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367화
2부 14장 8화 북한산성
북한산을 돌아다니며 산세를 파악하고 기본 계획을 세우니 벌써 음력 8월이 되었다. 기본 설계안이 작성되자 본격적으로 예산과 규모를 편성하였으며 거대한 공사기에 나와 협업하는 이들이 도착하였다.
그리고 의외의 인물이 배정되었다.
“서애 아니시오! 상왕전하께서 명하시길 그동안의 노력을 보아 행궁(行宮) 설계를 직접 행하라 하였소. 이번에는 이전처럼 어설픈 모습은 보이지 않을 것이오!”
“진해대군 어른께서 함께하신다니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니겠습니까.”
북한산성은 대규모 변란이 발생했을 때 조정이 옮겨오는 자리이다. 당연히 궁궐 역할을 할 건물도 필요하며 부속 시설도 필요하다.
이걸 누가 담당하나 했는데 진해대군이라니.
진해대군은 지금까지 수많은 도면과 건물을 참고하여 건축에 대해 내공을 쌓았고 조정에서도 실력 하나는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며 쓸데없는 기교를 모르니 오히려 좋다고 평가하였다.
물론 종친이니 약간의 제한은 있다.
“성곽을 만들며 배우고 싶지만 종친의 몸이라 불가하다 하였소. 혹여나 변란이 발생했을 때 내가 적에게 사로잡히면 성곽의 허실(虛實)을 모조리 드러내는 꼴이 아니겠소.”
“하지만 대군어른께서는 주상전하가 기거할 행궁을 담당하시니 그보다 더한 영광이 있겠습니까. 서로 업무를 진행하며 스스로 깨우치면 될 일입니다.”
이렇게 말했지만 북한산성은 이미 천혜의 요충지이니 일이 편하다. 그냥 평범한 산성만 쌓아도 지옥 같은 지형 덕분에 엄청난 방어력이 저절로 생겨난다.
하지만 진해대군은 깨우침이라는 말을 듣자 바로 도면을 꺼내 들었다.
“일단 행궁을 계획해 보았는데 어떠시오? 무언가 부족한 점이라도 있소?”
흠잡을 곳이 없기는 하다. 궁궐의 최소 배치규정을 준수했으며 지형에 따라 꺾어서 배치하면 충분히 통할 설계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하니 남한산성이 함락당한 이유가 떠올랐다.
내가 산성 설계를 진행할 때 산성의 역사에 대해 정리하라는 공무원의 압박에 시달렸고 사전을 찾아가며 역사를 정리해 줬으니 잘 안다. 여기는 아니지만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을 겪을 당시 그놈의 식량 부족으로 함락당했다.
군량의 절반을 성 밖에 보관한 덕분에 45일분의 식량을 둘 수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모조리 적의 식량이 되었다.
당시 영직이에게 물어봤는데 퉁명스러운 답이 나왔다.
-만약 식량창고가 성안에 있어서 한 달도 아니고 보름만 더 버텼다면 지방 병력들이 집결해 후방을 노리는 바람에 방어에 성공했어. 강화도의 세자는 볼모로 잡혔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북한산성과 비교할 수 없겠지만 남한산성도 천혜의 요새이다. 이걸 오로지 식량 부족 하나로 말아먹은 꼴이니 어처구니가 없지.
나는 행궁 여기저기에 비어 있는 장소를 가리키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생각하여 보니 험준한 산세 덕분에 식량을 들여오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요. 그러니 행궁을 비롯한 시설마다 곡창을 두시어 항상 규정된 식량을 쌓아두면 좋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좋은 말이네. 만에 하나 변란이 일어나도 적도들이 산 아래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는 동안 성안에서는 배불리 먹은 병사들이 굶주린 적을 유린하겠지.”
하지만 북한산성의 설계와 요구사항이 또 하나 들어왔다. 예전 북방에 있을 때 경원부사로 재직하던 박순은 어느새 영의정이 되어 이번 북한산성 설계의 최종 책임자로 배정되었다.
업무를 총괄 진행하는 사람은 박순이요 실무자는 나이니 이건 건축주와 설계자의 관계와 흡사하다.
박순은 한창 설계를 진행하는 나를 불러와 기초 설계도를 분석하고 남에게 들리지 않게 속삭였다.
“어떠한 변고가 일어나도 아국은 이를 격퇴할 수 있다네. 만에 하나 북원과 왜인들이 모조리 결집하여 난동을 부려도 도성에서 난전을 벌일 정도로 밀리지는 않겠지.”
“북원은 하르빈을 넘어서기 힘들며 우회하여도 의주 일대를 뚫지 못하겠지요. 왜인들이야 구주를 병탄하여도 달구벌(대구)까지 진격하는 것이 한계겠지요.”
