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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조선-363화 (363/573)

근육조선 363화

2부 14장 4화 한편 남쪽에선(4)

호기롭게 북쪽의 관아까지 진격했다 철저히 박살 난 카림과 그의 휘하 병사들은 어느새 골목 속으로 숨어들었다.

다행히도 조선군이 진영을 재정비하는지 숨어 있는 병사들이 사라진 뒤여서 어느 정도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카림 님! 이걸 어찌하면 좋습니까! 사방이 적입니다!”

“이 머저리들아! 적이 기껏해야 천 명에 불과한데 대체 뭘 하고 있는 게냐!”

“저희가 모이면 장창의 벽이 밀려오고 궁수들이 모여 장창의 벽을 걷어내자니 포탄이 날아옵니다! 이 도시 전체가 거대한 함정입니다!”

“그럼 그 함정을 우리가 이용할 생각을 하라고! 머저리들아! 빈집에 들어가서 농성을 벌이며 차근차근 진격하면 충분한 일이…….”

사람의 발소리도 아니요, 포성도 아닌 둔중하게 땅이 울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생각해 보니 파양군에는 최소 다섯 마리의 코끼리가 있다 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코끼리가 보이지 않은 이유가 뭐란 말인가.

본래 코끼리를 앞세울 것을 예상해 뛰어난 궁수는 물론이요 날카로운 화살도 잔뜩 준비했었다. 하지만 이런 시가지라면 코끼리를 물리칠 수 있는 일제사격을 퍼부을 방법이 없다.

저 멀리서 거대한 형체가 쿵쿵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가오자 카림은 사력을 다해 빗장을 부수고 집 안으로 뛰어들었다.

이윽고 방책이 무너지며 전투코끼리의 모습이 드러났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당장 꺼져!”

코끼리의 자그마한 눈이 건물 안에 틀어박힌 카심과 부하들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다행히도 코를 뻗어도 닿지 않을 거리이니 놈이 건물을 부수는 동안 재빨리 반대편으로 도망치면 되리라.

하지만 빗장을 푸는 카심의 등을 둔탁한 물체가 강타하였다.

“으악! 이게 대체 뭔…….”

허리가 부러졌는지 하체의 힘이 풀리며 움직이지 않았다. 가까스로 고개를 돌려 자신을 짓뭉갠 물체를 보았는데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한 무쇠로 만든 원판이었다.

-빠우우우우웅!

코끼리의 코가 손과 흡사하다는 말을 들었고 가끔 나무토막을 던진다는 말을 들었지만 이럴 줄은 몰랐다.

공령(플레이트)의 존재를 모르는 카림은 피를 토하며 자신의 등을 짓뭉갠 공령을 덜어내려 애썼다.

“뭐 이딴 코끼리가 다…… 있어……. 코끼리가 어떻게 무기를 사용해…….”

격통으로 혼절한 카심의 다리를 코끼리의 코가 휘감고 아낙네가 이불을 털 듯 가볍게 털어냈다.

가벼운 동작으로 전신의 뼈가 으스러진 카심의 영혼은 하늘 너머로 사라졌다.

다른 병사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 무리의 병사들은 어떻게든 코끼리를 상대해 보겠다고 골목 안으로 숨어들었다. 코끼리가 몸을 돌리는 순간 코를 찔러 격분시키고 빠져나갈 속셈이었다.

“지금이야 셋! 둘! 하! 아아악!”

날아온 물체는 공령이 아닌 길이가 훨씬 긴 대역기봉이었다.

잘 훈련된 입신체비사 세 명의 힘을 발휘하는 코끼리의 코라면 공령은 물론이요, 대역기봉을 장작 던지듯 내던질 수 있었다.

하지만 가볍게 내던진 대역기봉은 세 개의 창날을 부수고 맨 앞의 병사의 얼굴을 으스러트렸다.

군관은 포로를 얻을 생각에 포승줄을 찾았지만 코끼리는 감히 자신의 코를 찌르려 한 적들을 용서할 이유가 없었다.

“잠깐! 정국아! 정국아! 그놈들 포로로 잡을 거니까!”

생쥐를 밟을 때와 비슷한 소리가 들리며 사람이 뭉개지자 주변의 병사들이 헛구역질을 하였다.

사람이 납작해지는 모습을 보자 평상시에 편하게 대하던 코끼리가 호랑이조차 짓밟아 죽이는 맹수라는 사실을 되새겼다.

