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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조선-362화 (362/573)

근육조선 362화

2부 14장 3화 한편 남쪽에선(3)

우기가 시작되어 다시 울창하게 자라나는 열대우림의 사이에서 조선의 영토인 파양군을 침략한 여러 부족의 병사들이 적막이 맴도는 도시를 보며 무기를 가다듬었다.

권율의 예상대로 민다나오 호족들이 보낸 병사들은 바다로 나서지 않았다. 강력한 조선 해군을 끌어들이기 위해 일부러 정찰선에 발각되고 정찰선이 떠난 직후 뭍으로 상륙하여 산을 타고 파양군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의 목적은 조선의 거점인 파양군을 철저히 파괴하고 조선의 세력을 몰아내는 것 하나였다.

다른 이들이 군장을 점검하는 동안 파양군을 정탐한 병사들이 돌아와 보고를 올렸다.

“카림 님. 놈들의 병력이 너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목책을 순찰하는 놈들이 기껏해야 스무 명에 불과하고 순찰을 도는 병사들도 없습니다.”

“우리의 작전에 휘말려서 병사가 많이 줄어들긴 했겠지. 하지만 최소한의 병사도 두지 않을 정도로 멍청한 놈들은 아닌데.”

“혹시 항구를 포기하고 수리가오 녀석들을 보호한답시고 마을로 숨어든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금광에 병력을 보내서 경계가 허술해졌을지도 모릅니다.”

간혹 목책 안쪽에서 주변을 경계하며 돌아다니는 병사들이 보였지만 길이만 십 리(4㎞)가 넘는 목책을 순찰하는 병사는 열댓 명에 불과하였다.

“카림 대장님! 지금이라도 당장 쳐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첩자가 돌아와 상황을 보고할 때까지 기다려도 늦지 않다.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으니 우리는 너무 늦지 않게 행동하면 충분한 일이다.”

조선과 만다나오 섬의 호족 간의 오해와 편견으로부터 시작된 사소한 다툼은 감정의 골이 점점 깊어지며 파국으로 돌아왔다.

이는 백 년 전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백 년 전, 조선은 필리핀 북부의 도시국가인 톤도의 요청을 받아 해적의 토벌에 나섰다. 당시는 마자파힛 제국의 붕괴로 해적이 들끓었으며 조선의 지원으로 위기를 극복한 필리핀 북부는 이후 조선에 복속하였다.

하지만 남부인 민다나오에는 조선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였다. 당시의 혼란을 경험한 민다나오 섬의 호족들은 이슬람교를 받아들이며 생존을 위한 힘겨운 투쟁에 돌입하였고 조선은 모든 일이 끝난 60년 전부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조선이 요구하는 사항은 세 가지였다.

공납(貢納)을 제공하되 무역의 형태를 빌려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을 택할 것, 토지를 측량하고 인구를 조사하는 데 협조해 줄 것 그리고 조선의 관직을 받고 최소한의 관리들을 영토에 둘 것.

호족들은 세력의 분열을 막기 위해 조선은 이슬람교를 탄압한다며 소문을 퍼뜨렸고, 조선과의 갈등이 지속되며 세월이 흐르자 소문은 사실이 되었다.

다들 조선에 대한 욕을 내뱉으며 군장을 점검하는 와중에, 파양군 내부에서 일하던 첩자가 돌아왔다.

“카림 님! 살만 님이 보낸 화공선은 사흘 전에 남아 있는 적선을 터뜨렸고 놈들은 어디로 공격해 올지 몰라 사방으로 병력을 분산하였습니다.”

“더 자세한 사항은 모르는가? 다른 첩자들은 어디에 있지? 그리고 조선의 장수들은?”

“며칠 전부터 주민들을 피난시켰다던데 거기에 끼어들어 조용히 있겠지요. 장수는 군수(정탁)와 중경이 둘 다 함선에 탑승했고 지금 남아 있는 자는 파양군의 수비를 위해 병력을 분열해 자신이 육백 정도를 이끈다 합니다.”

정탁의 직위인 군수를 이름으로 알고. 이일의 자(子)와 이름을 엮은 단어를 이름으로 알지만 이 정도만 하여도 차고 넘치는 정보이다.

마을로 들어가 전투를 벌일 때쯤이면 따로 보낸 전령이 소식을 전해 수군 장수인 살만도 같이 공격을 시작하리라.

