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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조선-395화 (395/573)

근육조선 395화

2부 18장 1화 음영(陰影)

해가 넘어가 1582년이 되었지만 육주성의 성도(省都) 웅본에서는 한겨울임에도 병사들의 훈련이 이어졌다.

백여 년 전 명나라의 영토가 된 육주성이지만 기나긴 부패와 무관심으로 인한 폐해는 차고 넘칠 지경이었다.

새로 육주성의 도지휘사에 임명된 진린은 부패하였지만 뛰어난 인재였기에 이들을 다시 강병(强兵)으로 벼려낼 의지가 있었다.

하지만 이미 부패할 대로 부패한 명나라였지만 육주성에 있던 병사들의 작태는 상상을 초월하였다.

“빌어먹을…… 집결하라 하였으면 천호 휘하에 백호! 군호! 그리고 소기! 이 단위로 집결하여 대열을 갖추란 말이다! 네놈들이 병사라 하였느냐? 차라리 둔전병이 너희보다 기세가 좋겠다!”

이렇게 말은 했지만 지금 소집한 병사들은 상태가 굉장히 나은 편이었다. 소집한 600명의 병사 가운데 부상자와 실종자 몇 명을 제외하고 대부분 집결하였으며 나름 장비가 있었다.

육주성에 척계광이 오기 전까지 왜 왜구들이 들끓었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런 병사들이면 왜구를 상대로 맞서 싸우기는커녕 정예병이 오기 전까지 시간을 끄는 것이 전부이리라.

처음 소집한 병사들은 600명 가운데 300명이 도착하면 다행인 지경이었으며 기병을 보내 조사해 보니 아예 병사임을 잊고 밭을 갈며 농사를 짓던 이들조차 있었다.

지금 소집한 이들도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지 절대적 기준으로 보자면 조선군은커녕 명나라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오합지졸이었다.

진린은 이들의 병장기를 확인해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육백 명의 병사를 소집하였는데 병장기가 오백 개에 불과한 것이 말이나 되나! 병장기는 뒀다가 엿이라도 바꿔 먹었느냐! 아무리 잡병이라도 병장기 두 개는 패용하는 법이다!”

“작년부터 저희가 봉급을 일곱 달째 받지 못하고 있던 터라…….”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가장 큰 문제는 보급부족이었다. 아직 국가 체계가 완전히 붕괴하지 않았으니 병사들은 오 년 주기로 교체되며 배정될 무렵에는 온전한 장비를 갖춘 정예 병사들만 보내진다.

하지만 머나먼 변방에서 밥 먹듯 끊기는 보급을 몇 년간 경험하면 장비는 시장에 헐값으로 팔리고 몸이 축나게 마련이다.

이미 익숙한 일이기에 진린은 갑자기 웃는 낯으로 병사들에게 병장기를 지급하며 말하였다.

“녹봉이고 뭐…… 그러하면 장계를 올리고 항의를 행해야지 대체 뭘 하였나! 병장기를 지급할 것이니 부족하거나 흠이 잡힌 인원들은 서둘러 병장기를 교체하도록!”

군대는 먹어야 힘을 쓴다.

아무리 탐학을 저지르는 진린이라도 군대에 보급되는 미곡이나 미곡을 구매하기 위한 은자에 손을 댈 정도로 멍청한 이는 아니었기에 이런 경우는 윽박지르고 끝내는 것이 당연하다 여겼다.

병장기는 남경에서 출발하는 중에 충분히 챙겨왔으니 여유가 있었다.

이제 언제나와 같이 병사들을 이끌고 온 정천호(정5품 무관)에게 눈을 부라리며 멱살을 잡아챘다.

“일곱 달이나 봉급을 받지 못했다 하는데 네놈의 목을 베어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네놈이 관직에 있다면 어디 말이나 해 보아라! 지엄한 군율에 의거하여 처벌을 행하기 전에 변명이라도 늘어놓아 보란 말이다!”

“제 녹봉을 털어낸 덕분에 여덟 달이 일곱 달로 줄어들었습니다. 덕분에 병졸들이 이탈하지 않고 제자리를 지킨 것이고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황상께 대한 충심이 하늘에 닿을 지경이군! 자네를 보아 내 사재(私財)를 털어서 녹봉을 지급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도록. 또한 병졸들에게도 조만간 미지급된 녹봉을 지급할 것이다!”

