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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조선-378화 (378/573)

근육조선 378화

2부 16장 3화 남만인의 난(1)

파양군의 습격 이후 배치된 2,000여 명의 임해도감 병사들은 오늘도 어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숲속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1580년 9월. 건기지만 방금 전 비가 내려 질척거리는 정글 속에 판자와 가죽으로 은신처를 만들어둔 장병들은 입수한 정보를 나누는 데 여념이 없었다.

“명나라 군대는 아마 보름 뒤에 돌아올 겁니다. 그때까지 몇 놈 더 죽이고 빠지도록 하지요.”

“참 한심한 짓거리야. 명나라 애들에게 도움을 청해봤자 거기서 뜯기는 손실이 더 큰데 며칠 더 살겠다고 그런 부패한 놈들을 불러? 덕분에 우리가 고생은 고생대로 하잖아!”

“진작 끝날 일을 이 년 가까이 질질 끌고 다니다니. 명나라는 일을 키우는 재주가 있나 봅니다.”

나무를 깎아 만든 담배 파이프에 불을 붙인 병사들은 담배를 피우며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명나라의 개입만 없었더라도 남대주의 호족 대다수가 조선의 공격에 복속하거나 최후의 항전을 각오하였으리라.

하지만 명나라 보선함대가 남대주의 남쪽 바다를 순회하며 개입한 덕분에 적극적인 공작이 불가능해졌다.

어느 정도 공작을 진행하여 호족을 살해할 때쯤 되면 보선함대가 돌아와 명나라 병사들을 풀어놓는다.

물론 부패한 명나라 수군들이 임해도감을 추적할 능력은 없었지만 일단 한 번 신고를 받으면 보름 정도 마을에 머물며 호화로운 대접을 받는다. 그동안 모든 작전은 중단되는 법이었다.

“어쩔 수 없는 법이지. 대신에 차근차근 중요 인물을 죽여서 보선 함대를 물릴 때를 기다리자……. 잠깐 저거 뭐야!”

병사들이 머무는 숲에서 한참을 떨어졌지만 마을 하나가 불타오른 규모의 거대한 연기가 북서쪽에서 피어올랐다.

보선 함대가 정박하는 장소이며 조선에서 월국만(月匊灣: 본래 역사의 모로 만)이라 부르는 요충지였다.

“어떤 놈들이야? 보름 뒤에 명나라 함대가 오는데 저렇게 난장판을 벌일 생각을 했어? 혹시 진 부사과(副司果: 종6품 무관직) 그 멍청이가 공훈에 눈이 멀어서 저런 짓을 저질렀나?”

“대놓고 불을 지르면 백 리 밖에서도 보일 지경이 아닌가! 황 사과(司果: 정6품 무관직)님 당장 알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혹여나 자기들끼리 내분을 일으킨 것이 아닐까요? 아니라면 서반아인을 건드렸다가 덤터기를 쓰고 화를 당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저희가 굳이 갈 필요는 없습니다.”

천리경으로 살펴보려 해도 한계가 있었다.

지구는 둥근 물체이니 제아무리 배율이 높은 천리경이라도 땅 위에서는 10리(4㎞), 함선의 돛대 위에서는 40리(16㎞) 그리고 가장 높은 등대에서는 100리(40㎞)가 시야의 한계이다.

병사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어디선가 피어오른 거대한 연기가 전부였다.

황 사과는 한참 동안 고민하다 어쩔 수 없이 장비를 챙기고 명령을 내렸다.

“어차피 지금 돌아가도 호군(護軍: 정4품 무관직)님에게 보고를 올려야 한다. 차라리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귀환하는 것이 나을 것 같군.”

기껏해야 주변을 순찰하던 병사들이나 해치우려던 계획이 틀어졌다. 정글 속에 난 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마을로 접근한 임해도감 병사들의 눈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보였다.

이동을 시작할 때 마을이 파괴된 연기는 하나만 솟구쳤다.

하지만 두 개가 되고 다시 세 개가 되며 자신들이 인근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벌써 다섯 번째 마을이 습격당하고 있었다. 스페인 제국의 X 자 깃발이 휘날리는 마을에는 폭력이 난무하였다.

“남만 놈들이 우리의 머리통을 부수러 온다! 빨리 도망쳐!”

