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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조선-380화 (380/573)

근육조선 380화

2부 16장 5화 오만과 편견

단 이틀 만에 소문이 퍼지고 퍼져 남경 전체가 공격 소식을 피난민들과 위기를 틈타 한몫 잡으려는 놈들이 어우러져 혼란의 도가니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나마 다행인 것 세 가지가 있었다.

한참 동안 남경을 헤집고 온 등자룡은 그나마 관아를 관아답게 만들었다.

아직 피난 가지 못한 하급 관료들을 소집하고 창고지기들을 닦달하여 물자를 점검한 것이 전부지만 그게 어디인가.

“등(등자룡) 지휘동지께서는 그나마 창고에서 쓸 만한 물건을 건졌다 하셨습니다.”

“사용하지 못하고 방치된 병장기가 있는데 갑주는 패용해 봄 직 하고 구형 보총은 녹이 덜 올라와서 사용할 수 있더군요. 하지만 청동으로 만들어서 효율은 떨어질 겁니다.”

“군량은 물론이고 군자금도 발견하셨다 하셨습니다. 대체 얼마나 있습니까?”

“화약과 병장기는 충분하지만 자금은 박박 긁어모아도 구만 냥 정도입니다. 이십만 냥만 되어도 도적들과 거래를 하여 공격을 피할 수 있건만 이에도 미치지 못하지요.”

하르빈에 비축된 군자금 십만 냥에 미치지 못하지만 부패한 명나라 조정이니 이 정도만 있어도 다행이지.

그리고 다음은 헐레벌떡 뛰어온 정철이 알려주었다.

“참으로 다행인 일일세! 내가 힘을 들여 쓴 격문(檄文) 덕분에 사람이 삼천이백여 명이나 호응하였다네. 개중에 이백여 명은 명성도 드높은 척가군에서 은퇴한 이들일세!”

“남경의 인구가 최소 십여만 호에 달하는데 고작 장정 삼천 명을 징집하였다 했는가?”

“이미 대다수의 병력이 빠져나갔는데 그 정도만 하여도 감지덕지일세. 그나마 장정이지만 보인(保人: 군대에 노동력만 제공하는 비전투 인원)으로 사용해야 할 것이네.”

결국 군자금을 소모하여 일당을 지급한다 하고 술에 절어있는 정철을 대역기봉으로 위협해서 격문까지 썼건만 병사는 모이지 않았다.

한숨이 새어 나왔지만 마지막으로 다행인 점인 마테오 리치가 방구석에서 눈을 굴리다 한마디를 보탰다.

“저…… 일어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대체 어디 사람들이 어떻게 명나라에 쳐들어왔단 말입니까. 그 사람들 지금 제정신입니까? 그리고 이 나라는 제대로 된 나라입니까?”

“지금 몰래 남경에 들어온 서역인 주제에!”

“그냥 입을 다물고 계시오. 제발 좀!”

혹시 몰라 마테오 리치를 바로 관청으로 끌고 와 보호했다. 혼란이 가중되는 남경에선 서역 간자를 추포한답시고 애꿎은 사람들이 두들겨 맞거나 살해당하는 일이 생겨났다. 심지어 마테오 리치의 외모를 알고 거처를 습격한 이들도 생겨났다.

아는 사람인 데다가 잘만 하면 스페인 해적들을 돌려보낼 수 있는 사람이니 요긴하게 사용해야지. 그나마 다행인 점 세 가지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악재만 있다.

먼저 군사 수준의 문제이다. 등자룡 휘하의 병사 수준은 솔직하게 말해서 조선 지방군보다 부족하다. 훈련 정도는 비슷한데 조선 지방군의 삼수군(三手軍: 총과 활, 방패와 검 그리고 창)에서 총을 비롯한 화포를 다룬 적이 없다.

등자룡은 장강 유역의 물자 이동과 치안 유지를 위해 편성된 장강수군의 후위를 담당한 부대이니 어쩔 수 없다. 정규군이 도적보다 강한 요인은 화포 사용인데 이게 불가능하다.

등자룡은 답답했는지 곰방대에 담배를 담아 불을 붙이며 말하였다.

“그나마 일이 잘 풀려가고 있지만 수성(守城)이 불가하고 회전(會戰)을 행해야 할지도 모르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입니다.”

“병력이 이만 명만 되었어도 느긋하게 수성전을 벌이며 적을 격퇴할 수 있거늘…….”

“애초에 남경 일대의 병력을 합쳐도 이만 명에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세도가에서 차출하는 병력을 제외하면 일만 명에도 미치지 못하지요. 그러니 성을 지킬 의미가 없습니다.”

