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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조선-373화 (373/573)

근육조선 373화

2부 15장 5화 신도시 건설(2)

첫 작업인 주민 이주 준비가 끝났으니 두 번째 작업에 들어갈 차례이다.

인구증가로 인한 문제를 아는 소수의 관료와 주상전하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지만 다른 관료들은 아니니까.

인구증가로 거리에 분변이 생겨나도 관료들이 거주하는 도시 중심부에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다. 꾸역꾸역 모인 인구는 도성 외곽에 쌓일 뿐이며 문제는 외곽에서 내부로 서서히 밀려 들어오는 법이다.

당연히 조정에서도 신도시 계획을 세울 때에 많은 반론이 있었고 이를 무마할 대책도 마련해 두었다.

가장 먼저 시행한 작업은 수원의 남쪽. 현대로 치면 화성군 외곽에 위치한 수원향교를 이주하는 일이었다.

“수원향교를 고을 안쪽으로 이전하는 작업을 실시하겠으니 협조하여 주시오. 주상전하께서 명하신 바에 의하여 이 향교의 규모를 늘리고 선원묘(船員廟: 선원들을 위한 사당)를 추가로 건립하겠소이다.”

“선원묘라 하였습니까? 무관들을 위한 묘소는 훈련원에 둔 무묘(武廟: 무신들을 위한 사당)가 있는데 어찌하여 수원향교에 수부(水夫)를 위한 사당을 따로 두신다 하시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무묘에서 배향하는 이들은 관직을 가진 무관이 전부지 않소. 주상전하의 명을 받들어 바다에 나간 이들이 병마에 시달리다 명을 다하고 이역만리에서 삿된 이들을 물리치다 죽는 이들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오?”

향교에서 입신체비를 즐기던 양반들은 영 떨떠름한 눈치였지만 명분은 주상전하와 조정에 있다.

얼마 전 파양군에서 공적을 세우고 돌아온 조헌이 지금 충훈부(忠勳府)에 있으며 계속 간언한 말이 있었다.

-전하, 비명을 남기고 사라진 병졸들을 위하여 제도를 정비하시옵소서.

조선에 무묘가 세워진 것이 사십 년 전이라더라.

남한산성에 있는 훈련원에 작은 규모로 무묘를 세웠는데 여기에 모셔지려면 품계를 받은 무관이나 공적을 쌓은 장졸이어야 가능하다.

공을 세우지 못한 일반 장졸에 대해서는 위령제를 거행하고 관청의 땅을 약간 내어주어 아들이 장성할 때까지 보조하는 제도만 마련했고 간혹 이 제도가 지켜지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한 고장에서 지나치게 많은 장졸이 죽을 경우 관청에서 제공할 땅이 없으니 미곡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흉년이 발생하면 이 미곡이 지연되는 경우도 있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니 나는 유생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아국의 강역이 넓어지고 갈수록 외지에서 목숨을 다하는 장졸들이 넘쳐나는데 이들의 가족이 자신이 죽고 나서 굶주린다고 여기면 장정들은 군문에 발을 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오!”

사전 조사를 위해 도성 외곽의 병사들에게 물어보니 급료가 빵빵하니 흉년이 되면 서로 들어오려고 싸움이 날 지경이라던가.

물론 이들이 알 이유는 없으니 아예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자식을 잃은 부모가 끼니를 이어갈 길이 막히고! 부모를 잃은 자식이 끼니를 이어갈 길이 막힌다면 후손들이 군문에 들어설 연유가 있겠소?”

찍소리도 못하지.

사실 조헌의 간언을 받아들여 조만간 경기도 일대에 병사들을 위한 사당 하나를 건립할 계획이지만 그냥 이 사당을 4개로 분열해 각 신도시를 세울 명분만 확충했다.

4개의 신도시에 세워지는 사당은 수원의 선원묘, 시흥의 보군묘(步軍廟: 보병), 광주의 기사묘(騎士廟: 기병), 그리고 과천에 삼병묘(森兵廟: 임해도감을 비롯한 특수병과)이다.

