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355화
2부 13장 2화 – 장거정 죽이기(2)
막막한 마음에 괜히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는데 상왕전하는 얄궂은 것 같으면서 아닌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이니 상상조차 하지 못한 말이 이어졌다.
“명국의 수보인 장거정은 처음에는 개혁을 추진하고 황제의 스승으로 모범을 보였지만 이제는 아니라네. 백성을 수탈하는 탐관(貪官)이 아닐 뿐 다른 곳에서 수탈을 저지르고 있지.”
“하오면 명국에서도 의기가 넘치는 사람이 있을 것이옵니다. 혹여나 없더라도 재물을 탐한다면 손해를 보는 사람이 생기니 장거정을 탄핵할 것이 분명하옵니다.”
“그 재물을 다른 장소에서 마련하면 어찌 되겠는가? 이를테면 장거정이 나서서 만들어낸 수군에서 재물을 얻어낸다면? 그가 탄핵 당할 일이 있던가?”
이런 경우에는 없네. 장거정이 이렇게 날뛰면서 반대하는 무리가 없는 이유는 황제의 스승이라는 명분과 다른 어딘가에서 샘솟는 자금이다. 그 샘솟는 자금의 정체를 생각해보니 뻔했다.
가장 규모가 큰 조선을 통한 무역이나 사업을 주선해 뒷돈을 챙겨 정치자금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밀명을 받은 입장에서 물어볼 것은 물어봐야겠다.
“없사옵니다. 하온데 아국이 장거정의 패악을 바로잡는다고 어떠한 이득을 얻겠사옵니까? 혹여나 명국 황상이 스승을 탄핵한 아국에 진노를 퍼부어 손해를 볼까 염려할 뿐이옵니다.”
“이득이라. 명국의 관료들이 장거정을 중심으로 한 몸으로 뭉쳐 막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장거정이 탄핵당하지 않고 후임을 두어 다시 관료들을 한 몸으로 뭉치게 하면 어찌 되겠는가?”
뭔지 생각할 필요도 없다. 장거정이 모든 관료들을 휘어잡아 요동 문제에 적극 개입하여 진상을 숨기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조선이 요동의 진상을 알려도 매번 가로막힌다.
반면 장거정이 후임자도 두지 않은 채 실각하고 명나라 조정이 각 당파로 분열하면 조선이 개입할 여지가 생긴다. 오히려 장거정의 부패를 고발한 조선에게 감동한 만력제는 훗날 요동의 통치권을 할양할 가능성조차 있다.
“신의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상왕전하께서 심사를 거듭하시어 아국의 손실을 가져오는 명국의 부패를 일소하라는 밀명을 내리셨는데 미욱한지라 성교(聖敎 - 임금의 말씀)의 뜻을 재차 여쭸사오니 이 불충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상왕이면 실록에 기록될 사람이고 주변에는 사관이 우리의 대화를 적고 있을게 분명하다. 내가 너무 많은 진실을 알면 훗날 문제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을 돌려야지. 그러자 상왕전하도 껄껄 웃으며 답했다.
“벌하는 대신 더욱 열심히 일하길 바랄 뿐이네. 여러 방법을 모색해보다 정 불가하다면 대양도 수영으로 발령받을 예정인 정걸을 찾아가 보게나.”
“전하께서 하명하시는 바를 마음속 깊숙이 새기겠사옵니다.”
“자네 말고 밀지를 받은 이는 여럿 있다네. 이들과 협력하여 방법을 모색하고 조만간 효험을 보길 바랄 뿐이네. 어서 돌아가서 업무에 임하게나.”
다른 누구도 아니고 이전에 밀명을 받은 김성일이 있지 않은가. 농조에서 한창 야근하다 퇴근을 마친 김성일을 찾아가니 그는 눈치를 보면서 방 안으로 불러들여 필담을 시작하였다.
[서애 자네와 마찬가지로 나도 주상전하의 명을 받아 명국의 수보 장거정에 대한 조사를 진행한다네. 미곡과 관련된 일이니 농조에서 나서야지.]
[주상전하께서도 장거정을 내치려 하신단 말인가? 미곡과 관련된 일이라 하니 제법 민감한 사안인 것 같은데 혹여나 이야기해줄 수 있나?]