다음 문제는 너무 거대한 남경성이다. 높이는 낮은 곳을 따져도 40자(14m)이며 높은 곳은 60장(21m)에 달한다. 그리고 이 대단한 남경성은 우리에게 거대한 관이나 마찬가지이다.

창밖의 웅장한 성벽을 보니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남경성은 외성만 따져도 성문 13개에 일백 리(40㎞)라 하는데 이게 과장이 아니고 정말 일백 리이다. 이렇게 거대한 성을 기껏해야 3,000명으로 방어할 방법이 없다.

13개의 성문에 최소한의 방비를 위한 수비병 백 명과 보조 병력 백 명을 차출하면 400명이 남는다.

이 인원을 40㎞에 달하는 성벽에 나란히 배치하면? 100m당 한 명이 배치된다.

밤이 되면 갈고리를 걸고 올라온 적이 과장 좀 보태서 꽃놀이패(화투) 한 판을 즐기고 성안으로 침입해도 들키지 않으리라. 그렇다고 성문을 대충 수비하면 화약으로 폭파하고 바로 들어오니 성문 수비병을 줄일 수 없다.

그럼 이런 불리함을 알고 있는 등자룡은 왜 남경으로 왔는지 궁금해졌다.

사실상의 자살행위이지만 등자룡은 의욕이 넘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가.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등 지휘동지께서는 황상께 은혜를 입어서 남경으로 들어오셨습니다. 하지만 도저히 승산이 없는 싸움을 행하려 오시다니 이유가 무엇입니까?”

“남경에는 효릉(孝陵: 주원장의 묘)이 있지 않습니까. 도적들이 남경을 약탈한 이후 기세가 넘쳐 효릉을 범하려 할 것이 분명하기에 여기라도 지키려고 목숨을 걸었습니다.”

다 이유가 있기는 하네.

궁금한 사실을 알았는데 마지막 문제가 있다. 적들이 육로 한 방향으로 오면 싸워서 격퇴하면 그만이지만 절반은 장강을 따라 북상하고 있었다.

적을 어중간하게 격퇴하면 장강을 따라 북상하는 나머지 적에 합류해 양면으로 협공할 것이 분명하였다.

등자룡도 내 시선을 따라 장강을 돌아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세 배에 달하는 적도를 뭍에서 완전히 진멸(殄滅: 모조리 무찌름)시키고 다시 상륙하는 적도를 진멸시켜야 하니 이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열심히 행하여 봅시다. 그나마 다행인 일은 보름이 지나기 전에 아국에서 구원이 도착하는 것이지요. 충청 수영에서 우후(虞候: 정4품 무관)직을 역임하는 벗이 올지는 모르지만 온다면 천군만마와 다름이 없을 겁니다.”

충청 수영에는 이순신이 있지만 시간을 맞춰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판옥선 선단을 담당하고 있는데 판옥선은 격꾼(노를 젓는 보조인원)이 속도를 내는 데 이들이 지치면 속도가 느려지니 오히려 시일이 더 걸릴지도 모르지.

신속하게 임시 요새를 축조하였다. 행주대첩을 참고하여 남경 남서쪽의 적 진군 방향 인근에 수레를 쌓고 말뚝을 박아 요새를 만들었다. 그리고 무기를 배급하니 생각 외의 인재들이 있었다.

병사들은 물론이요, 남경 내부를 수비할 보인들에게도 병장기를 쥐어주고 있는데 척가군 출신이라 칭한 이백여 명의 병사들은 관아 앞에서 병장기가 없다고 투정을 부렸다.

“저희는 척가군에서 화포를 담당하였는데 화포가 없어서 문제군요. 이거 날붙이는 쓸 줄은 알지만 평범한 병사보다 못 싸웁니다.”

“보총이든 천보총이든 자모포건 호준포(虎蹲砲)건 다 가리지 않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저희에게 조선에서 사용한다는 각종 병기를 사용하는 법도 익히게 하셨지요.”

계속 줄담배를 피우며 표정이 구겨지던 등자룡이 담뱃대를 바닥에 떨구며 화색을 지었고 나도 웃음이 나왔다.

산더미처럼 쌓인 구식 청동제 보총과 모든 화포를 사용할 수 있는 척가군 출신 포병들의 조합이면 사용할 병기가 있다.

아직도 관아에 남아 있는 장인들을 닦달해 즉석에서 무기를 제조하게 하였다. 본래 역사의 임진왜란 매체에서 계속 나온 녀석이지만 정작 조선에서는 쓰이지 않는 무기이다.

