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385화
2부 17장 1화 승전 이후에는
처음에는 남만인의 난이라 불렸던 이번 사태의 공식 명칭은 경진만란(庚辰蠻亂)이라 칭해졌으며 수습 또한 한참 걸렸다.
거의 두 달이 지난 1581년 1월 말이 되어서야 비상사태가 해제되고 사건이 종료되었음을 알렸다.
당연히 파직과 승진이 교차하였다.
이번 사태의 원흉인 군관 이일은 파직은 물론이요, 가산을 압수당하고 형무소에서 환갑이 되어야 나올 수 있게 되었고 이외에도 파직당한 이는 차고 넘쳐 쉰 명에 달하였다.
평상시 서양인의 존재에 대해 아는 조선 사람들이지만 상인들과 이런저런 소식통을 거쳐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퍼지며 서양인에 대한 불신과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 올랐다.
조정에서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 먼저 승전연을 올리게 되었다. 한강 백사장 위에 문무백관이 도열한 채 공신(功臣) 임명을 제외한 -이런 경우 공신은 명나라에서 임명한다.- 모든 승전 예식을 마친 뒤 포로에 대한 간단한 심문이 시작되었다.
“네놈들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국의 강역을 침범하였는지 모르겠지만, 그 죗값을 치를 수 있는 방도는 비루한 몸뚱이 하나 외에는 없으렷다. 혹여나 무어라도 물어볼 것이 있더냐?”
단 위에 앉은 주상전하와 거대한 몸집의 내금위 병사들을 보고도 주눅이 들지 않은 이들이 있었다.
한 포로는 앞으로 두 발 나서더니 무릎을 꿇어 예의를 표시하며 말하였다.
“포로가 된 몸이지만 저희가 몸값을 낼 경우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가 궁금합니다.”
“몸값이라? 지금 서반아와의 교역을 끊었거늘 대체 어느 방법으로 몸값을 댈 수 있겠더냐. 너희가 할 일은 포로로서 탈주를 생각하지 말고 모든 사실을 고변하는 것 하나이다.”
뭔가 꿍꿍이가 있겠지만 내가 주상전하의 생각을 알 방법도 없다.
엄중한 선포를 듣자 포로들 가운데 일부는 입술을 짓씹으며 어떠한 고난도 이겨내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머지는 무릎을 꿇고 울먹거렸다.
며칠이 지나고 이들에 대한 분류가 끝나자 포로의 이송 장소가 확정되었다. 1,600명의 포로 가운데 300명은 북한산성에 있는 병영 하나를 개수하여 수용하기로 하였다.
수용될 포로들을 얼마나 철저히 관리하는지 오위의 한 부대인 용양위(龍驤衛)의 대졸(隊卒: 보병)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이송하였다.
왜 하필 북한산성인지 궁금해 정걸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하필 수용시켜도 여기란 말입니까. 제가 설계한 산성의 첫 손님이 서반아 사람이라니요. 여기로 이송하기로 정한 사람이 대감님이신데 왜 여기로 보내셨습니까?”
“어쩔 수 없지 않나. 이들이 탈주하였을 경우 오위의 정병(正兵)은 되어야 대등하게 상대할 수 있는데 오위를 머나먼 변방까지 보낼 순 없지 않은가.”
정걸도 깊은 한숨을 내쉬며 포승줄에 묶인 포로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지금 이송되는 300명은 원정대 본대에 소속된 이들로서 서양의 최정예 병사들이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어서 정걸에게 귓속말을 하였다.
“제가 보기에 이들은 오위의 정병과 대등한 수준이며 전혀 다른 전법을 구사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혹여나 주상전하께서는 이들이 군략을 내놓길 권유하시는 겁니까?”
“자네도 눈치가 빠르군. 심문을 행하여 구주(유럽)에서 오 년 이상 전쟁에 참가한 이들만 따로 선별했다네. 이들의 전술을 빼 올 수 있다면 아국의 군제를 개량하는 데 쓸모가 있겠지.”
“생각하여 보니 작금의 조선은 대등한 상대와 혈전을 벌인 적이 없습니다. 장비와 훈련도야 구주의 병사들보다 강하겠지만 경험은 부족한 감이 있군요.”