“하지만 자네가 놓친 사실이 있다네. 혹여나 반정(反正: 쿠데타)이 일어나면 어찌하겠나. 애초에 일어나서는 아니 될 일이지만 삿된 마음을 품은 이가 반정을 주도한다면?”
머리가 좋다면서 그건 생각 못 했네! 하긴 이 조선 역사에서 반정이니 민란이니 하는 단어는 이전 국가인 고려 말기에나 벌어진 비상식적인 상황으로 인식된다.
박순은 여기에 쐐기를 박았다.
“아마 반정이 일어나면 모든 일을 신속히 처리하려 할 것이네. 보름이면 도성 주변에 배치된 오위 병사들이 몰려들 것이니 화포를 움직일 틈도 없으니 머릿수를 앞세워 공격에 나서겠지.”
이거 의외로 막기 까다롭다. 정보가 온전하지 않은 변란 초기에 주상전하가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이들은 내금위 병력이 전부일 거다.
하지만 이들과 북한산성에 들어와도 문제이다.
적의 수가 많으면 소수의 내금위 병력을 분산해도 한계가 명확하다. 아무리 평범한 자라도 특별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머릿수를 앞세워 관문을 뚫어낼 수 있으니까.
박순은 내 표정을 보더니 도면을 지목하며 말을 이어갔다.
“자네가 설계한 성벽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네. 하지만 열여섯 개의 성문 가운데 여섯 개는 적이 드나들기도 좋고 특별한 대책이 없으니 문제지.”
“그러하면 네 개의 대문과 중문 그리고 궁궐에서 즉각 피난할 수 있는 대성문(大成門)만큼은 한 명이 열 명을 능히 상대할 수 있는 관문으로 설계하라는 말씀이시군요.”
“바로 그거라네. 자네에게 너무 무리한 부탁을 하는 것 같아 미안한 일이네만 문루만 두어서는 지극히 평범하여 오히려 문제가 생기지 않겠는가. 조금 고안해 줄 수 있겠나?”
성문을 강화할 방법은 차고 넘치지만 영의정의 자리에 있으면서 수많은 서적을 탐독했을 박순이 이 사실을 모르는 것이 이상했다.
하지만 돌아가서 가만 생각해 보니 이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 시대에는 현대처럼 체계적인 고고학이 없잖아?”
조선시대의 산성은 엄밀히 말하면 삼국시대 산성을 재활용하여 만든 축소판이다. 틈만 나면 전쟁을 벌이고 서로 혼신의 힘을 다하여 병력을 동원한 삼국시대는 정말 살벌한 성을 많이 쌓아뒀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사람들은 고고학적 지식이 없으니 이런 지식을 알지 못한다.
수양대군의 아들인 도원군 이장이 금석학과 고고학의 기초를 만들었지만 시대의 한계로 발굴조사는 몇몇 건물터에만 해둔 것이 전부였다.
결국 이 시대의 산성은 그냥 주변의 돌을 적당히 높이 쌓고 화포를 쏘는 포루(砲樓)와 장대(將臺: 장수 지휘대)를 축조한 것이 전부이다. 하지만 나는 현대인이다.
고고학이 발달한 현대에는 땅속에 묻혀 있던 삼국시대 산성을 거의 완벽하게 복원하였으며 나는 복원도를 기억하고 있다.
물론 내 창작물이라 할 수 없으니 근거는 필요하겠지.
* * *
삼국시대의 산성 가운데 가장 끔찍한 녀석은 신라가 만든 충북 보은에 있는 삼년산성이고 지금은 오정산성으로 불리는 녀석이다. 150회의 전투 가운데 함락당한 경우는 반란군이 성을 점령했을 때 단 한 번이 전부라더라.
기본적인 산성 설계를 일임하고 나와 진해대군은 배울 것이 있다며 충북 보은으로 향했다. 하지만 진해대군은 험하지 않은 산세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전조도 아니고 전조가 만들어지기 한참 전인 천 년 전의 요새를 찾아 대체 뭘 배우려 하는 것이오. 당시에는 화포도 없으니 성을 대충 쌓지 않았겠소. 더군다나 산세를 보면 일만 정도의 병력이 이틀 이내에 몰아칠 수 있겠구려.”
수양대군의 아들 도원군도 많은 조사를 하였지만 지금 방문하는 삼년산성에 대한 언급은 ‘옛적에 요충지로 쓰여 성의 흔적이 남아 있고 이를 현재도 사용한다’가 전부이다.
삼년산성은 온갖 산세를 끼고 만드는 다른 산성들과 비교하자면 접근성이 너무 좋다. 기껏해야 숲을 한 시간 걸으면 되는 한적한 장소이니 마실 나오듯 병력을 동원할 수 있다 여기리라.