“악마들이다! 알라시여 이 악마들을 몰아내 주시옵소서! 살!”

임해도감 병사들이 몸을 숨긴 수풀로 청년 한 명이 사력을 다해 도망치다 머스킷 탄환에 맞아 땅을 뒹굴었다.

하지만 총을 쏘고 시체를 확인한 병사는 수풀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미 수많은 나라에서 분쟁을 겪으며 온갖 경험을 쌓은 이들이었고 적의 매복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스페인 병사가 손을 흔들어 동료들을 소집하자 황 사과는 입술을 짓씹으며 휘하 장병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서반아 놈들이 아국의 영향권에 들어와 난동을 부리고 있으니 우리를 만나도 정중히 돌려보낼 게 분명하다. 차라리 지금 나서서 서반아의 정황을 면밀히 알아보도록 하자.”

람보복(위장복)을 입고 몸 곳곳에 수풀을 꽂은 임해도감 병사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스페인 병사들은 병장기를 부여잡았지만 임해도감의 손에 무기는 없었다. 당당한 모습에 스페인 병사들도 긴장을 풀었고 서로의 무장을 확인하며 한동안 시선이 교차했다.

임해도감 병사의 귀에 어눌한 조선말이 들려왔다.

스페인이 조선과 사방에서 교역을 시행한 덕분에 어느 정도 조선의 말을 익힌 상인이 늘어난 덕분이었다.

“혹시나 조선의 사람이십니까? 일대가 조선의 영향권이라 하여 언제 만나 뵐 수 있나 고민하였는데 이제야 만나 뵙게 되는군요. 저희는 펠리페 2세 전하의 명을 받은 원정대입니다.”

“원정대라 하였소? 대체 목적이 뭐요? 왜 우리가 행하려던 일을 방해하는 것이오?”

“일전에 아국의 상선을 폭파하고 신부를 죽였으니 이는 신성 모독이 아니겠습니까. 그나저나 조선이 행하려던 일을 방해하다니요.”

“우리는 정찰대요. 아국의 기휘를 범한 남대주(민다나오 섬)의 호족들을 토벌하기 전 정탐과 암살을 실행하고 있었는데 일을 다 망쳐 버렸구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스페인의 상인도 병사들도 자신이 조선 사람임을 알아차리자 잔뜩 긴장하여 자세를 낮추었다.

기회를 틈타 스페인 병사들의 상세를 알아보려 마음먹은 황 사과는 아예 성큼성큼 걸어 나아가더니 손가락을 들이대며 윽박질렀다.

“보시오! 본디 중요 인물과 호족을 암살하여 내분을 일으키고. 이후 얻은 정보로 삽시간에 적을 몰아쳐 몰살시키려 하였거늘 이렇게 행동하면 뭐가 되겠소!”

“참으로 무례한 일을 저질렀지만 모르고 행한 일이니 도리가 있겠습니까. 저희가 공식적으로 사과를 할 것이니 일단 진영 안으로 드시지요.”

이미 마을은 초토화되어 집이었던 것의 흔적만 남아 있었고 불에 타들어간 시체가 즐비하였다.

대놓고 모든 사람을 말살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행동이지만 기묘한 광경이 보였다.

폭력과 살인이 휩쓸고 지나간 마을에는 기묘하게도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즐비하게 들려왔다.

심지어 병사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죽을 쑤어 아이들의 입에 젖 대신 넣고 있었다.

“저항도 할 수 없는 아녀자를 살해하는 일조차 사람이 할 짓이 아닌데 정작 갓난아이들을 돌보려 하다니 무슨 일이오? 혹여나 아이를 키워 노예로 팔려 한다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요.”

“이들은 모로 놈들이며 이교도입니다. 자고로 이교도는 거래를 행하거나 우호적으로 나서는 이들은 개종의 대상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여 마땅하지요.”

“거기에서 갓난아이는 제외하는 풍속이라도 있소?”

“아닙니다. 갓난아이들도 세례를 내리면 이교도가 아닌 신실한 교인으로서 자라날 기반이 생기는 법입니다. 사람으로서 다시 태어나는 것과 다름이 없지요.”

“그게 무슨 병ㅅ…… 아니 병 주고 약 주는 논리요?”