“보총의 총열을 분리하여 총통기화차(銃筒機火車: 총통을 사용한 화차)를 만들도록 하게! 수레도 넘쳐나고 보총도 넘쳐나니 서른 개 정도는 쉽사리 만들 수 있을 것이네!”

책을 저술하고 북한산성을 만들며 수성과 관련된 서적을 읽다 도태된 무기에 대한 지식을 쌓아뒀다. 문종은 화차(火車)를 만들어 적을 격퇴했다 하였는데 보총 보급이 늘어나며 신기전화차에 밀려 퇴역하였다.

하지만 만드는 방법이나 도면 정도는 이미 알고 있다.

장인들에게 간단히 그림을 그려 보총과 수레를 결합한 화차를 만들자 척가군 출신 포병들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종류라면 몇 번 쏘지 않아도 익숙해질 수 있습니다. 아예 창고에 쌓여있는 세전(細箭: 작은 화살)을 넣어 쏘아대면 적을 단숨에 어육으로 만들 수 있겠군요.”

“그리고 남은 청동과 화약을 조합하여 내가 주문한 형태로 만들어주게.”

비격진천뢰이지만 남은 시일이 촉박하여 신형이 아닌 구형 비격진천뢰를 만드는 것이 전부이다.

하지만 구형도 쓸모가 있다. 대완구에 넣어 쏘지 않고 언덕 위에서 굴리면 되니 큰 문제는 없으리라.

여기서 대승을 거두고 여력을 남겨 해로로 침입하는 적을 상대한다. 이 원대한 계획을 계속 실행하며 축성을 지시하는데 등자룡 휘하의 전령이 도착하였다.

“버…… 벌써 적도가 엄습하였습니다! 율양(溧阳: 리양시) 인근에 남만 병사 삼천여 명이 벌써 진영을 차리고 진격 중입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군. 여전히 막사 안에서 기도만 올리고 있는 마테오 리치를 불렀다.

아무리 해적이라 해도 알맹이는 상인이니 신부를 앞세우면 말이 통하는 법이 아니겠는가.

* * *

적과 화의를 청하려고 등자룡에게 나머지 일을 위임하고 그 서반아 해적이라는 무리의 진영으로 들어왔다. 문제는 이들의 수준이 지나치게 높다.

당장 파수병이 우리를 보자마자 다섯 명이 달려와 무기를 들이대었다.

“나는 조선 출신이오. 이 병사들의 지휘관과 논할 이야기가 있어 여기까지 왔소이다.”

“저는 교황령 출신의 신부 마태오 리치입니다. 대체 무슨 문제가 있기에 스페인 사람들이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말을 이해한 파수병은 바로 본영으로 뛰어가 보고를 올리고 순식간에 저 안쪽까지 보고가 전달되었다.

이들은 명백한 원정군이며 지휘 체계도 완벽하게 잡혀 있다. 마테오 리치도 이 사실을 눈치채고 적잖게 놀라서 호들갑을 떨었다.

“아무리 보아도 본격적인 원정군입니다. 이 정도 수준이면 테르시오와 견줄 수 있겠군요.”

“테르시오라 하였소? 일전에 세스페데스에게 들은 바가 있지만 그들은 서반아의 최정예 병사가 아니오?”

“저도 경험이 일천한지라 확답은 드리지 못하겠지만 테르시오 소속도 있고 이외에 각지에서 소집된 장병들도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 삼엄한 기세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이런 놈들이니 나름 성도(成都)인 항주를 이틀 만에 박살 내지. 여기 모인 삼천 명이 공격하면 내가 어떤 노력을 하건 간에 며칠도 버티지 못하고 요새가 박살 나고 남경이 불타리라.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장교로 보이는 이가 우리를 인솔하였다. 경계가 풀렸는지 검만 패용한 사람 두 명이 우리를 본영으로 안내하였고 본영 안에서는 판금갑옷을 입은 지휘관이 마태오 리치에게 달려갔다.

뭐라 대화를 나누는데 마태오 리치가 안색이 붉어졌다 창백하게 변하길 반복하였다.

궁금해서 쳐다보니 마태오 리치는 손사래를 치며 말하였다.

“제가 담당한 신도들이 제 행태가 이상하다고 하였기에 박해인 줄 알고 쳐들어왔다 합니다. 이게 다 세스페데스 형제와 형제에게 이상한 것을 가르친 당신 덕분이 아닙니까?”

