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366화
2부 14장 7화 변란의 조짐
공사에 들어갈 북한산성의 설계안과 아직 미완의 서적인 수성전수방략을 집필하며 한창 설계에 몰두했지만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왜 큐슈에 성형요새가 필요한지 궁금하였는데 이조판서로 재직 중인 이이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요즘 들어 명국은 물론이요, 왜도 갈피를 잡기 힘들 지경이라네. 도저히 예상하지 못한 변고가 발생하여 계획이 엉망이 되고 말았지.”
“예상하지 못한 변고라 하셨습니까?”
“아국이 왜에 세력을 보내기 위한 통로인 대내씨(오우치)는 문제가 없지만 상삼씨(우에스기)가 문제라네. 아국과 척을 진 무전(다케다) 가문을 억제하기 위해 일전을 벌이려 하였지만 전투를 앞두고 가주인 상삼겸신(우에스기 겐신)이 명을 달리했다네.”
“전투를 앞두고 상삼겸신이 명을 달리했다니요. 그는 아국의 뜻을 따르는 자라 이미 몇 년 전부터 어의를 파견하여 몸을 관리한다고 들었는데 정녕 급사하였습니까?”
이이가 고개를 끄덕였는데 너무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닌가.
파견된 사람의 이름도 알고 있는데 보통 의원도 아니고 내가 아는 내의원 어의인 구암(龜巖) 허준이다.
일본은 조선이 간접적으로 개입하면 이를 따르지만 직접적으로 개입하면 모든 세력이 한 몸이 되어 반발하기에 간접적으로 세력 균형을 유지하며 이득을 챙기고 있었다.
이 핵심 과정은 영주 간의 세력 균형 유지이다.
지나치게 강대한 영주가 생기면 반대 영주에게 무기와 자금을 지원해 억제하고 간혹 약간의 호위병을 파견하여 ‘사신 호위’라는 명목으로 지나치게 밀리지 않게 보조한다.
솔직히 말해 일본이 미쳐서 쳐들어와도 조선의 전력이면 느긋하게 격퇴할 수 있지만 우리가 공격하면 끝없는 저항에 시달리며 어마어마한 손해를 보리라.
결국 먼저 공격하는 손해가 크니 방치하고 전쟁 상황을 유지하며 이득을 챙기고 있지.
이이는 내 말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답하였다.
“어의가 파견되면 무엇을 하나? 육식을 행하고 짠 음식을 줄이며 독주를 절제하라 하였는데 상삼겸신은 이 일을 하나도 지키지 않았네. 어의 앞에서는 절제하다 주연을 벌이면 짜디짠 매실 절임을 안주로 삼아 술을 들이켰다 하더군.”
짜디짠 매실 절임이면 우메보시인가 뭔가 하는 소금에 가까운 절임이고, 이걸 술과 함께 먹어댔다면 어마어마한 염분섭취로 고혈압과 심장질환과 단백질 부족으로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이다.
여기에 전쟁으로 인한 스트레스까지 겹친다면?
“양 군이 대치 중인 틈을 타 뒷간에 들어갔다가 변을 당했네. 반 시진이나 나오지 않기에 시종이 찾아갔는데 토사물이 기도를 막아 숨을 거두었네. 하필 적장인 목하 등길량(木下 藤吉郞: 키노시타 토키치로)이 여기에 쐐기를 박았지.”
“목하 등길량이 대체 뭔 일을 저지른 겁니까?”
“돌진하며 외치길 상삼겸신은 한 달 전에 죽었고 지금 있는 자는 가짜이니 승산이 없다 하였지. 사태를 수습할 수 없으니 전열이 깔끔하게 밀려 나갔고 전투는 패전하였다네. 손해는 크지 않지만 세력이 분열하였지.”
전후 관계를 모르니 답답하다. 내가 만들어둔 인맥인 고니시에게 서신이라도 보내서 대체 목하 등길량이 뭔 생각으로 자살에 가까운 돌격을 했는지 물어봐야겠다.
