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383화
2부 16장 8화 오문 해전(1)
유성룡과 등자룡이 남경에서 승리를 거둘 무렵 스페인 원정대는 전력을 다한 행군으로 항주까지 도망쳤다.
퇴각이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조선 수군과 전면전을 벌일 상황이기에 사력을 다한 상황이었다.
“혹여나 낙오하는 이가 생긴다면 부축하도록! 퇴각이 늦어진다면 조선 수군을 만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머나먼 동방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모르나!”
지휘관인 로베르토를 비롯한 원정대는 숙련된 군인이었다.
레판토 해전을 비롯해 유럽 곳곳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전한 이들이기에 빠져야 할 때를 알고 자신들의 목숨을 부지할 방법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원정대에 끼어 한몫을 차지하려는 사략선단에 속한 이들은 아직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였다.
한 잡부가 엉성하게 만든 지팡이를 짚고 절룩거리며 움직이자 테르시오 출신 병사가 달려들어 등짐에서 커다란 은 덩어리를 끄집어냈다.
“그놈의 은 덩어리는 좀 버리라고 이 머저리야! 발모가지가 다 뒤틀릴 지경인데 돈이 중요하냐? 목숨이 중요하냐! 당장 버려!”
“이거 가져가면 평생 먹고살 수 있는데…….”
“그만 좀 닥쳐! 물귀신 신세가 되거나 동방에서 노예 신세가 되면 그게 무슨 소용이야!”
보선 함대에 비축된 귀금속과 나름 커다란 항구인 항주를 기습하고 획득한 재화만 따져도 은 사백만 냥(약 150톤)에 달하며 남경까지 진군하며 노획한 귀금속도 은으로 환산하여 이백만 냥에 달하였다.
하지만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없으니 남경까지 진군하며 얻은 대다수의 재화가 길바닥에 버려졌다.
로베르토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태오 리치에게 울적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이런 퇴각이라니. 처음 성전을 행한다 했을 적에는 온 천하에 펠리페 2세 전하의 명성을 드높일 기회라 하였지만 본국으로 돌아가면 온갖 모욕에 시달릴 게 분명하오.”
원정대를 모집할 때에 유럽 전체에서 뛰어난 인재들을 소집하라 하였고 로베르토는 일 년 동안 유럽 전체를 돌아다니며 이를 충실하게 이행하였다.
만약 원정을 성공하였다면 유럽 전체에 펠리페 2세를 칭송하는 여론이 빗발쳤겠지만 이제는 아니다. 설령 퇴각을 완수하여 목숨을 건져도 조선 함대를 피해 달아났다는 소식이 퍼지리라.
하지만 마태오 리치는 오히려 화를 내며 맞붙었다.
“모욕이라 하셨습니까? 지금 가까스로 남경에 퍼지던 신앙의 불꽃을 모조리 짓밟아 버리셨으면서 대체 무슨 모욕을 생각하시는 겁니까?”
“일이 틀어져 미안하게 되었소. 모든 모욕은 내가 짊어질 것이나 내 목숨을 다하더라도 마태오 형제만큼은 고국으로 귀향할 길을 만들어주겠으니 염려하지 마시오.”
6일의 처절한 행군 끝에 항주에 돌아온 원정대이지만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넋 놓고 휴식을 취하다가 항구가 포위당하면 아예 싸울 방법도 없기에 사력을 다하여 승선하였다.
“사람이 줄어들지 않았으니 전투는 없었던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일입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당장 출항하시오! 상세한 일은 출항한 뒤에 설명하겠소!”
보선으로 화공을 벌이며 당당하게 상륙하였던 로베르토지만 퇴각은 처절하기 그지없었다.
발이 부르트고 통증을 호소하는 장병들이 휴식을 취하자 하였지만 살기 위한 퇴각이니 다른 방법도 없으리라.
“일단 원양으로 나가시오. 원양으로 나가서 혹시 모를 적의 추격을 뿌리치고 바로 항로를 변침하여 해안가로 나가도록 합시다.”
그래 보았자 며칠 버티지도 못하리라. 자신들은 운이 좋거나 태만한 초병(哨兵)을 만나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 삼엄한 경계를 취하는 조선 수군과 언젠가는 직면하리라.
하지만 싸우더라도 적의 마당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곳에서 싸워야 하지 않겠는가.
원정대는 황해 먼바다로 나간 뒤 바로 항로를 변경하여 남중국해로 향하였다.
