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359화
2부 13장 6화 이 구역의……(2)
유성룡이 동창의 감옥에서 풀려나 꾀병을 부릴 무렵 북경 외곽에 위치한 장거정의 저택에는 음습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장거정의 탄핵과 관한 소식은 순식간에 세상에 퍼져 나갔으니 도망친 하인이 생길 지경이었다.
지난 18일간 격쟁을 벌이고 시달려 가까스로 얻은 휴식이지만 쉴 시간이 없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뻔히 알고 있었는지 장거정의 입에서 다시 고함이 튀어나왔다.
“미친놈! 정녕 미친놈이야! 세상에 어떻게 보선에 올라탈 생각을 했지? 아무리 체격이 평범하다 해도 이역만리로 건너와 배에 올라타다니! 그 방법이 뭐야!”
유성룡이라는 놈은 미쳐도 한참을 미쳐서 다시 정상이 된 놈이 분명했다. 온갖 고문과 폭력이 자행되는 동창에 투옥되면서 떳떳하게 제 발로 들어갔다. 물론 조선의 촉망받는 신하를 죽일 수 없지만 괴롭힐 수는 있기에 명령을 내렸다.
간수들에게 돈을 먹여 두들겨 패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오히려 겁에 질려 실패했다. 쉬지도 않고 제자리에서 몸을 움츠렸다가 뛰는 운동(부와도약, 버피)을 행하는데 간수들은 역으로 두들겨 맞을까 겁에 질렸다.
심지어 기를 꺾으려고 형식상의 심문을 시켰지만 상대의 답변이 더 가관이었다.
왜 배에 올라탔냐는 질문을 하니 두 눈을 부릅뜨고 이마에 핏대를 세우면서 일갈(一喝)을 날렸다.
-나와 전함사의 장인들이 몇 달의 밤을 지새우며 설계하고! 조선의 장인들이 심혈을 기울인 선박을 엉망으로 망쳤다는 소문을 참을 수 있더냐! 장거정은 내 작품을 망쳤다!
예전부터 미친놈이라면 제풀에 지쳐 실각(失脚)당하겠지만 거기서 더 미쳐서 정상적인 모습을 보이다니.
정말 잘못 걸렸다며 한숨을 푹푹 내쉬자니 태감 풍보(馮保)가 들어와 인사를 올리고 황명을 전달하였다.
“다른 환관이 배정될 예정이었지만 제가 왔습니다. 황상께서 친히 명을 내리셨으니 이를 받으시지요.”
환관 풍보는 장거정이 권력 기반을 다질 때부터 호흡을 맞춰온 이였으니 그도 위기에 몰리는 마찬가지리라.
황명을 받들려 절을 올린 장거정은 황명을 읽고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황상께서는 수보의 삼년상을 온전히 치를 수 있도록 준비를 도우라 명하셨습니다.”
“자네는 생각이 없나? 내가 삼년상을 치르러 내려가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나!”
“그렇다고 삼년상을 치르지 않으면 더더욱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아버지 장문명(張文明)의 사망은 장거정에게 있어 치명타였다. 황제의 스승으로 언제나 도리를 강조해왔던 그였다.
하지만 조선의 탄핵으로 정국이 혼란에 빠진 와중에 삼년상을 치르러 내려가면 그 순간 권력이 붕괴되리라.
황상께서는 은혜를 내린다며 문책을 삼년상이 끝난 이후 진행한다 했지만 그건 다른 신료들이 침묵할 때이다. 다른 놈들은 자신에게 죄를 떠넘길 것이며 이후는 능지처사(陵遲處死: 능지처참)를 당하리라.
하지만 삼년상을 치르지 않아도 문제이다. 만력제의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도덕과 의리를 강조해 왔던 사람이기에 이 한 건만 해도 탄핵 대상이다.
외통수에 몰린 장거정에게 풍보는 그나마 합리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정국이 혼란한 와중이니 탈정기복(奪情起復: 군주가 삼년상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림)의 관례를 믿으시고 장례라도 치르고 오시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단 몇 달이 뭐야! 지금 남당의 부관이었던 오유충과 마귀가 내 목을 옥죄려고 사력을 다하고 있는데. 아마 보름이 지나가기 전에 온갖 누명이 나를 덮칠 것이네!”
