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356화
2부 13장 3화 장거정 죽이기(3)
남경까지 가는 방법은 간단했다.
조정에서 남경에 관원들이나 조정에 납품허가를 받은 상단을 파견하여 물자를 사 오는 일은 흔했고 매달마다 상단이 파견되었으니까.
더군다나 음력 3월은 좋은 시기이다. 보선 함대는 음력 3월 말에 입항해 5월 초에 출항하여 산동반도로 올라갔다 대양도로 향한다.
두 시기가 겹치니 운이 좋지만 세스페데스는 입신체비만 피하면 좋다고 굳은 의지를 표명했다.
“한시라도 빨리 마테오 형제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라 조바심이 생깁니다. 마테오 형제는 제가 인도 고아에 있는 신학교에서 함께 수학(受學)한 벗이지요.”
세스페데스가 말하기를 마테오 리치는 자신과 비교할 수 없는 재능을 지녔다 하였다.
나이는 한 살 어리지만 스페인 촌놈(종교인의 입장에서)에 불과한 자신과 달리 이탈리아 교황령 태생으로 교육 과정부터 달랐다던가.
집안의 재력도 넘쳐나서 로마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재능도 뛰어나서 다른 나라의 언어를 삽시간에 익히고 수학, 과학, 미술, 철학 그리고 측량술조차 익혔다 하였다.
“참으로 뛰어난 사람이구려. 하지만 내가 알기로 남경에 서역인이 머물 방법이 없다 하지 않았소? 서역인은 오로지 대남도에 머물며 명국 상인과 교역을 하는 일이 전부가 아니오.”
“제가 허가를 받았으니 마테오 형제도 명국의 문을 두드려 본다 하였습니다. 성공할 가망성은 없지만 저희가 먼저 가서 도움을 주면 성공할 가망성이 늘어나겠지요.”
천주교의 전파에 도움을 주는 꼴이지만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조선이 스페인과 신경전을 벌이면서 천주교 전파가 늦어졌던 것을 본래 역사대로 되돌리는 격이 아닐까.
세스페데스는 짐을 챙기다 갑자기 생각났는지 의문을 표시했다.
“그나저나 서애 유께서는 무슨 마음으로 제 복사(服事)를 칭하시며 저를 도와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본래 세례를 받은 이만 복사가 될 수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천주교 전파를 허가하지도 않은 마당에 내가 공식적인 천주교 신자가 되면 이래저래 공격당할 거리가 넘쳐난다.
애초에 무교이기도 했으니 두루뭉술하게 말을 흐려 논점에서 벗어났다.
“가만 생각하여 보니 이역만리로 건너와 섬에 갇혀 생소한 입신체비에 몰두하고 즐길 것은 없으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소. 내 그렇지 않아도 휴가를 겸하여 돕고 싶은 마음이 생겼지.”
“휴가가 좀 더 길면 더욱 좋겠지만 서애 유께서는 나라의 중책을 실행하시는 분이 아닙니까. 업무와 연관된 일이 더욱 길어야 하겠지요.”
세스페데스의 태도를 보건대 입신체비에서 벗어나려면 배 위에 타도 크게 불만을 표출할 것 같지는 않다.
나도 생각해 둔 건이 있으니 시종이 입을 법한 중인의 복장으로 갈아입은 채 이산해가 이끄는 상단과 함께 남경으로 향했다.
남경에 입항하는 배는 병사들에게 검문을 받는다.
조선에서 관세라는 세금을 매기니 명나라도 이를 따라 상품에 따른 세금을 매겼지만 이 세금을 내지 않는 방법이 있으니 뇌물이다.
배에 올라탄 통통한 명나라 참장(參將: 변경이나 각 거점을 지키는 장수)은 대놓고 뇌물을 원하는 눈치였다.
이산해가 나서서 은자를 챙겨주었지만 참장은 명부를 훑어보고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물품에는 이상이 없지만 명부를 보니 승려가 끼어 있다 하였으니 의심스럽구려. 승려라는 자는 대체 누구요? 어서 나오시구려.”
