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361화
2부 14장 2화 한편 남쪽에선(2)
군수 정탁부터 감무인 권율과 조헌, 그리고 군관으로는 수군우후(虞候: 정4품의 지방 군관)인 이일과 그의 부관 부사직(副司直: 정5품 군관) 이순신까지 거대한 관아에 모여 논의를 실시하였다.
정탁은 사람들을 돌아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조정에 장계를 올렸지만 지금쯤 장계를 읽고 있겠지. 다시 명령이 내려오는 데 한 달이 소모될 거라네. 놈들이 조만간 침략할 것이 분명하니 우리의 힘으로 대비해야겠군.”
한 달에 적으면 대여섯 명, 많으면 열 명씩 적발되던 첩자들의 소식이 뚝 끊긴 것은 지난 7월 무렵이다. 처음에는 포기하거나 한 달 정도 첩자가 끊겼다 예상하였지만 벌써 석 달째 적들의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았다.
이는 대규모 침략을 준비하는 과정이 명백하였다. 정탁이 장계를 보냄과 동시에 여송 본섬과 서쪽의 남서주(팔라완섬)에 다녀와 병력을 빌려온 권율과 조헌은 한숨을 내쉬며 답하였다.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첩자들이 일대를 염탐하려 하였고 심지어 몇 명은 금광을 확인하고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그나마 병졸로 잠입한 이들이 없어서 다행이지요.”
조선도 철저하게 첩자를 걸러냈지만 한계가 보였다. 처음에는 유성룡이 제안한 방법을 도입했지만 상대는 선박을 보수하고 남은 조선의 목재를 훔쳐 가짜 명패를 만들어 염탐하기에 이르렀다.
조선팔도나 하주도(下州道: 큐슈의 북부의 세 지방) 혹은 북방이라면 제대로 된 호패를 보급하여 첩자를 잡아내기 쉽지만 여송은 얼마 전에 북부부터 호패를 도입하였으니 막아낼 수 없었다.
정탁은 이일을 돌아보며 상황을 점검하였다.
“놈들도 바보는 아니니 공격하려면 우기를 노릴 것이 분명하지 않겠나?”
“그렇습니다. 우기에는 대부분의 화포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비가 스미면 화약이 무용지물이 되는 법이 아닙니까. 더군다나 각궁이 얼마나 손상되겠습니까?”
우기는 조선군에게 있어 험난한 시기이다. 각궁은 아교가 풀어져 철궁을 사용하며 화약에 물이 스며들면 화포는 쇳덩어리가 된다. 더군다나 갑주가 물을 먹으면 사람이 몸을 가누기 힘들 지경이다.
함대도 마찬가지여서 폭우는커녕 잔잔한 비만 만나도 속도가 급격히 줄어든다. 인근의 원주민도 마찬가지이지만 범선이 아닌 갤리선을 사용하여 기후의 영향을 덜 받으며 화약병기를 덜 쓰고 갑주도 없는 이들이니 상대적으로 나은 형편이다.
이일은 철저히 원리원칙만 따지는 사람이기에 이번에도 군말 없이 원리원칙만 적용하려 하였다. 시선이 쏠리자 이일은 덤덤한 표정으로 정탁을 바라보곤 보고를 덧붙였다.
“각 병졸들의 훈련이야 제 부관인 여해를 통하여 맹렬히 실시하였으며 저는 제군(諸軍)의 통합 훈련에 매진하였는데 손색이 없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제 우기가 시작되어 숲속에 배치한 초소(哨所)를 폐할 예정입니다.”
“진흙구덩이로 변모할 초소를 그대로 두느니 뚜껑을 덮고 폐하여 두는 것이 법도에는 맞지만 지금은 급박한 상황이 아닌가. 병사를 순찰하게 두어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게나.”
철저히 병법서와 군법만 따지는 이일의 성품을 아는 정탁이 슬쩍 권유하였지만 이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강직하고 사리를 분별하여 행동하지만 원리원칙만 철저히 따지는 사람이어서 다루기 까다로웠다.