척계광의 부관 오유충과 마귀 두 명은 조선의 탄핵, 아니, 정치공작이 시작된 직후 북경에 올라와 척계광의 원한을 풀어달라며 장거정을 탄핵하였다.
하지만 이건 문제의 시작일 뿐이다.
장거정은 명나라의 끝없는 부패를 척결할 능력이 없었으며 그가 가능했던 일은 조선이나 다른 국가들과 연관된 사업을 벌여 부패한 이들에게 자금을 주어 자신의 아래에 몰아넣은 것이 전부였다.
이를 통해 도적의 소굴이 된 요동에 대한 소식을 숨길 수 있었고 토지제도와 조세제도를 개편하며 척계광이라는 장수를 키울 수 있었다.
물론 척계광은 자신의 손에서 벗어났지만 그런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업이 모두 결렬되거나 중단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금의 흐름이 끊기니 자신의 아래에 있던 부패한 놈들은 돈과 권력을 탐해 사방으로 흩어질 것이 명확했다.
“자네도 알지 않은가! 이 상황에서 내가 자리를 비우거나 권력을 이탈하면 황궁에는 자중지란(自中之亂)이 일어날 것이네! 붕당 중 하나는 조선의 힘을 뒤에 두고 번성할 것이며! 조선은 그토록 바라던 요동을 얻을 것이 아닌가!”
하나로 뭉치지 못하면 사방으로 분열될 것이다.
이미 이십여 년 전부터 요동을 할양받기 위한 야욕을 보이던 조선은 정계에 관여하며 아예 친조선 당파(黨派)를 만들어 버리겠지.
친조선 당파의 의견을 받아들여 요동을 내어주면 그걸로 끝이다.
장거정도 바보는 아니기에 조선의 전력이 명나라와 대등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며, 이런 조선이 반기를 들면 그 자리에서 북경이 침탈당하리라.
장거정은 환관 세력도 동원해 달라는 간절한 눈빛을 보냈지만 풍보는 그런 눈빛을 애써 무시하였다.
이미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장거정의 편을 들어주면 환관들도 줄줄이 목이 잘릴 게 분명하였다.
“제가 그리 먼 훗날의 일은 알지 못합니다만 명확한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수보께서는 일단 잠이라도 청하시는 것이 좋은 것 같군요. 탈정기복이 최대한 빨리 이루어지도록 저도 힘을 써보겠습니다.”
“최대한 빨라도 문제일세. 잠…… 그래 잠이라. 어제 소식이 전해졌으니 황상께 오늘은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느라 혼절하고 깨어나 울기를 반복했다 전하게.”
애초에 아버지인 장문명도 쓸 만한 관리는 아니다. 돈을 남기는 재주는 좋아 탐관의 행적을 들키지 않았을 뿐이니까.
방금 전 악몽을 꾸어서 피로가 몰려왔는지 장거정은 아예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려 하였다.
“잠깐! 아닐세! 남당! 아니란 말이야! 진실을 말하면 내가 죽지 않는가! 자네를 졸장이라 음해한 일은 미안하네! 그만! 으아아아아악!”
피범벅이 된 척계광의 칼에 목이 베인 악몽을 꾼 장거정은 물을 들이켜고 한숨을 내쉬었다. 오유충과 마귀를 만난 이후 악몽을 꾸는데 그 둘에게 척계광의 혼이라도 달라붙어 있는 것 같았다.
도사라도 불러서 원혼을 달랠 수 있다면 진작 달랬으리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장거정의 눈에는 서역의 귀한 재료를 엄선했다는 정력제가 보였다.
“그래 자고로 방중(房中: 성생활과 관련된 도교 술법)을 행하면 삿된 기운을 몰아낼 수 있다 하였지. 젊은 시절에도 저걸 먹고 방사(房事)를 행하면 훨훨 날아갈 것 같았는데 잘되었어.”
전 세계의 물자가 모이는 중국이기에 장거정이 젊은 시절 먹었던 수은으로 만든 단약은 더욱 효력이 강해졌다. 수은의 양이 늘어났으니 온몸의 혈관이 수축하며 등골부터 찌르르한 느낌이 샘솟았다.
하지만 단약에는 피로를 몰아내는 초콜릿과 커피 분말 그리고 기를 뚫어준다는 반하(半夏)가 추가되었다.