급료가 나온다는 말을 듣자 병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진린의 호인 용애(龍崖)를 연호하였다.

본국에서는 병사들을 지나치게 옥죈다며 탄핵을 받았던 진린이지만 육주성까지 내려오니 모범을 보이는 데다 유능함까지 겸비하였다 칭송을 들을 지경이었다.

겉으로는 병사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웃고 있었지만 고개를 돌리자마자 진린의 표정은 한없이 뒤틀리고 일그러졌다. 처음에는 재물을 톡톡히 얻어낼 수 있겠다 여겼지만 오히려 자신의 재산을 탕진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부패를 저지른 이들을 엄히 처벌한 진린이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답이 없었다. 엄격한 군율을 바탕으로 처벌을 내리자니 육주성 주둔군의 절반 정도의 목을 날려야 처벌이 끝날 지경이다.

얼마나 기강이 해이해졌는지 처음 소집된 병사들이 곤장을 맞고 천호나 백호들의 목이 잘려 나갔다는 소문이 퍼지자 아예 탈주하여 도적으로 돌변하려던 이들조차 생길 지경이었다.

그나마 병사다운 몰골을 갖추자 진린은 기초 훈련부터 다시 시작하였다.

“너희들이 어떻게 병사라 칭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병사로서 소집된 이들이니 외적이 쳐들어왔을 적에 맞서 싸워야 하는 법이다. 지금부터 가장 기본인…….”

“도지휘사님! 포정사께서 찾고 계십니다. 항구에서 행할 업무가 있다 하셨습니다!”

드디어 때가 되었다.

훈련을 실시해야 하지만 진린은 훈련을 휘하 장수인 지휘사에게 위임한 뒤 서둘러 항구로 나아갔다. 조정에 장계를 올리고 여섯 달이나 지났으니 밀린 녹봉과 은자가 운반되었으리라.

하지만 한창 하역을 진행하는 항구에서는 파리하게 질린 안색의 섭몽웅이 진린을 바라보다 눈을 돌렸다.

더 높은 품계인 포정사가 이런 태도를 취하니 알 길이 없었지만 섭몽웅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애석한 말이네만 조정에서 요청한 삼십만 석의 미곡과 이십만 냥의 은자를 보내왔다네.”

“가뜩이나 곳간이 비어 다급한 상황인데 잘된 일이 아닙니까? 혹여나 보내온 물자에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여름에 미곡을 운반하면 간혹 비에 젖어 썩어버리거나 쌀벌레가 생겨 못 쓰게 되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지금은 겨울이니 곡식이 운송 중에 상할 일은 없으리라.

그렇게 여기고 곡식과 은자를 요청하였다. 하지만 거무튀튀한 곰팡이가 피어오른 포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뻔했다.

진린은 분노를 참고 삿대(포대를 찔러 곡식을 검사하는 도구)를 들어 쌀을 뽑아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삿대를 떨어트렸다.

바닥에 흩날려진 쌀에는 바구미가 들끓고 쭉정이와 모래, 그리고 썩은 쌀이 태반이니 창고 바닥에 깔린 찌꺼기를 모아다 보낸 것이리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곡식 포대를 삿대로 찔러 보니 열 석 중 네 석이 이 꼴이었다.

“세상에! 이런 곡식을 녹봉이라고 지급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불 보듯 뻔합니다! 삼십만 석을 보냈지만 이십만 석이나 남아 있으면 다행이겠군요.”

아무리 충성심이 넘치는 이라 하여도 배를 곪으면 충성심이 사라지는 법이다. 그나마 밀린 녹봉을 지급하길 바라며 참고 있는 병사들에게 이런 미곡을 줬다가는 당장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섭몽웅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린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그러니 내가 애석한 일이라 하였네. 내가 대충 확인하였는데 곡식의 물량도 부족하고 품질도 형편없네. 분명 황상께서 명하신 일이며 혹여나 황상께서 명하지 않아도…….”

