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386화
2부 17장 2화 고려 천자
만력제의 논리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뜻하지 않은 관직까지 얻고 도성으로 돌아왔다.
만력제는 통 크게도 자신의 내탕금을 털어 400만 냥에 달하는 은자를 우선 지급하였다. 400만 냥이면 은 150톤에 달하는데 여기에 추가 수익이 더 있다.
만력제는 다른 관리들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명령을 추가로 하달하였다.
“적선을 나포하였을 때 남경 일대에서 약탈한 물자도 노획했을 것이다. 하지만 약탈한 물자를 천병이 돌려받을 방법이라도 있더냐? 이 또한 조선의 것이다.”
이쯤 되니 명나라 관리들이 천자인지 고려 천자인지 모르겠다고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조선에서 거둬들여 북경에 반납한 자금만 은자 백만 냥이 넘고 도자기나 각종 금속세공을 비롯한 수많은 장식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하지만 지엄한 황명이 내려졌으니 부피가 가벼운 금과 은만 챙겨가기로 했다. 나머지야 알아서 관리들끼리 분배할 것이고 만력제의 내탕금으로 들어갈 것도 꽤 되리라.
이번 전투로 파손되어 자침시킨 선박이 다섯 척이요, 나머지도 보수가 필요한 실정이었는데 이 정도의 자금이면 아예 경기수영 수준의 함대를 하나 더 만들고 남을 수준이다.
당연히 조정에서는 소식을 듣고 주상전하를 비롯한 신료들이 벽란도에 나와 만력제의 은덕을 칭송하였다.
“황상께서 이렇게 은혜를 내리시니 더욱더 충심을 가져야겠구나.”
“명국 황상께서 은덕을 내리시니 참으로 귀한 일이옵나이다.”
기억을 떠올려 보니 현대에서 봤던 드라마에서 묘사된 만력제는 그냥 아무 일도 안 하고 궁녀들과 놀던 황제였고 조선과 관련된 업무만 진행해서 고려 천자라는 별명이 있다더라.
하지만 국가 예산의 절반을 단번에 내어주는 사람이니 고려 천자건 조선 천자건 뭐가 문제겠는가.
도성으로 돌아와 논의가 시작되고 만력제의 요구사항을 하나하나 따져보면서 주상전하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명국에서 보내는 자금이면 인삼을 팔아서 얻을 수익을 감당하고도 남을 지경이네. 서반아를 압박하기 위해 기율(紀律: 질서)을 바로잡느라 소모될 자금이 염려되었는데 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서반아는 고난을 겪을 것이옵니다. 다른 무엇도 아니고 귀한 인삼을 구주(유럽)일대로 들여오며 제법 많은 소득을 거두었는데 이를 삼 년간 폐한다면 안달을 낼 것이옵니다.”
“옳은 말일세. 아국의 기휘(忌諱)를 범하면 무슨 대가를 치르는지 뼈저리게 느껴야 정신을 차리는 법이지. 올해 신사(辛巳: 1581년)년부터 계미(癸未: 1583년)년 말일까지 서반아 상인의 정박을 불허하며 오로지 보급만 허용하도록.”
만력제가 화끈하게 돈을 줬으니 뜻에 응해야지.
하지만 외조판서에서 승진해 우찬성이 된 상이경은 난색을 표하며 의견을 말하였다.
“아국이 행하는 교역 가운데 인삼만 있는 것이 아니옵니다. 당장 솔로몬국(솔로몬 제국)에 인삼을 팔고 차익으로 천축의 초석을 사들이고 있사옵니다. 하오면 솔로몬국에 인삼을 보내지 말아야 하옵나이까?”
“솔로몬국은 아국에서 인삼을 사들여 서역에 파는 이들이니 솔로몬국의 인삼은 오히려 양을 늘려야겠군. 이들을 중매(仲買)로 삼아 국서를 교환할 창구를 만들면 좋을 것이니. 당분간 솔로몬국에 보내는 인삼의 물량을 오 할 할증하게.”
