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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조선-390화 (390/573)

근육조선 390화

2부 17장 6화 하주도 관찰사(2)

그나마 눈치를 보내니 나와 눈을 마주치고 억지로 웃는 놈들이 있기는 했다.

반면 시선을 계속 회피하는 놈들은 자료에 나와 있는 대로면 나름 뼈대가 깊은 영주들이다.

본래 이런 변화의 시기에는 뼈대가 있는 세력이면 세력을 지키기 위해 보수적으로 나서고 기반이 튼튼하지 못한 자들은 진취적으로 움직이는데 확연히 이상한 태도이다.

계속 지켜보기도 뭣하니 모두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하였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의 명망을 보니 하나같이 효웅(梟雄)의 자질은 물론이요, 간웅(奸雄)의 자질을 보이는 이도 있소. 하지만 이 자리에서 가장 간웅에 가까운 자는 나겠군.”

일단 필요한 것은 서열정리이다.

나는 조선 조정에서 파견된 관찰사고 놈들은 명나라 영토에 있건 조선 영토에 있건 관찰사 휘하에서 숨을 죽여야 하는 영주들이다.

내가 놈들을 처벌할 권한은 없지만 조만간 파견될 명나라 관리를 통하면 얼마든지 엿을 먹일 수 있다.

하지만 내 앞에 마주 앉은 놈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칭찬 아닌 칭찬을 하였다.

“간웅이라 하셨지만 처음 전투를 벌이면서 세 배에 달하는 적도를 진멸시킨 분이 아닙니까. 그러한 분이 간웅이라 칭하니 저희는 두려움에 몸서리칠 수밖에 없습니다.”

대놓고 호탕하게 웃으며 내 말을 받아치는 저놈이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라는 놈이었나. 말 속에 뼈가 있는데 조상이 명장 홍윤성에게 죽고 세력이 박살 나기 직전까지 갔다던가.

도가 지나쳤지만 조선에 조상 대대로 원한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른 영주들이 시마즈 요시히사에게 눈치를 주었고 그도 헛기침을 하면서 내 시선을 회피하였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이야기를 더 할 수도 없으니 벌떡 일어나 자리를 피했다.

“잠시 정원을 둘러보고 올 것이니 편히 있도록 하시오. 조만간 명국에서도 기한이 되어 포정사(종 2품, 조선 기준 정1품 이상 관료)는 물론이요, 도지휘사를 파견할 것이니 앞으로의 일이 많이 번거로워질 거요.”

놈들이 뭘 믿고 저렇게 날을 세우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명나라가 부패를 일삼고 한때 왜구가 들끓을 정도로 혼란이 심했던 큐슈라 해도 바로 위에 조선을 두고 있으니 함부로 움직일 이유가 없다.

내가 놈들 머릿속에 들어갈 방법은 없지만 놈들의 심리를 대충 꿰차고 있는 사람이 있다.

신분이 들킬 수도 있으니 아예 하급 관료로 위장하라고 지시한 아케치 미츠히데를 불러 물어보았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뼈대 깊은 세력 출신들이 왜 저렇게 날을 세우고 척을 지려 하는지 모르겠군. 명광수 자네는 혹시 이유를 알고 있는가?”

“다케다 신겐의 원칙 때문에 저렇게 날을 세우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몇 년 전에 죽었지만 후계자는 물론이요, 다케다 사천왕을 비롯한 무장들도 이를 따르지요.”

“원칙? 무전(武田: 다케다) 가문이 얼마나 뼈대가 깊다고 원칙이 있는가.”

“다케다는 유서 깊은 슈고(守護: 무로마치 막부의 지방관) 가문이었습니다. 난세가 시작되고 가문이 쇠락하였다가 가까스로 가문을 되돌렸는데. 이후 옛 질서를 되돌리겠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조정에서 분석하기로는 그저 옛 세력구도를 답습하여 통일 체제를 개편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더한 놈이 분명하다.

내가 가만히 바라보니 아케치는 한숨을 쉬고 말을 이어갔다.

“그들은 명망 있는 가문과 무로마치 시절에 임명된 이들이 제자리를 찾는 것이 이상적인 질서라 여기고 있습니다. 덕분에 제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 님이 명을 달리하였지요.”

