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365화
2부 14장 6화 천직(2)
위력을 보니 시험용 성벽이라 두께는 6자(2.1m)이지만 요충지에나 설치하는 두께 5m의 성벽도 상당한 타격을 입으리라.
김지는 포탄을 쏘아낸 광철포, 아니, 광철이를 쓰다듬으며 펄쩍펄쩍 뛰어댔다.
“역시! 역시야! 두께 여섯 자의 성벽을 단번에 무너뜨렸으니 천하제일관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자네도 보았지? 자네가 어떤 성벽을 가져오든 간에 광철이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라고!”
틀렸다, 김지는 이미 화력에 취해 현실과 예산을 왜곡하는 폭탄마가 되었다.
말이 서른 문이지 여유분까지 감안해서 대량생산하고 발사하는 비용을 따지면 나라가 파산할 지경이다!
한 정을 만드는 데 드는 청동이 9,000근이라 했으니 가공비와 기타 경비를 따지면 한 문 당 가격이 은자 1,500냥쯤 할 것이다. 이것만 해도 정신이 아득한데 문제는 또 있다.
충격이 너무 커서 튼튼하게 만든 포가(砲架)가 일그러지고 바퀴가 지면에 쑤셔 박혔다.
군기시에 파견된 화기도감 출신 병사들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화포를 정비하다 인력으로는 불가능해 황소 수십 마리를 데려와 화포를 재정비하지 않는가.
“포가(砲架)가 일그러지고 충격과 무게로 화포가 바닥을 파고들 지경이 아닙니까. 화약을 정량으로 쏘면 이백 냥이나 드니 이 화포는 백상(白象: 흰 코끼리, 귀하지만 어마어마한 재물을 소모함)과 유사한 녀석이군요.”
“화포를 더 크게 만들고 포가도 아예 철로 벼려 만들면 될 일이지. 수성에서야 암반을 정해 배치하면 될 일이고 공성전에선 터를 잡고 회령군께서 만드신 영회(시멘트)를 바닥에 타설하고 올리면 될 일이야.”
물론 저런 화포가 있으면 나쁘지 않다.
소수만 생산해서 해안요새를 비롯한 각 요충지에 배치하여 몰려오는 적의 함선이나 공성병기를 쏘면 되니까. 간혹 대규모 전역(戰域)이 발생하면 옮겨와서 사용하면 되리라.
하지만 광철포를 지나치게 많이 만들면 다른 화포를 만들 비용이 줄어든다. 김지는 피를 토하며 광철포의 양산을 주장할 게 분명하니 수십 발을 쏘아도 흠집 하나 나지 않는 성을 만들어 현실을 알게 하면 되리라.
그리고 내 자존심도 일그러졌다!
“저도 생각에만 둔 새로운 축조 방식이 있으니 두 달 뒤에 대결을 이어갑시다. 자헌 어르신은 광철포의 포가를 다시 만드시고 혹여나 이 두 화포를 배 위에서 올려 쏠 수 있는지 확인하여 주십시오.”
“배 위라. 애초에 선박 위에서 사용하지 못할 물건이라 생각했는데 시험은 한번 행해보아야 마음이 후련하겠어. 그럼 두 달 뒤에 보도록 하지.”
처음에는 서로 기술을 주고받으며 훈훈하게 끝내려 하였던 대결이지만 나도 넋 놓고 있다 질 생각은 없다. 이 년간 개발한 비상식적인 대포로 요새를 무너뜨렸다면 비상식적인 성형요새로 대포를 버티면 이 대결에서 이기리라.
문제는 내 경험 미숙이다.
학부생 시절에 성형요새의 모형 및 배치도와 부분 단면도를 만들어 보았지만 현대에 작성한 도면이라 실전적 기능이 상당히 빠져 있으리라.
“내가 만든 단면 모형에는 전면 제방, 해자 그리고 내부 성벽 단 세 개만 있었는데 이걸로는 부족하단 말이지.”
연말부터 북한산성 설계에 참가해야 하니 시간이 촉박하다. 이 시간을 어떻게 벌어야 하나 고민하는데 성형요새의 본고장은 이탈리아이다.
르네상스의 본고장이자 수많은 영지가 분쟁을 벌인 지역이니 그 경험은 막대하겠지. 내가 아는 이론과 이탈리아 사람의 경험을 합친다면?
성경 번역작업도 거의 다 끝나 돌아갈 날만 기다리는 알치드 데 상갈로에게 달려가니 그는 내가 그린 도면을 보고 적지 않게 놀라며 살펴보더니 답하였다.