지금 수원에 선원묘가 들어서는 이유는 물귀신이 많은 선원들이니 물이 없는 고장에 세운다는 명분이지.

유생들은 서로 눈치를 보더니만 북쪽을 향해 절을 올리고 나에게도 인사를 올렸다.

“주상전하의 하해와 같으신 은덕을 저희가 알아차리지 못하여 결례를 범했습니다. 참으로 좋은 일이니 주상전하의 뜻을 따라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자금을 모아 나라의 일에 이바지하겠습니다.”

이미 명분은 조정에 있으니 돈을 내어주어 명분을 챙기고 조정에 이름 하나 남기겠다는 소리다.

여기 모인 유생 가운데 상당수는 양반이긴 해도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여 후손이 양반 자리에서 물러날 이들이다.

자신이 덕을 쌓아 후손들이 음보(蔭補)라도 들어서거나 별시에서 약간의 혜택을 볼 수 있다 여겨 이렇게 재물을 내놓는다 한 것이고 이런 일은 예상해 두었다.

“참으로 훌륭한 뜻이니 이를 주상전하께 간언할 것이며 향교에 부설될 선원묘에 이 기록을 대대손손 남길 길을 마련해 둘 것이오.”

“참으로 다행이지만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노비들을 면천하시고 이를 도성에서 이주하는 백성들로 채우시는지 모르겠으니 지극히 깊으신 성심(聖心: 임금의 마음)을 알고 싶습니다.”

“병졸들의 가족이 이주를 청하면 새로 세워질 고을에 이주할 권리를 줄 것이오. 그런데 주변에 노비들이 넘쳐난다면 이들이 노비와 함께 기거한다고 모욕을 당하지 않겠소?”

명분이라는 것은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이다.

노비가 근처에 산다고? 조정에서 일하는 관노비는 대우가 아주 좋은 편이라 백성들과 큰 차이가 없으니 분간도 힘들다.

당연히 손가락질을 받을 일도 없고 그런 짓을 하면 곤장을 좀 친 다음 형무소로 보내면 되겠지.

하지만 양반들은 근육 다음에 체면과 평판을 중시하는 법이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하고 한마디를 보탰다.

“생각하여 보니 이주한 이들이 다른 백성을 만나니 재가(再嫁)를 행할 수도 있군요. 그러하면 광부(曠夫: 홀아비)들도 좋고 과부들도 좋으니 이는 참으로 훌륭한 뜻입니다.”

“옳은 말씀이오. 백성들이 평온할수록 나라도 평온해지는 법이 아니겠소.”

조선시대에는 남편이 죽으면 재혼할 수 없는 법이 명문화되었지만 여기서는 그냥 공직자를 위한 권고사항이다. 남편이 녹봉 받으면서 잘 살았는데 왜 다시 혼인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수준이지.

며칠 동안 향교를 이주하려고 작업을 지시하니 유생들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곡식은 물론이고 은자 심지어 새로 향교를 이전할 지역의 땅문서를 가져왔다.

그리고 나도 좋은 보상을 하나 가져왔고.

“새로 건립할 향교에는 당연히 유안류(儒案類: 향교에 속하는 유생의 이름을 기입한 책)를 새로 만드는 일이 옳으나 하나를 더 준비했소이다. 옳은 뜻을 대대손손 알리려면 명패로는 부족하지 않겠소.”

“오호라. 동판에 화상(畫像: 초상화)을 새겨두었는데 선이 아주 세밀합니다. 여기에 먹을 묻혀 찍어내면 화상이 수십 장은 나오겠군요.”

“얼마 전에 이현전에서 개발한 식각(蝕刻: 에칭, 각종 산으로 동판을 부식시켜 세밀한 판화를 만들어냄)이오. 동판은 쉬이 상하지 않는 법이니 대대손손 남아 있지 않겠소.”