조선은 어차피 인도와의 교역을 끊을 수 없다. 아마 인도와의 교역이 끊기면 화포를 아껴가며 사용하고 보총 훈련도 불가능한 지경이 되리라.
주상전하는 잠시 의자 손잡이를 쓰다듬더니 흥미로운 표정으로 말하였다.
“아국이 명국의 도움으로 피해를 막아내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구주에서 갖은 세력의 견제를 당하는 서반아의 형편은 어떻게 될지 참으로 궁금…….”
“주상전하! 명국의 황상께서 다시 조서를 보냈사옵니다! 하온데 급한 조서이옵니다!”
“조서라? 보낼 것이면 사신들에게 말하면 될 것을 어찌하여 따로 보냈단 말인가. 그래도 조서니 예의를 표시해서 읽어보아야지. 그나저나 누가 사신으로 당도하였는가?”
“통정사(황명을 수납하는 부서)에 속한 마귀라는 장수입니다!”
대체 뭔 일일까.
마귀는 일을 신속히 처리하라는 명을 받았는지 바로 만남을 청하였고 주상전하와 함께 조서를 읽는 자리에 나섰다.
명나라 관직을 받은 사람이니 이 자리에 빠질 이유가 없지.
온갖 미사여구로 점철되었지만 조서의 내용을 읽는 마귀는 물론이요, 주상전하의 표정도 구겨지고 나조차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번 조서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폐허가 된 항주(항저우)를 조선이 알아서 재건하되 조선의 함대가 머물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고 일 년에 넉 달 이상을 인근에 머물며 남경 일대의 수비를 행하라.
-또한 남경 일대의 세도가를 벌하여 토지와 병졸들이 머무를 장소를 마련하였으니 최소 일만 명의 병사를 머물게 하여 남경을 수호하라.
-소모되는 자금은 남경에서 지급할 것이며 번거롭게 장계를 올리지 말고 직접 받아가라.
“이…… 이상, 아니, 황상께서 대체 무슨 심려로 이러한 명을 내리신지 모르겠습니다.”
“미안한 말이네만 다시, 아니 도저히 믿을 수 없으니 어서 조서를 내어주게. 정녕 천자행보(天子行寶: 제후국에 상을 내릴 때 쓰이는 옥새)를 사용한 조서던가?”
“천자행보도 아닙니다. 황상께서는 황제신보(皇帝信寶: 군사권을 임명할 때 쓰이는 옥새)를 사용하셨습니다.”
“황제신보라 하였는가? 그러하면 아국에 정녕 폐허가 된 항주 일대를 위임하신다는 뜻인데 이를 도저히 믿을 수 없네. 내가 직접 읽어볼 것이네.”
이건 미친 짓이다. 당장 친조선 관료인 마귀도 손을 부들부들 떨며 조서의 내용을 믿지 못했다.
명나라를 수비하는 데 조선 함대와 군대를 보내라고? 이건 그냥 국방을 포기하는 거다!
* * *
자금성의 궁궐에서는 만력제가 조선에 기습적으로 정한 조서의 내용을 알아차린 관리들이 아우성을 쳤다.
한 관리는 무릎을 꿇고 산발을 한 채 며칠 동안 만력제의 답을 기다렸다.
“황상께서 어찌하여 번국에 항구를 내어주시고 병력을 주둔하는 명을 내리셨사옵나이까? 차라리 신을 보내 천병을 소집하시옵소서!”
“아니 되옵니다! 황상께서 진노하심을 익히 알고 있사오나 신의 충의를 믿어주시옵소서!”
일부 친조선 관료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관료들은 만력제의 조서를 되돌리려 애썼지만 만력제는 벌써 팔 일째 조정에 나오지 않고 동생인 친왕 주익류와 사소한 놀이에 몰두하였다.
“황상께서 저에게 선공의 기회를 주셨으니 가장 거대한 귀뚜라미를 골랐사옵니다. 제가 이기더라도 황상께서 진노하실 일이 없길 바랄 뿐이옵나이다.”