정탁은 한참 고민하였지만 적의 목적이 무엇일지 짐작하기 힘들었다. 이일과 유사하게 원리원칙만 따지는 사람이지만 다른 이의 의견을 경청할 여유는 있었기에 잡학에 능한 권율을 보며 의견을 내놓으라 하였다.
“언신(권율의 자) 자네가 보기에는 적들의 목적이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기로는 금광을 약탈하고 창고에 쌓인 물품을 노리는 도적 떼 같은데.”
“제 생각이 옳을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놈들이라면 재물을 노리지 않을 겁니다. 놈들은 아국의 간섭을 배제하고 싶은 심정이 아닙니까? 그러니 보이는 대로 학살과 방화를 일삼아 아국이 만든 모든 일을 허사로 돌릴 것 같군요.”
이들이 원하는 일은 간단하였다. 모든 것을 파괴하여 조선의 세력을 밀어내고 협상을 벌여 간섭을 억제하는 것이다. 명나라에 입조한 일을 보면 이들은 조선을 몰아내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게 분명하였다.
“지금 자네가 무슨……. 아니지,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야. 금광을 약탈하면 쌓인 금만 가져갈 수 있지만 아예 아국이 물러나게 만들면 금광이 온전히 자신의 소유가 될 것이 아닌가.”
권율은 자신의 생각을 이상하게 이해한 정탁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생각하여 보니 자신만큼 남의 심리를 꿰뚫는 사람이 이 세상에 흔하지 않았다.
권율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에게 숨겨진 장수의 자질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적의 전략을 손에 꿰듯 본다면 어설픈 병사를 동원하여도 적을 물러나게 만들 수 있는 법이다.
정탁은 권율의 속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명령을 하달하였다.
“일단 적도들이 어느 방면으로 올지 모르는 형편이네. 내 생각으로는 우천을 뚫고 선단으로 몰려올 것 같지만 그런 경우에는 함대를 보내서 놈들을 때려 부수면 될 것이야.”
“하지만 육로로 도시를 공격할 수 있지 않습니까?”
“불가한 일은 아니지만 전쟁에서 필요한 병장기 가운데 가장 중요한 창은 어떻게 들고 오는가? 우림을 넘어 오려면 칼과 도끼 같은 단병(短兵)을 패용하는 것이 한계일세.”
조선에서 사용하는 단창은 사람의 키보다 조금 작다. 난전에 쓰거나 투척하여 전열을 붕괴시키는 목적이지만 장창은 전열을 유지하고 적의 돌격을 받아내기 위하여 평균 열두 자(4.2m)의 길이로 만든다.
아주 능숙한 병사라면 검이나 도끼로도 장창을 이길 수 있지만 서로의 실력이 비슷하다면 장창이 압도적으로 승리한다. 적의 전술을 이해하지 못한 채 단순한 전투만 생각하는 이일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답하였다.
“이 지역에는 나무가 흔하여 열두 자가 넘는 장창을 사용하지 않던가? 그들이 밖에서 도열하면 적들은 침입할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네. 혹여나 소수의 적도가 후방을 혼란시키기 위해 침입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일은 마음속에만 담아두게나.”
권율의 생각이 옳다면 적들은 철저히 조선의 장점을 억누를 전략을 수립하고 공격에 나서겠지. 하지만 이런 일을 하나하나 설명할 방법도 없으니 조금이라도 손을 거들 생각에 다음 의견을 제시하였다.
“군수님과 우후께서 그렇게 여기시면 저는 철저히 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지금 서반아 상인들이 인삼을 사들이고 배를 출항시키기 직전인데 이들은 회회교(이슬람교)와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이들을 고용해 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서반아인이라. 지나치게 잔혹한 성정을 보일 때도 있지만 싸움 실력이 부족한 이들은 아니네. 적당한 품삯으로 고용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해보게나.”
