는 가장 먼저 임명된 이의 이름을 짚더니 의문을 표시했다.

“보시다시피 새로 임명된 이의 성은 후지와라(藤原) 가문이라 하였는데 후지와라 가문은 옛적에 덴노께서 하사하신 본성(本姓) 가문에 속합니다. 하지만 이름이 격에 어울리지 않게 낮습니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듣고 보니 좀 이상하구려. 등길랑(藤吉郞)이면 등나무 아래에서 얻은 사내라는 뜻인데 천박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구려. 아국으로 따지면 종친의 본명이 개똥이라는 소리가 아닌가?”

“바로 보셨습니다. 나름 격식을 따지는 가문에서는 양자를 들이건 아명 대신 본명을 내리건 이렇게 격이 떨어지는 이름을 쓰지 않습니다. 최소한 빼어날 수(秀) 정도는 쓰지요.”

뭔가 뒤가 구리다는 것은 짐작했지만 그걸로 끝난 것은 아니다.

아케치 미츠히데도 상대가 뭔 짓을 했는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난색을 표하면서 답하였다.

“솔직히 말씀드려 저도 놈들의 속내를 알고 싶을 지경입니다. 만약 논의로 타협을 보고자 하였다면 국서를 보낼 것이며 설령 전쟁을 일으키려 하여도 국서를 보내 조선의 경계를 줄였을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아무런 이득도 없이 그저 후지와라 토키치로라는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놈을 관찰사 아니 도독(都督)으로 임명하였단 말이군. 종삼위이니 나와 품계도 같구려.”

일본의 품계는 당나라 시절의 품계를 그대로 답습해 조선보다 두 품계씩 높다. 종삼위이면 조선 기준 종2품, 정사위이면 조선 기준 정3품인 방식이다.

조선의 경계심만 키워서 얻는 것이 뭐일까 했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토키치로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다.

고니시의 지인이자 지극정성의 효자인 키노시타 토키치로? 그놈이 출세해서 엉뚱한 관직을 얻은 것은 아닐까 궁금하다.

“내가 왜국에 지인이 조금 있는데 개중에 고니시 유키나가라는 자가 있었네. 그가 일전에 키노시타 토키치로라는 장수를 소개했는데 항상 전열에 나서고 부모를 지극히 모셔 평판이 좋더구려. 그자가 새로운 성을 받은 것인지 궁금한데.”

“토키치로 녀석 말입니까? 그 녀석은 제가 도주할 적에도 저보다 한참 아래에 있던 녀석입니다. 언제나 출세하려고 악을 쓰고 있지만 출세는커녕 한직이나 살아남을 가망이 적은 돌격대를 통솔한다 하더군요.”

“자질 하나는 뛰어난 자가 아닌가? 듣자하니 몇 년 전에 상삼씨(우에스기) 가문이 크게 패할 적에 전열에 나서서 돌격하여 상삼씨의 진영을 무너트렸다 하였는데.”

“당시의 일이 명확히 밝혀지자 큰 보상을 받지 못했다 하였습니다. 이미 적장이 변사(變死)하였으니 어차피 무너질 전열이었다고 은자를 조금 받고 말았다 했지요. 녀석은 출신이 한미해 큰 대접을 받지 못할 겁니다.”

무언가 이상하지만 내가 직접 다자이노소치로 임명된 토키치로라는 놈을 만나봐야 직성이 풀리겠다.

그렇지 않아도 서신의 뒤에는 신뢰를 얻고자 하니 통신사를 파견하라는 말이 있으니 내가 직접 나서야겠다!

* * *

두 달이 지나고 조정에서는 왜국의 속내를 알고 싶다며 정말 통신사를 보냈다. 그리고 통신사의 대표로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보내지 않는 고위 관료를 정사(正使)로 보냈으니 다른 누구도 아닌 율곡 이이였다.

“좌찬성께서 직접 방문하시다니. 주상전하께서 엄색(嚴色)하셨나 보군요.”

“진노하시다 못하여 용상(龍床)을 옆으로 집어 던지셨네. 조금만 더 진노하셨다면 아마 집어 던진 용상을 부숴 버리셨겠지.”