“병사들에게는 경험이 중요하지. 이들은 변란에 가담하였다는 죄목이 있지만 아국의 강역을 급습한 일도 없으니 얻어낼 것은 얻어내고 돌려보내면 충분한 일이지.”
한마디로 몸값은 필요 없고 경험이 중요하니 그 경험을 모조리 빼내겠다는 소리이다. 지금 조선이 필요한 경험은 토벌이 아닌 대등한 상대와 혈전을 치르는 것이다.
언제나 우월한 화력과 병력으로 적을 압살하던 것이 조선이다. 하지만 대등한 상대와 싸운 이는 근 오십 년 이내에 정걸이 최초이니 이 전투에서 배운 것이 많았으리라.
“결국 아국의 군대가 더욱 강해지겠군요.”
“물론일세. 적이 교전을 회피하다 수세에 몰렸음에도 어떻게든 탈출하였으니 나 또한 저들의 심계에 휘말렸다네. 항시 대등한 상대와 필사적으로 싸운 이들의 경험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아국은 더욱 강해지겠지.”
반면 북한산성에 가지 않고 따로 분리된 포로들도 있었다.
대다수가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략선단에서 사로잡힌 포로들인데 이놈들은 벌써부터 사지를 덜덜 떨며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 같은 표정이었다.
“명국 황상의 진노야 이놈들로 해결하면 될 일이지. 삼백 명 정도를 따로 빼내어 아국 백성들의 원한을 달래기 위해 엄벌을 내렸다 말하면 될 일이야.”
조선에 남은 300명의 포로는 북한산성에서 군사 지식을 뱉어내다가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인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겠지.
전장 정리도 끝나고 진짜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북경으로 향하였다.
* * *
북경으로 향하였는데 수많은 인파들이 나서 승리를 환호하였다. 이미 사태가 벌어지고 석 달이 지났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우리를 맞이한 사람은 익숙한 이였다.
“참으로 훌륭한 일이 아닐 수 없소. 황상께서는 변란의 소식을 듣고 심히 염려하셨지만 조선이 번국으로서 굳건한 행적을 보여줬으니 크게 만족하셨소이다.”
“참으로 훌륭한 일입니다. 그나저나 마 장군께서는 관직이 언제 이렇게 오르셨습니까?”
“관직이 올랐다 하였소? 이게 다 조선을 믿고 따른 내 행적 덕분이 아니겠소.”
조선에서 보내온 거마(샤이어종 말)에 올라타 우리를 맞이한 이는 친조선파 관료로 육성한 마귀였다.
39세의 나이에 불과하지만 권력의 핵심인 통정사(通政司: 황명을 수납하는 부서)의 장관으로 임명된 것이다.
이번 사태를 조선이 말끔히 수습하며 친조선파로 육성한 관료들의 품계가 하늘을 찌를 듯이 올라갔다.
마귀는 무관 주제에 조선의 승정원과 같은 권력 핵심부의 장관이 되었는데 나이가 어려서 품계가 많이 오르지 못한 것이라더라.
오유충은 아예 병부상서가 되었고 친구 김성일이 육성한 송응창은 아예 감찰기관인 도찰원의 수장이 되었다. 숙소에서 짐을 풀고 김성일의 표정을 보니 흐뭇하다 못해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자네가 십 년이 걸린다고 예상했던 일이 삼 년 만에 해결되어 기분이 좋던가?”
“그러하네. 아국의 제도로 보면 이조와 병조 그리고 사헌부에 아국의 입김이 들어간 관료들이 자리 잡았다네. 이미 명국 정계는 아국의 의견이 아니면 돌아가지 않을 것이네.”
“모두 다 이번 변란을 원활하게 수습한 우도수군통제사 대감과 여해 덕분일세. 물론 내 전공도 빼놓으면 아니 된다네.”
짓궂은 미소를 짓는 김성일을 보며 나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명나라 황제의 권력이 아무리 하늘을 찌른다 하여도 인사권과 병권 그리고 감찰 권한이 친조선 관료에게 넘어간 것이다.
이쯤 되면 명나라는 그냥 돈 뱉는 기계 신세가 되었다. 조선에 반기를 드는 이들은 사정없는 감찰을 당하고 파직당할 것이며 아예 인사 배정에서도 흠이 잡혀 밀려나리라.
군사야 조금 도움을 줘서 당장 무너지지 않게 조치를 취하면 충분하겠지.