자고로 준비는 철저할수록 좋은 법이다. 다섯 척의 선박에 탑승한 선원만 해도 오백 명에 달하고 그들의 화포를 지원한다면 수비를 강화할 수 있으리라.
* * *
권율의 예상과 달리 스페인 상선단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선장은 조선에 대한 정보를 잘못 알고 있었는지 오히려 놀란 눈치로 권율을 바라보고 답하였다.
“예? 모로(Moro: 동남아시아 일대의 이슬람교도의 총칭) 놈들이 쳐들어온다 하셨습니까? 그놈들이 뭘 잘못 먹었다고 조선에 쳐들어오지요? 조선은 이슬람을 허용한…….”
“아국은 회회교를 허가한 적이 없소. 다만 조상이 회회교 사람일 경우 회회교를 따르는 일을 암묵적으로 허용할 뿐이지. 서반아 사람들은 회회교만 보면 전쟁을 불사한다 하였는데 마침 잘된 일 아니오? 충분한 품삯을 제공할 것이니 같이 싸워봅시다.”
권율이 알기로는 스페인은 회회교와 전쟁(레콘키스타)을 벌여 근본을 세운 나라이다. 간혹 해적을 토벌할 때 스페인 선박과 협력하는 경우도 있었으니 당연히 허가할 거라 생각했다.
자고로 병사는 많을수록 좋은 법이다. 고용비로 얼마를 지불해야 할지 걱정하던 권율에게 실망스러운 답변이 돌아왔다.
“만약 이 선단이 상단(商團)의 것이라면 나서겠지만 이 선단은 펠리페 2세께 직접 명을 받아 인삼을 사들이려 왔습니다. 만약 배가 손상된다면 군주께서 진노하실 것이니 이를 감당할 수 없는 노릇이지요.”
“한 나라의 군주가 직접 보낸 선단인데 섣불리 싸움에 참가할 수 없는 법이 아니겠소. 다만 남쪽의 적도들이 어떤 행적을 보일지 모르니 항상 유념하시구려.”
“저희는 머나먼 동쪽으로 항해하여 파나마 일대로 갈 예정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기껏해야 갤리선을 모는 모로 놈들이 대양으로 나설 수 있겠습니까? 다만 준비가 좀 길어지고 있지요.”
싸우고 싶지 않다 말하며 차일피일 출항을 미루니 권율은 상대의 속내를 짐작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혹여나 지금 출항하면 적과 정면으로 마주칠 수 있으니 조선이 본격적인 행동에 나서면 이들은 출항을 시작하리라.
하지만 얕은 수라서 잘못하다 된통 당할 가능성도 있다. 만약 자신이라면 적과 만나지 않길 빌며 최대한 빠르게 출항하거나 항구의 수비를 도울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슬쩍 웃으며 엉뚱한 사람을 추켜세웠다.
“하지만 이 지역에는 중경 이(이일의 자)라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분이 부하까지 동원하여 훈련에 매진하니 모로 놈들이 오히려 도륙당할 게 분명합니다.”
“중경 이라 하였소? 아니, 중경은…….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분의 존함은 어떻게 알았소?”
“모로 놈들이 수작질을 벌이는 걸 알고 있기에 작년에 조금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까. 당시에 한 놈을 심문하며 이 지역의 장수가 무서운 자이며 이름이 중경 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실제로 이일이 하는 일은 전체 훈련을 통솔하고 정기 점검을 행하는 것 외에는 없다. 오히려 이순신이 모든 일을 도맡아 더욱 철저히 하기에 이일은 평온한 나날만 보내고 있었다.
지금은 정보가 부족한 시대이기에 전면전이 벌어지기 전에는 각 군을 통솔하는 장수의 이름만 알아도 상대를 충분히 염탐했다 여기는 시대이다. 심지어 정보가 부족한 경우는 더한 촌극도 많았다.
관직의 명칭을 상대의 이름으로 이해하거나 상대의 성을 명(名)으로 곡해하는 경우는 흔했으며 엉뚱한 사람을 죽이고 명장을 죽였다 보고를 올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를 이해한 권율은 미소를 지으며 답하였다.
