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372화
2부 15장 4화 신도시 건설(1)
논의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김귀영은 호조판서에다 나이가 60세인데도 두골헌(헤드 락)을 얼마나 세게 걸었는지 망건이 헝클어지고 갓이 다 뭉개져 버렸다.
“두개골 쪼개지는 줄 알았네. 세상에 내년에 환갑인 사람이 근손실이 거의 없다니 이게 말이나 돼? 단순한 완력으로 따지면 나보다 세잖아?”
스승인 이황도 장인어른인 조식도 쉰이 넘고 근손실이 시작되었는데 예순이 넘어서도 근손실이 없는 사람이 간혹 있기는 하더라.
김귀영도 그렇고 경기수영 통제사인 정걸도 그렇고.
머리가 쥐어 짜여 터질 것 같은 시점에서 되는대로 말이 나왔는데 어르신이라 한 것은 실수였다.
나중에 선물이라도 사 들고 찾아가려 했는데 지금 나라의 예산을 너무 쥐어짜 내는 것은 아닐까.
정작 재정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니 지나친 부담을 지워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을지도 모른다.
정기 휴일인 4월 23일(조선시대는 관리는 매월 1, 8, 15, 23일이 휴무일이다)이 다가오기에 좋은 선물을 마련해 김귀영의 집에 방문했다.
선물은 조선에서 즐겨 마시는 커피콩이며 갓 볶아서 향이 물씬 풍기는 녀석이다.
김귀영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나를 보자 눈을 흘기더니 내가 들고 온 커피콩에서 나는 진한 향기를 알아차리고 슬쩍 방으로 들어가 나를 맞이했다.
“예까지 무슨 일로 왔던가. 혹여나 내 두골헌으로 헛된 소리를 하여 사죄하러 왔다면 별일도 아닌데 괜히 왔군. 제대로 걸린 두골헌은 다 큰 장정도 모친을 찾게 만들지 않는가.”
그렇게 아프니까 엄마 찾는 사람이 간혹 내수린장에도 있더라.
일단 사과할 건 그거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니 정중히 인사를 올리고 커피콩을 건넨 다음 본론을 시작하였다.
“제가 호판대감께 결례를 범한 것이 그 하나만이 아닙니다. 제가 미주와 호주에 대규모 사민을 주장하였는데 이 또한 호조의 책무가 아니겠습니까. 차라리 대양도의 이야기를 먼저 꺼냈어야 하는데 생각이 부족하였습니다.”
“잘 알고 있으니 다행이군. 얘야! 질 좋은 가배콩이 들어왔으니 가누(드립커피)를 두 잔 내오너라!”
머슴에게 커피를 건네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김귀영은 손가락을 꼽아가며 무언가 계산을 하더니 한숨을 내쉬고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사민을 보내면 그 사람은 세금이 면제되는 십 년 동안 허공에 뜬 신세가 되며 정착 기간인 이 년 동안은 나라의 곡식을 축내는 신세가 되지. 더군다나 미주는 서반아(스페인)와 분쟁 중인 지역이라 더욱 많은 자금이 소모되네. 당연히 병력도 필요하니 참으로 힘든 일이야.”
“서반아와 분쟁 중이라 하셨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미주에는 아국이 먼저 당도하여 미주인들을 포섭하여 나라를 형성했다 하였습니다. 그러하면 더 유리한 위치가 아닙니까?”
“미주에 당도하는 시일을 생각하여 보게. 아국이 가장 빠른 선박인 상무선으로 움직여도 한 달 하고 보름이 걸리며. 그 이상 함선은 중간 보급이 필요하니 두 달이 걸리지. 반면 서반아 선박은 한 달이 조금 넘으면 충분하다네.”
이걸 생각하지 못했네.
미주에 다녀오려면 가장 빠른 선박으로 보급을 최대한 줄인 급속항해를 실시해야 45일이 걸린다더라. 마젤란이 괜히 태평양에서 80일간 고생한 것이 아니다.