손바닥 크기의 동판에 세밀하게 새겨진 판화를 매만진 유생들은 콧수염을 씰룩거리며 흡족한 미소를 숨기려고 애썼다. 조만간 조정에서 도공(圖工)이 내려와 이들의 초상화를 동판에 남겨 대대손손 보전하리라.

이제 본격적인 계획에 착수할 차례이다. 먼저 노비들이 거주하던 구역을 말끔히 밀어버리고 임시로 새집을 마련해야 한다.

이주민들은 도성에서 억지로 끼어 살던 이들이니 그리 많은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

“어차피 새집을 지으면 습기가 너무 많이 나와 군불을 때느라 고생이 많습니다. 하지만 평민이 된 몸이니 이런 고생 정도는 감내해야겠지요.”

“집은 지나치게 크게 만들지 않을 것이네. 집을 크게 만들어서 뭐에 쓴단 말인가.”

이번 사업에 들어갈 목재야 조정에서 쌓아둔 사업용 목재를 사용하면 충분하다.

대양도에서 매년 최소 오천 재의 목재를 조정에 들여와 잘 말려두고 있으니 이걸 잘 켜내어 기둥으로 삼으면 차고 넘치지.

집이 지나치게 클 필요도 없다.

화재 방지를 위해 초가집은 금하고 기와집을 세우지만 한 가족당 12평 정도면 약간 비좁아도 잘살 수 있으니까. 인구가 계속 늘어날 신도시이니 여유 공간은 필수적이다.

정작 중요한 건 다음 작업이다.

“토지 측량을 실시하게. 수확이 끝난 다음 논두렁을 지정한 대로 새로 만들어 바둑판처럼 정갈한 반 결 단위의 농토를 만들면 충분할 것이야!”

여기를 경작하던 사람들은 대다수 조정에 묶인 노비이다. 자신들의 수확이 얼마가 나오든 간에 먹고살기 적당한 곡식을 받는 생활을 수십 년 동안 해왔던 이들이다.

당연히 논은 누더기나 마찬가지다. 물골과 두렁이 넘실거리는 혼란스러운 형태이며 효율성이 극도로 떨어진다.

천만다행히도 토지 측량법을 대부분의 지방 관원들이 터득하여 삽시간에 수십 명의 관원들이 벌판을 넘나들며 측량을 시작하였다.

“직사각형으로 땅을 다시 정비하면 소출이 이 할은 증가할 겁니다. 세상에 이렇게 누덕누덕 기워놓은 토지는 처음 보았습니다. 지금 보니 반 마지기의 농토도 있군요.”

“이게 다 노비라서 생긴 일일세. 만약 여기에서 일하던 이들이 소작농이었다면 온전한 땅을 늘려나가 작황이 더욱 좋았겠지. 결국 노비는 어떠한 형태로든 폐하는 것이 옳다네.”

대충 측량한 배치도를 작성하니 대체 이 땅을 어떻게 경작해 왔는지 한심할 지경이었다.

물골이 통하지 않는 반 마지기의 농토를 농토랍시고 내놓았으니 수확은 어디론가 사라졌겠지.

제대로 된 농지만 정비해도 작황이 좋아지는 것은 이미 십 년 전에 토지 측량 사업에 참가하며 확인하였다.

당시 토지의 명확한 면적이 나오자 누더기처럼 얽힌 논을 소유하던 농민들도 서로의 논을 합치고 재분할해 커다란 논으로 바꿨으니까.

나름 중요한 지역이니 읍성(邑城)도 야트막하게 쌓았다.

어디까지나 도시와 농촌의 구획을 나누는 수준이라 큰 규모는 아니지만 사람이 심리적 안정감을 가지기에 충분한 수준이다.

날이 슬슬 추워질 무렵 노비들이 살던 건물 가운데 대다수가 철거되고 주거 효율성만 따진 새로운 집이 늘어났으며 측량작업도 끝나 농지에는 반 결 단위로 새로 두렁을 만들 장소가 지정되었다.