“접니다. 장군께서 서역에서 온 승려인 저를 찾으시니 어인 일이십니까?”
수사가 눈을 흘기며 통역으로 나온 나와 세스페데스를 번갈아 가면서 보았고 명나라 병사들은 처음 보는 서양인에게 놀라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기까지 했다.
심지어 수사는 화들짝 놀라 칼에 손을 가져가며 호통을 쳐댔다.
“네 이놈! 서역인이 감히 지엄하신 황상의 명을 어기고 남경에 발을 들이려 하더냐! 네놈들에게 허가된 땅은 한 치도 없으니 이 진조작(陳朝爵: 진린의 자)에게 엄벌을 받지 않으려면 당장 돌아가거라!”
“장군께서 얼마나 병졸을 잘 조련하며 정무에 임하시는지 근엄한 기세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바라는 일이 있으니 약간의 은자로 엄한 눈을 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세스페데스의 뒤에 숨어 있던 내가 은자를 쥐여주자 진조작이라는 장수는 헛기침을 하며 은자를 받아 넣더니 나를 물끄러미 보고 코웃음을 치며 말하였다.
“자네의 체격만 보아도 알 수 있으니 속일 생각을 말게. 자네는 조선의 관원보다 체격이 작으니 이 서역 승려의 시종이 분명하네. 대체 이 사람은 누구고 자네는 또 누구인가?”
“저는 의성 사천마을 출신의 허 도령이고 이분은 머나먼 서반아에서 아국과 명국의 지식을 배우기 위해 찾아온 승려인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입니다.”
“허 도령과 그레고리오? 그런데 말솜씨가 제법 능숙하니 이해할 수 없군. 자네는 역관도 아니요, 관원도 아닌데 대체 명국의 말은 어디서 배웠는가?”
“제 부친께서 북경을 다녀온 적이 많으시기에 알음알음 배워뒀습니다.”
난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중국어를 배울 때에 아버지의 도움도 받았고 아버지는 정식 사신으로 북경을 네 번이나 오간 분이니까.
하지만 이 통통한 장수는 여전히 돈이 고팠는지 트집을 잡아댔다.
“그렇다면 조용히 조선에 머물며 지식을 쌓을 것이지 어찌하여 남경에 온단 말인가. 조선에서 허가하면 여기서도 허가할 법하지만 간자라면 경을 칠 일이니 들여보낼 수 없다네.”
“자고로 사람이 모이는 장소에 지식이 있는 법입니다. 제가 승려님의 섭생을 비롯한 생활을 책임지고 있으나 승려께서는 명국의 지식을 알고자 하였으며 주상전하의 재가(裁可)가 떨어졌기에 남경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이것도 거짓말은 아니다. 섭생을 비롯한 생활? 입신체비를 가르쳤으니 모든 생활을 책임지는 격이고 주상전하의 허락도 떨어졌으며 명나라에서 선교하면 지식도 쌓을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상대는 여전히 눈을 흘겨댔다.
“조선의 왕이 허가를 내렸다 했는가? 하지만 나는 명국의 장수로서 입항이 금지된…… 서역인을 보지 못했네! 이 승려는 얼굴이 창백하고 모발의 색이 희미하지만 조선인이군!”
입항이 금지된 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은자를 쥐여주니 태도가 변한다. 아예 돈을 좀 더 먹여서 도합 서른 냥의 뇌물을 주니 세스페데스의 신분증명서까지 써줬다.
조선이면 관리들이 줄줄이 형무소로 끌려가고 상관이 파직당할 일이 은자 서른 냥으로 해결되다니 명나라의 부패 수준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산해도 많이 경험한 일인지 한숨을 쉬며 나와 세스페데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은자 몇 냥에 국경을 열어주는 격이 아닌가. 요동도적들이 문제가 아니고 뿌리 속까지 썩어 있는 명국이 문제일세. 이 부패의 근본을 잡아내지 못하면 명국은 스스로 무너질 것이네.”