“용상은 커다란 못으로 바닥에 박아 고정시키시지 않습니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게. 당시의 일을 떠올리면 나도 분노가 치밀어 올라 더 이상은 견디기 힘들 것 같군. 대체 어디서 버릇을 배워먹었기에 이런 막된 서신을 보내는지…….”

용상이 힘으로 잡아 뽑히는 물건이던가? 이 시대의 용상은 근육이 넘쳐나는 왕을 지탱하기 위하여 본래 역사보다 더욱 커졌고 못 여러 개로 바닥에 고정시켰다.

주상전하는 어지간한 일에는 화를 내지 않는데 이건 일본 놈들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어갔다. 통신사라고 파견된 인원들을 보자 하나같이 숨이 막혀오는 조합이다.

대다수가 장수인데 이 시대의 장수들은 어중간한 일이 아니면 최소한의 병력을 끌고 온다. 즉 조선 영토인 하주도에는 난데없이 정예병들이 들어찬 상황이다.

이이는 뒤를 돌아보더니 한숨을 쉬고 사람들을 소개하였다.

“혹여나 왜국이 삿된 마음을 품을지도 모르니 여러 사람을 보냈네. 대양도수영 관찰사인 이 수사(이윤범)는 물론이요. 북인의 지주이자 호분위(虎賁衛)의 총관인 정 군관(정지운)도 끼어 있지.”

“대다수가 문관들이 아니고 무관들이군요. 전체적으로 체격이 조금 작아져서 왜인들이 아국을 얕잡아 볼지도 모를 지경입니다.”

“어쩌겠나. 입신체비를 능숙하게 익힌 자는 체격이 크지만 체격에 비해 무술 실력이 부족하고. 정작 훈영제식법으로 몸을 단련한 자는 체격이 작지만 무술 실력이 월등하지 않나.”

생각해 보면 조선의 문신(文臣)이라는 이들은 대부분 덩치가 비대하다. 근육을 아름답고 크게 만드는 입신체비를 익혔으니 싸움 실력은 부족해도 몸 하나는 거대한 것이다.

반면 조선의 무신들은 상대적으로 덩치가 작다. 삼대운동 부류의 입신체비를 제외하면 진짜 싸움에 필요한 근육만 키우는 훈영제식법을 익혔으니 당연한 일이지.

이이는 교토까지 나아갈 일행들을 확인하다 웬 젊은 왜인 남자를 불러들였다.

“이런 중요한 자리에 어찌하여 가주 대신 장남의 모습이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구려. 혹여나 가주인 대내의존(大内義重: 오우치 요시타카)의 신변에 문제라도 있소?”

“불민한 일이지만 좌찬성께서 계시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부친께서는 나병(癩病)을 앓고 계십니다. 작년까지는 심한 부스럼이라 여겼지만 차도가 없으시니…….”

이이도 고개를 돌리며 눈을 찌푸렸고 나 또한 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현대라면 약 몇 알로 간단하게 치료되는 질병이지만 이 시대에는 신의 저주라 여겨질 정도로 끔찍한 질병이다.

명약을 써도 병의 진행을 늦출 뿐 완치는 불가하며 발병하면 십여 년 이내에 목숨을 잃으리라.

기껏해야 남은 인생을 어딘가에 유폐되어 가문을 통솔하다 명을 달리하겠지. 이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요시시게를 다독였다.

“주상전하에게는 장계를 올려 사정을 고변해 보겠소. 다만 몇 년 이내에 주상전하께 나아가 가독(家督)을 물려받을 준비를 하시오. 혹여나 나병이 아니고 심한 부스럼이라면 완치될 가망이 있지 않소?”

안타까운 일이지만 부모가 나병에 걸리면 자식들도 나병에 걸릴 확률이 높다. 이런 상황이니 주상전하는 아예 먼 친척을 가독으로 임명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훗날의 일이니 넘어가자.

이미 이윤범 휘하의 대양도수영 소속 함대가 정박해 있고 정지운도 머나먼 북방에서 사력을 다해 호분위 기병을 파견하였다.

설령 우리가 자리를 비워도 큰일이 벌어지지 않으니 당당하게 항해를 시작하였다.

기나긴 세토 내해를 지나가니 중간에 방문을 촉구하는 영주들도 있었지만 이미 분노와 정황을 자세히 알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찬 통신사 일행은 이런 요구를 마다하고 오로지 항해에 몰두하였다.