“옳은 말씀이오. 중경 어르신이 계시는 한 이 지역은 안전할 것이니 괜한 힘을 썼소.”
“중경 이라는 분도 있지만 권 장군께서도 대단한 분이 아닙니까? 난폭한 코끼리를 쉽사리 다루니 모로 놈들을 코끼리로 짓밟아 버리실 수 있겠지요.”
저 멀리서 한가로이 나무를 밟아 부수는 완보를 쳐다본 권율은 웃음을 지으며 적의 공격에 대비할 수단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모은 녀석은 대나무로 엮은 창살이었다.
“이거 우기가 끝나면 어살(漁箭)을 만들 녀석인데 가져가시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이걸로 수를 채울 수 없다네. 지금이라도 바삐 손을 놀려 더욱 많이 만들어두게나.”
예전에는 낚시나 그물로 고기를 잡던 주민들은 조선의 기술을 받아들여 바다에 대나무를 엮은 튼튼한 창살 형태의 어살(漁箭)을 만들어 큰 물고기를 대량으로 잡아들였다.
우기가 시작되었기에 어부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와 어살을 만들었으니 이것만 하여도 수천 개에 이르렀고, 여기에 권율은 대나무 조각이나 통나무를 수집하며 철저히 대비하였다.
보름 동안 적의 침략에 대비하고 병사들을 휴식시켜 만반의 준비를 갖출 무렵. 오늘도 코끼리를 부려 목책을 보수하던 권율에게 급보가 전해졌다.
“적선 일백여 척이 중중도(中中島: 보홀섬)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냈다 합니다! 군수님과 우후님께서는 즉각 군선을 동원하여 적을 격멸하고자 하였습니다! 어서 관아로 오셔서 상황에 대비하라는 명입니다.”
“잠깐……. 군수님께서 어찌 출병하신다는 말인가? 대체 왜?”
“군수님께서는 정4품이시지만 품계를 낮춘 행직(行職)으로 계시지 않습니까. 지원받은 함선들은 다른 지역의 우후가 통솔하기에 중경 장군님이 명령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로군. 하지만 적들도 바보가 아니니 정면으로 싸울 연유가 없는데.”
적선 일백여 척이면 만만치 않은 상대이다. 대충 계산해도 병력이 삼천 명에 격꾼이 삼천 명이라 이들이 일제히 몰려들면 강대한 조선의 군선 열 척도 잘못하면 패할 수 있다.
하지만 이상하다. 자고로 제대로 된 장수라면 이기는 싸움을 하지 질 싸움은 하지 않는다. 소집된 병사들을 배치하고 주민들에게 피난 준비를 행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얄궂게도 스페인 선장이 관아로 와 인사를 올렸다.
“이거 큰일이군요. 하지만 저희도 일정이 있는지라 다급히 출항할 예정입니다. 어스름이 내려앉을 무렵 출발할 것이니 물길을 알려줄 사람을 붙여주시지 않겠습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이지만 괜히 강요하지 않겠소. 혹여나 적들이 기습할지도 모르니 항시 주의하시구려.”
천둥이 내리치고 비가 사정없이 쏟아지는 가운데 저 멀리 외지인이 기거하는 항구에서 스페인 선단이 출항하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망원경으로 선단을 바라보는 권율의 눈에 선단 앞으로 돌진하는 세 척의 배가 보였다.
“저건 화공선이야! 이런 망할! 역시 양동작전이었나!”
권율의 예상대로 세 척의 배에는 화약이 잔뜩 담겨 있었다. 거대한 범선과 접촉한 순간 불길이 치솟으며 거센 빗줄기 소리보다 몇 배는 거대한 폭음으로 천지가 요동쳤고 두 척의 선박이 천천히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갯벌 사이에 파인 물골 한가운데서 배가 침몰하였으니 남은 세 척의 선박은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기우뚱거리며 항구로 되돌아오기 시작하였다.
권율은 폭발의 규모를 보고 적의 속셈을 명백히 파악하였다.