뒷이야기는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명나라에 있을 적에도 어떤 명령을 내리건 어떤 물자를 보내건 간에 부패한 관리들의 수작질에 걸리면 제대로 전해지는 법이 없었다.

그나마 부패가 덜한 친조선파 관료들의 입김이 들어갔기에 고작 4할의 곡식만 손실된 채 전달되었으리라.

하지만 섭몽웅은 배를 통해 운반된 은자를 열어 보더니 종잇조각들을 꺼냈다.

“미곡은 그나마 나은 편이고 중간에 떼어먹은 놈들이 미곡에서 많이 떼어먹지 못하니 은자를 횡령하였다네. 이십만 냥의 은자를 보내오라 하였지만 지전(紙錢)이 절반이 넘어간다네.”

“지전이라 하셨습니까? 그거 요즘 쓰는 동네나 있습니까?”

명나라는 건국 초창기에 원나라의 제도를 물려받아 지폐를 도입하였다. 하지만 원나라 말기의 지폐인 교초(交鈔)의 가치 붕괴를 경험한 명나라는 지폐를 신용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액면가의 1리(0.1%)에도 미치지 못하며 장례식 때 저승에서 쓸 노잣돈으로 교초를 불태우는 이들이 생길 지경이니 액수만 맞춰서 뒷간에서 쓰기 좋은 종잇조각을 보내왔다.

진린은 머리를 짚으며 한숨을 쉬고는 계산을 시작하였다.

“일단 들어온 이십만 석의 미곡의 절반은 밀린 녹봉을 지급하고 앞으로 나머지 절반은 병졸들을 조련하며 녹봉을 온전히 지급하는 데 쓰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은자가 문제군요.”

“자네의 계획대로면 은자 삼십만 냥은 사용해야 하는데 이래서야 뭘 해보지도 못하겠군.”

할 일은 차고 넘쳐나다 못해 조선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지경이었다.

각지의 성곽을 보수하고 제대로 된 봉화(烽火)를 만들려면 노동력이 필요하며, 이 노동력을 백성들을 징발해 얻어낸다 치면 급여만 따져도 은자 오만 냥이 소모되리라.

항구 개수에도 오만 냥을 소모할 것이며 각종 돈대와 포루를 만드는데도 오만 냥이 들어간다. 하지만 지금 내려온 예산도 친조선 관료들이 힘을 써서 얻어낸 예산이 분명하니 얻어낼 방법이 없다.

진린이 물끄러미 북쪽을 바라보자 섭몽웅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조선의 힘을 조금 빌린다면 외적을 방비하는 데 그리 큰 문제는 없을 것이네.”

“그리되면 누가 번국이고 누가 상국인지 모를 지경입니다. 차라리 백성들의 세율을 일시적으로 올려 필요한 자금을 벌충함은 어떻습니까?”

“세율? 세율을 증액시켜 예산을 벌충하려면 사 할로 올려야 하는데 이럴 경우엔 백성들에게서 반발이 줄을 이을 것이네! 높아진 세율로 백성들이 겨울 농사에 몰두할 것이니 축성은 물론이요 불가할 지경이네! 그리고 농군(農軍)을 육성한다면서!”

농군이라 하여 왜인 백성들을 가르쳐 일종의 속오군(束伍軍)을 만들려 한 진린이지만 부패로 인해 부족해진 예산은 모든 일을 허사로 돌리기에 충분하였다.

생각해 보니 얼마 전에 이달(伊達: 다테)이라는 가문의 사람이 찾아온 적이 있었다. 일손이 부족하니 가급적 병졸을, 아니라면 병졸의 보조를 담당할 보인(保人)을 보내면 값을 치르겠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떠올린 진린은 곰방대를 꺼내 담배를 피우면서 말하였다.

“일전에 왜국 영주 이달휘종(伊達輝宗: 다테 테루무네)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십시오. 백성을 차출하여 이달휘종에게 보내 보인으로 참전시키면 될 것입니다. 자고로 싸움에 참가만 하여도 훈련이 되는 법이 아닙니까.”

“그러다 이달휘종이 대패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보통 패배라면 약간의 손실을 입을 것이지만 대패하면 적도들의 물결에 휩쓸려 많은 보인들이 목숨을 달리할 걸세.”