병력을 잔뜩 올린 선박도 40일 만에 도착할 수 있는 스페인과 60일 동안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조선의 싸움이 벌어지면 조선의 대응은 계속 늦어지는 법이다.
“결국 분쟁이 벌어지면 아국에서 상황을 알고 대처를 행할 무렵 서반아가 이미 움직인 다음이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러하면 대규모 사민을 행할 경우에는 참으로 고난이 많겠습니다.”
“이미 서반아는 아국의 세 고을인 회주(回州: 밴쿠버 일대), 금주(今州: 샌프란시스코) 그리고 강주(康州: 샌디애고)를 염탐하다 호되게 당한 적이 있다네. 하지만 미주 전체를 자신의 땅이라 윽박지르는 경우도 있다네.”
내 생각이 짧았다.
미주를 제대로 개척하려면 기나긴 태평양을 건너서 백성을 풀어놓고, 백성들이 머무를 새 땅을 만들 때마다 시비를 거는 스페인과 분쟁을 벌여야 하는 격이다. 더군다나 거리 때문에 스페인의 대처가 언제나 한발 빠르다.
만약 대규모 전쟁이 일어나면 조선에서 상황을 알아차릴 무렵 스페인의 지원군이 이미 도착했으리라.
조선이 강한 나라여서 스페인도 무작정 쳐들어오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분쟁이 터질 것이니 스페인 사절단을 부르거나 우리가 직접 나서 교섭하고 영토를 명확히 정해야 하리라.
그럼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그러하면 대양도로 사람을 이주하는 일은 큰 문제가 없습니까? 근래에 들어 북악(북한산)에 산성을 만들고 신형 선박을 건조하며 이제는 고을을 만들어야 하지 않습니까.”
“예산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군. 공조 출신들은 맨날 쓰는 일은 잘하다 환갑이 다 되어서 정신을 차리고 예산을 줄이려 하는데 자네는 역시 재능이 뛰어나군. 대양도에 사민을 보내는 일은 그리 큰 문제는 아닐세.”
사민이야 그렇다 치자. 북한산성에 은자 사십만 냥, 신규 함선은 대충 매년 은자 삼십만 냥 이상이 추가 소모되는데?
하지만 김귀영은 나를 보고 갑자기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솔직히 말해 자네 덕분에 나라의 재정에 많은 여유가 생겼다네. 명세내역이 생기기 전에는 한 해 여유 자금이 이십만 냥도 빠듯하고 흉작이 들면 세금을 감면하니 삽시간에 적자가 생겼지. 그래도 요즘은 돈이 조금씩 쌓이고 있다네.”
“명세내역 덕분에 돈이 쌓인다 하셨습니까? 대체 얼마나 많은 자금이 생겨난 겁니까?”
“명세내역이 본격적으로 적용된 갑술년(1574년)부터 쌓인 자금이 벌써 이백만 냥이 넘었어. 예전 호판이었던 청천당(聽天堂: 심수경의 호)은 지금 호조를 보고 참으로 부러워한다네.”
병이 들어 잠시 관직에서 물러났다 다시 형조판서로 재직하고 있는 그 양반이 부러워한다고? 생각해 보니 이 시대에는 사업을 추진하면 대부분의 일에는 삼 할 정도의 손실이 기본이다.
중간에 손실을 핑계로 가로채거나 적당히 선물 식으로 주고받고 아예 많은 양을 보내서 다 사용하였다 변명하고, 건전한 조선이라서 삼 할의 손실이고 명나라는 오 할의 손실이 기본이라던가. 이게 일 할 이하로 줄어들었다.
당연히 나라에서 거둬들이는 수익은 고정되어도 소모되는 자금이 20%가량 감면되었고, 결국 국가 연 수익 800만 냥 중 자금소모가 줄어들어 한 해 10%인 은자 80만 냥이 남는 격이다.
김귀영은 내 표정을 보고 다른 말도 하였다.
“나라가 채무를 짊어질 정도로 고달픈 상황은 아니지만 만일이 있네. 정 많은 자금이 필요하면 남경의 상인들에게 표권(票券: 조선시대의 어음)을 은자 백만 냥 정도 발행하면 충분한 일이지.”