* * *
항주로 들어온 경기수영의 함대는 잠시 혼란에 빠졌지만 이내 상황을 알아차렸다. 해안을 따라 북상한 경기수영과 마주치지 않았다면 놈들은 원양으로 나아간 것이 분명하였다.
하지만 여기는 제대로 된 해도도 작성할 수 없는 이역만리이다. 정보가 없는 수역에서 섣부른 원양 항해를 실시하면 한 번의 실수로 엉뚱한 장소로 향하는 법이었다.
당연히 스페인 원정대가 갈 곳은 남중국해의 해안 한 곳밖에 없었다.
“개잡놈의 해적들! 내 반드시 네놈들의 명줄을 끊어놓고 말겠다!”
이를 부득부득 갈아대는 우도수군통제사(평양, 황해, 경기, 충청, 전라 수영을 담당하는 정2품 무관직) 정걸은 지독한 분노로 이틀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이었다.
보선 함대를 물리친 일이야 이해할 수 있었다. 언제나 여송 일대를 유람하듯 다니며 거들먹거리던 보선 함대를 싫어하는 것은 조선 수군뿐만 아니라 조선과 인연을 맺은 모든 이들의 공통점이니 오히려 환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선을 넘어도 너무 넘었다.
보선 함대를 물리친 이후 명나라와 협상을 하였다면 이들과 적당히 싸워 보내줬을 것이지만 지금은 수만 명의 해적을 끌고 명나라를 침략하였다.
“놈들의 위치를 찾았나? 혹여나 놈들이 구주(歐洲: 유럽)로 돌아간다면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되겠나! 여송은 물론이고 명국 전체가 해적의 소굴이 될 것이 분명해!”
원정대를 놓친다면 수백만 냥의 재물을 갈취한 소문이 퍼질 것이요, 훗날 벌어질 일은 수많은 서반아 해적들을 막아내며 고난을 겪는 조선 수군의 암담한 미래이리라.
병사들 또한 이를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눈에 핏발을 세우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평생 남중국해에 머물며 해적을 격퇴하며 사느니 차라리 제대로 된 전투로 적을 격멸하는 것이 백 배 옳은 일이다.
마침내 모두가 고대하던 소식이 도착하였다.
“수상한 선단이 태주(臺州: 현 타이저우 시) 인근 해상에서 발견되었다 합니다!”
“당장 뱃머리를 태주로 돌려라! 놈들을 모조리 격퇴하지 않으면 앞으로 수십 년 동안 해적들을 상대하며 온갖 고난에 시달려야 할 것이니 사력을 다하여 추격하라!”
설령 원정대가 도망치더라도 막심한 타격을 입혀 조선 수군과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눈에 핏대를 세운 경기수영 함대가 원정대를 추격한 지 이틀이 지나자 가까스로 원정대의 최후미 함선을 포착할 수 있었다.
“놈들도 우리를 발견하였는지 전속력으로 도주하고 있습니다!”
“상관없다! 남서풍이 불어대니 오히려 추격하기 좋은 상황이 아니겠는가! 돛을 펼치고 전력을 다하여 추격하라!”
사력을 다하여 추격하는 경기수영의 함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항해에 몰두하였고 원정대 또한 싸움을 피하기 위해 도주하였다. 7일간 이어진 추격전으로 함대가 이미 오문(澳門: 마카오) 일대까지 내려온 상황이었다.
하지만 전력을 다하여 항해하였기에 결국 사고가 터졌다. 계절풍을 받아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원정대 기함 산 마르티노의 돛이 터져나가듯 찢겨 버렸다.
원인을 알 수 없지만 적의 속도가 느려진 것을 확인한 정걸은 재차 명령을 내렸다.
“놈들이 느려졌다! 놈들을 포위할 것이니 원양으로 항로를 변침한 뒤 놈들을 해안으로 몰아넣을 준비를 하라!”
원정대가 택할 길은 둘 중 하나였다. 속도를 줄여 돛을 수리하거나 이 손상을 내버려 두고 항해를 계속하는 것.
길게 찢어진 돛을 보던 베르나르는 한숨을 쉬며 말하였다.
“돛을 예비용으로 갈아 끼우려면 속력을 줄여야 하고 수리에만 세 시간 정도 걸릴 겁니다. 하지만 세 시간이면 조선 수군이 저희를 추격하고도 남겠지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돛이 찢긴 채로 도주하면 이틀 정도 뒤에 따라잡힐 것이네. 차라리 적과 일전을 벌이고 적들을 혼란에 빠뜨린 뒤 바로 탈출하도록 하세.”