사방에서 어설프게 저항하던 민다나오 병사들이 코끼리에게 제압당해 사로잡히거나 밟히고 허공을 날아가며 생을 마감하였다.

한 병사는 공령에 맞아 부러진 다리를 부여잡고 조선 병사의 다리를 잡은 채 애원하였다.

“코끼리가 쇳덩이를 던진다! 여긴 지옥이야! 제발 살려주십시오!”

“전능하신 알라시여 영원한 빛…… 으아아아아아악!”

처음부터 코끼리를 상대하였다면 활과 병장기로 차근차근 피해를 입혔으리라.

하지만 두 번에 걸쳐 전열이 붕괴된 민다나오 병사들은 조직적인 저항이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심지어 다른 방면의 적들을 격퇴하였는지 북쪽의 금광에서도 남서쪽의 스페인 선원의 거주지에서도 환호성이 들려왔다.

전장을 정리하며 상세를 파악하던 권율에게 조헌이 돌아와 보고를 시작했다.

“보고 올립니다. 금광 방면으로 적도 이백여 명이 침입하였지만 손쉽게 격퇴하고 지원에 나서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파양군의 전황이 벌써 끝날 줄은 몰랐습니다.”

“적들이 오만한 덕분에 쉽사리 승리를 거두었네. 조금만 신중했더라면 화를 크게 입었겠지. 하긴 본군이 돌아오기 전에 도시를 망가트릴 놈들이니 신중할 시일도 없었을 것이야.”

북쪽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아직도 포성이 빗발치고 있었다.

이순신과 휘하 병사들의 신묘한 솜씨를 생각하면 상대가 경험이 많은 장수이거나 이순신이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아둔한 자이리라.

하지만 얼마를 버티든 간에 이틀 이내에 결판이 날 것이다.

조만간 물골을 막은 선박도 해체될 것이며 허탕을 친 본대가 전속력으로 항구로 돌아오리라.

* * *

권율의 생각 중 두 번째가 적중하였다. 살만은 장수치고는 성격이 급하였기에 이순신의 포격에 큰 피해를 입자 뱃머리를 돌려 이순신이 머무는 섬에 상륙하였다.

처음에는 포대가 있는 남쪽 해안으로 상륙하려다 다시 피해를 입었다.

여기서 항구로 향했다면 권율도 피해를 입었겠지만 살만의 자존심은 퇴각을 불허하였다.

그가 변명하길 섬을 크게 우회해 북쪽 해안으로 잠입하면 화포를 피할 수 있고 적의 후방을 기습하여 화약을 얻어낼 수 있다 하였다.

하지만 화포의 정확도가 떨어졌을 뿐 포격은 살만이 거느린 본대 주변에 쏟아졌다.

살만이 어떻게든 남쪽에 있는 포대로 방향을 돌리려 하면 바로 앞에 포탄이 쏟아지니 과감한 기습은 어느새 화포를 피하는 생존 경쟁이 되었다.

모든 병사들이 숲속을 빙빙 돌며 기력을 소진하고 있었다.

“젠장! 좀 더 빨리 뛰어라! 이대로 멈춰 있다가는 화포에 따라잡힌다!”

어두컴컴한 데다 비까지 내리는 밀림을 뛰어다니기를 반 시진(1시간). 병사들은 벌써 지치다 못해 기력이 쇠진하여 낙오하는 이가 생겼다.

부관은 숨을 헐떡거리며 살만을 만류하였다.

“살만 님! 이야기가 틀리지 않습니까! 숲속인데 포격이 계속 쏟아집니다! 놈들의 화포가 적다 하셨잖아요! 숲속으로 숨으면 화포를 쏠 수 없다 하셨잖아요!”

지금도 허공을 가로지른 뇌력포의 거대한 탄환이 나무를 부러트리고 대열 주변에 내리 찍혔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직면한 살만은 나름대로의 해답을 내었다.

“닥쳐! 닥치고 뛰라고! 이놈이 아예 군략에 대해 모르고 있으니 그 사이에 화포를 숲 속으로 옮겨둔 것이 분명해! 어서 숲 속에 있는 화포를 찾아내서 놈들을 도륙해야지!”

“이렇게 큰 탄환을 쏘는 화포를 삽시간에 옮긴다니요!”

실제로 화포는 이순신이 머무는 남쪽 해안에서 머리를 돌려 숲속으로 포화를 쏟아댈 뿐이었다.

살만의 병사들은 상관의 명령도 따르고 자신을 향해 좁혀오는 탄착군을 피하려 필사적인 강행군을 이어갔다.