“미켈란젤로가 만든 피렌체 요새와 흡사한 모습이군요. 이걸 어디서 알게 되셨습니까? 조선 사람이 피렌체에 방문한 적은 있지만 요새가 만들어지기 이전입니다.”
“내가 어떠한 화포라도 버틸 수 있는 성벽을 만들려 하였는데 여기까지는 생각해서 설계해 보았소. 혹여나 여기에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겠소?”
“역사에 남을 거장과 같은 생각을 하시다니 참으로 대단하군요. 그렇지 않아도 요즘 일거리가 적어져 한가한 잡서나 번역하고 있었는데 잘된 일입니다.”
김지가 지금까지 수십 명의 군기시 장인들과 협업하였듯이 나도 협업에 들어갔다.
재미있는 일거리가 생겼다며 달려든 신성로마제국 사절단은 자신들이 거주하였던 지역의 요새를 하나씩 알려주며 자신의 경험을 전달하였다.
어느새 조정에는 이 창과 방패의 대결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일종의 자존심 싸움이 되어 무관들은 김지를 응원했고 문관들은 나를 응원하였다.
단 하나 응원하지 않는 이가 있었으니, 호조 관원들이었다.
“자네는 요새를 만들지 않고 명국 황상이 머무는 봉분이라도 만드나? 이 거대한 흙더미는 대체 뭔가? 이걸로 요새를 만들겠다고?”
“아…… 이 요새는 모든 화포의 포격을 견딜 수 있는 요새입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사소한 문제가 있으니 성형요새의 축조비용이 상상 이상이라는 점이다. 현대에는 중장비를 동원해 수십 톤 단위의 흙을 쉽게 옮길 수 있지만 이 시대에는 토공사와 관련된 모든 과정이 수작업이다.
인부를 삼백 명이나 충원해 흙을 운반하는데 시일을 맞추지 못할 지경이라 백 명 정도 추가로 충원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 모습을 본 호조판서인 김귀영(金貴榮)이 수염을 파들거리며 물어보았다.
“내가 자네에게 예산을 내어줄 적에 작게 축소한 요새 한 토막을 만든다 하였지. 여기에 들어간 돈이 은자 오천 냥일세! 대체 이게 뭐가 작단 말인가?”
“하지만 이 요새가 통용된다면 천하제일관의 명성을 빼앗아 올 수도 있을 겁니다.”
“천하제일관이라. 내 자네를 믿고 예산을 보내줄 것이지만 이 일을 염두에 두게나.”
나도 글러 먹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축소판 말고 온전한 성형요새를 만든다면 적게 잡아도 은자 오십만 냥 이상의 비용이 소모되리라.
여기에 보조 요새를 건설하면 은자 백만 냥은 순식간에 사라지겠지!
* * *
당연한 일이지만 최종 대결은 주상전하가 친림(親臨)하는 자리에서 벌어질 예정이었다.
김지도 그동안 화포를 개량하였는지 주철도 아닌 강철을 엮어 만든 포가 위에 광철포를 엮어 가져오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광철이를 전함사에서 화포를 시험할 때 쓰는 선박의 본(本)에 올려놓고 쏘았다네. 대장선으로 사용할 팔천 료(배수량 1,120톤) 급 함선조차 버텨내질 못하더군. 이 흠집을 보게.”
어디선가 충격을 받았는지 광철이 아니 광철포의 측면이 일그러져 손상되었는데 무언가에 세게 부딪힌 것 같았다.
김지는 당시의 일이 떠올랐는지 혀를 내두르며 말하였다.
“사방의 목재에 밧줄로 묶고 고정하였으나 충격이 너무 심해 배가 요동쳤지. 결국 밧줄이 아니고 목재가 부서지며 크게 기울어 밀려 내려갔다네. 깔려 죽은 사람이 없기에 다행이야. 배 위에 올릴 엄두도 내지 말라 하더군.”
“그렇게나 충격이 거셌습니까? 그러면 신형 뇌력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선박의 본이 요동치니 조만간 만들 사천 료(배수량 560톤) 이상의 신형 전선 순주선(順州船)에만 올릴 수 있다 하였지. 거기에도 네 문을 올리는 것이 한계라 하였네.”
입수한 갤리온의 장점을 융합한 신형 전선이 드디어 양산에 들어갔나. 대체 그놈의 료가 뭔지 모르겠는데 조만간 쌀 열 석(약 890㎏) 단위로 배수량 기준을 잡아야 하리라.