그나저나 허준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구암 그 친구와 인연이 있는데 혹여나 분노한 상삼씨의 부하들이 주군의 죽음과 이로 인한 패전의 책임을 묻지는 않았습니까?”
“묻기는 했지만 상삼씨의 목을 막은 토사물에서 매실 절임 조각이 계속 나오고 주향(酒香)이 진동하기에 오히려 제장들의 뺨을 치고 호통을 쳐댔다네. 그나마 다행이 아닌가.”
의원이 내린 처방을 무시하였으니 이는 무시한 환자의 책임이지.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에 고개를 끄덕거렸는데 이이는 또 답답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안 좋은 소식이 또 있다네. 명국 황상이 아국이 남대주 일대의 불순한 이들을 토벌하라는 요청을 듣고 오히려 보선함대를 파견하여 불순한 이들을 엄히 다스릴 것이라 하였네.”
“보선함대를 남대주에 파견한다 하셨습니까? 그 비용은 누가 댑니까?”
“남대주의 호족들이 지불한다 하였으니 참 우스운 일이지. 어차피 바다 위에 머무는 함대가 아국에서 파견한 임해도감 병사들을 알아차릴 방법도 없으니 남대주는 보선함대를 지원하다 등골이 빠져나갈 걸세.”
만력제가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있었다. 만력제의 나이는 고등학생이니 내가 한때 그러하였듯 그렇고 그런 내용이 담긴 CD를 안 보이는데 숨겨두는 학생 같은 태도를 취한 것이다.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장거정은 역적으로 몰려 부관참시를 당하였고 그가 쌓아온 부정부패가 하나씩 드러나고 있지만 자신이 어린 시절 명령해 만든 보선 함대의 진상을 파악할 용기는 없었나 보다.
결국 머나먼 열대 바다의 파도와 폭풍에 시달린 보선함대는 몇 년이 지나기도 전에 천천히 붕괴하며 막대한 손실을 불러오리라.
명나라가 쓸데없는 짓거리에 힘을 쓰며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는데 일본의 정세도 불안하다.
차라리 전쟁이라도 벌어져서 보선함대가 모조리 불타 버리면 좋으련만!
* * *
조선에서 돌아간 신성로마제국의 사절단은 동남아시아와 인도, 그리고 아프리카를 거쳐 지브롤터 해협에 도착하였다. 머나먼 동방에 성경을 번역하러 떠났다 돌아온 이를 환대한 자는 스페인의 군주 펠리페 2세였다.
1578년 10월, 마드리드의 궁정에서 수많은 서류의 산더미에 박혀 있던 펠리페 2세는 간만에 열린 연회에 참가하여 조선에서 가져온 귀한 술을 따내 유리잔에 부었다.
약재의 냄새가 진동하는 와중에 펠리페 2세는 기쁜 얼굴로 연회의 시작을 알렸다.
“조선은 주님의 가르침을 정말 가르침으로 받아들였다는 말인가? 믿음을 학문으로 여기는 나라라니 참으로 신비한 일이군.”
“저도 종잡을 수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위대한 학자로 받아들이고 가르침을 해석하여 여기서 배울 점을 찾아나가는 방식을 택하였습니다. 여전히 선교는 거부하였습니다.”
“참으로 특이한 나라이군. 하지만 마드리드 시장의 아들인 그레고리오 신부가 여전히 조선의 풍습을 배우고 있으니 조만간 조선에서도 주님의 가르침이 퍼질 것이네.”
조선에서 들여온 독한 소주를 들이켠 펠리페 2세는 자신이 가장 관심을 가지는 항목에 대해 운을 띄웠다.
“자네 하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조선의 군사 훈련을 직접 보았다 하더군. 조선이 얼마나 강한가? 혹여나 동양식 머스킷의 실체는 확인해 보았는가?”
“동양식 머스킷은 보통 머스킷 열 정 중 한 정만 사용한다는 정보만 입수했지요. 저희가 참관한 훈련은 왕성 수비병(내금위)의 기동 훈련과 신형 화포 훈련 두 개입니다. 왕성 수비병이야 몰타 기사단과 견줄 수 있는 강대한 병사이라 이해할 수 있지만 신형 화포는 참으로 끔찍한 녀석이었습니다.”