“왕태조(태조 왕건)조차 이 성에서 크게 패한 기록이 있으니 이곳을 배우면 남한산성을 축조할 적에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나도 역사를 알고는 있소이다. 당시에는 도적 견훤(견훤의 평가는 조선시대에 도적 우두머리 수준이었다)놈의 기세가 성하였기에 패하지 않았겠소.”
삼국시대에 축성한 수비기술의 정수는 땅속에 묻혀 있고 겉에 드러난 돌을 다시 쌓아둔 어설픈 녀석이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산성까지 도착하자 진해대군은 허리를 쭉 펴더니 산세를 바라보았다.
“생각하여 보니 요충지이긴 하구려. 남동 방향으로는 상주와. 북방으로는 청주와 면해 있으니 아홉 개의 대로(조선에서 중점 관리하는 9개의 간선도로) 가운데 두 개에 관여할 수 있소.”
“옛적에는 옛 고려(고구려)와 백제를 막아낸 장소이니 의미가 더욱 컸을 것입니다. 산성이 제법 온전히 정비되어 있으나 기록과 견주면 온전하지 못합니다.”
순찰 도는 경비병들은 웬 높으신 분들이 와서 바짝 긴장해 있는데 앞으로 긴장할 일이 아니고 힘 좀 쓸 일이 남아 있으니 돼지나 한 마리 잡아서 먹어야겠다.
둘러보니 현대에 복원한 것보다 형편없이 작은 성이다.
둘레는 대충 맞춰두었는데 높이는 3m 내외에 두께는 2m 정도로 구색만 갖춰둔 상태이다.
그래도 산성에 꼭 필요한 연못과 우물은 깔끔하게 정비해 두었으며 미리 만들어둔 곡창에는 비상시에 식량으로 사용할 보리나 좁쌀 더미가 있었고 둔전(屯田)도 제법 크게 있었다.
“이거 감자를 기르고 있었나? 감자에 순무를 기르다니 이런 생각은 누가 했는가?”
“산성에 감자 씨를 뿌려두고 몇 년이 지나면 알아서 번성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따라 해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효험이 좋더군요. 이제는 험한 땅에는 모두 감자를 심습니다.”
예전에 감자 씨앗을 산성에 뿌린 적이 있었는데 어느새 험준한 땅만 보이면 감자를 심어대니 참 좋은 일이다. 일단 야트막한 산성 주변을 돌아보니 발굴할 거리가 차고 넘쳤다.
나는 성벽의 돌을 가리키며 결을 쓰다듬고는 말하였다.
“대군 어른께서는 이 두 석재의 차이점을 아시겠습니까?”
“색이 조금 다른…… 수준이 아니고 결이 아예 다르구려. 색이 다르면 비바람에 삭아 변한 것이지만 결이 다르다니 이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오.”
“제가 보기에는 산성이 지나치게 거대한 덕분에 모든 석물이 바닥나 외부에서 석재를 들여온 것이 분명합니다.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지만 이 둔덕이 아마 옛 성벽의 흔적이겠지요.”
“이 둔덕 전체가 옛 성벽의 흔적이란 말이오? 농담이 지나치시구려.”
병사들도 내 말을 듣고 믿지 못하겠다고 했지만 믿게 만들 방법이 있었다. 미리 준비한 삽을 하나씩 건네주고 땅을 파내라는 명령을 내리자 병사들은 앓는 소리를 내며 땅을 파고들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작업은 저녁이 되어도 끝날 줄을 몰랐다. 땅을 팔 때마다 삼년산성을 구성하던 돌이 끝없이 튀어나오니 기초에 닿지도 못하고 예전에 무너진 유구(遺構: 잔존물)를 건드리기만 하였다.
“사람이 쌓은 성 맞습니까? 이렇게 많은 석재라면 높이를 스무 자, 아니 서른 자(10.4m)는 쌓고도 남을 겁니다. 너무 큰지라 언덕으로 여겼는데 속이 석재일 줄은 몰랐습니다.”
“대체 화포를 사용하지도 않는 시대에 이런 거대한 성을 쌓아서 뭐에 쓴단 말입니까?”
화약병기도 없는 시대에 거대한 성을 쌓아서 뭐에 쓰냐고? 그런 성을 쌓지 않으면 파상공세로 전선이 쭉쭉 밀려 나가는 시대니까 살벌한 성을 쌓았지.
진해대군은 발굴된 석재를 만져보더니 네모반듯하게 가공한 모습을 보고 모두 정으로 쪼아 만든 녀석임을 확인했다.
조선시대에는 자연석을 대충 쳐내지만 삼국시대는 이런 가공이 필수적으로 들어가니 신기한 노릇이겠지.