이제 수확이 끝난 노비들은 나에게 감사 인사를 올리기 시작했다.

“주상전하께서 성은을 내리시어 저희 모두가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은혜를 갚으려 하면 면천된 사람으로서 모든 세금을 내고 편안히 살면 되는 법이오.”

이제 후임자가 일을 할 예정이니 나는 북한산성으로 돌아가 나머지 산성 공사에 몰두하면 되리라.

그런데 왜인 후손들이 대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네. 천석꾼이라는 소문을 들었는데 가본 적은 없잖아?

* * *

조선시대에는 이리저리 뒤틀린 해안선과 갯벌이 어우러졌어야 할 전라남도의 강진 일대에는 시대에 걸맞지 않은 거대한 간척지가 있었다.

세워지고 수십 년이 지나 이미 땅이 된 간척지이지만 몇 차례의 간척을 거쳐 여러 겹의 제방이 굳건히 자리를 잡았다.

수확이 끝나 황량해진 간척지에서 내륙으로 들어온 곳에는 칠십 칸에 달하는 거대한 저택이 있었다. 수십 명에 달하는 머슴들이 탈곡 작업에 몰두하는 가운데 별채에 마련된 입신체비장에는 한 노인이 몸에서 열을 피워 올리며 운동에 몰두하였다.

자신의 머리보다 큰 나무 공을 앉은 채로 이리저리 들어 올리고 허리를 트는 동작을 보아도 이 노인의 완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노인은 가쁜 한숨을 내쉬며 서적을 다음 장으로 넘겼다.

“역시 양장(襄莊: 우공의 호) 집은 몸을 다스리는 데 효험이 차고 넘치는구나.”

이 시대의 사람이 보면 천축에서 전해지는 요가와도 흡사하며 현대인이 본다면 필라테스(Pilates)라 불릴 동작을 물 흐르듯 수행하는 노인의 몸에서는 구슬땀이 샘솟고 있었다.

수양대군의 제자 우공은 자신의 지식을 서적으로 정리하려 하였고 이 서적은 인도에서 들여온 요가 수행자들을 비롯한 이 시대의 재활(再活)의술의 정석을 포함한 책이었다.

입신체비를 행하다 몸이 상한 이들은 양장집을 통해 자신의 몸을 다스렸다.

얼굴만 보면 예순을 훌쩍 넘긴 것처럼 보였지만 몸의 근육은 그 노인이 젊은 시절에 충실한 입신체비를 시행한 사람임을 증명하듯 끝없이 요동치며 사지의 균형을 잡아댔다.

이윽고 운동이 끝난 노인은 머슴이 가져온 녹차를 들이켜며 호흡을 정돈하였다.

“내가 젊을 적에 몸을 험하게 굴리지만 않았어도 여전히 역기를 들 수 있었거늘.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니 방도가 없구나. 이제 충선이를 데리러 다녀와 볼까.”

가볍게 몸을 씻고 의관을 정제한 노인이 문을 나서려 하니 대문이 열리며 철릭을 휘감은 장정이 인사를 올렸다.

“아버지, 소자 왜국에서 군문과 관련된 업무를 행하다 방금 전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시일을 조금 내어 분가의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왜국이라 하지 말라 그렇게 말을 하지 않았더냐. 우리 가문은 엄연히 왜…… 막부의 구, 구 웅본(熊本: 구마모토)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다. 옛 조상의 행적을 잊어서야 쓰겠느냐.”

노인도 자신의 고향의 이름을 조선식으로 읽으니 부끄러움에 고개를 돌렸지만 이들은 누가 보아도 조선의 유생이었다.

한숨을 내쉰 노인은 머슴을 시켜 향교에 다녀오게 한 뒤 대청마루에 걸터앉았다.