만력제는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독(旅毒)이 풀리자마자 승전연을 시작하였다.
“남방의 만인(蠻人)들이 변란을 일으켜 남경을 범하려 하였으니 이를 수습한 공이 차고 넘쳐 짐을 흡족하게 하고 남을 지경이로다. 하지만 승전을 치하하기 이전에 벌을 내릴 이들이 넘쳐나니 먼저 죄과를 엄중히 묻겠다.”
등자룡이 인사를 올리더니 금군이 나서 동창에 갇혀 있던 이들을 끌고 나와 무릎을 꿇렸다. 누군가 했더니만 남경을 버리고 도망친 서유지와 뇌물을 바쳤던 남경 일대의 세도가들이다.
만력제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눈을 흘기며 말하였다.
“네놈들은 남경의 병졸을 헛되이 낭비하였으며 변란이 일어날 적에 이십만 호의 백성이 거주하는 남경을 수호할 책무조차 저버리고 스스로의 안위만 택하였다. 다만 서유지는 개국공신 서달의 후손이니 가산을 압수할 것이며 나머지는 삼족을 멸하라.”
세도가들도 바보가 아니니 관료들에게 뇌물을 먹여 목숨을 보전하려 했지만 황제가 직접 나서니 모든 일이 허사로 돌아간 것 같았다.
당황하는 세도가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건 말건 이들은 모조리 목이 베어져 효수당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차린 포로들은 살려달라고 애원하였고, 만력제는 이 말을 듣더니 아예 코웃음을 치며 포로들의 처우도 정하였다.
“네놈들이 정녕 살기를 바라더냐? 그러하면 살아남는 것이 죽는 것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알게 하면 되겠구나. 네놈들은 달자들에게 팔아 노예로 삼으면 죽는 것보다 더욱 끔찍한 고통이 아니겠느냐. 놈들을 다음 마시(馬市)에 팔아넘겨라.”
달자들에게 노예로 판다는 말은 저들이 북원으로 향한다는 말과 같다.
북원은 그냥 사람이 살 동네가 아니고 여름에는 폭염이, 겨울에는 영하 30도가 넘는 혹한이 이어지는 황무지이다.
하지만 저래도 되나?
저들은 엄연히 따지면 항해의 대가이며 선박을 개수하는 방법 정도는 알 수 있다. 조선에서야 필요 없지만 명나라의 수준이면 항해 기술을 전수받아 명나라 수군을 재건할 수 있으리라.
마귀와 오유충은 만력제에게 달려들어 뭐라 간언했지만 만력제는 오히려 성을 내며 둘을 노려보고 뜻을 확실히 하였다.
포로들이 사라지자 만력제는 다시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단상 아래로 내려와 관료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정걸이라 하였는가. 자네가 일등 공신이니 은자 이천 냥과 비단 일백 필 그리고 금은보화를 마련해 두었다. 그리고 유성룡이라 하였는가? 간만에 보는구나.”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정걸이지만 그다음 공을 세운 사람은 나였다.
만력제가 뭔 생각인지 뒤틀린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청하였고 나는 고개를 숙이며 악수를 받아들였다.
“황상께서 이리도 은덕을 내리시니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몸 둘 바를 모른다 하였는가? 그렇다면 명국에서 몸을 둘 장소를 정하면 되겠구나.”
지금 만력제가 뭐라 했지? 나를 명나라의 관료로 임명해?
이건 미친 짓이다. 명나라에서 관직을 받은 조선 사람들은 실권이 없이 그냥 관직을 받고 정치적 입지를 굳히라는 뜻에서 관직을 하사받을 뿐이다.
아무리 상국이라지만 다른 나라 사람을 불러다 관직에 올리면 예법은 물론이요, 국가 운영의 기반 자체가 무너지는 법이다.
하지만 만력제는 진지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정말 관직을 내렸다.
“번국 조선의 신하로서 상국의 관리로 일하라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솔선수범하여 남경을 수호한 심계를 인정하는바. 이번 일등공신의 포상으로 독사(督師)로 임명하겠다.”
임명장이 내려오고 이를 환관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낭독하였다. 지금 벌어진 사태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미사여구로 점철된 임명장을 듣다 보니 절로 혼잣말이 나왔다.
“이건 도를 넘어도 한참 넘어갔는데…….”