주상전하가 도착하길 기다리는데 어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고 내 망원경의 다리를 만든 서애 유가 아닌가! 조선의 군주께서 마음이 넓으신지라 이번 화력시험을 관람하는 걸 허가하셨네!”
난데없이 난입한 티코 브라헤와 신성로마제국 사절단이 우르르 몰려오자 불안감이 들었다.
과연 이 화포를 보여줘도 되나? 그렇게 여겼지만 이건 주상전하의 뜻인 것 같다.
유럽은 조선을 머나먼 동방의 강대국으로 생각하지 상세를 모르고 있다. 세스페데스도 조선이 얼마나 강대한 국가인지 모르는 형편이다. 그러니 사절단이 돌아가기 전에 화력시범을 보여 조선의 위엄을 떨치려는 책략일 거다.
이 사실을 아는지 사절단은 칭찬 일색이었다.
특히 알치드 데 상갈로는 신형 뇌력포를 쓰다듬으며 말하였다.
“조선의 화포가 빼어나다 하였는데 참으로 대단합니다. 제가 들은 바가 틀림없다면 이 다섯 문의 화포는 영국에서 포기한 캐논 로열보다 대등하거나 조금 작은 녀석이군요.”
“영국 녀석들이 거대한 화포를 양산한다고 자랑하다가 감당하지 못하여 모조리 폐기하고 한 문만 남겨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이를 감당하는군요.”
신성로마제국 사절단은 대다수가 귀족이었고 이런저런 견문이 쌓여 있으니 화포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특히 광철포는 내가 본 것 중 가장 거대한 화포라면서 조선에 대한 경외심이 섞인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가장 멀리서 온 티코 브라헤는 광철포를 주의 깊게 보더니만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황동 자를 꺼내 이리저리 길이를 재고 매만져 본 다음 말하였다.
“이것은…… 카노네 그리프(Kanone Grief)와 닮은 거대한 화포군요. 하지만 조금 작습니다.”
“그 화포는 뭐요? 대체 얼마나 거대하기에 내가 만든 광철이보다 거대하다 확언할 수 있는 것이오? 대체 어디에 사는 누가 만든 거요?”
“수십 년 전에 만들어진 화포를 조선에서 오는 길에 방문한 슈타인 요새에서 본 것이 전부입니다. 사이먼이라는 기술자가 조선의 무게로 일만 오천 근(9톤)의 청동을 부어 만들었다 하더군요. 소모되는 화약이 육십 근(38.4㎏)에 달한다 합니다.”
“육십 근? 거짓은 논하지도 마시오! 비격진천뢰에 들어가는 화약이 여섯 근에 불과한데 거의 열 배를 넣고 쏘면 우르반이라는 자가 만든 거포도 자폭할 거요!”
갑자기 눈을 부라리며 티코 브라헤의 멱살을 잡으려는 김지의 모습을 보고 뜯어말리니 티코 브라헤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답하였다.
“저도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런 거포를 마음대로 쏘아대는 나라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습니까? 기껏해야 나라의 운명을 건 결전에서 한 발 쏘아 적의 기세를 꺾는 것이 전부이지요.”
“지금 뭐라 하였소? 화포를 만들었으면 연습도 행하고 양산하며 개량할 방법을 찾기 위해 항시 쏘아보며 훈련해야지! 그런 태만한 이들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단 말이오!”
티코 브라헤를 시작으로 사절단이 김지의 말을 듣고 경외감이 아닌 공포감을 가득 담은 눈으로 화포를 바라보았지만 김지는 마음이 상한 듯 화포의 최종점검에 임하였다.
중요한 기술까지는 유출할 마음이 없었는지 화포에 사용하는 갈색화약(유황을 빼고 숯 대신 건류한 지푸라기를 사용함) 대신 흑색화약을 사용하니 주상전하의 속내를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주상전하가 도착하였고 방포를 명령하였다. 모든 이들이 귀에 솜을 끼워 고막을 보호하였으며 내가 만든 성형요새에 포탄이 작렬하였다.
“역시나! 저 흙먼지를 보시게! 판축다짐이 포탄사격에 효험이 좋지만 광철이 정도라면 삽시간에 무너뜨리지 않…… 아? 아닌가? 무너졌잖아?”