“저런 장수가 변방을 책임진다 생각하니 소름이 돋는군. 은자 몇 냥을 주면 외적을 잠입시킬 것이요, 내부와 외부에서 협력하면 천하제일관도 며칠을 버티지 못할 것이네.”
명나라가 송두리째 무너지면 그 타격은 조선에 퍼지고 대명무역이 중단되며 재정은 삽시간에 궁핍해지리라. 적어도 내가 살아생전에 명나라가 멸망하는 꼴은 보지 않기를 바라며 거리에 들어섰는데 눈이 돌아갔다.
그냥 별천지이다. 지금은 1577년 3월 중순이라 정월 대보름도 끝나고 중국 문화권의 명절인 답청절(踏靑節)도 끝난 지 오래이다.
하지만 길거리는 미어터지는 인파가 물결을 이룬다.
“이게 남경이라고? 북경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했잖아?”
“마드리드조차 뒷골목에 불과하겠군요. 비할 수 있는 장소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북경은 상가도 규모만 클 뿐 사람의 밀집도 따지면 청계천과 비슷했는데 여기는 규모도 사람도 청계천을 아득히 초월한다. 조선에서는 가격 문제로 별로 만들지 않는 삼 층 목조건물이 여기서는 일반 상가이다.
이게 중국의 저력이라 생각하며 숙소를 잡아두고 작업에 들어갔다.
일단 이산해는 조사를 위해 가짜 병에 걸려야 하니 준비한 물건을 의원과 상의해 풀어놓았다.
“이건 말려놓은 감자의 싹이 아닌가?”
“내 자네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꾀를 썼다네. 자네의 말을 듣고 한참을 웃었지만 생각해 보니 감자의 싹만큼 후환이 적은 독이 별로 없더군.”
참으로 무식하지만 이 시대에선 잡아낼 수 없는 가짜 질병이다. 감자 싹의 독은 두통과 설사, 그리고 복통을 일으키지만, 토해내거나 설사를 일으켜 장을 비우면 며칠 만에 치료된다.
아마 의원과 작당하여 계속 꾀병을 일으키며 몇 달이고 머물 수 있겠지.
마테오 리치가 오기로 한 날을 기다리며 주변 상황을 알아보니 마침내 마테오 리치가 남경에 도착했다.
* * *
당연한 일이지만 진조작은 이번에도 은자 스무 냥을 받더니 콧김을 씩씩 내뿜고 열 냥을 더 받아 은자 서른 냥이 되어서야 마테오 리치의 입항을 허가하였다.
“은자 서른 냥이면 사람을 팔아넘길 수 있으니 사람을 들여보내는 일도 가능하군요.”
진조작이 무슨 유다인가? 아무 문제 없다는 증명서까지 받은 마테오 리치는 땅에 입을 맞추고 성호를 그은 다음 우리를 따라 숙소로 돌아왔다.
이역만리에서 동문을 만난 감격의 눈물을 흘리던 마테오 리치는 눈물을 닦아내고 나에게 인사를 올렸다.
“이분은 조선의 관…… 아니, 조선에서 나를 도와주는 허 도령이라는 분이네.”
“허 도령께서 군주의 명을 받아 그레고리오 형제를 도와주시니 이 또한 주님의 은총이며 조선의 배려가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동양의 예법을 알음알음 배웠는지 깊숙이 목례를 하는데 아무리 봐도 마테오 리치는 내 정체가 허 도령이 아니고 세스페데스의 편지에 나왔던 유성룡임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의 입항을 도와줬으니 무슨 목적이든 큰 문제는 없다 여기고 있겠지.
세스페데스도 이 사실을 인지했는지 서로 라틴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마테오 형제를 이 년 만에 만나게 되어 참으로 기쁩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경험했는지 모를 일이지요. 조선에서의 생활은 참으로 험난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세스페데스 형제? 형제가 먼저 남경에 와 계실 줄은 몰랐는데 어찌 여기 오게 되었습니까? 그리고 체형이 마치…… 왜 이리 살이 찌셨습니까?”
