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389화
2부 17장 5화 하주도 관찰사(1)
세스페데스는 의원의 말을 증명하듯이 보름 정도 지나자 과도한 입신체비로 인해 굳어버린 근육이 풀리고 다시 입신체비를 재개할 수 있었다.
오히려 이번 사태로 깨달은 바가 있는지 크게 인사를 올리며 말하였다.
“지금까지 입신체비를 피해왔으나 이번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알 수 있었습니다. 입신체비를 행하여 나쁜 것은 마음의 고단함 하나일 뿐이었으니 제가 불민한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다들 그러는 법이요. 나도 정신을 차리고 입신체비에 몰두할 때까지 삼 년이 걸린 것 같은데 당연한 일이지. 조선에서 오래 살다 보니 조선 사람이 다 되었구려.”
싱긋 웃은 세스페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신체비를 재개하였다. 혹여나 몸이 상한 곳은 없는지 점검하며 천천히 입신체비를 하다 마당에 놓인 십자가가 보였다.
세스페데스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제가 십자가에 박힌 못을 잡고 두 각이나 버틴 것은 모두 입신체비 덕분입니다. 기적은 아니지만 저렇게 험난한 일을 행하며 신앙을 증명할 수 있다니 놀라운 법입니다.”
“두 각이 아니고 세 시진을 내리 매달려 있다 했소. 내 생각해 보니 오한이 치밀 지경인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요?”
“저도 모를 일입니다. 그저 주님께서 작은 은총을 내리신 것이 아닐까요? 제 기억에는 없으니 이를 자랑스럽게 말할 일은 아니지요.”
세스페데스가 혹시나 성인의 자리에 오르지 않을까? 이번 일은 나도 일기에 기록했고 이항복과 이덕형은 물론이요, 성균관 대사성인 정인홍까지 기록했기에 명백한 기적으로 기록되리라.
아니다, 내가 알기로 성인이 되려면 최소 두 번의 기적을 거쳐야 하는데 조선 출신 성인들은 박해를 통한 신앙증명과 순교로 두 번의 기적을 채웠다. 하지만 세스페데스는 한 번이지.
아마 성인 아래의 복자(福者)로 인정받지 않을까. 아니면 기적을 계속 일으켜 진짜 성인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고.
증거품을 남기기 위해 세스페데스가 매달렸던 십자가를 강화도의 성당 지하에 보관하라고 권유하니 세스페데스도 이를 따랐다.
소란도 끝나 돈령부에서 한가한 업무를 담당하면서 차근차근 세상 돌아가는 정황을 파악하였다. 스페인은 말 그대로 인삼을 내달라며 아우성을 치고 명나라는 이 상황을 흡족하게 방관하고 있으며 조정은 바쁘게 남경 일대를 방비하였다.
심지어 남경 일대만 방비하는 것이 아니었다. 만력제가 돈을 잔뜩 내어줬으니 경진만란과 같은 비극을 막기 위해 대양도 인근의 팽호열도와 큐슈 서쪽의 오도열도에 요새를 설치한다더라. 그리고 그 요새에 설치될 화포는 광철포였다.
“주상전하께서 광철포 대신 천용포(泉涌)라는 이름을 하사하셨네. 한 발을 제대로 쏘면 암반을 꿰뚫고 샘을 치솟게 만드는 위력이라 이런 이름을 정하셨더군.”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그나저나 광철포, 아니, 천용포를 대체 몇 문이나 설치하려는 겁니까?”
“워낙 값이 비싼 녀석이니 효험이 좋아야지. 서른 문을 만들고 개중 오차가 적은 스무 문을 배치할 것이라 하였지. 돈이야 제법 들지만 이게 다 주상전하의 위업이 아니겠는가.”
역시 고려천자 만력제다. 아예 나라를 통째로 뜯어 바칠 각오로 조선에 퍼주지 않으면 이런 화려한 요새를 만들 예산은 꿈도 못 꿨겠지.
이윽고 5월이 되자 주상전하가 나를 불러 새로운 보직에 임명하였다.