“믿기지 않소. 그저 옛 성의 흔적이라 비루하게 여겼거늘 배울 것이 차고 넘치구려. 도원군의 서적을 보니 옛 글귀가 남아 있다 하였는데 이럴 줄은 몰랐소.”
“제가 짐작하건대 오정산성에 소모된 돌은 적게 잡아도 오백만 개가 넘을 것이고 잘하면 그 두 배가 넘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성이니 배울 것이 차고 넘치지 않겠습니까.”
진해대군은 배울 것이 넘쳐나고 나는 근거자료로 삼을 게 충분하지.
진해대군도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동의하였고 발굴 작업을 즉각 진행하였다.
보은 관아에 연락해 장정들을 소집하였고 늦가을에 일거리가 생긴 장정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동네 뒷산으로 여기던 삼년산성의 터로 몰려와 땅을 파헤쳤다.
가장 먼저 발굴한 장소는 내가 다녀온 적이 있는 서문, 즉 정문이다.
조선시대는 그냥 산세에 따라 성을 쌓으니 지금 정문자리에는 성벽이 있었고 진짜 정문은 서쪽 계곡의 경사면에서 튀어나왔다. 내가 엉뚱한 장소를 파라 지시한 것 같았지만 다 생각이 있어서다.
가파른 비탈에서 문확석(문을 설치하는 구멍이 있는 돌)이 튀어나왔다. 상식과 어긋나는 일이기에 진해대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질문을 퍼부었다.
“왜 이런 험준한 장소에 문을 만든 것이오? 자고로 성문을 만들 때에는 통하기 편한 계곡 정중앙에 만들어야지 왜 사면(斜面: 비탈) 귀퉁이에 만들었는지 알고 있소?”
“통하기 편하다는 말은 적이 침입하기도 편하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더군다나 저 남쪽과 북쪽에 있는 치성(雉城)이 시야를 막으니 적은 여기를 성문이 아니라 여겨 돌아갔을 겁니다.”
모든 장소를 발굴조사 할 수 없으니 각 대문을 발굴하였다.
하나같이 천 년 전 신라의 모든 기술력이 결집한 설계인지라 공격자 입장에서는 더럽다 못해 끔찍한 수비 체계가 드러났다.
보름이 지나 마지막 남문 발굴이 한창인데 진해대군은 이치와 맞지 않는 현장 상황을 보고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널린 돌과 흙을 확인하였다.
“여긴 대체 뭐요? 문확석이 나왔는데 왜 쌓였던 흙이 계속 나오는 거요? 대체 생땅(파헤쳐진 적이 없는 자연스러운 퇴적층)이 얼마나 깊이 있는지 모르겠구려.”
발굴조사의 기본은 다른 색상의 지층이 나올 때까지 땅을 파내야 한다. 지금 마지막으로 발굴하는 남문의 경우에는 성벽 유구가 모조리 드러났음에도 생땅이 나오지 않았다.
문확석의 아래로 계속 땅을 파내며 돌을 걷어내자 마침내 생땅이 나왔다. 문확석의 위치보다 열두 자(4.16m)나 낮은 장소에서 땅이 튀어나오자 진해대군은 아예 비명을 질렀다.
“옛 신라 사람들은 성에 창문을 뚫어두는 풍습이라도 있었던 거요? 여기를 어떻게 드나들라는 말이오! 이런 성이면 화포로 쏘아도 한 달은 걸리겠소!”
“저도 기록으로만 알아보았는데 직접 볼 줄은 몰랐습니다. 현문(懸門)이라 하여 허공에 매달린 문을 사용했다 했는데 과장이 있을 줄 알았지요.”
“여기를 공격하려면 수많은 병졸이 공성용 무기 대신 흙을 쌓아 올리고 자신들의 시체도 겹쳐 쌓아야 할 것이오. 이러한 성이니 왕태조가 고전할 법하였구려.”
조선시대에는 동네 뒷산이라 여긴 삼년산성의 실체가 온전히 드러났다. 정문은 계곡 사이에 숨어 있고 동문은 보조 성벽을 돌아가며 화살받이 신세가 된다.
북문은 성문을 뚫어도 바로 호수가 튀어나와 애초에 뚫는 의미가 없으며 남문은 성문이 최소 3m 높이에 매달려 있어서 성문을 뚫어도 공성전의 연장이 될 뿐이다.
근거자료가 차고 넘치게 쌓였으니 이걸 북한산성 각 문 설계에 적용하면 충분하리라. 생각해 보니 나는 근거자료만 수집했지 여기서 제대로 배운 사람은 진해대군이다.
큐슈에 성형요새를 만들 때 진해대군을 외부 보조 요새 건축에 투입하면 쓸 만하지 않을까.
나 홀로 모든 요새를 만들 생각은 없으니 진해대군도 좀 물귀신처럼 끌고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