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381화
2부 16장 6화 첫 실전은 심리전으로
스페인 해적, 아니, 원정대는 내 경고를 철저히 받아들여 모조리 퇴각하였다.
명나라에 대해서는 호구일 수도 있다 의심해 볼 수 있었겠지만 조선 수군은 확실한 위협으로 다가왔겠지.
등자룡도 척후병을 보냈으니 적의 수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일단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병졸들을 소집해 공치사를 늘어놓았다.
“세 치 혀로 정말 서반아 놈들을 몰아내시다니 대단한 일입니다. 그들이 해적들과 한패를 이루어 움직였다면 승산이 없었겠지요.”
“놈들도 약탈을 행했으니 더 이상 재물을 모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저 제 말을 듣고 돌아갈 마음을 정한 것이니 큰 공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이 약탈했냐고? 놈들은 본영을 대충 정리하고 도주했는데 무게 대비 값이 저렴한 도자기(도자기는 개당 은자 3~5냥이다)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등자룡은 이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고 바닥에 침을 뱉으며 말했다.
“남쪽의 해적 놈들이 앞잡이가 되어 놈들에게 금은보화를 얻는 방법을 알려줬겠군요. 하여튼 광동성(廣東省)과 복건성(福建省)의 해적 놈들은 죽여도 끝이 없다니까.”
간혹 마제은(은자)이 굴러다니는 것을 보면 놈들이 타고 온 배의 밸러스트(배 하부에서 균형을 잡는 무거운 물건)는 모조리 은 덩어리가 되었을 것이요, 일개 잡부들조차 주머니 가득 은을 챙겼으리라.
그리고 가장 무거운 물건이 있었다.
“얼마나 다급하였는지 화포도 두고 돌아갔습니다. 심지어 화약도 있는데 많아봤자 쓸 사람이 없으니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다 쓸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물자가 부족하면 문제이지만 남는다고 큰 문제는 아니지 않소. 적에게 노획될까 염려되면 화약에 물을 뿌리면 충분한 일이지요.”
어디선가는 다 쓸모가 있겠지. 물자를 산 아래에 옮겨두라 지시하고 임시 요새로 돌아갔다.
당나라 시절부터 있던 절이며 태조 주원장이 시주하고 중건하였다는 백복원(百福院: 현 영봉사)이라는 절이 있는 산의 능선이 요새였다.
말뚝과 수레를 이용해 축조한 요새에는 곳곳에 임시로 만든 화차와 화포가 배치되어 있었다. 시일이 부족하지만 도적들을 상대하기에는 차고 넘치는 진영이다.
상황을 점검하는 등자룡이 돌아오지 않아 홀로 남아 있자니 괜히 한숨이 나왔다.
“보통 승리도 아니고 적의 삼 할 이상을 죽이는 대승을 대등한 병력도 아니고 세 배나 적은 병력으로 거둬야 한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야? 내가 을지문덕이나 이순신이라면 모르겠다.”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번 싸움이 끝이 아니고 장강을 따라 북상하는 도적들을 상대로 다시 한번 일전을 벌여야 하니 이번 전투에서 적이 다시는 결집하지 못할 압도적인 승리를 거둬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게임이 아니다.
사람들은 공격 명령을 내리면 죽을 때까지 싸우는 유닛이 아니고 살고자 하는 욕망에 충실하다. 더군다나 도적을 비롯한 비정규군은 더욱 패배에 민감하다.
손자병법을 보면 1할(10%)의 병력만 죽거나 부상을 입어도 대열이 흐트러지고 퇴각을 시작한다더라.
하지만 해적들은 5푼(5%)의 병력만 손실되어도 대열이 붕괴되며 사방으로 도주할 것이 분명하다. 이러면 며칠 뒤 2만의 대병력을 상대해야 한다.
물론 이런 불리한 상황에서도 대승을 거둔 사람들이 있지만 대부분 명장으로 역사에 남은 사람들이다. 나는 그저 지식이 많고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딱히 재능도 경험도 없는 사람이니 그저 서적에만 의존해 전략을 수립할 뿐이다. 그나마 함께 하는 이는 50살의 노장 등자룡이라 어느 정도 나의 부족한 점을 보완할 뿐이지.