“그런 문제는 당신의 근육이 부족해서 벌어진 일 아니오? 그리고 박해? 박해를 명분으로 삼아 명국 전체와 전쟁을 벌이려 하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요?”

이놈들이 미쳤나?

명나라가 아무리 부정부패에 물들고 망국의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지만 인구가 1억이 넘는다. 고작 삼천 명의 원정대가 뭘 얼마나 싸운단 말인가.

하지만 상대는 마태오 리치의 설명을 들으니 자랑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역만리인 만지(남중국)에서 조선의 사람을 뵙게 되다니 참으로 좋은 일이 아닐 수 없군. 본관은 원정대의 지휘관 로베르토이며 지금까지의 여정을 잘 이야기 해주겠네.”

설명을 들었지만 이 머저리들이 대체 뭔 소리를 하는지 내 뛰어난 두뇌로도 두 번이나 생각을 거듭해야 했다.

여하튼 내가 정리한 것이 옳다면 다음과 같은 논리로 여기까지 쳐들어왔다.

1. 선교사의 목숨을 앗아간 민다나오 섬 호족들에 대한 토벌을 실시하다 보선 함대를 만났다. 하지만 보선 함대의 선공을 당해 반격하여 승리하고 보선을 나포했다.

2. 보선 함대에 있던 천주교 신자들을 건져내 마테오 리치가 이상한 증상을 보이고 제대로 된 미사를 집전하지 않는다는 증언을 확보하였다.

3. 이미 명나라는 민다나오 섬의 이슬람 세력을 후원하였고. 천주교에 대한 박해 정황도 있으니 명나라를 공격해야 한다. 하지만 명나라는 봉건제로 굴러가는 나라이다.

4. 당연히 봉건제 외에는 생각할 여지가 없다. 결국 만지(남중국)영주 한 명이 잘못을 저질렀으니 이를 응징하고 카타이(북중국)의 지배자와 협상을 벌인다.

“이런 논리로 여기까지 찾아온 거요?”

“물론일세. 앞으로 만지의 영주를 만나 그의 잘못을 뉘우치게 만들고 적절한 배상을 받으면 될 일이니 형제의 나라인 조선은 어서 자리를…….”

“지금 뭔 개떡 같은 논리로 입을 놀리시오! 이 무식한 놈들 같으니!”

진짜 분통이 터져 팔을 내리쳐 임시로 만든 원탁을 박살 냈다.

얼기설기 엮은 나무판이 박살 나고 로베르토라는 자는 당황해 뒤로 물러섰으며 다른 이들은 나를 황당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만지? 지금 이 지역이 만지(蠻子: 만자, 중국 발음이 만지)라 칭했소? 그럼 북쪽은 카타이(契丹: 거란)이고? 만지라는 말이 뭔지는 아시오? 미개한 족속이라는 욕설이오!”

서양 놈들은 생각보다 훨씬 무식하다. 상대에 대한 지식도 없는 주제에 자신들 멋대로 세상을 판단하는 오만과 편견이 차고 넘치다 못해 하늘로 솟구칠 지경이다.

순간 인터넷을 하다 가끔 볼 수 있는 ‘여러분 미국인들은 생각보다 훨씬 무식합니다’라고 말하는 미국인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 시대에는 현대보다 훨씬 더 무식한 것 같다.

“우리는 이미 백만의 마르코(마르코 폴로)를 비롯한 옛사람들의 기록을 가지고 있기에 이를 따를 뿐이네. 욕설이라 하면 미안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새로운 사실을 알면 갱신하는 일이 당연하지 않소! 내가 조선의 관료로 일하며 아국의 명칭을 꼬박꼬박 전조의 이름인 고려로 정하여 죽었다 깨어나도 바꾸지 않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화가 올라오는지 아시오? 세상에는 당신들만 살고 있소?”

“하지만 우리가 아는 사실을 바꿀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알고 있는 사실을 바꿀 수 없다? 아국의 사서(史書)에 서반아는 회회교만 있다는 팔백 년 전의 사실을 저술하면 좋겠소? 앞으로 서반아를 회회교의 분파가 지배하고 있다 하겠소!”

“말이 지나치군!”

마테오 리치도 로베르토도 핏대를 세우며 일어섰는데 할 말은 내가 더 많다. 일단 이 머저리들의 뇌에 담겨 있는 잘못된 지식부터 죄다 게워내게 만들어야지.

“일단 지도나 꺼내놓으시오. 내가 당신들의 잘못된 관념을 모조리 수정해 주겠소. 내가 지리에 대해 많은 사실은 모르지만 적어도 엉성한 지도는 그릴 수 있소.”