이미 레판토 해전을 비롯한 수많은 해전을 경험한 병사들 사이에서 불만이 솟구쳤다.
이대로 추격을 달고 다니느니 차라리 전투를 벌이자는 의견을 제시하는 이가 생겨날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피할 수 없다면 맞서 싸우고 도주하는 것이 옳은 방침이리라.
급속도로 느려지며 전투를 준비하는 스페인 원정대와 원양으로 나가 상대의 옆에 선 조선 수군은 서로 종대(縱隊)를 유지한 채 점차 거리를 좁혀갔다.
두 함대의 간격이 1,000보(1.6㎞)로 좁혀졌을 무렵 정걸이 탑승한 대장선에서 화포가 발사되었다. 전속력으로 항해하며 발사한지라 정확도는 애초에 기대할 수 없었다.
선단 근처에서 물기둥이 치솟자 정걸은 입술을 깨물며 지시를 하달하였다.
“신궁으로 이름난 태조대왕께서도 말 위에서 움직이는 적을 온전히 적중시키지는 못하였다! 계속 거리를 좁히며 사격을 이어가라!”
함대 간의 거리가 좁혀지자 물기둥이 함선에 가까워졌다.
전체적으로 큰 구경의 화포를 사용하는 경기 수영은 두껍고 수가 적은 물기둥을, 작은 구경을 사용하는 스페인 원정대는 얇고 수가 많은 물기둥을 만들어냈다.
한 발의 포탄이 정걸이 탑승한 대장선에 적중하였다. 나무가 으깨지는 소리가 들리며 병사들의 입에서 침음성이 새어 나왔지만 대장선의 거대한 크기에 비하면 경미한 손상이었다.
보선 함대가 몇 발의 명중탄에 당하고 겁에 질려 움직이지 못한 것과 달리 경기수영의 병사들은 오히려 장전속도를 올리며 대응하였다.
마침내 몇 발의 탄환이 운수가 사나운 사략선에 명중하였다.
“적의 소선(300톤급 갤리온)에 명중하였습니다! 뇌력포의 탄환이 분명합니다!”
“역시 뇌력포라니까! 사용하기는 불편하여도 위력 하나만큼은 천하제일이지!”
어중간한 해적선 대여섯 척을 물리칠 수 있으며 지방 수영에서도 주력 함선으로 쓰일 크기이지만 이 해전에서는 소형 함선에 불과하였다.
항로를 제대로 잡지 못한 사략선이 조선 함대 방향으로 표류하며 포탄을 여러 발 얻어맞고 해전의 첫 격침 기록을 세웠다.
원정대도 유효사격을 실시하려 하였는지 급격히 항로를 변침하며 조선 함대 방향으로 다가왔다.
견제사격 대신 유효사격을 택한 두 함대는 전열(戰列)을 형성하고 숨을 죽인 채 천천히 거리를 좁혀 나갔다.
“전 화포 방포하라!”
서로 간의 거리가 400보(640m)에 도달하자 정걸의 명령이 떨어지며 붉은색의 대장기가 거세게 펄럭였다.
함선 우측의 모든 화포가 순차적으로 발사되었고 1,000톤이 넘는 거대한 대장선이 출렁이며 반동을 받아냈다.
이윽고 엄청난 충격이 대장선을 휩쓸었다. 서로 속력을 줄인 상태였기에 삼 할 이상의 포탄이 명중하였으며 잘 훈련된 경기수영의 해군들도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정걸은 눈을 부라린 채 보고를 들었다.
“상황은 어떠한가! 차탄을 장전하며 보고하라!”
“수부 넷과 선원 여섯이 전사하였고 둘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놈들이 불을 붙인 탄환을 쏘아 화약이 유폭할 위험에 처하여 물을 뿌려 진화하였습니다!”
“잘하였다! 지금부터 자율적으로 방포하되 선체의 흔들림을 염두에 두며 방포하도! 젠장!”
서양은 비격진천뢰와 같은 폭발탄이 없었지만 탄환을 다양하게 활용하였다. 거대한 쇠사슬이 엮인 탄환이 날아와 대장선의 돛대를 휘감았고 돛 하나가 갈기갈기 찢겼다.
상대도 만만한 자들이 아니다. 이역만리까지 해적질을 할 이들이면 실력에 부족함은 없을 것이요,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탈출하려 하리라.