절로 한숨이 나와 다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육로로 올라오는 도적들을 최소 삼 할가량을 죽이거나 중상을 입혀야 놈들이 재결집하지 못하고 패퇴하겠지만 손실이 적으면 오히려 더 결집하겠지. 어중간한 승리는 패배보다 못한 것이 아이러니라니까.”
“아이노이(阿夷路移)라니 대체 무슨 말이오? 혹여나 조선에서 쓰이는 사자성어요?”
무심코 영어를 사용했네. 등자룡은 내 부담감을 이해하였는지 측은한 눈빛을 보내었고 나는 애써 고개를 저으며 답하였다.
“등 지휘동지께서 오셨습니까? 그냥 혼잣말을 하였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심려가 깊으신 모양이구려. 참으로 다행인 일인데 해적들의 척후를 두 명 사로잡았소. 듣자 하니 인근 농부들이 도리깨로 작물을 탈곡하다 쫓아가 추포했다 하더구려. 심문을 행하니 사흘 뒤 도적들이 일대로 몰아친다 하였소.”
때가 왔지만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병장기는 많고 승산도 있지만 목적 달성이 불가능하다면 결국 패전이고, 남경이 불타면 조선은 삽시간에 재정 부족 상태에 직면하리라.
등자룡과 함께 지도를 보며 작전을 계획하였는데 등자룡은 바둑판을 가져와서 검은 돌과 흰 돌을 놓으며 설명하였다.
자연스럽게 바둑 생각이 나서 백돌을 집어서 놓자 등자룡은 내 돌을 치우더니 슬쩍 웃으며 말하였다.
“자고로 바둑은 잡기라 하지만 바둑을 잘 두는 이는 상대의 심리를 꿰뚫는데 능한 법이지요. 내가 효릉을 방비하고 죽을 생각을 하였는데 귀공(貴公) 덕분에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바둑이 심리를 꿰뚫는데 능하다 하셨습니까?”
생각해 보면 내가 바둑을 둘 때는 유성룡의 어마어마한 두뇌와 결합해 상대의 심리를 손금 보듯 꿰뚫었다.
내 행마(行馬)를 숨기고 상대의 허를 찌르며 본의를 드러내는데 그걸 전장에 적용한다면 어떨까.
막사 밖으로 나가니 아직도 사용처를 찾지 못한 화약과 화포, 그리고 비격진천뢰를 비롯한 병장기들이 천막 아래에서 잠들어 있었다.
이걸 잘 배치한다면? 적의 심리를 예측해 최대한의 피해를 입힐 수 있게 만든다면?
* * *
아니나 다를까 재물에 미쳐 있는 도적들은 천 명 정도의 병력을 따로 쪼개 우리가 머무는 백복원으로 올려보냈다.
예상대로의 움직임을 보이지만 과연 전투가 시작된 뒤에도 예상대로의 움직임을 보여줄까.
“화포를 일제히 방포하라!”
귀가 찢어지는 화포의 일제 발사가 시작되었지만 도적들의 대열 인근에 떨어질 뿐이었다.
아무리 척계광 휘하의 정예병이라 해도 생소한 화포를 사용한 덕분에 정확도는 그리 높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도적들에게는 심각한 위협이다.
남경으로 향하는 길목의 산 위에 진지를 차렸으니 우리를 무시하고 진군하면 뒤통수를 맞아 크게 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저 화포를 모조리 노획해 남경 성문을 박살 내겠다는 욕심.
이 두 가지가 도적들에게 통했나 보다.
“사찰에 올려둔 척후의 보고가 들어왔는데 놈들이 점차 집결하고 있다더군요. 그나저나 작전대로 일이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작전이 실패하면 다음 전투를 수행할 수 없을 겁니다.”
“어차피 이번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지 못하면 남경이 불타는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적들을 진멸시킵시다.”
더는 물러날 방법도 없다. 계획한 명령을 임시 장교인 척가군 출신 포병들에게 전달하였고 명령이 철저히 하달되었는지 산 아래에서 신호 대신 함성이 들려왔다.
장수주제에 전장의 상황을 알고 싶어 최전선으로 향하니 예상대로 해적들이 일제히 돌진하였다.