“분가는 어떻게 지내고 있더냐. 이전처럼 고생하면서 지낸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실은 분가 사람들이 조선으로 이주를 청하여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잘했다! 내가 젊은 시절에 분가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는데 내가 한 달 동안 사자소학만 가르치다 돌아왔었다! 그런 이들이 조선에 와서 뭘 한다고! 은자 쉰 냥을 고 서방을 통해 보내면 입을 싹 닦을 것이다!”

“저기…… 아버지와 만난 사람은 고 서방이 아니고 고니시 유키나가입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에서 이 년 넘게 머문 덕분에 조선과 일본 양국에서 소식통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간혹 주문하는 물자를 보내주며 중간 수익을 챙겼다.

하지만 이름을 혼동해 부끄러워진 노인은 괜히 호통을 쳤다.

“어떻게 읽던 일단 나와 알고 지내는 사이이니 고 서방이야! 사람 성명이 도합 일곱 자나 되어서 헛갈리는 것이다! 나처럼 김우근이나 너처럼 김일천이어야지!”

이들의 정체는 경인왜란에서 끌려온 아소 가문의 가신(家臣)의 후손이었다. 당시 조선으로 끌려왔다 옥유충이라는 이름을 받고 돌아간 아소 코레타다를 비롯한 이들은 큐슈로 돌아갔지만 가신들은 아니었다.

상당수의 가신은 조선에 남아 죄를 사한다고 간척지를 만들었으며 이들은 기껏해야 차남이나 삼남을 분가(分家)의 형식으로 일본에 남겨 양 국가에서 가문을 이어갔다.

조선에서 웅본 김(金)씨의 성을 하사받은 가신은 간척에 몰두하다 세상을 떠났으며, 그 대가로 후손은 조선 사람이 되었지만 당사자는 팔십 년 전에 세상을 뜬 다음의 일이다.

김우근은 수염을 쓰다듬더니 자신의 조상이 묻힌 선산을 바라보았다.

“네 고조부이자 내 증조부님께서 말씀하시길 고향의 산천에 묻히고 싶다 하셨다. 내가 세상을 떠나면 봉사손(奉祀孫: 제사를 올릴 의무가 있는 자손, 4대손까지)이 끝나니 분가 사람들에게 연락을 보내 이장하면 좋을 것 같구나.”

“그러하면 묘소를 폐(閉)하고 유골을 화장하여…….”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를! 왜국이야 조상을 모실 엄두가 나지 않으니 불씨들의 풍속을 따라 유해를 화장하지만 그런 삿된 일을 행하라고! 입 밖으로 꺼내지도 말거라!”

일본의 풍속을 잘근잘근 씹어대듯 꾸짖는 김우근의 모습을 본 아들 김일천은 작은 한숨을 쉬며 이 모습을 바라보았다.

뼛속까지 입신체비와 유학 그리고 농사에 물든 김우근의 시선에는 일본의 모습이 수라도(修羅道)와 마찬가지였으니까.

“조정에서 교지가 내려왔소이다! 진사 김우근은 어서 교지를 받으시오!”

고함을 치던 것도 잠시, 북쪽을 향해 절을 올리고 교지를 받은 김우근은 조심스럽게 교지를 열어 확인해 보았다.

그가 관직에 나서지 않은 이유는 외동아들로서 농토를 다스릴 의무가 있어서였지 학문이야 차고 넘치게 배운 사람이다.

“오호라, 주상전하께서 면천하신 노비 삼십 명을 이 부족한 사람에게 배정한다 하셨구나.”

“노비 삼십 명이요? 그러하면 식솔들을 합치면 백이십 명에 달하지 않습니까?”

“내가 가진 농토가 오백 결이 넘고 이번에 새로 개간한 간척지가 일백 결이 넘지 않더냐. 본래 내 종친(宗親: 동성동본의 먼 친척)들에게 소작지로 주려 했건만 이러면 다른 수를 써야지. 새 간척지의 세금을 추가로 십 년 동안 면제한다 하셨으니 이는 큰 이득이다.”