“무너지긴 하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만든 요새는 흙의 안식각(安息角: 흙이 자연스럽게 쌓이는 각도)보다 각도를 낮게 잡았기에 흙이 제자리에 도로 쌓였지요.”
광철포건 신형 뇌력포건 죄다 흙먼지만 피웠지 요새의 형태는 멀쩡하다. 얕은 경사로 쌓았으니 포탄은 흙에 틀어박혀 먼지만 일으키고 흙은 제자리에 다시 쌓인다.
이게 성형요새의 장점이다. 아무리 직사로 화포를 쏟아부어도 사면에 화포가 틀어박히면 아무 효과도 없고 적에게 잘 만든 철환을 선물하는 꼴이다.
“그러하면 내가 이긴 것이 아닌가!”
“아닙니다. 제가 요새 곳곳에 수비병 대신 나무로 만든 표적을 두었으니 이 표적에 흠집이 가면 무너뜨린 것이라 여기겠습니다.”
경사로 위에는 벽돌로 만든 여장(女墻: 성가퀴)을 두어 병사들이 활과 총을 쏠 수 있으며 만에 하나 벌어질 백병전을 대비할 장소를 마련했다. 여기를 타격하려면 이순신처럼 신기에 달한 곡사사격을 펼쳐야 하리라.
이런 상세 설계는 모두 신성로마제국 사절단이 담당했는데 미리 요새를 방문한 군관들이 쓸 만하다고 평가하여 그대로 적용하였다.
이후 계속 포격이 이어졌지만 김지의 기대와 달리 허수아비 가운데 손상된 녀석은 없으리라.
“그만하면 되었다. 창과 방패가 대결하였으나 이번 대결은 결국 방패의 승리로구나.”
주상전하가 승리를 선언하였고 김지의 어깨가 축 처지고 나는 자연스럽게 읍하였다.
화포에 대항하는 성능만 추구한 성형요새를 들고 왔으니 억지로 이긴 거지라 마음이 탐탁지 않았는데 주상전하는 김지를 먼저 칭찬하셨다.
“김지 자네가 만든 화포는 너무 거대하지만 충분한 효험을 발휘하였다. 하지만 신형 전선에 신형 화포를 설치하는 것이 먼저이니 뇌력포를 우선 만들도록 하겠다. 광철포는 조만간 새 이름을 정해 육전을 대비해 소수를 만들도록 할 것이다.”
“주상전하의 하해와 같은 은덕에 감읍할 뿐이옵나이다!”
“또한 유성룡의 공도 크지. 자네를 믿고 맡겼는데 참으로 비범한 일을 해냈구나. 흙을 성기게 쌓아 이미 무너진 형태를 만들었으니 마치 살받이(사격장의 뒤에 설치하는 모래 더미)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주상전하는 생전 처음 보는 요새인데도 자신의 경험에 힘입어 요새의 장점을 훤히 꿰어버렸다.
물론 나 혼자 공을 독차지할 생각은 없으니 다른 참가자도 알려주었다.
“소신의 경험이 부족하여 일천한 경험을 라마국 사절의 힘으로 빌렸나이다. 신은 그저 배운 것을 따랐을 뿐이니 부디 공을 라마국 사람들에게 돌려주시옵소서.”
“이미 들어서 알고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 하지만 이 요새는 산성에 쓸 방법이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구나. 하지만 다른 장소에 만들어야 할 일이 발생할지도 모르니 유성룡에게 명을 내리겠다. 지금까지 배운 모든 수성 지식을 서적으로 정리하여라.”
“주상전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하나이다. 신 유성룡 명을 받들겠나이다.”
지금 뭐라 했지? 조선 근처에 화포를 쏘는 국가가 명, 왜 두 개 국가 말고 더 있나? 파양군에 이걸 설치하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인데?
주상전하는 내 의문스러운 표정을 이해했는지 입을 벙끗거리며 알려주었다.
입을 비쭉 내민 것을 보니 자음은 모르겠고 모음은 우 우인데 우 우로 시작되는 단어가 뭐가 있을까.
우주는 아니고 설마 구주? 구주면 큐슈인데 일본에 뭔 변란의 조짐이라도 있나?
#작가의 말
김지가 급한 와중이라 신형 화포 두 종류만 시험했지 아직 시험하지 않은 화포가 여럿 있습니다. 특히 애매한 곡사포가 그 종류이죠
대완구를 개량한 호준포나 크기를 키운 특대 비격진천뢰라든가……. 이걸 들고 왔으면 성룡이도 골치 좀 아팠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