“지금 그 말을 들으니 짐작 가는 바가 있군. 옛 명문가의 세력이면 어지간히 심기에 거슬러도 받아들이고,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출세한 자거나 옛 세력에 손을 댄 자라면 항복을 받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살육과 약탈을 일삼는다는 말인가?”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당시 오와리에서 일어난 비극을 생각하니 지금도 몸서리가 쳐지는군요. 옛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가문을 멸절시키는 일이 빈번합니다.”

진짜 제대로 미친놈이네.

지금 조선으로 따지면 고려시대가 좋았으니 고려시대에 임명된 호족과 지방관 가문을 살려두고 나머지를 다 죽여서 고려시대로 되돌리자는 소리이다.

물론 자기편을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맞다. 다케다 가문이 어느 정도 두각을 드러낸 이후부터는 명망 있는 가문 출신들은 모조리 결집하여 힘을 보탰으리라.

이렇게 보니 놈들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 명국의 육주성에 있는 이들 가운데 척을 지려는 자들은 대부분 유서 깊은 가문 출신들이 아닌가. 아마 무전의 휘하에 들어가면 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 믿고 있겠군.”

“참으로 바보 같은 생각이지만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정국이 혼란하면 이득을 주는 이에게 달라붙기에 마련이지요.”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오다 노부나가를 죽인 이유? 듣자 하니 오다 노부나가가 기세를 올릴 때 일본의 타락한 불교와 척을 지었다던데 불교는 다케다 가문이 감싸는 세력이니 불교 세력의 평판을 위해 죽인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살아 있다 해도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이유? 보잘것없는 한미한 출신이기 때문이다. 멀쩡히 살아 있어도 다른 가문의 양자로 들어가지 않는 한 출세는 불가능하리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암살당한 이유? 놈의 가문 자체는 역사가 깊지 않은 가문이라더라. 아마 무슨 수작을 부리다가 제거당했겠지.

이렇게 생각하니 놈들을 다룰 방법을 떠올랐다.

“자고로 전통과 옛 질서를 무분별하게 따르는 자들에게는 특효약이 있지. 더 깊은 전통과 질서로 회귀시키는 방법일세. 생각해 보니 왜에서는 아직도 당(唐)을 섬기고 있더군.”

“아직도 옛 방식을 고수하는 이들은 당물(唐物: 당나라 물건)이니 당국(唐國)이니 하며 옛적에 사라진 당나라를 이상적으로 여기고 있기는 합니다.”

아케치 미츠히데는 왜 당연한 말을 묻는지 궁금해했지만 나도 다 꿍꿍이가 있다.

나 혼자 판단할 일은 아니니 대략적인 계획을 수립해 조정에 장계를 올리고 답신을 기다렸다.

이 계획이 성공하면 최소한 놈들의 후계자를 인질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조금만 더 신경을 쓰면 내부 사정을 손금 보듯 훤히 알 수 있을 것이고, 잘만 하면 차기 영주들 여럿을 친조선 세력으로 육성할 수 있겠지.

* * *

두 달 뒤, 조정에서는 내가 조사하여 올린 장계에 대해 아주 확실하게 답변하였다. 옥새가 찍힌 친서(親署)를 펼쳐보니 내 계획에 찬성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참으로 뜻깊은 일이다. 명나라 육주성에 속한 영주들의 자제를 포섭할 계획을 마련하였으니 이를 전력으로 지원할 것이다. 명국의 재가(裁可)도 받았으니 개의치 말고 시행하라.]

허가도 받았으니 바로 실행에 들어갔다.

내가 할 제안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다. 무로마치 막부의 전통에 얽매이고 옛 질서를 추구하는 놈들에게 더욱더 오래된 전통인 구백 년 전 일본을 지배했던 율령국가 시절의 전통을 되새기게 만들면 되리라.

다시 소집 명령을 받은 육주성 출신 영주들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원탁에 앉았다. 개중에는 귀찮았는지 대행자를 보낸 이도 있었는데 말만 전하면 되니 상관없다.

먼저 조정에서 내려온 친서를 펼쳐 보이며 말하였다.

“조만간 계미년(1585년)에 식년시가 열리오. 당연히 관찰사의 업무로서 향시(鄕試: 지방에서 주최하는 초시)를 열 것이나 여기에 명국의 육주성에 속한 이들의 기회를 줄 것이오.”