입신체비사들은 셈이 느리면 역기가 추가되는 방식으로 덧셈과 곱셈을 익힌지라 간혹 대역기봉의 무게 40근을 자연스럽게 빼는 오류를 제외하면 대다수는 셈이 빠르고 정확하다.

새 간척지의 염분을 빼기 위한 목화를 수확할 일손도 덜고 보상으로 노비 출신들이 일한 땅의 절반을 내어주면 충분하리라.

향교로 다녀온 머슴이 아홉 살의 어린아이를 데려왔다.

“소손(小孫) 오늘도 학업에 열중하다 돌아왔습니다. 체장(입신체비사)님께서 말씀하시길 몸이 날렵하니 학업을 익힌 이후 군문에 들어가면 좋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어느 길로 나아가도 충분한 일이다. 충선아, 이 할아비는 네가 그저 무럭무럭 자라나 무탈하게 살아가면 될 일이라 여기니 염려하지 말거라. 그러고 보니 참으로 뜻깊은 날이구나. 얘야! 신 것을 내오너라!”

조선으로 이주한 일본 사람들이 그나마 남은 풍속은 단 하나였다.

일본에서는 당시에도 스시라 불리고 조선의 말로 직역하면 ‘신 것’이 되는 생선 요리이다.

물론 교토의 명문가도 아니고 촌구석인 큐슈의 가신들이 자신들의 부족한 지식을 쥐어짜 내 만든 요리이니 생선과 밥을 틀에 넣어 누르는 방식이며 신맛이 난다는 것 외에는 지식이 없었다.

없는 지혜를 쥐어짜 내 나무로 만든 틀에 밥을 깔고 식초에 절인 생선을 올려 꾹 눌러 한 입 크기로 잘라낸 걸 신 것이라 불렀으니, 이는 간척지 일대의 토속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본래 18세기에 나와야 할 음식이지만 이들이 알 길은 없다.

“역시 도미로 만든 신 것이 입에 착착 감기는 법이지. 생선에 있는 벌레(기생충)들이야 식초에 절여서 모두 죽었으니 염려하지 말고 먹어라. 갓 잡은 생선이니 상하지도 않았다.”

“제가 왜국에 다녀오며 사람을 통해 신 것이 대체 뭔지 알게 되었는데 생선에 소금을 치고 찐 밥에 묻어 삭히는 음식입니다. 신맛이 돌면 생선만 꺼내어 먹는다더군요.”

가족들의 손이 멈추고 김우근의 입술이 파들거리다 다시 고함이 튀어나왔다.

“그러면 생선에 있는 벌레도 쉬다 못해 상한 밥알도 뱃속으로 밀어 넣는다는 말이냐? 홍어야 삭혀야 제맛이 나는 법이고 식해도 신맛이 돌기 전에 적당히 삭혀 먹거늘 이 무슨 짓이란 말이냐! 다음에 왜국에 가거든 신 것을 널리 퍼뜨려 보거라!”

자신의 풍속을 지키려는 마음이 오히려 음식 문화의 급속한 발전을 불러오게 되었다.

완전한 조선 사람이 된 왜인의 후손들은 오늘도 주상전하의 은혜를 마음속 깊이 새기며 자신의 정체성을 점점 더 상실하고 있었다.

#작가의 말

항왜 왜장 김충선의 정체에 관한 설은 4개가 있습니다.

1. 자인 선지(善之)에서 따와 사이카슈 소속의 스즈키 요시유키라는 설

2. 항왜 가운데 이름이 남은 오카모토 에치고가 훗날의 이름을 김충선으로 정했다는 설

3. 울산성 전투에서 실종된 왜장인 하라다 노부타네가 항복했다는 설

4, 아소 가문의 가신이었지만 가토 기요마사에게 가문이 망하여 원한을 품고 항복했다는 설.

여기서 4안을 채택하였고 역사가 변해 김충선의 조상은 조선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결국 태생부터 조선 사람이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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