알음알음 라틴어를 배워서 들을 수 있긴 한데 겉으로 보면 살이 찌긴 했다. 세스페데스는 체형조절을 위한 단 한 번의 절육(커팅)만 시행하고 이외에는 모조리 양생(벌크 업)에 매진했으니 근육과 지방이 동시에 늘어났지.
반면 세스페데스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는지 콧김을 씩씩 내뿜으며 구석으로 가 장롱을 들어 올리며 축기(펌핑)를 실시하였다.
마테오 리치는 이 모습을 보더니 어디선가 보았다는 듯이 라틴어로 중얼거렸다.
“저건 분명 피렌체의 몇몇 가문에서 전해져 오는 단련법인데…….”
“마테오 형제여! 조선에는 피렌체에서 전해지던 단련법의 원류가 있었소! 내 조선에 대해 배우려다가 이 단련법을 성경에 근거하여 해석한 것을 체득하기에 이르렀지!”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성경에 근거하여 해석했다니요?”
“상세한 사항은 묻지 마시오. 내 살아오면서 이러한 고난은 경험한 적이 없지만 덕분에 조선의 가르침을 몸으로 체득할 수 있었지! 보시구려!”
세스페데스는 축기가 끝나 어설프게 부풀어 오른 근육으로 이런저런 자세를 취하였지만 절육이 없어 지방이 넘치는 몸으로 자세를 취하니 볼품없었다.
마테오 리치는 요모조모 살펴보더니 한숨을 쉬고 말하였다.
“미켈란젤로의 역작인 다비드 상과 흡사한 모습이긴 합니다. 하지만 다비드 상을 만들 때에는 조선에서 몸을 단련해 그레고리오 형제보다 군살이 적고 근육이 많은 사람을 모형으로 삼은 것이 분명합니다. 근육의 질이 다르지요.”
“아니오! 내가 비록 다비드 상보단 못해도 그럭저럭 알맞은 몸 아니오?”
“제가 로마에서 서품을 받으며 다비드 상을 본 기억이 있는데 명백히 부족합니다.”
세스페데스는 입신체비가 더 가혹해질지 모른다 생각해 내 눈치를 슬슬 살피는데 중요한 건 그런 사소한 것이 아니다.
지금 뭐라 했지? 다비드 상이 어쩌고 어째?
피렌체는 미술가의 도시이며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비롯한 수많은 미술가들의 산실이다.
16세기 초 건축과 미술로 세계에서 으뜸가는 장소를 꼽자면 피렌체이지!
르네상스 미술이 전성기에 다다를 무렵 입신체비를 익힌 이들이 돌아와 모델이 되었다고? 혹시 수양대군처럼 삼대운동 1,350근을 찍은 근육괴물들이 르네상스를 오염시키지 않았을까?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웃옷을 벗고 자세를 취했다.
“잠시 물어볼 것이 있소. 혹여나 그 다비드 상이라는 기물이 내 체형과 닮았소? 아니면 근육이 더욱 많소?”
“갑자기 웃통을 벗으시는 이유를 모르겠지만 다비드 상은 그렇게 근육이 드러나 있지 않고 보기 좋을 정도의 근육과 군살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하지만 비슷한 것이 있으니 피에타군요.”
“지금 뭐라 하였소?”
“피에타를 만들 당시 십자가에서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혹독히 시달린 모습을 원해 운동으로 군살을 걷어내 사람이 죽기 직전에 다다른 모습을 표현하였습니다. 당신의 체격이 피에타와 흡사한 것 같군요.”
망할 수양대군! 르네상스 미술품도 죄다 근육에 오염되지는 않았지만 몇몇 역작이 오염되었으리라.
유럽 여행 당시 일정을 틀어가며 머물게 만들었던 미술품들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이 분노를 어디에 풀어야 할지 생각했는데 내 눈치를 슬슬 보며 어떤 고난이 기다릴까 기대하는 세스페데스와 함께 입신체비로 해소해야지!