둘은 제법 커다란 대나무 우리를 탁자에 올려놓은 채 흥미로운 표정으로 우리 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동생의 정중한 말을 들은 만력제는 코웃음을 치며 황명을 내렸다.
“어허, 익류는 황명을 지엄히 여기지 않는가 보구나.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적에는 몰라도 여기는 우리 둘과 시녀 몇 명이 전부이다. 어서 형님이라 하여라.”
“알겠습니다! 형님! 보십시오! 하양도(뉴질랜드)의 귀뚜라미는 계란보다 무거운 것 같습니다.”
두 형제가 즐기는 놀이는 명나라에서 유행하는 귀뚜라미 싸움이었다.
황제가 평범한 귀뚜라미로 싸울 이유가 없었으니 크고 강한 곤충을 조선 상인을 통해 수입하여 싸움 붙이기를 즐겼다.
주익류는 뉴질랜드에서 들여온 가장 거대한 귀뚜라미인 태실솔(太蟋蟀: 자이언트 웨타, 여치의 일종이지만 상인들은 귀뚜라미라며 팔았다)을 집어 싸움터로 보냈고 만력제는 코웃음을 치며 손을 놀렸다.
“형님께서 정한 곤충은 얼핏 보면 방아깨비와 닮았습니다. 팔다리가 억세고 길긴 하지만 덩치가 작으니 태실솔을 당해낼 수 없을 겁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더냐? 싸울 적에 중요한 것은 크기가 아니고 능숙함이다. 내가 수많은 귀뚜라미를 다뤄 봤지만 거황(鋸蝗: 톱메뚜기)보다 잘 싸우는 녀석은 본 적이 없었다.”
만력제가 고른 곤충은 방아깨비를 닮은 여치의 일종인 사가 페도(saga pedo)라는 녀석이었다. 싸움이 시작되자 육식성 여치인 사가 페도는 덩치만 커다란 초식 여치인 자이언트 웨타에게 달려들어 목덜미를 물어뜯었고 삽시간에 승부는 결정되었다.
목덜미가 뜯겨 나간 자이언트 웨타가 사지를 뒤틀며 쓰러지니 주익류는 창백한 얼굴로 패배를 시인하였다.
만력제는 코웃음을 치며 자신의 곤충을 도로 집어넣으며 말하였다.
“싸움이건 뭐건 덩치가 크다고 능사가 아니다. 조선 사람처럼 날렵하며 튼튼하고 억센 사지를 갖춰야 하는 법이지. 이 녀석은 밤앵무의 밥으로 주면 되겠구나. 어서 오려무나!”
만력제의 애완동물이 된 카카포는 고향에서 즐겨 먹던 자이언트 웨타를 보자 꾸르륵거리며 집어삼키더니 주변에 즐비한 곤충의 사체도 모조리 먹어 치웠다. 여기서 싸우다 죽어 나간 곤충의 가격만 따져도 은자 삼천 냥에 달하지만 만력제에게는 푼돈이었다.
만력제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기지개를 켜자 친왕 주익류는 오히려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만력제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형님께 말씀드리기 불민한 일이옵니다만 벌써 여드레째 궐에 나서지 않고 계십니다. 소제와 즐거운 일을 행하느라 시일을 보내신 것 같으니 어서 국정에 임하시옵소서.”
“네가 참 옳은 말을 하였구나. 이제 남경도 정리되었을 것이니 서둘러 본래의 직무로 돌아가도록 하여라.”
동생 주익류가 인사를 올리고 돌아가자 만력제는 코웃음을 치며 지금까지 수집한 자료를 다시 훑어보고는 이를 부득부득 갈아댔다.
“국정에 임하라 하였느냐. 이런 썩어 문드러진 곳에서 국정에 몰두해 보았자 뭘 어찌하겠느냐. 내 명이 온전히 전해지지도 않는구나.”
만력제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재주가 부족한 자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어지간한 관료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자였다.