-삐입! 삐이익!

“저 소리 들었어? 이 지역에는 없는 새의 소리야! 놈들은 새소리를 흉내 내어 내 위치를 전하고 화포를 조종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저기 화포가 각기 따로 분열되어 있다면 새소리가 훨씬 많이 들려야 하지 않습니까?”

“닥쳐! 닥치고 뛰기나 해! 어디엔가는 화포가 미치지 않는…… 그래! 지금부터 본대를 넷으로 나눈다! 놈들의 수는 기껏해야 삼백 명에 불과한 데다 사방으로 분열되어 있으니 충분히 이길 수 있어!”

적이 한 덩어리로 뭉쳐 있다면 각개격파를 당할 수 있는 어처구니없는 명령이지만 한 덩어리로 뭉쳐 돌아다니면 포격이 집중되리라.

생명연장과 개죽음 사이에서 고민할 필요도 없던 병사들은 네 무리로 분열하였다.

-삐삐! 삐삐삐익! 삐삐! 삐삐삐익!

산 정상에서 귀를 기울이던 군관은 깃발을 흔들어 신호를 보냈다.

신호는 단숨에 이순신이 머무는 포대까지 전달되었고 이순신은 신호를 해석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려 애썼다.

“참으로 훌륭한 장수로다. 압도적인 열세에서도 매섭게 맞서 싸우니 적수로서 부족함이 없는 것 같군. 여송에서 저런 사람을 만나다니 참으로 뜻깊은 일이야.”

“제가 보기에는 죽으려고 날뛰는 것 같습니다.”

부관으로서 신호를 분석할 수 있던 고란은 적의 한심한 작태를 비웃었지만 이순신은 자신의 관점으로 상대를 평가하였다.

그의 관점에선 멧돼지 같은 살만조차 부족한 점이 있지만 충분히 훌륭한 적장으로 여겼다.

“그러한 생각은 접어두게. 그대로 물러났다면 우리는 만취당(권율의 호)을 지원하러 항구로 향했을 것인데 적장이 저토록 맹렬히 나서니 우리가 한참을 허비하고 있다네.”

이순신은 모든 심려를 기울여 적을 분석하였다.

남쪽 해안으로 상륙하려던 일은 실수라 쳐도 퇴각하지 않고 북쪽 해안으로 돌아온 일은 필사적으로 자신을 묶어두려는 전략적 행동이라 여겼다.

해안에 상륙하자마자 미리 잡아둔 사표대로 화포를 쏘아댔는데도 적은 흐트러짐이 없이 한 몸이 되어 숲속을 진격하였다. 아마 동료를 위하여 포화를 몸으로 받아내려는 생각을 가졌으니 참된 장수이리라.

하지만 그 몸부림도 이제 끝낼 때가 되었다.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을 통솔할 수 없었는지 각기 분열하여 흩어진다는 신호가 들렸다. 두터운 뇌력포도 과열되어 더 이상 쏘지 못할 지경이 되었으니 고란이 나설 차례였다.

“적이 분열한 데다 사력을 다해 숲을 뛰어다니느라 지쳤을 것이네. 자네가 나서서 마무리를 짓게. 만약 항복하는 적이 있다면 반드시 사로잡도록 하게.”

“명심하겠습니다!”

숲을 제집처럼 여기는 임해도감 병사들도 반 시진 동안 산을 뛰어다니면 제자리에 쓰러지고 싶은 심정인데 적들은 오죽하겠는가.

어느새 포성이 멈추고 고요해진 숲속에서 살만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제 화약이 떨어졌나? 젠장 나는 여태 뭘 했단 말인가. 이천에 달하는 병사들이 절반으로 줄어 들었는데 뭘 어쩌라고.”

투구를 벗어 던지자 은은한 달빛이 투구를 비추었다. 병사들이 아예 자리에 드러눕기 시작하자 살만도 모든 일을 포기하고 싶었지만 불현듯 드는 생각이 있었다.

“다들 일어나라! 화약이 다 떨어졌으니 놈들은 화포를 쓸 수 없다! 기껏해야 삼백 명에 불과한 놈들이니 어서 나서서 놈들을 몰아치자!”

“지금 저희 인원이 이백 명이 조금 넘는데 싸워서 이길 수나 있습니까? 이 틈을 타서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병사들 사이에서 아우성이 터져 나오고 몇몇 병사들은 아예 게거품을 물고 혼절해 있어 살만도 분통이 치밀어 올랐다.