경쾌한 발걸음으로 첩실의 방으로 향한 장거정은 잠시간의 쾌락을 즐기고 영원한 수면으로 빠져들었다.
* * *
동창의 감옥에서 나오고 이틀 정도 지났지만 아직도 북경은 어수선했다.
이미 장거정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이들은 서로 분열하여 이합집산(離合集散)을 반복하였고 심지어 우리에게 와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 이들도 있었다.
명나라 조정도 슬슬 눈치를 주지만 지금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시기이니 사신단도 내 핑계를 대며 며칠만 더 머무르려 하였다.
할 일도 없어서 동창의 목측 도면을 작성하고 있는데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지금 뭐라 하였는가! 수보 장거정이 시신으로 발견되었다고! 확인은 했는가!”
“저도 확인하지는 못하였지만 정황이 그러합니다.”
장거정이 자살했나? 이 시대에 자살은 불명예의 상징이 아니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기에 제법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자살을 할 이유가 없는데?
“하지만 자진(自盡)은 아닙니다. 지금 다른 사람을 보내 장거정의 하인들에게 돈을 먹여 정보를 얻어내려 하지만 하인들이 알 이유가…… 뭐라 하였는가?”
다른 명나라 사람이 와서 귓속말을 하였고 외조에 포섭된 상인은 이야기를 듣더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김종인과 나를 번갈아가며 보았다.
그리고 어처구니없는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믿기지 않는 말입니다만 태악(장거정의 호) 대감의 첩실에게 배정된 시종의 증언입니다. 정력제를 먹고 방사를 행하다가 갑자기 사지가 뻣뻣해지며 숨을 거뒀다더군요.”
“부친의 상중에 방사를 행하였다고! 이것만 하여도 대죄이거늘 하필이면 복상사를 당해!”
“지금 태악 대감이 자주 들렀던 의원에 병사들과 수보의 저택에 기거하던 하인들이 들이닥쳐 북새통이라 합니다. 아무리 보아도 복상사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만력제의 아버지인 가정제의 사망 원인도 과도한 정력제의 사용과 방사로 인한 복상사로 추정되는 와중에 장거정이 정말 복상사를 당했단 말인가?
생각해 보니 예전에 이이와 함께 북경에 왔을 때 경험한 일이 떠올랐다.
-예부 우시랑인 태악이 아닌가. 명국 황상이 도교에 심취하여 단약을 섭취한다 하였는데…….
나는 장거정은 젊은 시절에 먼발치에서 본 적이 있었다. 막 퇴청한 주제에 수은으로 만든 정력제를 사들이려 발품을 파는 모습을 보며 한심하다 생각했는데 정말 한심한 최후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만력제는 스승의 한심한 최후를 무마하려고 애썼다. 이 시대에는 스승이 곧 제자를 결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어느새 금군이 거리로 뛰쳐나와 장거정의 죽음을 떠드는 이들을 윽박지르고 포박하기 시작했다.
장거정의 죽음은 공식적으로는 과로, 부친상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 그리고 탄핵으로 인한 건강 악화로 인한 급사라 알려졌다. 물론 알 사람은 알고 조선왕조실록에는 정력제의 남용으로 인한 복상사라 적히겠지만 그건 훗날의 일이다.
보름 넘게 시달렸던 만력제는 빨리 돌아가라는 의사 표현을 하듯 다시 접견을 허가하였다.
기껏해야 중학교 2학년에 불과한 만력제도 안색이 파리해진 채 장거정의 빈자리를 바라보다 한숨을 쉬고 말하였다.
“어제 짐의 스승이자 수보인 장거정이 명을 달리하였소. 집안에 우환이 겹친 와중에 탄핵을 당하였으니 그 심려가 겹쳐 이런 일이 벌어졌구려.”
“번국의 신하로서 위문을 표할 뿐이옵나이다. 태악 대감은 의혹이 많으나 명을 달리한 지금 의혹을 밝힐 연유가 없사옵니다. 그저 조문을 바랄 뿐이니 개의치 마시옵소서.”
만력제는 아직도 장거정을 신뢰하고 있었는지 우리를 슬쩍 째려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스승에 대한 신뢰와 조선에 관한 신뢰 가운데 아직도 스승을 신뢰하고 있지만 이걸로 충분하다.