그렇기에 지난 사 년 동안 명나라의 부패에 대해 조사하였다.
산더미처럼 쌓인 자료는 인구가 일 억이 넘는 명나라의 현황에 대한 극히 일부의 사실만 담고 있었다.
만력제는 다시 자신이 수집한 자료를 넘겨보며 한숨을 크게 쉬었다.
“위소제(衛所制)와 이갑제(里甲制) 모두가 붕괴하였고 일조편법은 도입한 지 오 년 만에 폐단이 일어나 백성들이 고통을 겪는다 하였지. 스승께서는 대체 뭘 생각하신 거요?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잖소.”
이미 부관참시를 당한 스승 장거정에 대한 원망을 늘어놓은 만력제는 얼마 전에 들어온 보고를 보면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명나라의 부패는 이미 백성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명나라의 기본 호적 제도는 부유한 한 개 가구와 평범한 열 가구를 묶어 11호가 묶인 갑(甲)을 만들고, 다시 이를 10개를 엮어 110개의 가구를 리(里)라 불렀다.
이러한 이갑제를 기반으로 병력을 차출하고 세금을 거둬야 하지만 이미 이갑 자체가 붕괴하였다.
인구 이동을 누락하는 일은 평범하며 새로 이주한 이들이 관리에게 뇌물을 먹여 세금을 내지 않는 경우가 빈번했다.
여기에 결정타를 날린 것이 장거정이 주장한 일조편법(一條鞭法)이었다. 각종 잡다한 세금을 통합하고 오로지 은으로 세금을 받는 제도였는데 겉으로 보면 좋았지만 부패가 만연하였다.
만력제는 보고서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이미 이갑이 붕괴되어 사람이 부족한 상황인데도 서류에 적힌 대로 세금을 거두니 백성들이 도주하여 아예 마을이 붕괴하였다고? 그럼 도주한 백성들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왜 백 년 전과 지금의 인구가 변하지 않았단 말인가!”
만력제에게 진귀한 짐승들을 납품하는 조선 상인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명나라의 인구가 얼마냐 물어보니 그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조선에서 아는 바로는 최소 일억 명, 약 이천만 호라 답하였다.
하지만 만력제가 보고 있는 자료에는 천사백만 호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만력제 자신이 추측하건대 명나라의 인구는 이의 두 배가 넘는 삼천만 호가 넘을 것이다.
문제를 알았으니 앞으로 행해야 할 일은 호적 재조사로 나라를 바로잡는 일 외에는 없었다.
하지만 만력제는 갑자기 분통이 치밀어 올라 읽던 서류를 거세게 집어 던졌다.
“내가 평생토록 부정부패를 쇄신하고 호적을 다시 조사하여 나라를 바로 세워도 모자랄 판국인데! 당장 스승이라는 작자부터! 갓 부임한 초임 관리까지! 모조리 부패를 일삼아!”
이미 명나라의 부패는 뿌리가 깊다 못해 골수까지 들어차 있으니 호적 조사를 하여도 신뢰할 수 없으리라.
만력제는 다른 서류를 읽어보고는 콧김을 내뿜으며 이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세금을 걷을 적에 곡물을 담은 통을 걷어차 흩어진 곡물이 관리의 것이라고! 백성들의 피와 땀이나 마찬가지인 미곡부터 불순한 용도로 쓰는 놈들이 나를 상국의 천자라 추켜세우다니! 조선의 반만 닮아도 믿었을 것이다!”
만력제는 지난 사 년 동안 몇 개의 고을을 정해 철저히 조사하고 전반적인 자금 흐름을 파악하였다. 그리고 세금이 4할만 걷히고 조정에서 내려보내는 물자가 4할만 도달하는 사정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거두면서 삼 할을, 운반하면서 줄어든 물자에서 다시 삼 할을, 그리고 창고에 들여놓으면서 재차 줄어든 물자에서 삼 할을 손실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00만 석의 곡식이 거둬지면 70만 석이 되며, 운반하면 49만 석으로 줄어들고 마지막으로 창고에 넣으면 34만 석이 된다.