한 병사가 아예 산 아래로 내려가려 하자 살만의 고함이 산 속을 울렸다.

“야 이 머저리 새끼야! 분견대 하나만 더 합류하면 숫자로도 우리가 위니까 공격하자고! 그래! 너희들 분견대구나! 그쪽 방향에서 오다니 고생이 많았다!”

수풀이 부스럭거리고 사람들의 움직임이 느껴지자 살만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뒤로 돌렸다.

하지만 환한 미소의 응답은 달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는 도끼날이었다.

“적장! 잡았다! 네놈들은 바닥에 뒹굴며 뭘 하는 게냐! 죽고 싶은 놈은 덤비고 살고 싶은 놈은 무기를 버려라!!”

환한 미소를 머금은 살만의 목이 허공을 날아올라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병사들 사이로 떨어졌다.

이미 몸을 벗어났음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기괴한 모습을 목격한 민다나오 병사들은 병장기를 집어 던지며 목숨을 구걸하였다.

* * *

적의 계략에 속아 넘어간 정탁과 이일이 돌아올 무렵 전장은 말끔히 청소되었다.

사람을 짓뭉개던 코끼리들은 예비 자재를 옮겨와 마을을 보수하는 일에 힘썼고 관아에서는 전후 보고가 이어졌다.

“총원 이천이백육십이 명 가운데 부상자 이백마흔하나, 사망자 예순일곱입니다. 적은 도합 칠천여 명이 공격을 가하였으며 사망자 이천여 명에 포로로 잡힌 이가 이천여 명이 넘습니다.”

“지…… 지금 뭐라 하였는가?”

“덕분에 포로를 수용할 공간이 없어 임시로 만든 건물 아래에 두고 있습니다. 이들을 여송 본섬으로 운송하는 것이 좋아 보이는군요.”

세 배나 많은 적에게 군대를 다루기 불리한 우기에 공격을 당했음에도 이런 대승을 거두었다면 파양군에 남은 세 명의 관리는 변란을 진압할 자질이 충만하다 못해 넘쳐나리라.

놀라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쓴 정탁이지만 미소가 새어 나오는 것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근래에 왜국에서 변란의 조짐이 보인다 하였는데 이 얼마나 뜻깊은 일이겠는가.

“저기…… 저희도 피해를 입었습니다. 화공선에 함선 두 척이 파손되었으며 선장님이 돌아가시고 신부님만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셨지요. 더군다나 인삼도 모조리 가라앉았는데 이건 조선에서 배상할 일이 아닙니까?”

스페인 상선의 부선장. 이제는 함대의 선장으로 승진한 사람이 쭈뼛거리며 앞으로 나왔고 정탁은 그의 눈을 째려보며 한참을 생각하였다.

같잖은 수작질을 부려 위기를 모면하려다 더 큰 화를 입었으니 이들을 당장 쫓아내고 싶었지만 항구의 수비를 도운 공로가 있었다.

정탁은 깊게 한숨을 내쉬고 조헌을 불러 지시를 하달했다.

“이들도 품삯을 지급해야 하니 사들인 홍삼의 사 할을 금으로 배상하여 주게나. 듣자 하니 홍삼이 지나치게 귀중한 물건이라 모든 배에 나누어 싣는다 하였으니 그 정도면 충분할 걸세.”

“홍삼은 없습니까? 폐하께서 홍삼의 구매를 명하신지라 웃돈을 주고서라도 홍삼을 사들이고 싶습니다!”

“홍삼은 내년 구월에 여기로 옮겨올 것이니 그때 사들이시구려. 혹여나 본국으로 돌아가 받을 처벌이 두려운 거요? 도적들의 수급을 얼마든지 줄 수 있으니 마음껏 가져가시구려.”

“모로 놈들을 죽이는 거야 숨 쉬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크나큰 공이 아닙니다! 제발 홍삼! 홍삼을 주십시오!”

“그럼 당신들은 여기 머물며 숨을 참고 지냈소? 애초에 홍삼은 아국에서도 진귀하게 여기는 물건이니 함부로 내어줄 수 없소이다.”

정탁의 냉정한 말에 선장의 고개가 숙여졌다. 없는 물건을 가져올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들은 스페인으로 돌아가서 호된 질책을 당하리라.

조선 입장에서는 적의 침입을 훗날의 명장들이 격퇴하였다 여기고 민다나오 섬의 제압에 대하여 논의할 사건이지만 이는 국제적 문제로 불거지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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