“서애 어르신! 여기 계시면 위험합니다!”
“내 지시가 제대로 하달되었다면 위험할 일은 없다네. 오히려 내가 장수처럼 보일 것이니 계획대로 퇴각하면 장수조차 자신들의 기세에 질려 달아난다 생각하겠지.”
해적 주제에 보총을 사용하는지 적진에서 총성도 들려오고 있었다. 이미 화살이 목책에 가로막히며 몇몇 해적들은 더욱 많은 전리품을 받을 욕심에 쭉 빠져나와 달려왔다.
“재물에 미친 자들이니 그 욕심이 자신의 목숨을 거둬갈 것이라 생각조차 못 하는군.”
한 해적이 바닥에 놓인 나무판자, 아무렇게나 엉성하게 만든 목책에 미처 덧대지 못한 판자로 보이는 물건을 밟고 넘어가려는 순간 굉음과 함께 거대한 폭연과 흙먼지가 치솟아 올랐다.
스페인 진영에서 거둬들인 도자기와 화약으로 지뢰의 일종인 작포(炸炮)를 만들어뒀다. 엉성하게 만든 목책 앞에는 이 지뢰를 10개나 매설하였는데 모든 물자는 쓸 일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해적들도 잔뼈는 굵은지 바로 대응에 나섰다.
바닥에 깊숙이 묻혀 있어야 할 작포의 발화장치를 심리전을 위해 일부러 드러나게 매설하였다.
해적들은 이 사실을 바로 알아차리고 바닥의 판자란 판자는 모조리 피하면서 질주하였고 병사들은 절로 탄식을 내며 나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공을 들여 작포를 매설한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놈들이 작포를 하나씩 해체하고 있습니다!”
“이럴 줄은 몰랐군. 어서 화포를 방포하고 목책을 포기하게!”
그나마 제대로 매설한 작포 하나가 더 터지자 무섭기는 했는지 놈들은 흙을 파낸 흔적을 찾아내며 진군이 늦어졌다.
등자룡 휘하 병사들은 진군이 느려진 적들에게 착실히 피해를 입히면서도 나를 원망하였다.
“나름 전술에는 자신이 있는 것 같았지만 백면서생(白面書生)이 따로 없군. 왜 쓸데없이 일손을 낭비해서…….”
“이게 다 제대로 묻어두지 않아서 벌어진 일입니다! 지휘동지님이시라면 다섯 개를 묻더라도 제대로 묻으라고 명령을 내렸을 것인데 참으로 한심한 몰골이군요!”
다 심리전이라니까! 나는 말을 타고 본진을 휘적거리며 병사들에게 고함을 질러대는 졸장인 양 행동하였고 당연히 병사들은 조선 자라새끼라고 욕을 하였다.
하지만 내가 미리 명령을 전해둔 척가군 출신 장교들은 횃불을 들고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병사들의 퇴각을 지시했다.
다음 목책도 엉성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심지어 이번에는 작포를 다급하게 설치한 듯 구덩이를 파 놓았으며 생각보다 적의 진군이 더디니 어쩔 수 없이 내가 선두에 서서 아예 퇴각을 지시하였다.
“퇴각! 당장 퇴각하라! 놈들의 기세가 삼엄하니 본영으로 돌아가 적을 상대하라!”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조선에서 온 사람이라 했는데 대체 밥 먹고 뭘 했습니까! 싸우지도 않고 퇴각하라니요!”
다 심리전이라니까! 슬쩍 뒤를 돌아보며 상황을 파악했는데 척가군 출신 장교들은 내 계획에 의거해 횃불을 들고 미리 정해둔 장소로 가서 작업에 몰두하였다.
적들의 기세는 이미 하늘을 찌를 듯 올라 날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비웃어댔다.
“저거 보게! 저 장수가 대체 누군지는 모르지만 졸장이 따로 없군! 목책도 제대로 만들지 못해 폭약도 제대로 매설하지 못해! 화포는 뒀다 국을 끓여 먹나?”
“혹시 모르지! 조선 놈들처럼 쇳덩이로 만들어 몸을 단련한다 했을지 누가 아나!”