자신의 병력만 따져도 삼천 명이며 살만의 수군과 잡부까지 합치면 팔천 명에 달하는 대군이다. 생각 외로 손쉬운 싸움이 될 것 같았지만 최대한의 효율을 거둬야 하니 병력을 조금 분산하기 시작하였다.

“너희 오백은 북서쪽에 있는 수리가오 놈들을 견제해 지원군을 보내지 못하게 하여라. 너희 오백은 남동쪽에 있는 다른 마을을 시끄럽게 만들어 지원군을 차단하도록. 바로 진군한다!”

밀림에서 오천 명에 달하는 병사와 잡부들이 목책을 향해 달려오자 조선의 병사들은 경종(警鐘)을 울리며 고함을 치고 활을 쏘아댔다.

하지만 스무 발의 화살이 날아오자 수백 발의 활이 응사하였고 병사들은 파양군 안으로 도망쳤다.

“당장 문을 열어라! 놈들의 병력을 모조리 소탕하고 약탈한 다음 불을 지르자! 조선 놈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자!”

민다나오 병사들은 밧줄을 던져 목책 위를 기어올라 목책의 문을 열었다.

조선도 나름 대비를 하였는지 길거리가 통나무와 수레로 막혀 있었지만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놈들이 도망간 것은 좋은데…… 이건 뭔가 이상해.”

“혹시나 도시 내부에서 농성전을 벌이려다 준비를 마치지 못하여 도망친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가장 좋은 일이지. 생각해 보니 길이 모조리 막혀 있지 않고 막히지 않은 구간이 있군. 일단 다들 분열하여 도시를 정찰한다. 나는 관아를 확인하고 불태울 것이니 너희들은 민가에 불을 지르도록.”

숨이 막힐 것 같은 적막함이 감도는 파양군을 돌아본 민다나오의 병사들은 자연스럽게 약탈과 방화를 위해 작은 규모로 분열하였다. 우기인지라 조금씩 비가 내렸기에 날씨 하나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여기까지 들어왔으니 조선 놈들의 장기는 모조리 봉쇄되겠군. 놈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알고 있는 놈들 있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십장(什長)님은 예전에 놈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보셨다면서요.

“놈들과 건기에 싸우는 것은 자살행위이다. 방진을 만들고 안에서 쉴 새 없이 화포를 쏘아대지. 하지만 이렇게 비가 내리니 화포는 맘대로 쓸 수 없고 이런 좁은 길목에서는 무기를 맘대로 돌리지도 못할 거야.”

첩자들이 보고하길 도시가 가로세로로 그물같이 정돈되어 있고 건물이 하나같이 거대하다 하였는데 도가 지나쳤다.

건물의 크기만 따져도 도저히 민가라 볼 수 없는 규모였다.

보통 필리핀 일대의 주택은 우기를 거치며 순식간에 썩어 없어질 물건이라 대충대충 만든다. 기껏해야 팔뚝 굵기의 나무로 기둥을 만들고 대나무를 얼기설기 엮어 벽을 만든다.

하지만 파양군에 있는 민가는 색상마저도 우중충한 갈색에 대나무는 사용하지 않았으니 이 지역의 양식이 아니었다.

병사들은 두꺼운 판재로 만들고 위에 못을 박아 막은 문을 걷어차더니 혀를 내둘렀다.

“벽은 물론이요, 문도 대나무가 아니고 나무를 켜낸 판을 이어 붙이고 그 위에 망고나무 수액(옻나무와 유사한 성분이다)을 발랐다고? 조선 놈들은 대체 얼마나 부유하지? 이거면 내가 사는 집을 다섯 채는 만들고 남겠어.”

“벽만 문제가 아니야. 기둥은 내 허벅지보다 굵은데 이 정도면 우리 마을 촌장님의 집보다 튼튼한 것 같군. 그리고 아래로 기어들어 가지 못하게 대나무 창살로 막아뒀는데?”

유성룡이 설계한 파양군 표준 주택의 폭은 최소 열 자(3.5m)에 길이는 40자(14m)에 달하는 데다 주변에 넘쳐나는 나무를 아낌없이 사용하였다.

표면에 옻칠을 한 목재가 불에 잘 견디듯이 망고나무 수액을 칠한 목재도 불이 안 붙기는 매한가지였다. 우기이며 비가 내리니 기름을 뿌리고 불을 붙여도 금방 꺼지리라.