“저희에게 기회를 주시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굳이 과거를 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조선에서 관직을 얻게 되면 저희는 조선과 명국의 이중 봉신이 되는 격입니다.”

“다 이유가 있소이다. 사 년 뒤의 향시에 육주성의 왜인들이 합격하면 명국의 과거 가운데 두 번째 단계인 원시(院試: 명나라의 두 번째 과거시험)에 합격한 것과 같은 대우를 받는 거요.”

두 번째 서류는 명나라 황제의 옥새는 아니지만 명나라의 황명을 전달하는 기관인 통정사의 직인이 찍힌 서류였다.

사 년 뒤 조선 향시에 합격한 이들에게 명나라 향시의 응시 자격을 수여한다는 내용이다.

명나라의 과거라 하자 놈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나름 뼈대 깊은 가문 출신이니 옛 문화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며, 명나라와 당나라는 연관 관계가 거의 없지만 옛 조상들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이들에게는 간절한 일이리라.

이미 놈들의 생각은 훤히 들여다보인다. 명나라에서 관직을 얻고 기존의 전통을 더욱 굳건히 만들어 더욱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생각이 분명하다.

내가 잠시 침묵하니 타카하시 쇼운이라는 자가 엉뚱한 소리를 하였다.

“빈공과가 있지 않습니까? 왜 빈공과에 응시하는 길을 마련하지 않고 조선에서 행하는 과거에 응시해야 합니까?”

“명나라가 들어선 이후 빈공과는 사라졌소. 덕분에 당나라 시절 수많은 왜인들이 입신양명을 꾀하며 당의 관직을 얻어 출세가도를 달리던 길이 막혀 버렸지.”

수많은 왜인들이 당나라 관직을 얻고 입신양명을 꾀했다? 실력이 안 되어서 못했지.

조선에서 본 역사서에도 당나라 시절 빈공과 합격자의 8할은 신라 출신이요, 2할이 조금 못 미치는 이가 발해 출신이라 기록되었다.

당시 일본이 견당사라 하여 당나라의 제도를 답습하고자 10회 이상의 사절단을 파견한 것치고 초라한 업적이다.

하지만 이런 상세한 사실을 몰랐는지 영주들은 나름 관심을 보이며 내 의견을 경청하였다.

“하지만 내가 명국 황상께 진언(進言)을 올려 해결할 방법을 찾았소. 없어진 빈공과를 다시 만들 방도는 없지만 육주성 출신 사람이 아국의 하주도에서 실시하는 향시에 통과하면 명국향시 응시 자격을 부여한다 하였소. 이는 변방에 내리는 황상의 은덕이오.”

은덕이라 말했지만 놈들이 처음 볼 시험은 조선의 향시이다.

학문을 배우려면 어디서 배우겠는가? 과거시험에 응시할 만한 인재들은 죄다 하주도에 건너와 강의를 들어야 하리라.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답이 나왔다.

“정녕 사실입니까? 그러하면 조선의 하주도(큐슈 북부의 조선령)에서 시험에 합격하면 빈공과에 합격한 것보다 드높은 영예가 아닙니까?”

“드높다 할 수는 없지. 다음 단계는 명나라로 건너가 참가하는 향시가 있으며 여기에 합격한 이후에는 회시와 진시가 있소. 하지만 명나라에서 실시되는 향시에만 합격해도 거인(擧人: 향시 합격자)이 되어 관직을 얻을 수 있소이다. 빈공과보다 더욱 높은 영예요”

“같은 시험이 아닙니까? 하주도에서 향시에 합격하고 명나라로 가서 다시 향시에 합격하면 되는 일이군요.”

이들은 조선과 명나라의 차이를 모르므로 조선 향시에 합격하면 바로 명나라 향시에도 합격할 수 있다는 망상에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두 시험 다 한자는 향시(鄕試)로 같아도 난이도는 천양지차이다.

명나라에서 실시하는 향시는 응시자만 따져도 조선 전체의 과거 응시자보다 많다.

전에 답안을 본 적 있는데 솔직하게 말해 지금의 나도 합격을 장담할 수 없는 미친 난이도더라.

이런 난이도이니 명나라의 친조선 관료들도 허가한 일이다. 정말 합격하면 천고의 기재이니 당연히 관직을 줘야겠지.