정걸은 이를 악물며 다음 지시를 하달하였다.
“벽력포와 대완구를 사용할 것이다! 적의 함대와 이백 보(320m) 거리로 접근하도록!”
정걸도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이런 전투에서는 접근하는 쪽의 사격 각도가 뒤틀려 일방적인 피해를 입는다.
하지만 상대가 잔재주를 부리게 내버려 두면 결국 도주를 막을 수 없으니 한 번의 포격 정도는 받아내려 하였다.
* * *
스페인 원정대 또한 타격을 입었다. 원정군 주제에 화력 교환을 하였다가 손실을 무마하지 못하고 자침 당할 수 있으니 쇄(鎖: 사슬)탄이나 핫 샷 같은 잔재주에 의존하여 피해를 누적시키자는 방침이었다.
“선원 서른이 죽고 선체 하부까지 구멍이 뚫렸습니다! 물이 계속 새어 나옵니다!”
“운수가 없어도 지지리도 없군! 어서 들어가 구멍을 막아라!”
이대로 포격을 교환하며 적의 돛대 다수를 쇠사슬로 찢어버린 뒤 탈출한다. 계획은 완벽해 보였지만 상대의 화력이 더 강하니 잘못하면 함선이 침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경기 수영은 포격을 중단하더니 이상한 움직임을 보였다.
“적이 계속 접근합니다! 저희에게 접근하고 있으니 먼저 일제 포화를 날리시지요!”
“접근한다 했는가? 저렇게 급격히 접근해?”
상대가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을 준비를 하니 신이 난 선원들은 포도탄을 장전하며 상대의 접근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대로 300야드 정도 접근한 상태에서 포도탄을 쏘면 수십 명을 죽일 수 있으리라.
하지만 로베르토의 생각은 달랐다.
상대는 바보가 아니다. 저렇게 숙련된 병사들이 손해를 감수하며 지나치게 접근하는 이유를 알 길이 없지만 분명 전략적인 움직임이리라.
망원경을 들어 상대의 갑판을 확인하니 적어도 백병전의 준비는 아니었다.
“장전 마쳤습니다! 놈들이 충분히 접근하면 포도탄을 쏘아 아예 분쇄하여 버립시다!”
함선이 저렇게 접근하면 접근하는 쪽이 일방적인 손해를 본다.
선체가 기울어 갑판에 둔 화포 몇 발만 발사할 수 있으며 하층에 둔 화포는 각도가 나오지 않아 쏠 방법이 없다.
갑자기 로베르토의 등골에는 오한이 치밀어 올랐다. 아주 예전 즐거운 마음으로 오스만 제국의 함선과 싸울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몰타 기사단은 포격을 퍼부으며 상대와 화력을 교환하다 어느 순간 달려들어 그리스의 불(그리스의 불 제조법은 동로마 생존자에 의해 전해졌다)을 바른 등나무 가지를 집어 던져 적함을 불태워 버렸다.
순간 로베르토는 지휘체계를 무시하고 명령을 내렸다.
“전 함대 항로를 변침하라! 적함과 절대 접근하지 말라!”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인데 어찌…… 억!”
“닥쳐라! 적함이 그리스의 불을 사용하면 어찌 되겠나!”
포도탄을 일방적으로 쏟아낼 기회를 노리던 함선들은 로베르토의 명령에 따라 해안 방향으로 기수를 틀었다.
하지만 모든 함선에 지시가 하달되는데 시간이 걸리기에 후미의 함선과 사략선단은 조선 함대에 바짝 접근하였다.
스페인 원정대의 산탄 세례와 조선 함대 비장의 병기인 비격진천뢰와 저속 화포인 벽력포가 서로 포격을 주고받았다.
산탄에 맞은 경기 수영의 함선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스페인 원정대가 입은 피해는 치명적이었다.
벽력포에 당한 원정대 함선이 갈피를 잡지 못하며 표류하기 시작하였다. 벽력포 특유의 느린 탄환이 선체를 관통하며 수없이 많은 파편을 만들었고 경로 상의 모든 선원을 찢어버린 덕분이었다.
하지만 다른 두 척의 함선은 이보다 끔찍한 운명을 맞이했다, 대완구에서 발사된 농구공 크기의 비격진천뢰가 폭발하였다. 한 함선은 세 발의 비격진천뢰가 순차적으로 터지자 화약이 유폭하며 불기둥으로 변하였다.