“유성룡 자네를 하주도(큐슈 북부 3개 지역)의 관찰사로 임명할 것이네. 근래에 들어 경진만란으로 인해 육주성(큐슈 북부 6개 지역, 명나라 관할)의 기강이 해이해졌으니 이를 잘 통솔할 것이라 믿겠네.”
“주상전하의 하해와 같은 은덕에 감읍할 따름이옵나이다.”
“내 마음이 편치 않으나 도리가 없다네. 본래 외관(外官: 지방직) 관원은 한 품계를 낮게 잡지만 자네와 같은 인재가 나서야 할 장소이지. 자세한 사항은 좌찬성이 설명할 것이며 왜국 출신의 사람을 붙여줄 것이니 큰 어려움은 없을 걸세.”
왜국 출신의 사람들이라 했는데 세력이 멸망할 당시 큐슈로 도망쳐 조선으로 망명한 이들이다. 대다수가 하급 무사들이지만 간혹 고위 간부들이 있었기에 조선에서도 이를 정보 수집 용도로 사용했지.
이들의 명부를 훑어봤는데 아는 사람은 없다. 기껏해야 예전에 상이경과의 대화에서 언급된 명지광수(아케치 미츠히데) 정도만 알고 있다.
별실로 들어가니 이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서류를 건네주며 말하였다.
“조만간 왜가 일통(一統)할 것이 분명하기에 주상전하께서 마음이 편치 않으시네. 일통이라 하여도 아국과 연을 맺은 두 호족은 제외한 일통이지만 그것만 해도 어디인가.”
“아국과 연을 맺은 두 호족이라 하시면 대내씨(오우치)와 상삼씨(우에스기)가 아닙니까. 혹여나 아국에서 계책을 마련하거나 내란에 개입하여 소득을 얻는 방법은 없었습니까.”
“아무리 난폭한 왜인이라 하여도 수십 년이 지난 이후엔 깨달은 바가 있다네. 아국이 한 세력의 기세를 꺾으려 개입하면 모조리 결집하여 아국에 반기를 들었지. 그나마 왜국이 분열된 이후 일백 년 가까이 대립 구도를 이어온 것이 천만다행일 지경이네.”
지금 상황을 요약하면 이렇다.
일본이 분열되어 개들이 싸우는 개판이 되었고 조선이라는 호랑이는 적당히 튼튼한 오우치와 우에스기라는 두 마리의 개를 부하로 만들고 개들이 싸울 때마다 적당히 이득을 챙겨왔다.
하지만 개들도 머리가 있으니 시간이 지나자 호랑이가 개입할 때마다 뭉쳐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사람도 몇 번 당하면 대처법이 나오는데 일본의 영주들이 아무리 바보라도 조선의 개입을 몰랐을까.
이이는 여기에 한마디를 붙였다.
“실은 상왕전하가 보위에 오를 무렵에 왜국에 적극 개입하려고 삼만 명에 달하는 병사들을 파견한 적은 있다네. 하지만 왜국 모두가 한 몸으로 뭉치니 감히 손을 쓸 방법이 없었지.”
“지금 상세를 보니 왜국의 인구가 칠백만 명에 육박하는군요. 아국보다 영토도 인구도 적지만 이러한 국가를 무력으로 점거하려면 아국의 손실이 너무나 클 것입니다.”
칠백만 명이라 했지만 주석이 첨부되어 있었다.
전란이 만연하고 각 지역이 나뉘어 있어서 제대로 된 정보를 파악하지 못해 더 많을 수 있다고. 아마 천만 명에 가까운 인구가 아닐까.
생각해보니 좀 무섭다. 조선의 인구가 1,400만을 넘어서고 외방 영토를 다 포함하면 1,700만에 달하지만 일본도 그 절반 이상의 인구를 가지고 있다.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라는 의견에 이이도 동의하였다.
“옳은 말일세. 명국처럼 체제가 붕괴하고 부패가 만연하면 모르겠지만 왜국은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네. 혹여나 왜인들이 미쳐서 옛 고토를 회복하고자 날뛰면 어떻게 되겠는가.”