이윽고 큐슈에서 출발한 지 17일 만에 일본의 수도 교토의 인근에 있는 사카이(堺: 계)에 도착하였다. 수많은 환영인파고 뭐고 우리의 눈에는 다 미친놈들이 수작을 부려 경계심을 누그러트리는 것이라 여겼다.

환영인사와 연회가 이어지자 조선 출신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씩 썩어들어 갔다.

쇼군인 아시카가 요리야키는 그냥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이며 억지로 끌려왔다는 표정으로 고개만 까닥거리고 있다.

일본의 실세인 다케다 카츠요리가 나와 뭔가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연회장에 나오지 않았으니 정보를 얻을 방법이 없다. 이래놓고 입신체비적으로 어긋나는 식사와 술만 내놓으니 누가 만족하겠는가.

대부분 생선을 사용한 기름진 요리이기에 입에 대는 이도 별로 없었고 환갑이 다 된 정지운은 아예 품속에서 말린 닭가슴살을 꺼내서 으적으적 씹어 먹고 있었다.

이윽고 한 사람이 내 옆으로 와서 인사를 올리며 말하였다.

“송구합니다만 다자이노소치로 임명되신 후지와라 토키치로께서 귀빈을 뵙고자 합니다.”

눈썹이 절로 찌푸려졌지만 놈이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다. 이이에게 이야기를 전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마를 타고 후지와라 가문의 저택이 아닌 엉뚱한 사찰로 향하였다.

실세인 다케다 카츠요리가 이미 이야기를 끝내 놓았는지 사찰은 몇 명의 승려를 제외하고 텅텅 비어 있었으며 금당까지 나아가니 어떤 왜소한 사내가 고개를 숙이며 나를 맞이하였다.

“조선에서 오신 분을 먼 곳으로 다니게 하여 죄송합니다. 저는 다자이노소치로 임명된 키노…… 아니, 후지와라 토키치로라 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네? 그분은 대체 무슨 분입니까? 성이 도요토미(豊臣)면 뜻만 보아도 존귀한 성씨이며 명이 히데요시(秀吉)면 빼어나고 길하다는 뜻이니 더더욱 존귀한 분이 아닙니까?”

저절로 손가락이 올라가며 놈의 얼굴을 가리켰다.

나의 급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지만 나는 저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저 쥐새끼 같은 얼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다!

국사 교과서고 뭐고 이 얼굴을 모르는 한국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외모는 현대에서 보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초상화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체격은 초상화보다 훨씬 작아 왜소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놈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천연덕스럽게 말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분이 어디에 계시기에 저와 혼동하셨습니까? 저는 얼마 전 후지와라 가문의 양자로 들어간 미관말직의 토키치로입니다.”

“미안하군. 내가 착각을 하였나 보구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후지와라 토키치로, 아니,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보자 내 속이 저절로 죄어오며 구토감이 치밀어 오를 지경이었다. 지금 내 앞에서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않지만 녀석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한미한 출신으로 출세에 출세를 거듭하여 일본 전체를 집어삼킨 능력자. 그리고 말년에 미쳐서 그 뛰어난 능력을 조선을 침공하는 데 사용한 괴물 중의 괴물이다.

놈이 어떤 인생역정을 거쳐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본래 역사에서 임진왜란을 일으킨 놈이니 능력 하나는 증명되어 있겠지.

지금 내 앞에서 보이는 태도도 모조리 거짓일 가능성이 있고 실제로는 일본 정계를 장악한 괴물일지도 모른다.

“피로가 깊으신가 보군요. 여독을 푸신 뒤에 저와 같이 바둑을 두어 보심은 어떠합니까? 조선에서 국수(國手)라 불리는 분이시지만 저도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알겠소. 내일 진시(오전 7시)부터 바둑을 두어보겠소.”

마침 잘 되었다. 놈이 뭔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바둑을 두면 사람의 심계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는 법이다.

놈의 교묘한 화술에 밀리지 않고 바둑으로 속내를 짐작해 보면 되리라.

#작가의 말

다음 화는 히데요시의 인생역정에 대해 절반 정도 할애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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