하지만 온전한 진실을 모르는 이들은 망상이 점점 심화되며 서로 망상이 섞인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였다.

어떻게든 조선의 시험에 통과하고 명나라 말만 익히면 명나라의 시험에도 합격하여 관직을 얻을 수 있으리라.

이런 의견까지 나오니 아예 쐐기를 박았다.

“또한 내가 제안한 일이지만 불민한 일이 벌어질 가능성도 있지. 기껏 기회를 제공하였는데 첫 단계인 하주도 향시에 합격하는 이가 없으면 아니 되오. 그러니 과거에 응시하려는 이들 가운데 영주 집안의 자제(子弟) 열두 명을 선발하여 직접 가르칠 것이오.”

“저…… 관찰사의 업무를 시행하시면서 사람을 가르친다니. 가능한 일입니까?”

“이는 내 관찰사 업무의 일부이고 주상전하의 명이며 명국의 명이기도 하니 염려 마시오. 내 성심성의껏 명문가 자제들을 가르쳐 반드시 하주도에서 실시하는 향시에 합격시키겠소.”

어느새 동맹에서 경쟁자가 된 이들이 서로 눈치싸움을 벌이며 나를 보고 서로를 돌아보길 반복하였다.

잠시 밖으로 나오니 방 안에서 서로의 가신이나 아들을 명나라 과거에 응시시켜야 한다고 소란을 피울 지경이다.

어느새 목표가 조선의 영토 하주도에서 실시되는 향시가 아닌 명나라 과거 제도의 향시로 탈바꿈했지만 다 의도한 것이다.

점잔을 빼며 밖으로 나오니 아케치가 염려를 가득 담은 말을 하였다.

“자제들을 포섭하여 저들의 속내를 알려는 계책은 옳은 일이나 저는 심히 염려됩니다. 열두 명에 달하는 이들이, 그마저도 대부분 장성한 이들이 하주도에 방문하면 조선의 사정이 새어나갈 수 있지 않습니까.”

“얻는 것이 있으면 주는 것도 있는 법이지. 혹여나 영주의 자제들이 하주도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염탐하고 아국의 사정을 전달할 것이라 염려하는 건가? 그리할 시일도 없다네.”

영주들의 아들이나 가신들이 배움을 청해 오면 그다음부터는 입신체비를 시작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한계에 직면할 때까지 교육을 실시하면 된다. 자고로 뭘 하려면 몸도 마음도 여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사지의 힘이 고갈되고 정신적으로 한계에 몰렸는데 하주도를 돌아다니며 염탐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내가 이황에게 배울 때 삼 년 정도는 저런 상태였으니 잘 안다.

새벽같이 일어나 입신체비로 몸을 단련하고 몸이 지치면 입신체비를 기반으로 한 근면육연화기억술로 학문을 익히기를 반복하면? 여기에 입신체비의 근본인 효도에 충성을 합친 충효(忠孝) 사상을 반복적으로 주입하면?

한계 직전의 생활을 반복하며 충효사상이 몸에 배어버린다. 나도 어마어마한 기억력 덕분에 근육적 사고방식이 뿌리 깊이 들어오지 않았을 뿐이지.

아직도 떨떠름한 표정의 아케치에게 단언하였다.

“옛적에 문종대왕께서 흉험하였던 여진족을 복속시켜 북인으로 만들 적에 다 행하였던 일이네. 몸과 마음을 입신체비를 기반으로 한 효심으로 가득 채운다면 절로 충의지사(忠義之士)가 되는 법이지.”

어느새 서로 합의를 보았는지 12명에 달하는 내 제자들, 정확히는 내가 입신체비와 충효사상으로 세뇌시킬 제자들의 목록이 작성되었다.

놈들이 오면 야만인이나 마찬가지였던 여진족도 복속시킨 조선의 교육 맛을 보여주면 되겠지.

#작가의 말

조선 향시와 명나라 향시 난이도는 차원이 다릅니다.

조선 향시가 지방관이 최소한의 학문적 소양을 확인하기 위한 기본 시험이면 명나라 향시는 조선의 대과와 대등합니다.

합격할 경우 지방관으로 즉각 부임이 가능하며 난이도는 대과보다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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