저놈 얼굴 기억했다. 죽을지 살지 모르지만 저놈이 사로잡히면 처형 대신에 내수린으로 반병신을 만들어 버리겠다!
분노로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는지 병사들은 내 얼굴을 보며 혀를 끌끌 차고 본영에서 진형을 갖추었다.
순간 난데없이 첫 번째 목책에서 굉음이 들려왔는데 속발(速發: 빠르게 터짐)이 분명하였다.
하지만 해적들은 물론 병사들도 발견하지 못한 작포가 터진 것이라 여기고 넘어갔다.
“다들 위치를 사수하라!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으니 적들은 조만간 지리멸렬하여 사방으로 패주할 것이다! 염려하지 말고 본영을 수호하라!”
“왜 화포를 쏘지 않습니까! 적도들을 향하여 포도탄을 한 발 갈기면 효험이 좋을 것인데 왜 화포도 화차도 침묵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항명은 엄금이다! 다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
등자룡은 내 작전을 훌륭하다 말한 사람이니 적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심리를 파악하려 애썼다.
적의 심리를 능숙히 파악하는 노장답게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지시를 하달하였다.
“보총을 쏘되 적의 수괴를 노려 쏠 것이며 화포 또한 적의 수괴를 노릴 수 있도록 작은 구경으로 조준하여 쏘도록 하여라. 다들 목책을 사수하라!”
천리경으로 바라보니 산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해적들도 이미 우리를 다 제압했다 여겼는지 산 아래에서 모두 본진을 향해 진군하였다.
해적 가운데 나름 명망이 있는 이들이 중간에서 지휘에 몰두하였지만 이들은 뛰어난 척가군의 포병들의 사격에 의해 조금씩 제거되었다.
보통 군대라면 새 지휘관이 명령을 내렸지만 이들은 해적이 모인 것에 불과하다.
우리의 본진은 능선 윗자락에 설치되어 수비는 힘들어도 치고 나가기 좋은 위치이다.
여기에 서서히 무너지는 자신들의 지휘체계와 두 방어선과 다른 전투 양상까지.
뛰어난 지휘관이 봤다면 함정이라 여길 상황이지만 이들은 철저히 무시하였다.
“이렇게 불리한 장소에서 싸우다니요! 왜 그놈의 화차는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까! 이러다가 목책이 붕괴할 지경입니다! 장군님!”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건 말건 나와 등자룡은 본영에 설치된 물시계를 보며 시간을 가늠하였다.
전투가 시작되고 두 각(30분)이 지났고 한창 해적들이 진입을 마친 첫 번째 목책이 있는 곳에서 불규칙적인 굉음이 계속 터져 나왔다.
굉음을 시작으로 산의 계곡이나 기슭에 숨겨둔 스페인 본영에서 노획한 화포가 화약만 담은 채 포성을 쏟아냈다.
병사들과 해적들 모두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데 등자룡의 호통이 포성과 함께 전장에 퍼졌다.
“지금까지 작전을 숨기기 위하여 제대로 된 정황을 전하지 못하였다! 도독께서는 후퇴하지 않으시고 군사를 모으셨다! 지금 적도의 후방을 삼만 대군이 엄습하는 중이다!”
“세상에! 도독께서 도주하시지 않으셨다니! 그럼 화포를 쏘지 않은 이유도 적들을 유인하기 위해서입니까!”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적들을 좁은 골짜기로 유인하여 모조리 격멸할 계획을 세우셨고 본관이 이런 대계의 핵심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미 이긴 전투이다! 모든 화포를 쏟아부어라!”
삼만 대군 따위는 없지만 사방에서 포성이 메아리치고 길가에서 화포가 터지니 정말 대군에게 포위당했다 여길 상황이다.
등자룡이 나를 보고 환한 미소를 지었지만 아직 아군을 속여야 하니 사방을 정신없이 돌아보다 억지로 인사를 올렸다.
지금까지의 전투는 다 심리전의 일부이다.
목책 앞에 엉성하게 작포를 매설하고 즉시 퇴각하며 적이 어설픈 장수를 상대한다고 방심하게 만들었다. 대신 사람이 다닐 길을 조금 피해 비격진천뢰를 일백 개나 매설해 뒀다.