“이제는 방도가 없지 않습니까. 더 이상 조선에게 손을 벌렸다가는 여기가 조선 땅인지 명나라 땅인지 분간할 겨를이 없을 지경입니다!”

왜인들의 수괴인 다케다의 요청이라면 일언지하에 거절했겠지만 다케다 가문과 척을 져서 여전히 분쟁 중인 다테 가문이라면 여러 병법을 가르쳐줄지도 모른다.

한참을 고민하던 섭몽웅도 어쩔 수 없이 동의하였다.

십 년 넘게 평화로운 삶을 이어가던 육주성의 백성들 가운데 일만여 명이 차출되어 머나먼 북방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인솔하여 분쟁에 돌입한 다테 가문은 대패하여 가주 다테 테루무네는 전사하였고 백성 중 절반만이 가까스로 살아 돌아왔다.

* * *

정월 대보름도 지나자 조정에서 내 보고를 듣고 사람을 파견하였다.

본래 종친(宗親)은 포로로 잡힐 경우를 염려하여 명나라 외의 타국에는 파견하지 않는 법이지만 지금 파견된 사람은 내가 익히 아는 진해대군이었다.

“다들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 들게. 왜국의 떡도 맛있긴 하지만 아국의 떡도 먹어봄 직하지 않은가. 자고로 백설기만큼 호화로운 떡도 없다네!”

이미 차기 보위에 오를 세자가 정해지고 이 년이 지나 딱히 할 일도 없는 데다가 남한산성에서 배운 지식을 쓰고 싶다는 요청을 주상전하께서 받아들여 하주도로 파견되기에 이르렀다.

대군쯤 되니 재산은 넘쳐나는 법이고 이 재산을 베푸는 법도 알고 있었다.

정월 대보름이 지나가자마자 재개된 공사현장에는 돼지 수십 마리를 잡아 만든 수육은 물론이요, 수십 개의 시루에 그득하게 쌓인 떡으로 잔치가 시작되었다.

“백설기라 하였습니까? 대군 어른께는 송구스러운 말씀입니다만 이 떡은 하얀색이 아닙니다.”

“자네가 왜인인 복도정칙(福島 正則)이라 하였는가? 본래 하얀 떡이지만 자리에는 맞는 격이 있어야 하는 법이지. 잔칫날에는 이런저런 고명을 넣어 떡을 호화롭게 한다네. 예부터 전해진 방식이지.”

보디빌더 출신인 수양대군으로 인해 변한 조선의 식문화 가운데 긍정적으로 변한 녀석들도 있었다. 설탕이나 꿀 혹은 조청을 잔뜩 넣어 만드는 열량 폭탄인 떡이 대표 사례이다.

떡은 곡식을 찧어 만드니 기본적으로 탄수화물 덩어리이며 여기에 앙금과 고명이 들어가면 탄수화물이 폭증한다. 하지만 수양대군의 장녀는 빵과 떡의 열량을 줄이는 것에 힘썼으며 맛 또한 유지하였다.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떡을 한입 물고는 맛에 감탄하였다.

“시루에 넣어 쪄낸 포슬포슬한 떡 사이에 말린 고구마를 잔뜩 넣었군요. 여기다가 좋은 향이 나는 말린 곤약을 잘게 썰어 얹으니 식감도 호화롭고 은은한 단맛이 일품입니다.”

“곤약이 아니라 야자열매의 속을 삭혀낸 뒤 잘라 말린 야자락(椰子酪: 야자 요구르트)이라는 녀석일세. 대군 어른이 아니었다면 이런 진귀한 재료로 맛을 낼 수 있었겠는가. 대군 어른께서 이런 진귀한 재료를 쓰시니 제 입 또한 즐겁습니다.”

현대에는 후르츠 칵테일에 들어가는 말랑말랑한 하얀 젤리.

조선 이름으로는 야자락이라는 이상한 명칭이 붙었지만 여하튼 이 젤리는 최근 입신체비에도 나쁘지 않다는 것이 갖은 실험으로 증명되어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조선에서는 가격이 비싸 자주 못 먹는 녀석인데 이 자리에서는 넘쳐나니 진해대군이 얼마나 사람 좋은지 알 수 있었다.

