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370화
2부 15장 2화 인구 증가
북한산성의 주요 성문 공사는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어 햇살이 따스해질 무렵…… 은 아니고 아직 쌀쌀한 시기이다. 높이만 30자(10.4m)에 달하는 거대한 성문에 누각까지 올리니 장관이 따로 없다.
본래 조선시대의 성은 물론이요, 한반도의 성은 화강암이 넘쳐나는 지역이라 돌을 대충 가공한다. 격식이 필요한 성은 돌을 네모반듯하게 다듬기는 하지만 적당히 다듬는 선에서 끝난다.
하지만 내가 눈앞의 대성문 성벽은 네모반듯하지는 않지만 표면을 쓰다듬어도 거친 느낌이 잘 들지 않을 정도로 매끈하게 다듬었다. 더군다나 돌 사이의 틈도 드러나지 않는다.
각 성문에 배정된 잉카제국 출신 유민들이 석수로 나선 덕분이었다.
“역시 잉가국(잉카제국) 출신 석수들은 돌을 두부 다루듯이 재단한다니까. 이십 돈(17.8톤)에 달하는 거대한 돌이 서로 맞물려 칼날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일치하는군.”
칼날은 아니고 목재를 가공할 때 쓰는 끌을 들어 대성문의 돌을 찔러 보았는데 정말 끌이 박히지 않는다.
내 모습을 본 석공은 담배 연기를 하늘로 내뱉더니 아쉬운 소리를 내뱉었다.
“저희 고향 기준으로는 굉장히 작은 돌입니다. 제 고향인 삭사이우아만의 성벽은 이거보다 열 배는 무거운 돌을 마음대로 끼워 맞추었지요.”
열 배는 무거운 돌이면 200톤에 가까운 녀석이다. 정육면체로 계산해도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6미터에 달하는 거석인데 이쯤 되면 이집트 피라미드의 거석보다 훨씬 큰 돌이지.
조선에서 이런 돌을 다루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평지 한정이다. 여기는 북한산이니 설치할 수 있는 녹로(크레인)도 한계가 있고 거중기도 한계가 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자금 소모가 심해 딱 잘라 말했다.
“돌을 옮기기 쉬운 평지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산지에서 거대한 돌을 하나 쓸 바에는 작은 돌 열 개를 쓰는 것이 나은 일일세. 수십 명이 돌을 옮기고 거대한 녹로를 둘 수는 없지 않나.”
“그래도 아쉬운 일입니다. 작은 돌을 여럿 쓰면 표면적이 늘어나니 가공할 장소도 늘어나는 법이지요. 나중에 보수할 적에는 더욱 편하긴 하겠습니다.”
본래 이런 방식으로 돌을 가공하려면 뛰어난 석공을 다수 소집해야 한다.
당연히 어마어마한 인건비가 소모되지만 지금 소집된 이들은 인건비는 평범하게 줘도 되니 서로 북한산성 공사에 참가시켜 달라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거대한 공사에 잉카제국 출신 석공들을 소집하니 이들의 기술을 흡수하려고 같은 공사에 참가한 것이다. 덕분에 인건비도 절약할 수 있었고 석공들의 기술 수준도 순식간에 늘어나리라.
완성된 대성문을 보니 절로 감탄이 나왔다.
신라의 수비체계와 조선의 화포 그리고 머나먼 잉카의 석수들이 결합했으니 단순 방어력으로 따지면 산해관도 꼬리를 내리리라.
시찰 중인 박순도 절로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을 내렸다.
“유 부정 자네도 고생이 많았네. 이제 농번기가 되어 인부들을 돌려보낼 시기가 되었으니 잔업을 진행하고 옛 비석을 주상전하의 어필이 담긴 새 비석으로 바꾸도록 하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정녕 이러한 비석으로 괜찮겠습니까? 무언가 미사여구라도…….”
“이렇게 당당한 성이니 천 년은 갈 것인데 무슨 미사여구가 필요하겠는가.”
내 앞에 놓인 비석은 주상전하의 어필(御筆)이 담겨 있다. 참으로 대범하게도 내용은 [옛적 사람들이 전장으로 삼았던 북악에 별궁과 산성을 축조함. 만력 9년(1579년) 3월]이 전부였다.