지도라는 말에 새 원탁이 들어오고 지도가 놓였다. 대충 스페인의 1/3 크기로 그려진 조선과 스페인보다 두 배 정도 거대한 명나라를 보자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새 지도를 그릴 양피지가 준비되어 지도에 덧대 붙이고 명나라, 조선, 몽골 그리고 일본을 비롯한 전체적인 형상을 뭉뚱그려 그렸다.

서유럽 전체보다 거대한 명나라를 보자 다들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따지고 들었다.

“이렇게 거대한 나라가 여러 개로 쪼개져 있지 않다니 말이 안 되는구려.”

“천칠백 년 전 진나라부터 한 몸으로 움직이기에 중원이라 불리오. 나는 오히려 서방이 저렇게 조각조각 찢어진 것이 말이 안 된다 생각하오. 명국의 모든 관리는 중앙 정부에서 임명된 관료요. 당신들처럼 각 영지가 나눠진 경우는 없소이다.”

조정에서 민주공화정에 대한 일장연설을 늘어놓으면 저런 표정을 지을까.

놀라서 입을 벌렸지만 눈은 불신과 의문이 가득한 로베르토를 보면서 설명을 추가하였다.

“물론 갈라진 적도 있소이다. 당신들이 칭하는 카타이는 한때 중원 북방을 점유하였던 거란에서 비롯된 말이며 만지는 남방 오랑캐들에 대한 멸칭이오. 당신들의 지식이 모두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겠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을 알려줘서 고맙네. 그렇다면 궁금한 점이 있네. 이런 거대한 국가에서 어찌하여 군대가 없나? 왜 항구가 공격당하고 약탈을 실시하는데도 군대를 파견하지 않는 것인가?”

명나라가 호구라서 그렇지! 하지만 이렇게 답하면 아마 서반아 해적들이 날뛰는 덕분에 일대가 다 어수선해지겠지.

당히 과장을 섞으면 될 일이라 내가 그린 지도의 북쪽을 짚으며 말하였다.

“북방에는 북원이 있소. 지금은 쇠락하였지만 여전히 십여만 이상의 기병으로 아국과 명국에 대하여 파상 공세를 퍼붓고 있소이다. 그리하여 아국과 명국은 동맹을 맺어 아국이 해군을 담당하고 있지. 하지만 이런 경우엔 무슨 일이 일어나겠소?”

병력이 다 북방에 가서 여기는 조선이 수비한다 했는데 변명 아닌 변명이지만 통했나 보다.

이 오만과 편견 덩어리들도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짐작하였으니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협박 아닌 협박을 시작하였다.

“또한 당신들이 목표로 삼고 이미 이만 명에 달하는 도적이 공격하려는 남경은 조선과 무역을 행할 때의 요충지요. 한 해 여기서 거래되는 물자만 당신들의 화폐로 사백만 두카트(900만 냥)가 넘는데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지겠소.”

도저히 믿지 못할 일인지 로베르토는 마태오 리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마태오 리치도 바보는 아닌지라 내 주장이 옳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명나라에서 버텨봤자 첩자로 몰려 살해당할 운명이니 어떻게든 로베르토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무…… 무례를 범하여 참으로 미안한 일이네. 그러하면 내가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하겠나.”

“일단 빠르게 철군하시구려. 그리고 철군을 준비하는 와중에 육하원칙에 의거하여 지금까지의 행적을 기록한다면 설령 일이 잘못되어도 죄가 더 커지지는 않을 것이오.”

양피지에 펜을 놀리는 로베르토를 보니 한숨이 나왔다. 오늘은 11월 10일이고 아무리 늦어도 항주 일대에 조선 수군 중 가장 강력한 경기수영이 11월 17일에는 도착하리라.

정말 전력을 다해 도망쳐 배에 올라야 조선 수군에게 당하지 않으리라.

아니다, 오히려 도망친다 해도 어중간한 속도로 도망친다면 먼바다에서 따라잡혀 해전을 벌이겠지.

일단 눈앞의 위기는 모면하였으니 며칠 뒤부터 남경을 수비해야 하리라.

#작가의 말

서양의 독단적 사고방식은 역사가 아주 깊습니다. 서양과 접촉한 조선은 서양인 멋대로 조선을 ‘꼬레’ 즉 고려라 부르는 모습을 보고 항의하였습니다.

이후 최소 백 년 동안 자신들을 조선이라 부르라 이야기했는데 귓등으로 듣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작중 상황도 동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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