설명이 이어지자 펠리페 2세의 당뇨병과 피로로 얼룩진 눈이 가늘게 좁혀들며 주변 스페인 관료들의 안색도 창백해졌다.
유럽의 패권국과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스페인 입장에서도 조선의 전력은 전혀 얕잡아볼 수 없었다.
영국에서 만들었다 포기한 캐논 로열을 장착한 신형 전선의 이야기부터 해안요새에나 배치되는 바실리스크 포(basilisk)보다 거대한 화포를 양산한다는 이야기까지.
펠리페 2세는 이 말을 듣고 잔을 내려다보며 말을 흘렸다.
“우리가 쓰는 화포보다 위력이 오 할은 강한 화포를 함선에 사용한다 했는가? 물론 화포의 화력이 강하다고 전쟁에서 이기는 법은 없다네. 그 정도면 육 인치 화포(데미 캐논)로도 대응할 수 있지.”
“하지만 그걸 감당할 신형 전선도 건조할 것이며 이미 조선은 동맹인 솔로몬을 통해 갤리온을 입수하였습니다. 혹여나 조선과 싸울 일이 생긴다면 소규모 전투는 몰라도 아르마다(Armada - 함대) 규모의 결전은 피하십시오.”
“혹여나 조선이 예수회 신부를 죽이고 우리 함대를 불태웠다면 원정대를 보낼 이유라도 되겠지만 조선은 그런 이교도가 아닐세. 복자 하비에르(프란체스코 하비에르)조차도 돌려보낸 나라가 아닌가.”
예수회 신부를 죽이고 함대를 불태웠다는 말에 관료들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펠리페 2세는 조선에서 가져온 술을 완전히 비우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조만간 조선이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당당한 가톨릭 국가를 선포하고 추기경을 선출할 정도로 교세가 커진다면 머나먼 동방의 빛이 되어 기세를 올리는 위그노(개신교)를 억제할 수단이 되리라.
며칠 동안 이어진 연회가 끝나고 펠리페 2세는 다시 정무에 몰두하였다.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전해진 서류를 본 그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궁정백(宮庭伯)에게 서류를 돌려주었다.
“얼마 전에 세바스티안(세바스티안 1세, 펠리페 2세의 조카이자 포르투갈 왕)의 사망을 선언하였다던데 후계자가 없으니 엔히크 추기경이 왕위에 올랐다고?”
“다급히 환속(還俗)을 마치고 귀국하여 추기경의 자리에 올랐다 합니다. 더군다나 엔히크는 신실한 자인지라 양자를 들이지도 않았고 사생아도 없습니다.”
“엔히크의 나이가 올해 66세였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명을 달리할 거고 그럼 내가 포르투갈의 왕위를 주장할 수 있겠군.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막대한 이득이 생기겠나.”
동양이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대소신료들이 들고일어날 말이지만, 합스부르크와 혼인동맹을 맺으며 근친혼을 불사하는 권력의 화신이 가득한 서양에서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엔히크가 언제 급사할지 모르니 미리 준비한 사람으로 리스본의 여론을 뒤흔들어 놓도록. 내가 포르투갈의 왕위를 얻더라도 반박하는 이가 없어야 하지 않겠나.”
한동안 서류를 확인하고 업무를 진행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던 펠리페 2세의 눈이 가늘어지며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물들었다. 온갖 사소한 업무를 담당하는 그가 확인한 서류는 유언장이자 청원서였다.
“베드로 신부가…… 카스티야의 빛나는 별이라 칭송받던 베드로 신부가 숨을 거두었다고?”
파양군에서 사고를 당한 베드로 신부는 당시에는 멀쩡하였지만 한 달이 지나 갑자기 숨을 거두었다.
탈출 당시 익사 직전까지 몰렸기에 폐가 손상되었으며 이 폐는 한 달이 지나자 급작스러운 폐렴을 일으켰다.