한번 균열이 시작되면 걷잡을 수 없으며 이걸 회복시킬 장거정도 시체가 되었다. 결국 만력제는 어느 순간 명나라의 진실을 알아차릴 것이며 세상에 믿을 놈은 조선 하나 외에 없다고 인식하리라.
아무리 조선을 경계해도 믿을 놈이 조선밖에 없다면 조선을 밀어줘야지 뭘 어떻게 하겠는가.
장거정의 부재로 어수선해진 접견장의 분위기를 온몸으로 체험하니 다음 단계를 진행해도 될 것 같았다.
명나라 영토를 벗어나 궁궐로 돌아온 직후 바로 다음 작업에 착수하였다. 장거정의 실각은 죽음이라는 형태로 완료되었으니 이제는 장거정의 후임자를 만들 차례이다.
본래 전쟁의 조짐이 보일 때에만 임시로 창설되는 비변사가 형태를 변형하여 창설되었고, 그 자리에는 외교와 관련된 인물들이 집합하였다. 그리고 변복(變服)을 한 주상전하가 자리에 참석하였다.
“주상전하께서 어찌 이런 한미한 자리에 임하시는지 모르겠사옵니다!”
“한미한 자리라 하였는가? 어제까지 강무(講武: 계절의 끝에 열리는 왕이 친견하는 사냥대회)를 행하다 돌아왔다네. 피로하다 하여 일찍 처소에 든다 하고 빠져나왔지.”
이런 일을 이야기할 때에 사람이 적을수록 좋고 사관이 없어야 더더욱 좋다.
귀찮은 짐을 덜어낸 주상전하는 헛기침을 하더니만 논의의 시작을 알렸다.
“장거정의 휘하 세력이 분열하여 당파를 만들 것이네. 그 당파 가운데 하나를 적극적으로 밀어주어 이득을 분배하고 훗날 정계를 장악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천거하는 인물이 있는가?”
참으로 원대한 계획이지만 길게 잡아 30년, 짧게 잡으면 10년 이내에 요동을 할양받을 수 있으며 훗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요동을 유지할 수 있겠지.
가장 먼저 발언한 인물은 상이경이었다.
“제가 천거할 인물은 석성(石星)이라는 자입니다. 지금은 대리사승(大理寺丞)을 역임하고 있지만 청렴결백하며 아국이 나서기 이전부터 장거정을 탄핵하려던 자입니다.”
“그러하면 참으로 다루기 까다로운 이이군. 그런 이 한 명이 당파를 주도한다면 아국의 마음대로 휘둘리지 않을 것이네. 일단 물망에 넣어둘 것이니 다른 이는 없는가?”
명나라와 연관이 있거나 다녀온 이들이 이래저래 사람을 천거하였지만 하나같이 문제점이 있었다.
이름과 신상명세를 살펴본 주상전하는 혀를 차며 말하였다.
“참으로 난해한 일이로군. 당파를 만들려 하여도 가장 중요한 인물이 없다네. 자고로 아국이 다루기 쉬우려면 재물을 탐하며 능력도 좋은 이가 있어야 하는 법이 아닌가.”
“그러한 이가 많으면 세상이 탐학으로 가득 찰 것이옵니다. 그나마 옛적 임사홍이 그러한 사람이었는데 이와 견줄 수 있는 이는 찾지 못하였사옵니다.”
당파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줘도 하나같이 청렴결백하면 자신들의 주장을 할 뿐 조선의 의견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
결국 적당히 부패하고 적당히 청렴결백한 비율을 맞추어야 한다.
하지만 내가 만난 이들 중에 능력도 있고 부패한 이도 있다. 남경에 입항할 때에 알게 되었던 진조작이라는 자는 분명 병졸들을 잘 훈련하였으며 돈을 밝혔으니까.
가만히 상황을 보다 한 명을 추천하였다.
“남경의 참장(參將)인 진조작이라는 자를 천거하고 싶사옵니다. 저와 비슷한 연배이지만 병사를 날래게 조련하니 명장 척계광보다는 못하여도 맹장에 속하는 이이며 은자라면 사족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옵니다.”