어느덧 골목골목을 지나 다시 수레와 통나무로 막힌 막다른 장소에 도착한 십장은 자신이 왔던 길을 가늠해 보더니 코웃음을 치며 명령을 내렸다.

“여기가 좋겠어. 대나무 창살을 부수고 횃불을 바닥에 하나 던져 넣고 건물 안에 하나를 더 던져라. 아래에서부터 열기가 전해지며 습기가 빠져 지붕까지 모조리 타오를 거다.”

건기라면 불쏘시개만 던져도 마을 전체가 불타지만 우기이니 화공(火攻)의 효험이 극도로 떨어진다.

결국 집을 하나씩 부수고 불을 놓는 방법 외에는 마을을 파괴할 수단이 없다.

“이걸 다 언제 태운답니까. 거기 이봐 도끼나 좀 주게!”

툴툴거리며 도끼를 가져온 병사가 대나무 창살을 부수려는 순간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뒤로 자빠졌다.

어느새 대나무 창살 사이로 창날이 독사의 머리처럼 뻗어와 배에 깊숙이 틀어박혔다.

“이게 무슨! 여기서는 장창을 사용할 수 없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건물 아래로 장창을 보낼 줄은 몰랐지! 적이다! 적이 반대편에 있으니 어서 돌아!”

명령을 하달하려던 십장의 말은 거기서 끝났다.

민가의 창문 사이로 보총의 총구가 튀어나와 불을 뿜었고 머리를 잃은 몸이 바닥으로 쓰러지며 병사들이 발작적으로 무기를 들고 빗장을 찍어댔다.

“야 이 개새끼야! 나와! 어디서 숨어서 개짓거리야!”

“당장 반대편으로 돌아가! 지금 돌아가지 않고 뭘 하고 있어!”

건물의 아래에서 날아드는 장창은 허벅지와 종아리를 노리며 독사의 머리처럼 사방을 파고들었다.

병사 두 명이 온 힘을 다해 장창을 잡아채고 도끼로 부러뜨리려 하였지만 상대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창날을 놓치고 손가락 여러 개가 잘려 나갔다.

“이 미친놈들 시가지에서 장창을 쓰고 있어! 여길 기어들어 가면 머리가 꿰뚫릴 거야”

“그럼 도끼는 뒀다 뭐 해! 건물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서 놈을 죽여!”

병사들은 사력을 다해 건물의 벽을 부수고 사람 한 명이 드나들 만한 구멍을 만들었지만 구멍에서 보총이 나오며 다시 불을 뿜었다.

네 명의 희생 이후 가까스로 병사 한 명이 건물로 파고들었지만 끔찍한 비명이 들리고 목에서 피를 뿜는 시체가 튀어나왔다.

“널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 다들 도끼 들지 않고 뭘 해!”

“야 이 머저리야! 지금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어? 당장 물러나!”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던 도시 곳곳에서 고함과 단말마, 그리고 폭음이 울려 느닷없이 전쟁터 한복판에 들어온 것 같았다.

하지만 멍하니 있는 병사의 가슴팍으로 화살이 날아들었다.

* * *

다섯 배는 되는 적을 상대하리라 여기고 죽음을 각오하였던 조선군은 어느새 여유를 되찾고 차근차근 전투를 진행하였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지만 적을 상대하는 지금은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본래 병법에 의거하면 시가전은 절대 피해야 할 행위이다. 시가지는 잘 마른 나무로 만들어져 있는 장작이니 적은 여의치 않으면 불을 지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언제나 비가 내리는 우기이다.

권율의 말대로 민가는 성채요 길목은 화포를 쏠 길이나 마찬가지다. 골목마다 적을 분열시켜 뭉치지 못하게 만들고 소수를 차근차근 격파하니 손쉬운 전투만 이어졌다.

튼튼한 갑주와 원패를 패용한 병사가 자세를 잡고 대기하자 벽에 도끼날이 박히며 사람 한 명이 들어올 구멍이 생겼다.

하지만 갑주도 없으며 어설픈 병장기만 갖춘 상대이기에 삽시간에 훈련원 병사의 칼날이 배에 쑤셔 박혔고 피를 뿜으며 뒤로 나자빠졌다.

“이 좁아터진 구멍으로 한 놈씩 다섯 번 들어오면 승산이 있겠더냐! 날 죽이려면 다섯 놈이 한 번에 와야지!”