고열과 혼수에 시달리는 베드로 신부의 유언은 이교도의 습격을 당하여 자신이 명을 달리하였으니 고국에 묻어달라는 말과 조선에서 습득한 영회(시멘트)의 제조법이었다.
하지만 펠리페 2세의 눈에는 영회 제조법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감히 모로 놈들이! 우리의 선단을 침범한 것만으로도 모조리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이교도들이 예수회 신부의 목숨을 앗아가다니! 당장 귀족들을 소집하라!”
한 달 전에 보고를 들었을 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선박이야 늘 손실되는 법이라 딱히 분노하지도 않았고 조선은 바다로 가라앉은 인삼 값을 보상해 주며 후한 인심을 보여줬다.
조치로 모로(moro: 동남아 이슬람교도)인의 습격을 대비하라는 명령서만 보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가톨릭 신앙에 대한 극단적 집착과 스페인 특유의 광신(狂信)이 결합된 펠리페 2세의 분노는 누구도 말릴 사람이 없었다.
“조선의 영향권인 남대주에 있는 모로인들이 예수회의 베드로 신부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이 참담한 신성모독을 기껏해야 사고로 여길 것인가!”
유럽 전체에서 가장 경건한 기사도의 군주이며 가톨릭의 수호자라 칭송받는 펠리페 2세의 진노와 대면한 궁중 귀족들은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가 침묵하자 펠리페 2세는 한숨을 내쉬며 재정관을 지목하였다.
“모든 모로인이 아닌 조선의 영향권인 여송도의 남대주 남부에 있는 모로인을 대상으로 원정을 한다면 얼마나 많은 자금이 소모되겠는가.”
이미 3년 전인 1575년 파산을 선언했다 신대륙에서 들어온 금으로 가까스로 채권자의 마음을 돌린 전적이 있는 재정관은 손을 덜덜 떨며 계산을 시작하였다.
이윽고 이 원정을 중단할 법한 거금이 입에서 새어 나왔다.
“순수 원정 예산은 일백만 두카트(약 은자 230만 냥)에 달합니다. 더군다나 원정에 참가하는 함선이 무역을 중단하며 생길 손실을 감안하면 총 손해액은 일백오십만 두카트입니다.”
“채권자를 부르고 예산을 편성하라. 신성모독에 대한 응징이 일백만 두카트에 불과하다니 이 얼마나 값싸단 말인가.”
기껏해야 육십만 두카트에 불과한 예산을 부풀린 결과물은 더욱 대규모의 원정이었다.
이미 여러 번의 전쟁을 실시한 펠리페 2세는 일백만 두카트로 편성할 수 있는 병사를 생각하더니 손뼉을 치며 시종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번 원정의 사령관으로 왕립해병대 소령인 로베르토 우리엘 레예스를 임명하겠다.”
그는 조선으로 따지면 내금위의 호군(護軍: 정4품)에 해당되며 권력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는 이였다. 잠시 뒤 갑옷이 철컹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관자놀이부터 턱 끝까지 흉측한 흉터가 새겨진 로베르토 우리엘 레예스가 무릎을 꿇었다.
“전하가 신을 부르시다니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옵나이다. 대체 어느 불신자가 전하의 기휘(忌諱)를 범하였나이까?”
“모로 놈들이 상선을 털어대는 것도 모자라 예수회의 신부 베드로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이 일에 대한 징벌을 자네에게 일임할 것이니 지금부터 내리는 명령을 수행하도록!”
로베르토 레예스는 인간 백정이자 이슬람을 학살하는 것이 인생의 낙인 사람의 탈을 쓴 괴물이었다.
그는 아라곤 출신으로 젊은 시절 테르시오에 복무하였으며 훗날 몰타 기사단으로 이적하여 다시 전쟁에 참가한 인물이다.
1565년 벌어진 몰타 섬 공방전에도 참전하여 열다섯 명의 예니체리를 철퇴로 때려죽인 위업을 세운 자이다.
이로 인해 외경에 나오는 천사인 우리엘의 이름을 가운데 이름으로 받은 그는 훗날 레판토 해전에도 참전하여 용맹을 떨쳤다.