이 시대의 비석은 자신의 치적과 위업은 물론이요, 온갖 미사여구를 담은 어학의 진수지만 주상전하는 이런 행태가 영 못마땅했나 보다.
이 비석을 세울 장소는 이미 정해두었는데 다른 어디도 아닌 북한산 비봉(碑峰)이다.
수양대군의 장남인 도원군은 고고학자이자 금석문의 달인이었다. 젊은 시절 북한산 비봉에 올라 비석을 발견한 것을 계기로 삼아 금석학의 시조가 되었고 이 비석이 무슨 물건인지 정체를 알고 있었다.
사실 다른 산봉우리에 비석을 세워도 되지만 옛 비석을 택한 이유가 다 있다.
잠시 기다리니 내가 보냈던 인부들이 북한산 순수비를 가지고 돌아왔다.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옛적 신라가 남긴 비석이 남아 있었다 했는데 이걸 내려놓는 일에만 사람 스물다섯이 달라붙었지 뭡니까. 그리고 이 금은 본래 있던 흔적입니다. 저희가 내동댕이친 것이 아닙니다!”
“익히 알고 있으니 염려하지 말게. 오랜 세월을 밖에 둔 덕분에 비바람에 손상되며 흠집이 좀 생겼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군.”
현대의 북한산 순수비는 더욱 오랜 세월을 풍화되고 6.25를 겪으며 총탄 흔적까지 새겨져 훼손이 심각한 상태였지만 이 비석은 글귀를 알아볼 정도로 명확한 녀석이다.
내가 치수를 완전히 기억하고 있는 석물(石物)인 북한산 순수비는 훗날 내가 만들 새로운 척관법의 기준이 될 녀석이다.
포상을 바라고 눈을 굴리는 인부들에게 은자를 준 다음 새 비석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참으로 고생이 많았네. 그나저나 새 비석을 세울 공간은 충분하던가?”
“새 비석이 조금 더 크지만 이런 산중에는 물건을 올리는 것이 차라리 쉽지요.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당장 다녀오도록 하지요.”
북한산 순수비는 도성으로 보내서 풍화를 겪지 않는 장소에 잘 보관해 두면 되겠지.
인부들이 차례로 돌아가고 적막해진 산성 도면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처음 공사를 시작할 때는 도성에 거주하는 한량은 물론이요, 경기도 일대의 백성들이 몰려와 삼만 명에 달하는 이가 집결했었지만 이제 공사현장은 텅텅 비어서 다른 성문을 만들 석공들이 돌을 쪼아내는 소리만 들려왔다.
농번기가 되자마자 썰물같이 빠져나간 사람들 덕분에 임시로 만든 숙소도 텅텅 비었고 공사장에 밥을 하러 모인 아낙네들도 어느새 사라져 부뚜막에 연기도 올라오지 않는다. 중요한 시점에 공사가 중단되다니 안타까운 노릇이다.
반면 전문성이 필요한 목공들이 모이는 행궁 공사는 착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현대처럼 공사현장 노동자 계층이 없는 시대이니 인구가 곧 힘인 세상이라 별 방법이 없다.
박순은 인부들이 비석을 옮기자 몸을 돌리며 명령을 내렸다.
“어차피 나머지 일은 스스로 알아서 행할 것이네. 다시 인부를 소집할 때까지 여기에는 관원 몇 명만 두고 자네는 돌아가도록 하게. 나도 보고를 올리러 돌아가 보겠네.”
할 일이 없으니 돌아가라는 말이지.
산성 공사현장에 남은 이들은 기껏해야 이천 명 내외인데 종3품 관원이 버티고 있으면 밥도 마음 놓고 먹을 수 없으리라. 지금까지 보름에 한 번 집에 돌아갔는데 이번에 좀 푹 쉬고 와도 되겠다.
“중국처럼 인구가 쑥쑥 늘어나면 좋겠네. 하긴 인구가 지나치게 많으면 화전으로 인한 산림 훼손은 물론이고 사람이 지나치게 도시로 몰려 전염병이 퍼질 게 분명하니 문제기도 하지. 그래도 인구는 많이 늘어났어.”