제자들도 어느새 고기에 적응하여 돼지고기 수육을 퍼먹고 떡을 집어삼키니 진해대군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많이 먹고 많이 몸을 놀리게. 서애 영감은 내가 어릴 적부터 함께 해온 사람인데 세상 어느 누구와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다네. 장담하건대 자네들 모두 서애 대감에게 학문을 배우면 몸도 학문도 빼어나게 변할 것이네.”

“그렇지 않아도 지난 여섯 달 동안 제 신장이 두 치(6.8㎝) 가깝게 넘게 성장하였습니다. 체중은 열두 근이나 성장하여 부친께서도 저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하셨습니다!”

“여섯 달 동안 두 치나 성장하였다고? 왜인들의 섭생에 육질이 부족하다 하였는데 참으로 잘된 일일세. 아무렴, 입신체비사는 제자의 몸도 마음도 책임지니 진정한 스승이 아니겠는가.”

지난 6개월 동안 제자들의 성장도 눈부셨다.

20대에 가까운 제자들도 키가 한 치는 컸고 10대 제자들은 두 치 가까이 성장한 이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타치바나 무네시게의 키가 두 치가 넘게 커졌으니 말 다했지.

이게 다 고기를 먹고 입신체비를 쉴 새 없이 굴려서 가능한 일이다. 처음에는 제자들이 도망치려 하였지만 자신의 몸이 나날이 변해간다는 것을 알고 오히려 더욱 배움에 몰두했다.

진도가 늦은 제자도 사자소학과 동몽선습을 떼었고 진도가 빠른 제자는 사서삼경(四書三經) 중 삼경 정도는 떼었다. 물론 모두 다 구간 반복학습 덕분이다.

내 머릿속에는 십삼경의 내용이 모두 복사되어 있으니 난해한 구간을 상세히 설명하며 답을 알려주는 대역기를 사용하고 쉬운 구간은 대충 넘어간다. 아마 내가 관찰사 자리에서 물러날 1584년에는 정말 소과에 합격할 준비를 갖출 것이다.

배불리 음식을 먹었으니 진해대군과 함께 주변을 지나다녔다.

이미 성형요새를 축조할 준비를 마쳐 해자와 성채를 동시에 축조하고 있으니 진해대군은 또다시 질문을 시작하였다.

“성을 축조하는 데 둔덕만 만들다니. 내 경사요새라 불리는 방안에 대하여 배워 보았지만 왜 해자부터 먼저 파내는지 영문을 알 수 없구려.”

“제가 창안한 성형요새는 참으로 단순한 요새입니다. 흙을 쌓아 정해진 형태만 만들면 되니 우선 흙을 퍼내서 쌓을 장소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흙이 부족하면 해자를 더 깊게 파면되는 법이 아닙니까.”

성형요새의 규모와 해자의 규모는 비례적으로 늘어난다. 가장 긴 변이 800m에 달하는 거대 성형요새이니 해자의 너비만 50m에 달한다. 더군다나 강과 연결할 수 있는 해자이니 물을 채우면 어지간한 적은 접근조차 못 한다.

주변에 석회암이 많아 이래저래 영회, 조선시대에 재현한 콘크리트도 만들 수 있으며 겨울에 물이 얼지 않는 고장이라 동결심도나 파손 걱정도 없다. 해자 주변에는 석축을 두르고 콘크리트를 사용한 석축을 만든다면 거의 무적에 가까운 요새가 되리라.

그리고 땅을 파내니 자연스럽게 부산물이 튀어나온다.

공사현장 주변에 쌓인 돌무더기를 본 진해대군은 눈을 빛내며 돌을 정으로 몇 번 내리쳐 보다가 말하였다.

“이건 사암(砂巖)이구려. 성벽을 축조하는데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요긴하게 쓸 수 있는 돌이오. 화강암보다는 못해도 적당히 단단하니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 법이지.”

“이걸로 대군 어른께서 주변에 치성을 축조하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전에 남한산성과 옛 신라 시대의 삼년산성을 보며 배우신 것을 고스란히 재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변에 산성을 축조할 자리도 마련해 두었고 돌도 잔뜩 쌓아두었다.

진해대군도 자신의 배움을 적용할 준비를 마쳤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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