조만간 보선 함대에 교대할 수부(水夫)들이 머무는 장소에 세스페데스를 데려갔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지 걱정하던 세스페데스는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병사들의 눈치에 질겁했는지 나에게 조곤조곤 속삭여 댔다.
“자고로 선교(宣敎)라 하면 위정자의 눈치도 보아야 하며 삿된 행위라 비판을 받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러니 저희 예수회에서는 관료들의 허가를 받고 선교에 임합니다.”
“관료의 허가는 이미 받지 않았소? 그리고 내 듣기로는 예수라는 성현을 비롯하여 수많은 이들은 험난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그대로 두는 법이 없었소.”
“그거야 성인들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이를 따르는 분파는 프란치스코회(수도회 분파, 청빈과 봉사를 목표로 삼는다) 입니다! 제가 대체 어떤 방식으로 이들을 도와야 하는지…….”
지금까지 해온 일이 산더미인데 왜 못 한다고 그러시나.
한창 물자를 내리고 올리는 수부들은 파김치가 되었는데 나는 앞으로 나서서 수부들에게 세스페데스를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다들 보시오! 이 분은 서역에서 오신 승려인데 몸을 단련하고자 당신들이 행하는 일을 돕고자 하였소! 어서 녹로(도르래)의 회롱기(밧줄을 감는 기구)를 내어주시구려!”
“이건 연자방아와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제가 무슨 삼손이라도 됩니까?”
난데없이 입신체비를 실행하게 된 세스페데스지만 나름 성직자라고 회롱기에 달라붙었다.
평상시에는 네 명이 달라붙어 움직이는 녀석이지만 수부들은 우리를 의심했는지 나와 세스페데스만 남긴 채 멀찍이 떨어졌다.
“미시오! 선원에 대해 선교하고자 정하였으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는 법 아니겠소? 입신체비를 하면서 익혔던 옛 성현들의 발자취는 어디로 사라졌소!”
“이걸 해서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무슨 도움이 되긴 엄청난 도움이 되지. 처음에는 별 미친놈을 다 봤다는 표정으로 멀찍이 떨어져 있던 수부들은 어느새 우리와 일하며 한 몸이 되어 있었다. 허벅지가 아려오고 팔 근육이 끊어질 것 같았는데 이는 세스페데스도 마찬가지이리라.
멀찍이 떨어져 우리를 감시하던 병졸들도 기가 막혔는지 일하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기나긴 하역작업이 끝나고 세스페데스는 아예 대자로 넘어져 바닥을 꿈틀거렸고, 나도 등을 기댄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자네들은 대체 무엇 때문에 여기서 일하는가? 내 살다 살다 수많은 사람을 보았지만 서역의 승려와 시종인 조선 사람이 이렇게 힘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네.”
나름 높은 관원이 오자 세스페데스는 뭐라 중얼거렸지만 이를 받아서 해석하고 전달하는 사람은 나이다.
나는 뭣도 모르고 휘말렸다는 말을 이렇게 전해줬다.
“이분은 서역의 승려인데 자고로 물이 낮은 장소로 흐르듯 종교를 낮은 곳에서부터 위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니 가장 험난한 일을 도맡아 하며 사람들의 신임을 얻고 친해진 이후 믿음을 전파한다 하였지요.”
“그러니 사람들을 돕고 친해진 이후 종교를 전파하겠다. 그런 말인가? 일을 아무런 품삯도 받지 않고 열심히 도와주니 기쁜 일이지만 정말 친해진 이후에 전하게나. 여기서 일하는 것은 눈감아주겠네.”
어느새 내 작전에 휘말린 세스페데스는 아무것도 모르고 관원이 돌아가자 기뻐했지만 앞으로의 고난은 배가 출항하기 직전까지 이어질 거다.
한 달 정도는 죽어라 일해야 배에 올라 종교를 전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