참으로 미친 짓이기에 욕을 할 힘도 나지 않았다. 해안으로 나아가니 제법 커다란 범선 여섯 척이 해안에 정박하여 약탈품을 실어 올리고 있었다.

생소한 복장의 임해도감 병사들을 목격하자 배 근처에서 한 기사가 전력을 다해 뛰어왔다.

“조선의 용맹한 병사들이 아닌가! 이런 모로 놈들의 소굴에서 형제의 나라를 만나게 되다니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일세! 혹여나 무언가 필요한 물자라도 있는가?”

“조선의 병사가 맞습니다만 왜 이렇게 친근하게 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제정신인 사람은 아니다. 건기의 막바지에 이어지는 불볕더위에도 갑주를 패용하였으며 처음 만난 사람의 손을 잡고 흔들며 형제라고 칭하니 더욱 기괴하였다.

하지만 휘장과 둥근 방패의 문양이 아로새겨진 갑주는 물론이요, 의복이 휘황찬란하니 이자가 원정대의 지휘관이리라.

황 사과는 자연스럽게 존대를 섞어 예의를 표시하였다.

“펠리페 2세 전하의 명이며 나 또한 조선이 가톨릭을 받아들여 동방의 등불로 굳건히 자리 잡았음을 알고 있다네. 본관은 이번 원정대의 총사령관 로베르토 우리엘 레예스라 하지. 자네는 대체 누구인가?”

“저는 조선의 임해도감에 소속된 장교인 황대중이며 자는 정숙입니다.”

“황? 대중 정숙이라. 자네도 중간 이름을 받았으니 제법 훌륭한 가문 사람이 분명하군. 우리의 목적은 모로 놈들의 토벌과 모로 놈들의 개종일세. 조선에게도 피해를 입힌 모로 놈들을 토벌하니 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오래 계시면 불민한 일이 생길 것이지만 알아서 잘하실 일이니 염려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좋은 일은 둘째 치고 이렇게 난리를 치면 조만간 들이닥칠 보선 함대의 분노와 직면하게 되리라.

보선 함대가 아무리 나약해도 고작 여섯 척의 함선으로 상대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로베르토는 상대의 말을 또 곡해하였다.

“혹여나 모로 놈들이 떼로 몰려올 것을 염려하는가? 그렇다면 차라리 좋은 일일세.”

악수를 마친 로베르토는 포도주를 꺼내고 호족들에게 약탈한 식량을 주며 조선 병사들을 환대하였고 이들은 주변을 살피며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이거 원정대의 병사들이 강하긴 하지만 규모가 너무 작습니다. 이래서야 보선 함대가 들이닥치면 여섯 척으로 저항을 거듭하다 몰살당하지 않겠습니까?”

“보선 함대가 보선 여섯 척에 명나라에서 따로 만든 스무 척의 선박으로 구성되어 있지? 그 규모면 도망치지도 못하고 싸우다 죽을 것이야. 마지막 모습이나 보고 돌아가자고.”

하루 동안 환대를 받은 황대중은 약탈품의 일부를 주려는 로베르토의 배려를 마다하고 귀환하여 보고를 올렸다.

로베르토 또한 며칠 뒤에 다음 공격 장소를 정하러 모로 만 한가운데 정박한 본대로 귀환하였다.

원정대의 총사령관은 로베르토지만 서열 두 번째이자 부사령관은 기함의 제독을 겸하는 몰타의 영웅 발레타의 조카인 베르나르 루이 발레타였다. 간단한 공치사가 이어지고 다음 공격 계획이 수립되었다.

“첫 전투는 당연히 승리하였소. 지나치게 작은 항구라 정박하지 못하여 머나먼 바다에 떠 있느라 참으로 고생이 많았구려.”

“당연히 승리하여야지요. 모로 놈들이 이런 규모의 원정대와 직면한 적이 있습니까? 다음 기회에는 아예 원정대를 여럿으로 나누어 동시에 상륙해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문제가 있더구려. 이 지역은 조선이 조만간 모로 놈들을 토벌할 예정이라는데 토벌만 실행해서는 아무런 이득도 건질 수 없소. 차라리 본대 전체를 몰고 가서 모로 놈들을 개종시키는 방향을 택해보면 더 좋지 않겠소.”