100만 석의 곡식을 구휼미로 보낼 때 50만 석이 닿으면 청렴결백한 관리가 다스리는 고장이라 칭송하였다.
이미 요동 사건과 척계광에 대한 모함으로 관리들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으로 떨어진 만력제였지만 남경 사건으로 바닥을 뚫고 지하 깊숙이 파고들 지경이었다. 그는 더 이상 상황을 개선할 의지가 없었다.
이럴 바에는 모조리 부패한 명나라 관료들 대신 조선에 모든 일을 위임하는 것이 나을 지경이다.
이를 꽉 다물고 분노를 삭인 만력제는 바닥에서 눈치를 보던 카카포를 끌어안고는 다짐하였다.
“짐은 네놈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으며 무슨 방법으로 네놈들을 다스려야 하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짐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을 것이며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을 것이다. 네놈들의 멍청한 짓을 가만히 보고 즐길 것이다.”
만력제가 조금이라도 명나라 관리들을 믿었다면 그는 자신의 재능을 모조리 발휘하여 명나라를 위해 평생을 바쳤을 것이다.
하지만 명나라의 수많은 관리 가운데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일부 친조선 관료들이었다.
이미 조선의 나팔수가 된 관료들을 믿는다면 그건 천자가 아닌 꼭두각시 인형이나 마찬가지이다. 천자로서의 자존심과 관료들에 대한 불신이 결합된 만력제의 대처는 본인 기준으로 지극히 논리적이지만 타인이 보기에는 광인(狂人)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니 아무런 일을 하지 않으면 되겠지. 네놈들이 알아서 나라를 돌아가게 만들면 충분하지 않겠느냐. 그저 번국에서 청하는 일이 있다면 그러한 일만 가끔 행하면 될 것이지 않더냐.”
유성룡을 임시직이라고 해도 높은 관직인 독사(督師)에 올려둔 것은 친조선 관료들을 도와달라는 신호였다.
뛰어난 관료라면 조선의 왕이 자신의 옆에 두고 항시 정책을 추진할 것이며 항시 유성룡을 통해 친조선 관료들과 연줄을 유지하리라.
본래 뛰어난 관리는 외방에 두지 않고 언제나 왕의 곁에서 자신을 보좌하게 두는 법이었다.
이런 귀중한 인재를 외방에 보낸다면 조선 임금은 아주 대범한 자이거나 아주 멍청한 자이리라.
만력제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갔다.
“지금까지 알아서 잘 행한 이연인데 혹여나 허튼수작을 부리지는 않겠지. 정말 유성룡이라는 자가 독사…… 아악! 네놈은 대체 뭘 하는 것이냐!”
갑자기 푸드덕거리며 만력제의 목 뒤로 올라간 카카포는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흥겨운 울음소리를 내고 만력제의 뺨을 날개로 계속 후려쳤다.
한참을 두들겨 맞아 정신이 쏙 빠진 만력제는 카카포를 내려놓더니 한숨을 쉬었다.
“혹여나 내가 멍청한 짓을 하였더냐? 그래서 네가 성을 낸 것이냐?”
실은 암컷이 없어 교미 행동을 한 것이지만 만력제가 그걸 알 이유는 없었다. 목덜미에 난 발톱 자국을 매만진 만력제는 한숨을 쉬고 본격적인 장기 태업에 나섰다.
이후 삼 년 동안 만력제를 본 관리는 없었다.
간혹 환관이 명을 받아 이런저런 명령을 이행하는 것 이외에는 정말 철저한 태업을 실행하였다.
#작가의 말
곤충들은 흉측하게 생겼으니 정신 건강을 위하여 검색하지 마시길 추천드립니다.
지난 화 20년 형을 선고받은 관료는 이일에서 이각으로 수정하였습니다.
이일은 이각 상관으로 있다가 파직당하였습니다. 조만간 복직할 예정이지만 진급 누락은 물론이고 온갖 불이익을 겪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