“놈들이 가진 화약을 모조리 털어 넣은 화공선이니 일백여 척의 적선은 화포를 준비하지 않았을 거야. 아예 가벼운 병장기만 패용한 채 육로로 짓쳐 들어와 마을을 불태우려 할 것이 분명하군.”
“지금 폭음은 무엇입니까? 혹여나 적도가 다른 방면으로 침략하였습니까!”
폭음에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뜬 조헌이지만 자세는 단정하고 이미 갑주를 패용하여 기세가 삼엄하였다.
충분히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남아 있기에 마음을 다잡은 권율은 정탁을 대신해 명령을 하달하였다.
“중봉(조헌의 호) 자네는 어서 금광에 있는 초소에 병력을 파견하고 적이 들어오면 소식을 알리게. 아마 적들은 밤을 틈타 숲을 뚫고 난입하려 할 것이네. 어서 여해에게 소식을 전하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화공선이 스페인 상선을 터뜨리지 않고 항구로 돌진하였으면 창고가 박살 나고 자칫 잘못했다간 화약 창고에 불이 옮겨붙어 대참사가 일어났으리라.
하지만 앞으로의 전투는 한참 남았다. 멀리 남쪽의 숲에서 삼천 명 이상의 적이 기습할 것이며 명백한 양동작전이니 동쪽으로도 수십 척의 선박이 난입하리라.
더군다나 사천 명에 달하는 병력 가운데 이천 명만 남은 상황이다. 최소한 3배 이상의 적을 상대할 상황이었지만 권율은 오히려 손을 쥐락펴락하며 호탕하게 명령을 하달하였다.
“일천 명의 병력은 수리가오를 방비하게 보내도록! 나머지 일천 명과 소집한 민병으로 파양군을 막아낼 것이다!”
“고작 일천 명의 병사면 목책을 오르는 적들도 막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차라리 수리가오를 포기하고 파양군에 집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당장 이천 명의 병사로 대열을 갖추면 적을 몰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천 명의 병사가 대열을 갖추면 뭘 하겠나. 숲속으로 우회해 고을로 난입하면 난전이 벌어질 것이네. 차라리 목책을 포기하고 시가지에서 싸우면 될 일이 아닌가.”
전략적으로도 전술적으로도 이 시대에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 권율의 입에서 나오자 병사들은 서로를 돌아보고 권율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하지만 권율은 입신체비로 다져진 몸으로 한 민가에 몸을 부딪치더니 호탕하게 답하였다.
“내 벗이자 전임자인 서애가 아주 튼튼한 가옥을 만들어 뒀다네. 어지간한 도끼로 두드려도 여러 차례 두드려야 할 정도가 아닌가. 민가가 성채요 길목은 화포를 쏠 사로가 아닌가!”
목재가 넘쳐나는 지역이기에 유성룡이 설계한 표준 주택은 지나칠 정도로 튼튼하였으며 정돈된 가로는 원하는 방향을 마음대로 볼 수 있게 만들었다.
드넓은 파양군을 감싸는 목책은 튼튼하여도 지나치게 길어 오히려 수비에 불리하니 시가지를 방책으로 싸워야 하리라.
권율은 습기를 막기 위해 지상에서 띄워 둔 건물 아래를 가리키며 다음 명령을 하달했다.
“내가 지정하는 길목을 통나무로 막아 차단하고 건물 아래에 미리 준비한 어살을 단단히 박아 적이 기어들어 오지 못하게 막게! 적들은 모두 짧은 병장기를 사용하고 자네들은 긴 창을 사용하니 일방적인 싸움이 될걸세!”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 계속 하달되어 병사들이 혼란을 겪었지만 이미 이순신의 조련을 받아 상급자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신임하는 이들이라 큰 문제는 없었다.
사흘이 지나 밤이 되자 적들이 등장하였다. 권율의 예상대로 최소 수천에 달하는 적이 밤을 틈타 고요한 파양군 근처에서 공격을 실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