[혹시 모를 흉년을 대비해 산동 일대에 삼백만 석의 미곡을 비축하고 흉년이 발생하지 않으면 이를 무역자금으로 활용하지 않던가. 이 곡식이 사라졌다 돌아오는 일이 잦다 들었네.]
장거정은 환곡(還穀)으로 쌓아둔 삼백만 석의 미곡을 주물럭거리며 이득을 챙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걸 조선에서 내놓으라 하면 세금을 털어서 벌충할 놈들이니 현장을 포착해야겠지.
이후에 여러 사람을 통해 알아봤는데 주상전하도 상왕전하도 한 몸이 되어 장거정의 부패를 조사하라는 밀명을 내렸다. 최소 다섯 개의 건수가 잡혀있는데 이게 한 번에 상소문의 형태로 올라간다면?
장거정이 권력의 중심이건 뭐건 명나라 관료들은 한 몸으로 장거정을 탄핵하여 삭탈파직 아니 당장 삼대를 멸할 역적이라 칭하리라. 문제는 내 건수가 가장 막막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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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은 죄다 땅 위를 조사해야 하는데 나 혼자 바다 위를 조사해야 한다. 더군다나 보선함대는 명나라 수군의 중역으로 군림하며 국가 기밀에 속한다.
명나라에서는 이를 적극 활용해 해적을 퇴치한다는 명목으로 머나먼 남쪽의 여송부터 산동반도까지 항해하여 다시 남경으로 돌아와 정비하는 방식으로 운행한다더라.
이걸 어떻게 알아냈느냐고? 여기는 한강 위에 떠다니는 나룻배고 내 앞에서 노를 젓는 사람은 바로 남경의 비리를 알아내라는 밀명을 받은 이산해이다.
“나도 막막하지만 내수사 관리의 협조를 얻어 일을 진행할 수 있었는데 자네의 일은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 모르겠군.”
이산해는 숙부인 이지함에게 미주를 비롯한 전 세계의 물산에 대해 배웠으니 각종 물자를 빼돌리는 경로를 추적하라는 명을 받았지. 다른 배가 가까워오자 서로 노를 저어 다른 배와의 거리를 벌리고는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나야 남경에 물산을 보낸다며 따라가 병을 핑계 삼아 남경에서 몇 달을 쉬면서 알아보면 충분할 것이네. 문제는 자네일세. 결국 선박에 잠입해야 하는데 이게 가능한 일인가?”
“명국의 말은 할 줄 알지만 내가 잠입하려면 잡부(雜夫)로 배에 승선해야 하겠지.”
잡부로 배에 승선한다? 가능한 일이다. 내 덩치는 소룡식 입신체비를 익혀 그리 큰 편도 아니고 명나라 말도 원어민에 가깝게 할 수 있다. 문제는 효율이 지나치게 떨어진다. 이산해는 뭔 일이 일어날지 생각하고 고개를 저었다.
“잡부로 승선하면 배가 원래 항구로 돌아올 때 까지 한 배에 탑승하니 꼬박 일 년을 소모해야겠지. 혹여나 자네가 탑승한 배가 멀쩡한 상태라면 어찌 하겠는가?”
“그런 경우에는 일 년을 허비하는 일이 되니 답답할 뿐이네.”
“하긴 배 위에서 일 년을 지낸다면 몸이 축나는 것을 넘어서서 정말 병으로 쓰러질지도 모르지. 제대로 된 약재나 의원도 없는 배 위에서 병에 걸리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다네.”
조선 잡부들이 먹는 식사는 따듯한 물에 불려낸 찐 쌀에 말린 근어(황태)와 대충 삶는 둥 마는 둥 한 시래기지만 이 정도면 다른 나라 잡부들과 비교할 수 없는 호화로운 식사라 하였다.
세스페데스에게 듣기로는 치아를 박살내는 비스킷을 먹고 보름이 지나 물이끼가 둥둥 떠다니는 물을 들이켜 시도 때도 없이 곽란을 일으켰다 했는데 내가 마실 물은 더욱 끔찍한 상태이리라.
이런 고난을 어떻게 견딜지 몰라 답답한 마음에 노를 젓고 있으니 이산해는 나름 생각해 둔 것이 있는지 다른 제안을 내놓았다.
“어차피 자네의 일이 내 일이나 시작은 같다네. 나와 함께 남경으로 향하고 명나라 잡부들을 여럿 고용해 각 배를 알아보고 그 상세를 자네가 분석하면 어떠한가?”