임명장의 내용을 요약하면 나는 명나라의 지방 군권을 통솔할 수 있는 종1품, 조선 품계로는 아예 대등한 관리가 없는 독사로 임명되었다. 한때 요동에서 변란의 근원이 된 경략(經略)과 마찬가지로 지방 군권을 모조리 거머쥘 수 있는 자리이다.
물론 명나라 군대가 패배하여 수습할 수 없을 지경에만 독사의 직위를 사용할 수 있다. 이번에 남경과 같은 상황이 일어났을 때 황명을 내세워 군사 기강을 똑바로 잡으라는 소리지만 나에게 너무나 큰 짐이다.
만력제는 내 표정을 보더니 아예 표찰(標札)을 건네주었다.
“이 표찰은 짐이 직접 만든 표찰이다. 만약 지방에서 변란이 발생하여 천병(天兵)이 패퇴할 적에 이를 수습하는 일을 위임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 어디 쉽게 일어나는 법이더냐.”
“황상의 은덕이 하늘에 닿을 지경이라 이 미욱한 자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옵나이다.”
“미욱한 사람이라 하였느냐? 처음으로 군문에 나서 삼천 명의 병사로 일만 명의 적도를 진멸시켰으니 이를 미욱하다 여기면 세상천지에 사람 되다 만 것만 있겠구나!”
일이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고?
꼭 이런 것을 받으면 일이 터져서 덤터기를 쓰고 개고생을 하더라고. 조만간 뭔 일이 터질지 몰라 고민하는 와중에도 만력제는 차곡차곡 공신을 임명하기 시작하였다.
“이순신이라 하였는가. 장강의 병사들을 다시 인솔하여 해적들을 진압하였으니 그 공이 참으로 크다. 정걸이 없었다면 자네가 일등공신이었겠지만 공신 간에는 격이 있는 법이다.”
“황상께서 재주 하나만 가진 사람을 어여삐 여겨주시니 은덕이 하해를 메우고 하늘에 닿을 지경이옵나이다.”
이순신은 어쩔 수 없이 이등공신이 되었지만 그것만 해도 어디인가. 사실 정걸이 경기수영을 이끌고 적과 전면전을 벌여서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공신 임명도 끝나자 만력제는 조선에 따로 선물을 주었다.
“남경이 불탔다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자금이 소모되었을 것이니 조선이 사용한 군비를 계산하기도 아까울 지경이다. 역적들의 재산을 몰수하였으니 이를 환수해 조선에 은자 사백만 냥을 내리겠다.”
왜 남경의 세도가를 죄다 죽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역적을 죽이고 남은 재산은 모조리 국고로 환수되며 대다수는 황제의 개인 내탕금으로 들어오는 법이다.
만력제는 한술 더 떠서 아예 흡족하지 못하다는 듯이 말하였다.
“또한 남만과의 교역을 삼 년 동안 폐하도록 하라. 만약 이문이 부족하다 생각하면 교역에 쓰이는 물산을 북경으로 가져오도록 하여라. 그리 하면 교역품의 값이 얼마건 간에 매년 이백만 냥의 은자를 내릴 것이다.”
“황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이건 만력제 만세다.
영원히 교역을 중단하라는 명령도 아니고 기강을 잡도록 삼 년 동안 무역을 중단하며 그 기간 동안 발생하는 손실을 모조리 명나라가 부담한다는 뜻이니까.
장거정 시절의 명나라 관료들이라면 만력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목숨을 걸고 아니 된다고 손사래를 쳤겠지만 지금 명나라의 실세는 친조선 관리들이다. 밉보이는 순간 친조선 관리들에게 탄핵당할까 염려하여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결국 조선은 막대한 이득을 챙겼지만 만력제의 퉁퉁한 얼굴에 담긴 생각이 뭔지 모르겠다.
세도가를 죽여서 재산을 얻어낸 걸 보면 뭔가 생각이 있는데 대체 어떤 논리로 이런 방침을 내렸을까.
#작가의 말
성룡이에게 직위는 제한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직위입니다. 그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명나라 군대가 패퇴할 당시 해당 지역에서 군관 직무를 수행할 것.
2. 패퇴한 명나라 군대를 인솔할 장수가 올 때까지 지휘하고 이후 인솔할 장수에게 권한을 일임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