“개종시킨다 하셨습니까? 압도적인 전력으로 무슬림들을 개종시킨 전례가 있지만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본대 전체를 움직이면 놈들도 개종을 택하겠지요. 굳이 바쁠 필요는 없으니 상선을 조금 더 받아들이고 이동합시다.”

어차피 조선에 의해 박살 날 지역이면 가톨릭으로 개종을 택한 이들을 만들어 훗날 조선과 협정을 행할 초석을 만든다.

이후 조선의 비위를 맞추어 항구 하나를 할양받으면 충분하리라.

원정대가 방향을 서쪽으로 정하여 움직이니 자연스럽게 소식을 접한 상선들이 합류하였다.

처음에는 함선 13척으로 시작한 원정대는 약탈을 통한 이득을 얻어내려는 상선들이 합류하며 30척이 넘는 대규모 함대가 되었다.

“저…… 전방에 조선 군함입니다!”

“역시 대규모 원정을 준비하는 것이 분명하군. 천천히 속도를 줄여 대화를 나눌 준비를 하여! 이런 미친! 조선 사람들이 미쳤나! 왜 화포를 쏘아대는 거지!”

“지금 확인하였습니다. 조선 수군의 깃발인 황색 바탕에 구름과 두 색의 동그라미(태극)가 아닙니다! 정체불명의 문자가 아로새겨진 적색 깃발입니다!”

모로 만을 벗어나자마자 명나라의 보선함대와 직면한 스페인 원정대는 정체불명의 함대의 선공을 받아 즉각 전투태세에 돌입하였다.

보선 함대 입장에서는 조선의 함대라면 모를까 다른 배를 모두 해적과 다름없게 여기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원정대는 신속한 대응으로 일자진을 만들며 먼바다로 항로를 돌렸다.

“어느 놈들이 저렇게 거대한 함선을 만들었나? 정체는 알 수 없지만 실력이 부족하다 못해 한심할 지경이군! 차라리 레판토 해전에서 싸운 오스만 놈들이 백배는 잘 싸우겠어!”

함대 규모는 유사하였지만 숙련도의 차이가 한눈에 들어왔다. 서로 2,000야드(1.8㎞)를 거리를 유지한 채 포격을 날리자 원정대의 포격은 보선함대 인근에 떨어지지만 보선함대의 포격은 아무렇게나 떨어졌다.

배를 전속력으로 움직이며 화포를 최대사거리로 쏘면 허공에 화포를 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숙달된 스페인 선원들은 점차 오차를 좁혀가며 포격을 이어갔고 보선 인근에 물기둥이 솟구쳤다.

반면 보선함대의 화포는 처음에는 모든 탄환을 발사하였지만 숙련도가 부족해 오차를 좁히지 못하였고 함선 설계 자체의 문제로 발사되는 화포가 줄어들었다.

보선의 하층 갑판에서 화포를 쏘아대던 병사는 짠물을 들이켜고 울상을 지었다.

“바닷물이 들어와서 화약이 다 젖었잖아! 지금 놈들의 화포가 점점 더 정확해지는데 대체 뭘 하는 거야! 야! 상층 놈들아! 화포 더 빨리 쏘지 못해!”

“그럼 상층으로 빨리 올라오라고! 대체 뭘 하고 있어!”

“이런 좁아터진 곳에서 기어 올라가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 알기나 해!”

억지로 만든 함선인지라 화포의 수는 많아도 격렬한 기동과 파도에 직면하자 하층 갑판에 배치한 화포가 하나둘씩 바닷물에 젖어가며 효력을 잃어버렸다.

상대의 이상을 알아차린 스페인 원정대는 차츰 거리를 좁히며 포격을 이어갔다.

함대간의 거리가 좁혀지자 거대한 보선에 탄환이 조금씩 적중하였다.

배수량 1,000톤이 넘는 거함이 고작 쇳덩어리 몇 개에 맞았으니 전투력을 상실할 이유는 없지만 명나라 선원들의 눈에는 공포가 치밀어 올랐다.

“배가! 배에 물이 들어온다! 배가 침몰한다!”

“닥치고 구멍을 막아라! 판자로 못질을 해서 막고 물을 퍼내라고! 그런 구멍이 수백 개는 뚫려야 배가 침몰하니까 당장 움직여!”