길가에 잘 숨긴 녀석이고 함정이 더 없으리라는 심리적 허점을 노렸기에 해적들이 이를 찾아낼 리 없었다. 불을 붙이고 30분이 지나 적진 인근에서 비격진천뢰가 폭발하였다.
비록 길가에서 터진 녀석이지만 적의 혼을 빼놓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기술력이 부족해 비격진천뢰가 불규칙적으로 터졌지만 오히려 산 전체가 폭음으로 진동하였다.
“남경군이 온다! 놈들이 산을 무너트릴 정도로 화포를 쏘아대고 있다!”
“퇴각하기는 틀렸어! 차라리 놈들의 본영을 무너트려 산 반대편으로 향하자!”
본진을 뚫으려는 시도는 이미 예상해 두었다. 마지막 발악으로 공격이 거세지자 목책 하나 뜯겨 나갔다. 포위를 피하려 적들이 진입하는 순간 지금까지 숨을 죽인 총통기화차가 불을 뿜었다.
조선에서는 도태된 장비였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없어서 못 쓸 물건이다. 오히려 백 년 전에 만들어진 거대한 청동제 보총을 사용하였기에 위력은 조선에서 쓰던 물건보다 좋았다.
삽시간에 수백 발의 세전이 적진을 꿰뚫자 처음 사격에 당한 이들은 아예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찢겼으며 그 파편과 세전에 휩쓸린 서른 명 이상의 적이 숨을 거뒀다.
하지만 여기에는 총통기화차가 30문이나 있다.
“돌격! 돌격하라! 능선을 따라 적을 추격하며 놈들을 모조리 도륙하라!”
후방에는 진입 이전 제압을 위해 포격을 퍼붓는 삼만 대군이 있고 전방에는 무시무시한 화포를 난사하는 병사들이 뛰어 내려온다. 도적들은 살기 위해 사방으로 도주하였지만 물자가 차고 넘치니 할 수 있는 전략도 있다.
사람 몇 명이 지나가기에도 부족한 산길로 도주한 도적들은 갑자기 발을 부여잡고 뒹굴었다. 낙엽 사이에 묻힌 거대한 마름쇠가 발바닥을 뚫고 종아리로 튀어나왔으니 장정이라도 게거품을 물리라.
“마름쇠다! 쇠스랑을 휘어서 마름쇠를 만들다니!”
“이때를 노렸다! 도적놈의 새끼들아! 니들을 죽이면 한 놈당 은자 석 냥이라더라!”
보인들은 힘을 잘 쓰는 농부들이다. 농부가 힘을 잘 쓴다는 말은 농기구 사용에 익숙하다는 말이다.
당연히 적과 맞서 싸울 수 없지만 마름쇠에 당했다면?
다리를 다친 도적들은 앉은뱅이나 마찬가지이니 보인들의 도리깨를 당해낼 수 없다.
처음에는 길을 막아서던 보인들도 해적들의 골통을 부수기 위해 무작정 달려들었다.
어느새 나도 말 위에 올라 일장연설을 늘어놓으며 지휘에 힘썼다.
내 모습을 보고 못마땅해하겠지만 이런 대승을 거둔다면 병사들이 마다할 이유가 있던가.
반 시진(1시간)이 지나자 전장의 열기도 식어가고 후방에 지원군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해적들이 도주하였지만 이미 손해가 막심하다 못해 차고 넘쳤다.
첫 번째 목책까지 내려오니 서로를 밟아 뭉갠 시체가 보일 지경이다
“대승이오! 지금까지 확인된 적도의 수급만 이천 개에 달하며 갈기갈기 찢긴 적도들과 중상을 입은 적도를 감안하면 사천에 달하는 적을 도륙하였소!”
흥분이 가시고 원군도 없이 자신들의 힘으로 적을 몰아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병사들은 등자룡과 내 이름을 부르며 환호성을 올렸다.
인생 첫 번째 전투는 등자룡의 도움 덕분에 바라지도 못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작가의 말
명나라의 연쇄지뢰 작포입니다. 15세기 중엽에 제작되었다 하며 송나라 시대에도 사용되었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신빙성은 부족합니다.
물론 이런 병기가 전쟁에서 쓰이지 않은 이유는 명나라가 급속도로 몰락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