적이 비장의 한 수를 가졌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멀쩡한 배를 터트리는 신비한 탄환을 쏠 줄은 몰랐다.
침착하게 전황을 바라보던 베르나르조차 바닥에 주저앉으며 비명을 질렀다.
“저건 또 뭐야! 저런 병기가 세상 어디에 있어!”
선원들은 성호를 그으며 수호성인을 찾기 시작하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함선이 화포에 맞고 시간이 좀 지나자 멋대로 폭발했으니 이를 악마의 소행이라 여겼다.
“성 에라스무스(항해자의 성인)시여! 저게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저건 유폭이 아니야! 그리스의 불에 적중당한다고 저렇게 유폭할 이유가 없다고! 놈들이 그리스의 불을 담은 탄환을 쏘아대는 것이 분명해!”
원정대는 로베르토의 부정확한 설명 덕분에 혼란에 빠지지 않았지만 사략선단은 살길을 찾아 함대에서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조만간 항로를 잃고 표류하다 조선 수군에게 사로잡히리라.
기세가 오른 경기 수영은 다시 벽력포와 대완구를 장전하며 거리를 좁혔고 원정대는 어쩔 수 없이 항로를 재차 해안으로 돌렸다.
하지만 베르나르는 주변을 살펴보고 이를 갈며 외쳤다.
“로베르토 님! 이대로 항로를 계속 변침하면 결국 갈 곳은 해안밖에 없습니다!”
이대로 경기 수영의 접근을 피하기 위해 항로를 변침하다 보면 해안에 좌초되리라.
그렇다고 상대와 포격전을 이어가면 저 끔찍한 탄환을 몇 발이고 맞아야 하니 도주하지도 못할 것이다.
설령 거리를 벌려도 상대의 화력을 감안하면 정상적인 해전을 벌여서 패배할 상황에 처하였다. 로베르토는 자신의 철퇴를 꺼내며 최후의 명령을 내렸다.
아마 절반 이상이 여기서 목숨을 달리하겠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전원! 백병전을 준비하라! 크게 선회하여 한 바퀴를 돌고 적함과 격돌할 것이니 그동안 쓸데없는 물건을 버려 함선의 속도를 높여라! 마태오 신부! 당신은 선창 아래로 들어가 있으시오!”
거대한 호를 그리며 우회하는 스페인 원정대의 의도를 알아차린 경기 수영 또한 상대의 접근을 대비하며 진형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 * *
“이대로 궁지에 몰아넣으면 이길 수 있습니다! 놈들이 결국 발악을 하는군요!”
“발악이라 하였는가? 우리가 벽력포와 비격진천뢰를 숨겨두었듯이 놈들도 비장의 수를 준비해 두었을 것이네. 잠깐…… 지금 우리가 바람을 받는 쪽이지?”
정걸 또한 해전 경험이 충분한 노장이었기에 상대의 심리를 파악하느라 애썼다.
적은 북동쪽에 있으며 자신들은 남서쪽에 있다. 아마 적은 바람의 기세를 받아 백병전을 걸고 사력을 다해 탈주할 것이다. 서반아인 주제에 풍향을 잘 읽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거세게 불어오며 입술이 갈라질 정도로 건조한 겨울바람을 느끼자 정걸도 반사적으로 소름이 돋아 올라왔다.
문종 시절에 오사만국(오스만 제국)에서 귀부한 학자의 후손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조상들이 화공원에서 일하며 수없이 많은 물건을 만들고 재현하려 애썼지만 ‘끈끈한 불’이라 불리는 끔찍한 병기는 재현할 수 없다 하였다.
듣자 하니 오사만국과 싸우다 멸망한 동대진국(동로마 제국)의 비장의 병기라 하였다.
“화공…… 화공이라면 설마.”
“화공은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희가 선창과 갑판에 드므(방화수용 물동이)를 얼마나 많이 두는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 선창으로 내려가라! 예비용 돛을 닥치는 대로 꺼내 물을 축여두란 말이다!”
끈끈한 불을 재현할 수는 없어도 그 위력만큼은 익히 알고 있었다. 물을 뿌려도 물 위에서 타오르며 불을 끄려면 젖은 모래를 뿌리거나 젖은 가죽으로 덮어야 한다고.
서반아나 동대진국이나 같은 구주(유럽)에 속하는 이들이기에 같은 병기를 사용할 가능성이 있었다.
정걸이 침을 삼키며 젖은 돛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적의 돌격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