기함은 물론이요, 전체 함대가 혼란에 빠지며 속도가 감소하였고 기함을 호위하던 300톤 규모의 함선들도 하나같이 혼란에 빠져 제자리를 맴돌았다.

지금까지 보선 함대는 위용을 드러냈을 뿐 전면전을 행한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나타나면 모조리 도망갔는데!”

“도망가지 않는 놈들이니까 살고자 하면 화포를 쏘라고! 야 이 멍청이들아!”

보선함대의 총지휘관인 유정(劉楨)은 피를 토하며 병사들을 다그쳤지만 그 또한 제대로 된 싸움을 행한 적이 없었다. 간혹 덤비는 해적들의 화포는 통하지 않았지만 상대방의 화포는 보선의 든든한 함체를 여지없이 관통하며 병사 여럿을 휩쓸었다.

상대가 혼란에 빠졌음을 알아차린 스페인 원정대는 아예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해 진격과 일제사격을 반복하며 야금야금 보선 함대를 갉아먹기 시작하였다.

혼란에 빠진 함선이 빠져나가려 발버둥을 쳐도 주변 배들이 일제히 포격을 퍼부으며 포위망을 굳혔다.

“적이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습니다. 돌격할까요?”

“물론이지! 대체 어느 이교도 놈들인지는 몰라도 분명 모로 놈들의 뒤에서 암약하는 놈들이 분명하네! 전원! 백병전을 준비하라! 적함을 나포하고 적의 수괴를 도륙하라!”

거대한 배라면 약탈할 수 있는 물건도 많을 것이요, 함선이 이상할 정도로 까맣게 물들어 있으니 배 자체가 보물이나 마찬가지이리라.

스페인 함선에서 발사한 포도탄이 갑판의 병사들을 휩쓸고 지나가자 혼란이 극대화된 명나라 선원들은 살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었다.

“싸워라! 이 함선은 황상께서 기거하신 함선이니 이 함선이 곧 황거(皇居)와 마찬가지이다!”

“네놈이 지휘관이구나! 어서 그 머리통을 내놓지 못할까!”

보선 함대의 기함에 로베르토를 시작으로 수십 명의 원정대 병사들이 밧줄을 타고 등선하였다. 아예 나포를 생각하여 그리스의 불을 사용하지도 않았지만 기함이 가까스로 저항을 이어갈 뿐 나머지 함선은 저항 조차 없었다.

등선에 성공하자마자 닥치는 대로 병장기를 휘두르고 권총을 발사하는 원정대에게 명나라 병사들은 저항을 하였지만 장작개비처럼 부서지고 찢겨 나갔다.

유정은 자신의 지휘도를 들고 로베르토에게 필사적으로 달려들었다.

“네놈은 남만인이 아니더냐! 어찌하여 황상께서 기거하시는 함선에 그 더러운 발을 들이느냐! 다들 공격해라!”

유정 또한 마상에서 거대한 철도를 휘두르며 장사로서 손꼽히는 무골(武骨)이었지만 로베르토를 꺾을 방법이 없었다. 단 다섯 합의 싸움 끝에 로베르토의 철퇴가 유정의 허벅지에 내리찍혔다.

인간 백정답게 로베르토의 철퇴는 유정의 허벅지 근육을 파열시키고 튼튼한 대퇴골을 두 조각으로 박살 냈다. 끔찍한 고통에 바닥을 뒹구는 유정은 바닥을 긁으며 통하지 않는 말을 이어갔다.

“어째서! 어째서 이러는 것이냐! 우리가 남만에 무슨 죄라도 지었더냐! 네놈들은 우리 함대가 머무는 남대주를 침범하였으니 너희의 잘못이 아니더…….”

“기세는 좋았지만 실력은 형편없군. 기껏해야 부모를 잘 만난 놈이겠지.”

유정의 머리에 로베르토의 철퇴가 찍히며 투구가 부서지고 두개골 또한 박살 났다. 본래 역사의 임진왜란에서 부패한 명나라 총병관으로 악명을 떨쳤던 유정의 최후였다.

#작가의 말

*베르나르 루이 발레타는 몰타의 영웅이자 기사단장인 장 파리소 드 라 발레트의 조카입니다. 참전 경험도 있고 함대 지휘관으로 명성이 높았다던데 자료를 찾지 못하여 이름을 가상으로 설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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