“남경의 상인이라 하셨습니까? 어찌하여 아국의 상인이 아닌 남경의 상인들에게 표권을 발행하여 다른 나라에 채무를 만드는지 모르겠습니다.”
“윤가놈(윤원형)이 저지른 패악 덕분이지. 나라에서 발행한 표권을 사들여 여러 관료들을 미혹시켰으니 나라 안에 표권을 발행하는 일에 제약이 생겨 한 해에 오십만 냥을 넘지 못하네.”
“오히려 더 위험한 일이 아닙니까? 남경 상인들에게 표권이 넘어간다면 이들이 아국을 뒤흔들 수 있는 재력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염려하지는 말게나. 남경에서 사사로이 교역하는 물자만 하여도 한 해 은자 칠백만 냥이 넘어가는데 여기서 얻은 관세만 따져도 백만 냥에 달하지. 남경 상인들에게 발행한 표권은 길어야 육 개월 이내에 모두 갚을 수 있다네.”
자신의 고난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겠느냐는 표정으로 커피, 아니, 가누를 한 모금 들이켠 김귀영은 갓 볶아낸 커피의 향을 음미하다 다시 표정이 일그러졌다.
“명세내역이 없었다면 줄줄이 새어나가는 자금으로 온갖 사업이 지연되거나 소실되었을 것이네. 가까스로 운영되던 재정이 다시금 여유롭게 차오르니 모두 자네 공이지.”
“아닙니다. 제가 아무리 좋은 생각을 하여도 주상전하께서 이를 널리 퍼트릴 뜻이 없으셨다면 제 이론은 허공에 뜬 채로 저 혼자만 즐겨 사용했을 것입니다.”
“자네가 그렇게 말하니 훗날 무슨 일을 할지 궁금하군. 그나저나 새 고을을 만드는 일 또한 염려하지 말게나. 전라도 각지에 거주하는 왜인 후손들의 힘을 빌리려 한다네.”
왜인 후손들의 힘을 빌린다니 영문을 알 수 없지만 호조에서도 나름 생각을 다 해뒀으리라.
김귀영의 답을 듣고 자신감이 생겨 바로 다음 사업에 들어갔다.
* * *
경기도 일대의 땅의 상당수는 내수사를 비롯한 조정의 각 기관에 배정된 공노비(公奴婢)들이 농사를 짓는 곳이다. 녹봉 가운데 반드시 미곡으로 지급하는 분량은 여기 수원을 비롯한 각 지역에서 생산되고 있다.
조선의 노비는 차츰 자취를 감추어 지금은 인구의 7% 정도를 차지한다던가.
권세가의 사노비는 대양도나 북방을 개척한 공으로 면천되었으며 기껏해야 남은 것이 채무 불이행자인 사노비나 정부 소속 공노비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공노비 일만 명을 면천시켜 평민으로 만들 예정이다. 수원 일대의 관아에 노비들을 모아놓고 도호부사와 함께 간략한 행사를 진행하였다.
“오늘부터 자네들 모두 다 면천되었다네. 이는 주상전하의 어명이며 이미 조정에 있는 노비문서는 불태워지고 자네들의 호패를 만들고 있으니 염려하지 말게. 그리고 수원도호부에 있는 노비문서도 모두 불태울 것이네.”
나름 행사이니 쌓여있던 노비문서와 도저히 쓸 수 없는 폐지를 섞어 대충 불에 던져 넣었다.
하지만 공노비들은 멀뚱멀뚱 눈을 굴리더니 오히려 질겁하여 답하였다.
“저희가 면천되었다 하셨습니까? 아니, 저희가 뭘 잘했다고 면천되었단 말입니까?”
“주상전하의 뜻이니 염려하지 말게나. 그저 은덕을 내리려 하니 올바른 일을 행할 뿐이네. 이제 자네들 대신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여기에 배정될 것이니 다른 일자리를 찾으면 될 걸세.”