그러한 자가 원정을 담당하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신료들이 암담한 현실에 고개를 싸매는 가운데 로베르토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무릎을 꿇었다.
“신의 온 몸이 전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하여 존재하나이다. 이러한 크나큰 영광을 내려주시니 제가 몰타 섬에 있던 젊은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 같사옵니다!”
“그러하면 내 뜻을 따르도록 하라. 주님의 종을 죽음으로 몰고 간 여송의 남대주(민다나오 섬)에 사는 모로 놈들을 자네의 뜻대로 처분하라.”
“그러하면 모로 놈들을 돕는 이단자들은 어찌해야 하옵니까?”
스페인은 이슬람을 비롯한 이교도를 대할 때 자신과 적대하면 모조리 말살하고 자신과 우호적이면 한편으로 받아들여 선교 대상으로 삼는다.
하지만 여송의 남대주는 조선의 영향권 안에 있으니 잘못하면 조선과의 전면전을 벌일 수도 있다.
펠리페 2세는 강대한 조선과 싸울 마음이 없었으니 조건을 추가하였다.
“모조리 죽이되 각종 이문(利文)과 얽힌 조선군이 덤비면 가급적 피하라. 조선은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려 하니 목숨이 위태로울 때에 도주하기 위하여 싸우면 족하다.”
“조선이 정녕 그러한 나라입니까? 머나먼 동방에 주님의 가르침이 퍼질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러하면 조선에 대해서는 철저히 교전을 피하고 형제로 대우하도록 하겠사옵니다.”
로베르토는 레판토 해전에도 참전하였으니 둘째가라면 서러울 전략가이니 이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 하지만 이 영광스러운 성전(聖戰)에 어울리는 위엄이 있어야 하리라.
펠리페 2세는 생각을 정리하더니 재정관에게 다시 질문을 하였다.
“그러고 보니 함대의 기함이 필요하군. 포르투갈의 조선소에서 한창 건조 중인 산 마르티오(São Martinho)를 징발할 것이다. 다만 덮어놓고 징발할 수 없으니 인부와 자금을 보내 건함을 촉구하라.”
산 마르티오는 세바스티안 1세가 건함을 명령한 배수량 1,000톤급 초거대 함선이다. 가뜩이나 재정 적자인 포르투갈은 약간의 돈을 받고 이 함선을 빌려줄 것이니 큰 문제는 없으리라.
펠리페 2세는 예산을 가늠하더니 상세한 명령을 하달하였다.
“기타 함대의 편성은 대형함(600톤급) 5척과 중형함(300톤급) 7척 그리고 현지에서 합류하는 사략선(私掠船)으로 자유 편성한다. 산 마르티오는 1580년에 완성될 것이니 로베르토 자네는 그동안 용맹한 병사들을 소집하라.”
“급료만 충분하다면 레판토 해전을 경험한 이들을 소집할 수 있을 것이옵나이다.”
“급료는 대위(colonel) 기준 오십 두카트를 먼저 지급할 것이며 소집할 인원은 이천 명이다. 약탈품에 대한 분배는 모두 자유로이 나눌 것이니 염려하지 말도록.”
함대 규모만 스페인 전체 군함의 1/7에 달하는 원정대가 편성되었다.
펠리페 2세도 예산을 축소하려 하였지만 차라리 큰 원정대를 꾸리면 인근의 모로인을 일소(一掃)하는 위업을 동방에 떨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잘만 하면 골칫거리를 소탕한 업적으로 조선과 협상을 열 수 있을 것이요, 아직까지 조선의 압박으로 만들 엄두조차 나지 않는, 본래 역사에서 자신의 이름을 따 식민지로 만든 필리핀을 뒤늦게 개척할 수 있으리라.
#작가의 말
스페인이 은자 230만 냥을 투자해 보내는 원정대의 전력은 조선의 최대 규모 함대인 경기수영과 이들과 교대하며 근무하는 대양도수영보다 부족합니다.
현지에서 징발한 사략선을 감안하면 대등해지지만 사략선은 해적들과 비슷하게 승산이 있을 때만 참전하는 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