처음에는 기세등등하겠지만 조선에서 병력을 소집해 버티면 그냥 역으로 박살 나겠는데? 이렇게 생각했지만 지도 아래에 있는 명나라 영토인 육주성이 보였다.
고작 이만 명의 해적에도 초토화 당할 뻔했던 남경을 생각하면 육주성의 상황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이는 손가락으로 육주성은 물론이고 큐슈 전체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아국의 강역이 된 하주도의 왜인들은 이미 아국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네. 임명된 토관들은 이미 아국의 신하가 되었으며. 백성들의 언어조차도 단어가 다를 뿐 문법(文法)이 아국의 그것과 동일하게 변하였지.”
“백성들의 언어가 단어만 다를 뿐 문법이 같다 하셨습니까?”
일제 강점기를 경험한 사람들은 문화 말살정책의 후유증으로 일본어에서 비롯된 단어를 사용하였다. 문법이야 한글 문법을 따르지만 머릿속에 강제로 주입된 단어를 걷어낼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반면 큐슈의 백성들은 일본 단어를 쓰지만 문법이 변하였다. 바꿔 말하면 단어만 좀 가르치면 조선 사람이 될 지경이니 이건 그냥 일본풍 조선인이라 봐도 될 지경이다.
이이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숨을 쉬며 말하였다.
“그래서 천만다행이라네. 이미 문법이 변하여 아국 사람으로 보아도 될 지경이지만 불행히도 육주성은 명국이 세금만 거둬가는 고장인지라 왜국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네. 혹여나 일이 틀어진다면 어찌 되겠나?”
어떻게 되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놈이 명나라 군대를 다 몰아내고 여기는 지금부터 일본이다! 하고 선언한 순간 바로 일본 영토가 되어버리겠지.
생각해 보니 20년 전만 해도 명나라 육주성에는 왜구가 들끓었다 하더라.
이를 제압한 사람이 분전을 거듭하다 세상을 떠난 명장 척계광이고. 하지만 척계광도 죽었고 명나라의 위신은 바닥으로 추락하고 아예 지하에 파묻혔다.
절로 한숨이 나왔지만 방법이 있나. 나를 아직도 걱정하는 이이에게 억지로 힘을 내어 말하였다.
“제 진가는 수성과 방략에 있습니다. 튼튼한 요새를 만들고 하주도의 백성들을 훈육(訓育)하여 난이 벌어지더라도 이를 변(變)으로 격하할 방도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필요한 물자가 있다면 즉각 지원할 것이니 큰 염려는 하지 말게. 무엇보다 자네는 변란이 일어나 명국의 군대가 패퇴하면 지휘권을 거머쥘 수 있는 사람이 아닌가. 자네가 하주도에 부임하면 명국 관리도 잔뜩 긴장할 것이네.”
생각해 보니 나는 제한적이지만 명나라 관리로 부임할 수 있다.
아마 내가 변란을 대비하면 명나라에서 파견된 관리들도 은근슬쩍 나를 따라. 정확히는 패전할 경우 지휘권을 인계받을 나를 회피하려고 같이 대비할 것이다.
큐슈로 향하는 배에 올라 조용히 명부를 살펴보았다. 지난 100년 동안 조선이 일본에 개입한 덕분에 각 가문의 몰락이나 세력 구도에 대한 상세한 서적이 여섯 권이나 준비되어 있었다.
내가 역사에 대해 빠삭했다면. 하다못해 영직이 녀석이 했던 신장의 야망인가 뭔가를 했었다면 여기 있는 이름들에 대한 지식이 있었겠지. 하지만 내 역사 지식은 지극히 한정적이다.
하지만 개중에 가장 중요한 인물. 본래 역사에서 일본을 통일하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원흉을 찾아내려 애썼다.
본래 일본을 먹어치웠어야 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디 있는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 아는 사실이라고는 최하층 빈민에서 시작해 온갖 고난을 겪고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로 들어가 출세에 성공했다는 사실 하나다. 그리고 권력의 정점에 오른 뒤 미쳐서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병사했지.