“잡부들의 지식이 거기서 거기가 아닌가. 그럴 바에는 명나라 군관을 매수해야 하는데 발각될 경우에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네. 첩자를 보낸 셈이 아닌가.”
“직접 잡부로 위장해 탑승하면 문책당할 염려는 없지만 몸이 축나고 배 하나만 확인하니 헛손질을 할 염려가 있으며, 사람을 고용하면 첩자라 역공을 당할 수 있다니. 뭘 해도 문제로군.”
조선에서 온 지식이 많은 잡부가 탑승해 우연히 비리를 알아차렸다 하면 이는 우연히 일어난 일로 여겨 명나라에서도 별 말 없이 넘어갈 것이 분명하다. 오히려 비리를 고변한 이를 칭송하겠지.
하지만 잡부와 군관을 줄줄이 매수해 설계도를 가져간다면 아무리 조선에서 만든 함선이라 해도 대놓고 국가 기밀을 유출하려는 시도이다. 이를 증거로 제시하면 혹 떼려다 혹이 아니고 말기 암을 붙이는 수준이다.
상왕전하께서는 정 방법이 없으면 조만간 대양도수영의 절도사로 임명될 정걸을 찾아가라 했었다. 정걸이면 나이도 많은데다 명성도 자자한 사람이니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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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걸은 평생 수군에서 일한 장수이며 올해 62세로 환갑을 넘긴 나이이다. 자고로 사람이 환갑은커녕 50세만 넘어도 입신체비의 효험이 쇠하고 관절이 상하며 근력이 줄어드는 법이다.
“서애 아닌가! 자네가 여기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네!”
하지만 정걸은 근손실 따위는 없다. 삼대운동 일천 근은 할 체격으로 격려한답시고 내 등을 쳤는데 얼마나 힘이 센지 앞으로 고꾸라졌다. 재빨리 일어나니 정걸도 머쓱했는지 괜히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해변으로 나아갔다.
“상왕전하께 이미 밀명을 받았다네. 그렇지 않아도 가장 험난한 일이었는데 자네가 내 도움을 구하질 않아 신묘한 대책을 마련했으리라 여겼지. 하지만 자네도 한계가 있었군.”
“제가 아직 세상물정에 대해 잘 모르는지라. 사실 제가 잡부로 일하며 보선함대에 머물러 볼 생각이었는데 실패할 경우 세월만 낭비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자고로 수부(水夫)의 일은 수부가 잘 아는 법이네. 자네가 승선해보았자 생소한 업무에 휘둘리다 오히려 몸을 상하게 될 것이네. 그나마 내가 생각한 방법은 세 가지가 있네.”
세 가지나 된다고? 뇌에도 근육이 들어찬 것 같은 환갑이 넘은 근육덩어리가 뭔 생각을 했단 말인가. 아니나 다를까 정걸의 말을 들으니 참으로 호쾌해서 할 말이 없었다.
“첫째 방법은 보선 함대 인근에서 배를 난파시키는 방법일세. 이럴 경우 번국인 조선에게 은혜를 베푼다 하며 구원할 것이요 항구로 돌아올 때 까지 배를 오가며 마음대로 조사하겠지.”
“저기 배를 난파하였는데 혹여나 보선함대의 방향이 변하거나 삿된 이가 구하려 하지 않으면 상어 밥이 되거나 바다 위에서 떠다니다 죽는 꼴이 아닙니까?”
“상어가 그리 흔하던가? 설령 습격하면 창으로 찔러 죽이면 되는 일이고 뭍까지 이십 리(8km)정도는 맨몸으로는 불가해도 나무토막을 잡고 헤엄치면 당도할 수 있지 않던가. 저 바다를 보게나.”
정걸이 가리킨 방향을 보니 벌써 11월이 다 되어가는 험난한 바다 위에는 수십 명의 임해도감 병사들이 나무토막 하나를 부여잡고 죽어라 육지를 향해 헤엄치고 있었다.
“에이 모자란 놈들! 자맥질에 능하면 동래부터 대마도까지 자맥질로 다닐 수 있거늘 기껏해야 이십 리를 견디지 못하고 탈락하는 이가 속출하다니. 이게 다 근육이 부족해서야!”
틀렸다. 정걸은 완벽한 근육적 사고를 갖춘 근육뇌가 되어버렸다. 적어도 첫 번째 방법은 실행하다 죽을 것 같으니 다음 방법을 택해야 하리라.