조선시대에 대한 기록을 본 적이 있기는 한데 1590년 무렵 인구는 가장 적게 추산한 경우 500만 명, 모든 요소를 감안해도 1,100만 명에 불과하다더라. 더군다나 호구조사는 전체 인구의 40%도 반영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철저한 호구조사로 대부분의 인구를 집계한다. 인구는 8세 이상 기준으로 1,150만 명이며 모든 인구를 감안할 경우 1,400만 명이 넘는다더라.
하지만 도성으로 돌아오니 인구 증가로 인한 문제점이 보였다.
“이거 청계천 청소를 하는 거야 마는 거야?”
쉴 김에 청계천 입신체비장에 들릴까 했는데 퀴퀴한 썩은 내가 느껴졌다. 어린 시절 청계천에 방문했을 때는 퀴퀴한 냄새가 올라왔지만 여름이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십 년의 세월이 흐르자 봄날에도 퀴퀴한 냄새가 진동한다.
사람도 더 늘어 석축과 그 위에 심어진 버드나무 사이에 좌판이 생겨났다. 본래 좌판은 청계천 상인들이 엄격히 금하지만 어느새 좌판이 상설화되었으니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현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봐야지.
아버지의 손길에 이끌려 내가 난생처음 연필을 접했던 가게로 들어가자 이미 노인이 다 된 주인장이 내 얼굴을 살펴보더니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아이고 나리! 어린 시절에 자주 들리셨던 분인데 장성하셔서 찾아뵙다니 참으로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번에는 자제분의 붓을 사러 오셨습니까?”
“일단 담비 털 붓 하나면 되겠고 따로 물어볼 게 있다네. 대체 청계천에 좌판이 생긴 것이 언제부터인가? 내가 업무에 열중하느라 상점에는 사람만 보냈었는데 영문을 알 수 없군.”
“한 삼 년 전부터 이렇게 되었습죠. 명국에서 물산이 더욱 많이 들어오며 운종가도 난전도 감내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청계천의 상가가 미어터지기 직전까지 갔습니다. 결국 상인들도 이를 감당할 수 없으니 좌판을 허가하였습니다.”
“잠깐, 좌판을 허가하고 난전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라 하면 인구는 더욱 늘어났다는 것이 아닌가. 왜 호구조사에서 누락되었지?”
“그걸 제가 알 연유가 없지 않습니까…….”
집으로 향하며 하나하나 따지고 들었다.
명나라에서 더욱 많은 물건을 수입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파양군의 개발에 성공하며 무역항이 하나 늘었고 국가 수입이 증가한 것이다.
대놓고 금을 풀어도 조선의 생산량은 한계가 있다. 결국 파양군에서 얻은 소득은 조선으로 올라오며 남경 일대에서 소비되어 명나라 물건을 사들이는 데 쓰였을 것이요, 더욱 많은 물건이 수입되니 당연히 상업이 번창한다.
이미 남경 일대에서 거래되는 물품만 따져도 은자로 칠백만 냥에 육박하고 더욱 늘어났으리라. 결국 상업이 번창하고 얼마 전에 도성 확장 계획이 시작되었으니 사람이 들어설 자리도 늘어난다.
호구조사가 십 년 주기로 진행되니 허점이 생긴 것이다.
“그럼 도성 인구가 7년 전 조사한 21만이 아니고 24만은 되겠는데?”
말이 24만이지 호구조사에서 자동 누락되는 어린아이도 생각하면 27만은 되리라. 본래 역사에서 한양 인구가 30만이 넘어가자 분변이 들끓는 도시가 되었고 전염병이 몇 년 주기로 창궐했던가.
아마 한양의 내부 하천과 국가 체계가 감당할 수 없는 정도로 인구가 늘어나면 역병은 물론이요, 심한 경우 대규모 화재가 일어날 수 있으리라.
이건 단순한 도성 확장공사로 감당할 수준이 아니다. 도성을 아무리 잘 확장해 봤자 상업 발달로 몰려드는 인구를 감당할 수 없으며 오히려 인구 밀집을 가속화할 뿐이다.
결국 얼굴에 철판을 깔고 호조로 들어갔다.