이 자리에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 있기는 했다. 지금은 명지광수 대신 명광수라는 줄인 이름으로 불리는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명광수 자네 혹여나 수길이라는 이를 아는가? 내 어디서 들어본 적은 있는데 명부에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군. 혹여나 장수의 자질이 있는 이가 누락된 것은 아닐까?”
“장수라 할 사람 중에 수길(秀吉)이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혹여나 공가(公家: 학문을 전담하는 계층) 사람이 아닐까요? 그런 이들은 알 필요도 없습니다.”
영직이에게 들은 바가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출신이 한미해 어머니의 성을 따를 지경이었으며 이후 출세하며 이름을 갈아치웠다고.
지금은 알 방법이 없지만 그놈 초상화는 현대에서 줄기차게 보았으니 만나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겠지.
대신 명부에 있는 이름 중에 임진왜란에 참전한 장수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역사가 변했지만 장수들이 픽픽 죽어 나갈 이유는 없었나 보다.
하지만 명부에 빨간 가로줄이 쳐진 이름이 내 눈에 들어왔다.
[덕천가강(徳川家康) 기묘년 9월 사망. 사망 원인은 주먹만큼 거대한 떡으로 인한 질식사. 이후 장남 신강(信康: 노부야스)이 가독을 물려받음.]
본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이후 일본을 휘어잡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재작년에 죽었다니! 그마저도 주먹만큼 거대한 떡으로 인한 질식사라면 누가 뭐라 해도 타살이다.
일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겠지만 일본의 실권을 휘어잡은 무전승뢰(武田勝頼), 다케다 가츠요리라는 자는 살벌한 공포정치를 휘두르는지도 모른다.
이럴 경우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으니 차라리 잘된 일이리라.
* * *
젊은 시절 아내와 신혼여행을 왔던 큐슈에 다시 방문할 줄은 몰랐다. 당시에는 소과에 합격한 풋내기였지만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은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당연히 내가 항구에 내리자마자 조선에서 파견된 관료들을 시작으로 조선에 의해 임명된 토관들 그리고 큐슈 일대의 영주들까지 나를 맞이하였다.
미리 준비한 원탁에 앉아 가볍게 인사를 올렸다.
“이제 막 관찰사가 된 사람을 너무 후하게 대접하니 더욱 근면히 일해야겠구려. 외관(外官)으로 몇 번 일하여보았지만 관찰사의 자리에 오르게 되니 부족한 점이 많소이다.”
“관찰사께서 저희를 잘 지도해 줄 것이라 믿고 있겠습니다. 이미 북방과 남방에서 치적을 쌓은 분이고 명국에서도 모범을 보이신 분이 아닙니까.”
남경의 소문이 벌써 퍼졌나. 큐슈의 2/3는 명나라 영토이고 남경과 무역을 실시하는 일이 많으니 일본에도 경진만란의 소문이 퍼져 있으리라.
그렇지 않아도 조정에서 큐슈에서 할 일이 있다 했는데 이번 기회에 말해둬야겠다.
“참으로 불민한 일이 근래에 있었소. 남만인들이 난을 일으켜 명국에 기습을 가하였고 이후 아국이 나서서 제압하여 남만과의 교역이 끊기게 되었지. 하지만 아국과의 교역이 끊기니 남만인들이 왜로 나아가 교역을 행하지 않소.”
“불민한 일이지만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오는 상인을 마다할 수 없는 법이 아닙니까.”
“조정에서는 다시 같은 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오도열도(고토열도)에 요새를 세우기로 하였소. 또한 최근에 왜국에 불민한 일이 연달아 벌어진다 하였는데 이 사실을 익히 알고 있을 것이오.”
조선 관리들이나 이미 조선 사람이 다 된 영주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명나라의 영토에 속한 영주들은 뜨끔했는지 내 시선을 회피하였다.
암만 봐도 이놈들의 정체성은 일본인이다. 그저 명나라에 짓눌려서 억지로 굴복했던 모멸의 시간을 버티려 했겠지.
그러다 명나라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니 다시 고개를 들려는 모양이다.
이놈들을 어떻게 제압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