“참으로 좋은 사람을 찾아냈군. 그의 능력이 얼마나 대범할지는 몰라도 그런 이가 함께한다면 당파가 아무리 청렴하여도 흠결이 생기는 법일세. 앞으로 잘 다루어야겠군.”
목록을 보니 생각 외로 적당한 조합이 갖춰지고 있었다.
이제 장거정의 실각 이후 조각난 정국에서 이들은 친조선 관료들로 뭉쳐 우리의 나팔수가 되리라.
* * *
자금성의 침전에는 아직도 등잔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조선에서 어디보다 싼 가격에 들여온 고래 기름을 부은 등잔으로 불을 밝히니 훤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서류를 살피는 만력제의 표정은 암울하기 그지없었다.
“이럴 리가 없어……. 태사(太師: 황제의 스승)가 나를 여태껏 속일 리가 없어! 그래! 이건 오로지 삿된 놈들이 태사의 눈을 가려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거야!”
만력제의 어린 시절부터 스승으로 군림한 장거정의 그림자는 그만큼 컸다. 보름이 넘게 이어진 언쟁으로도 장거정에 대한 신뢰는 굳건하였다.
하지만 약간의 의심이 남기에 이를 확인하고 싶을 뿐이었다.
“태사가 지난 보름 동안 얼마나 고초를 겪었는가. 김종인이라는 놈도 상이경이라는 놈도 하나같이 매몰차게 대하니 첩실의 품에 안겨 잠을 청하다 변고를 당한 거야!”
약간의 의심은 점점 커졌다. 이미 공공연하게 장거정이 복상사를 당했다는 소문이 퍼져서 걷잡을 수가 없었고 결국 만력제는 명령을 내렸다.
조선에서 가져온 서류와 특명을 내려 남경에서 가져온 물자 목록을 일일이 대조해 보았다. 그의 머리는 영민하였으며 장거정의 가르침도 훌륭하였기에 점차 진실로 접근하였다.
15세의 어린 나이이자 사춘기가 시작되어 거뭇거뭇한 수염이 피어오르는 만력제는 한 장의 서류를 볼 때마다 탄식을 내뱉으며 다음 서류와 대조하였다.
실무와 관련된 용어는 잘 몰랐지만 서류의 공백을 발견할 재능은 되니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분명 태사가 말하기를 조선에서 들여온 물자는 배를 타고 들어와 삼 할이 손실되는 일이 평범하다 하였는데! 창고에는 온전히 물자가 있었잖아!”
강남 일대에서 생산하기 힘든 향신료는 조선이 여송도 일대에서 대량으로 재배해 명나라로 수출한다.
이 향신료 500석이 조선에서 들어오면 북경까지 전달되며 자연스럽게 6할인 300석으로 줄어든다.
어린 시절 이에 대해 물어보니 장거정은 조선에서 하역할 적에 손실되는 양이 많고 바닷바람에 썩는 분량이 많아서 3할이 입항 중에 손실되고 다시 1할이 운반 과정에서 손실되어 6할만 남는다 하였다.
당시에는 의심이 없었지만 의심이 생긴 지금은 달랐다. 생각해 보니 향신료는 물이 스며도 품질이 떨어질 뿐 사용할 수는 있기에 그 분량을 추려내 싼값에 팔아치우면 되는 법이다.
진실을 알게 된 만력제의 심장이 쿵쾅거리며 등골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다 자신의 침전 위에 놓인 시커먼 배의 모형이 눈에 들어왔다.
어린 시절 조선의 함대와 정화의 대원정에 대해 듣고 자신이 만들라 명했던 보선 함대. 그 보선 함대의 모형을 보자 가장 명확한 진실을 알 방법이 떠올랐다.
자신이 탔던 보선과 조선이 제공한 목재 파편을 대조하면 장거정의 비리를 명확하게 알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만력제의 섬세한 마음속에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자신이 믿어온 태사도 태사와 한 몸이 되어 일한 관료들도 모두 부패했다면 그 위에 군림하는 자신은 무엇이란 말인가?
#작가의 말
본래 역사에서도 장거정의 사망원인은 정력제 혹은 회춘약의 오남용 이후 시작된 질병을 극복하지 못해서입니다. 이런 약들에는 중금속이 매우 풍부하게 들어있습니다.
대신 더 일찍 더 많은 정력제를 먹었기에 편안히 세상을 뜨게 만들어 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