“이거 서애 아닌가? 북악(북한산)에서 내려와 집으로 향해 편히 쉴 것이지 무슨 연유로 여기 왔단 말인가. 혹여나 예산이…….”
나를 보자마자 절로 질겁하는 호조판서 김귀영을 보았지만 예산 문제가 아니다.
인사를 올리고 예산 문제가 아니라 운을 띄웠다.
“다른 일이 아니고 도성의 사람들이 지나치게 몰린 것 같습니다. 올해가 기묘년(1579년)이니 내후년에 호구조사를 실시하겠지만 이미 이십일만 명을 넘어서도 한참 넘어선 것 같군요.”
“자네가 알게 되었다니 조만간 세상사람 모두가 알게 되겠지. 내가 예측하기로 도성의 호구조사를 실시하면 거의 삼십만 명에 육박할 것이네.”
30만 명? 인구가 지나치게 폭증하여 답이 없을 지경이다.
이쯤 되면 한양 주변의 시흥, 수원, 광주 그리고 김포 등의 지역을 죄다 개발해서 도시에 편입시켜야 할 수준이다.
원인이 뭘까 궁금했는데 김귀영은 이야기를 술술 털어놓았다.
“도성에 모이는 물산이 많아졌으니 사람이 늘어남은 당연한 일이지. 주상전하께서도 도성을 확장할 계획을 세우시며 이를 예측하셨는데 문제가 또 있다네. 바로 북인들일세.”
“아니, 북인들은 부유한 이들이 아닙니까? 이들이 무엇이 부족하다고 도성까지 밀려온단 말입니까? 영문을 알 수 없습니다.”
“삼 년 전부터 북방에 한파가 거세진 덕분일세. 처음에는 몇 년 주기로 지나가는 한파인 줄 알았지만 점점 거세져 농사를 망치고 가축들이 상하였다네. 대체 이 원인이 뭔지 모르겠지만 북인들은 사참(사설 역참)을 따라 도성으로 이주한 이들이 생겨났지.”
한파가 거세졌다는 말을 듣자 떠오르는 사실이 있었다. 정확한 시기는 모르지만 17세기 후반에 조선을 강타한 경신대기근과 을병대기근의 원인이 소빙하기라 알고 있다.
하지만 소빙하기의 시작은 생각보다 빨랐나 보다.
조선의 체계를 뒤흔들 수준의 혹한이 시작된다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 왔지만 따로 대책이 없었다. 기후변화는 현대에도 대처할 수 없는 재난이니까.
김귀영은 그래도 안심하라는 표정으로 말하였다.
“그래도 크게 염려하지는 말게. 한파가 길어보았자 십 년이 이어지겠나? 설령 십 년이 이어져도 도성을 확충할 계획을 더욱 늘리면 되는 일이요. 호구가 증가하면 자연스럽게 국가의 세수가 온전히 늘어나는 격이지.”
“혹여나 한파가 이십 년을 이어진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북인들 다수가 한파를 피하여 도성으로 내려올 것이며 도성의 인구가 사십만이 넘을지도 모릅니다.”
소빙하기가 아무리 짧아도 최소 백 년은 이어지리라. 이 시대의 사람들은 기껏해야 십 년 앞을 내다보는 것이 전부지만 나는 역사를 알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김귀영은 심각하게 고민하더니 답을 내놓았다.
“사민(徙民)일세. 정녕 한파가 이십 년을 이어질 것이라 확신할 수 있다면 십 년 이상의 계획을 세우고 빈 땅을 정하여 백성을 옮겨야겠지. 그게 단번에 될 일이라면 말일세.”
빈 땅이라 해도 조선 팔도는 이미 인구 1,400만을 달성해 슬슬 맬서스 트랩을 걱정해야 할 시기이다. 건축 역사를 배우며 조선이 부양 가능한 인구는 1,500만에 불과하다는 명제가 머릿속에 박혀 있었으니 내릴 수 있는 결론이다.
일단 북한산성을 쌓은 다음의 과업은 도성 주변의 도시정비이리라.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주상전하에게 인구증가의 대책을 마련하자는 장계를 올려두는 것이 전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