“적당히 싸우면서 놈들이 적당히 들어오도록 유인해야지! 이런 젠장! 놈들이 갑(甲)의 사 번 통로의 방책을 넘으려 한다! 궁수는 뭐 하고 있어! 빨리 막아내라고!”

병사들은 건물 자체를 요새로 삼아 적의 수를 착실히 줄여나가며 지휘관을 노렸다.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지만 권율의 말대로 도시 자체가 요새나 마찬가지였다.

골목 하나하나에서 벌어진 소규모 교전은 조선의 압도적 승리로 돌아왔다. 열 명의 적이 단 네 명의 조선군을 이기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골목 안으로 들어서면 건물 아래를 넘나드는 장창이 허벅지를 꿰뚫고 지휘관은 보총수의 근접사격으로 머리가 날아가며 설령 건물 안으로 들어가도 팽배수를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큰 길목으로 뛰쳐나왔지만 여기에도 대책은 있었다.

가장 큰 대로라 하여도 폭이 20자(7m)에 불과하니 장정 서른 명이 장창으로 일자진을 갖추면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올 틈이 없었다.

장창을 패용한 병사들은 수리가 부족이던 조선인이던 다른 여송도 사람이던 한 몸이 되어 진격하였다.

“밀어! 장창으로 세 겹의 진영을 갖추었으니 놈들이 수백 명이라도 모조리 꿰뚫어 버릴 수 있다! 화살이 날아와 몸에 박힐 염려는 하지 마라! 너희는 갑주를 입지 않았느냐!”

사방의 골목에서 혼이 빠진 민다나오 병사들이 뛰쳐나왔다.

하지만 그들은 창날의 벽을 만나고 다시 도주를 택하였다. 자신들이 가진 짧은 병장기로 서른 명의 병사가 창을 겹친 진영을 뚫을 방법이 없었다.

간혹 바닥에 넘어진 자는 조선군에게 짓밟히고 당황하여 무기를 뽑은 이는 세 겹의 창날에 꿰어 사지에서 피를 쏟으며 절명하였다.

이 모든 상황을 계획한 권율은 관아에서 천리경으로 내려다보며 명령을 하달하였다.

“무(戊)의 육 번에 적도 오십여 명이 집결하였다! 화포를 쏘아 놈들을 격멸하라!”

도시의 가로마다 번호를 매긴 권율은 어설프게 집결한 적에게 결정타를 날렸다.

명령이 하달되기가 무섭게 각 거점을 조준하고 있던 지자총통(본래 역사의 천자총통)이 불을 뿜어냈다.

다른 이들이 보면 미친 짓이라 여겼지만 포병들은 이순신 휘하에서 훈련받은 이들이라 솜씨가 천하제일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화약의 양을 조절하며 사거리를 조절하는 방식이기에 권율의 명령이 떨어지는 즉시 포탄이 날아갔다.

허공을 가르고 권율이 명령한 지점에 떨어진 탄환은 민다나오 병사 여럿을 휩쓸고 흙먼지를 뿜어 올렸다.

다음 포탄이 떨어지자 무슨 상황인지 이해한 적들은 다시 사방으로 흩어졌다.

“비 오는 날 먼지 나듯 두들겨 맞는다 하였지. 그나저나 잠깐…… 저거 빗나갔는데?”

각도가 틀어진 화포가 일을 저질렀다. 여러 채의 가옥이 지자총통의 탄환에 휩쓸려 파손되었으니 저 화포를 담당한 병사는 이순신에게 칭찬과 포상을 받고 기합도 받으리라.

저 멀리 바다에서 적의 배가 상륙을 시도하였지만 화포를 얻어맞고 방향을 돌린 것 같았다.

이순신이야 알아서 잘하리라 생각한 권율은 적이 골목으로 숨어들자 숨통을 끊을 명령을 내렸다.

“적의 수는 아군보다 많지만 소수로 분열되어 있다! 골목으로 나아가 적의 숨통을 끊어라! 그리고 코끼리를 풀어 병사들을 도와라!”

수는 적지만 한 몸이 되어 움직이며 지형을 활용하고 화포의 지원을 받는 조선군과 수가 많아도 지휘체계가 분열되고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진 적이면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이제 골목으로 숨어든 적들이 농성을 벌일 시점이 되었으니 저항을 무력화시킬 가장 효과적인 수단을 사용하면 되리라.

권율은 코끼리들이 보여줄 활약을 기대하며 다시 천리경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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