공식적으로 상왕전하께서 병환에 들었으니 노비를 면천시켜 은덕을 베푸는 자리이다. 물론 상왕전하가 요즘 관절염이 심해지기는 하셨지만 여전히 쌩쌩하니 그냥 명분이다.
하지만 노비들은 환호성을 지르기는커녕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주변을 돌아보다 따지고 들었다. 이들은 특수 직종이 아닌 농사를 짓는 공노비들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저기 지금 모내기가 끝나서 벼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데 저희를 면천시키면 뒷일은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당장 면천되었다고 쌀이 생기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면천되어도 결국 나라님의 땅을 개간하는 소작농으로 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희는 땅 파먹고 살던 사람들이니 땅을 파먹어야지요.”
“저희는 천것이라 손가락질을 받지는 않아 다행이지만 갑자기 내쳐지면 할 일이 없습니다. 결국 넝마주이 신세가 되겠지요.”
당연한 반응이다.
이들이 각 기관에서 전문 업무를 담당한 기술자들이면 당당하게 받아낼 녹봉으로 자식들을 기를 생각을 하느라 당장 천세를 올렸을 거다.
하지만 이들은 특별한 기술도 없는 농사꾼들이다. 평생 땅만 파먹고 사는 이들이니 소작농보다 조금 불리한 수준의 신분이며 결국 소작농 신세가 되면 천민 딱지만 뗀다 생각하겠지.
하지만 김귀영이 왜 왜인 후손과 연락했는지 답이 다 있다.
“염려하지 말게. 올해는 농사를 이어가며 자네들이 머물던 땅에 새로 거주할 사람을 위한 준비를 하고 올겨울에는 전라도에 내려가 새 땅을 배정받을 준비를 하면 된다네.”
경인왜란이었나 경인왜변이었나.
110년 전에 벌어진 조선과 무로마치 막부 간의 전쟁에서 조선은 당당히 승리를 거두었고 수만 명의 포로를 거둬들여 이들을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 간척 사업에 사용했다.
당연히 이 포로들은 조선에 머물며 조선 사람이 되었다. 처음에는 적응하느라 온갖 고난을 겪었지만 수십 년이 지나자 간척지의 염분이 빠지고 비옥한 농토가 되어 남 부럽지 않은 갑부가 되었다더라.
그리고 한 번 제대로 늘어난 간척지는 끊임없이 늘어났으며 지금도 전라도 일대에는 왜인 후손들이 만드는 간척지가 계속 생겨나는 실정이다.
물론 문제는 있지만 면천된 노비들은 여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나 보다.
“전라도라 하셨습니까? 세상에 그러면 이모작도 가능하고 고구마도 마음대로 심을 수 있는 땅이 아닙니까? 주상전하 천세!”
“주상전하 천세! 주상전하 천세!”
“이모작이건 삼모작이건 자네들에게 배정된 땅에서 농사를 지을 만큼 짓게나. 다만 자네들은 땅 주인이 제시하는 업무를 진행해야 함을 잊지 말게.”
“기껏해야 땅 한 결만 얻어내면 족한데 얼마나 고생하겠습니까! 주상전하 천세!”
자신들에게 전라도의 땅을 준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북쪽을 바라보며 절을 올리는 노비, 아니, 평민들을 보자 쓴웃음이 나왔다.
조정에서는 맨입으로 이들을 면천시키지 않았다.
이들이 배정될 곳은 새로 간척된 땅이다. 염분이 넘쳐나는 지역이며 이 염분을 제거할 작물이 있는데 목화이다.
목화가 제대로 자라날 정도로 염분이 빠지면 오 년 정도 목화를 심어 염분을 모조리 빼낸다더라.
결국 이들이 얻어낼 땅은 당장은 곡식을 기르지 못하고 오 년 동안 피와 땀을 흘려 목화를 기르며 스스로 쟁취해야 하는 땅이 되었다.
그동안 의식주야 땅 주인인 왜인들의 후손이 알아서 하겠지만 이런 사실을 알아도 큰 불만은 없을 테니 본격적으로 신도시 건설 사업을 진행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