“저기······. 임해도감 병사들은 하나같이 정병(精兵)이 아닙니까. 저라면 몰라도 모든 이들이 저렇게 날래게 움직일 수는 없는 법입니다. 나머지 방법은 무엇입니까?”
“보선함대와 훈련을 하자고 서로 육박전을 벌이는 것일세. 그러다 자네를 비롯한 여럿이 배 위에서 길을 잃어 보선 함대에 들어가면 충분한 일이지. 적어도 시일은 벌 수 있다네.”
“그러다가 간자로 낙인찍혀 두들겨 맞고 배 위에서 버려지면 또 헤엄을 쳐서 아국 함대로 향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생각해보니 그런 문제도 있었군. 내가 계책에 능숙하지 못하여 미안할 뿐이네. 그리고 마지막 방법은 내 생각만 해두었지 도저히 말할 수 없는 방법인데······.”
얼마나 무식한 방법이기에 저렇게 쩔쩔 맬까 두려웠다. 혹시나 근육을 길러 배 위로 기어올라 조사하라는 방법인가? 침을 꿀꺽 삼키자 정걸은 내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괜히 고개를 돌리며 말하였다.
“선원이건 잡부건 배 위에 오르는 이들은 천기(天氣 - 날씨)가 목숨을 좌우한다고 여겨 삿된 믿음을 중요히 여긴다네. 기이한 풍습이나 무당들이 만든 부적을 지참하는 일은 흔하지.”
“저도 많이 있다 들었습니다. 서역인들도 뱃머리에 여인의 모습을 새기고 부적을 지참하며 홀수에 기이할 정도로 집착한다더군요.”
“아국도 마찬가지라네. 나도 암묵적으로 허가하는 판국이지만 이는 명국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그러니 자네가 도학(道學 - 도교)에 능하여 명나라까지 온 도사라 말하고 배 위에서 해신을 달랜다는 제사를 지내보게.”
지금 뭐라 했나? 이미 조선에서 학풍이 끊기다 시피 하여 명나라 도사를 수입해 쓰는 도학을 배워 도사놀이를 하라고? 얼마나 도학이 뭉개졌는지 잡학에 능한 이지함도 기초만 알더라.
명나라는 황제도 선단을 만들어 먹고 선약이 각지에 퍼지며 수은을 좋아하는 판국인데 이런 도사들을 이기려면 어마어마한 학식을 쌓아야 하며 선단에 들은 수은도 몸에 쌓아야겠지. 정걸은 내 눈치를 살피더니 말을 흐렸다.
“당연히 도학을 익힌다 하면 자네를 문책하는 이들이 생길 것이며 적어도 일 년은 넘게 걸릴 것이네. 하지만 삿된 믿음을 중요히 여기는 선원들이니 가장 잘 통할 방법이지. 아니면 무당은 어떠한가?”
“무당이라 하셨습니까? 믿음이 어떠하던 간에 문제는 없다는 말씀이신지요?”
“물론일세. 대다수의 수부들은 성현께 제사도 올리고 불씨(석가모니)에게 시주도 올리며 무당들에게 굿을 지내라 하네. 심지어 맥이 끊긴 도학도 섬기는 자가 있다네.”
그냥 종교적 상징이라면 모조리 주워섬기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 주변에도 종교 전문가가 있잖아? 세스페데스 신부와 고니시다! 정걸의 손을 맞잡고 바로 인사를 올렸다.
“어르신의 말씀 덕분에 제 머리가 맑아졌습니다! 도사도 무당도 아니고 서역에서 온 승려라 하면 명국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고견(高見)을 묻고 싶습니다.”
“서역에서 온 승려······. 서역에서 온 승려라 하면 충분히 통할 것이네. 이역만리에서 여기까지 건너왔다는 것 자체가 천기를 이겨내고 당도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었다. 지금쯤 이이의 입신체비가 끝나 파김치가 되어있을 세스페데스와 고니시를 찾아가니 둘 다 사람이 변해있었다.
“수난기약 다다르니 주 예수 산에 가시어······.”
퀭한 눈으로 성당으로 향하며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성가를 중얼거리는 세스페데스와 얼마나 하체에 몰두했는지 아예 지팡이를 짚은 고니시라니. 둘 다 근육은 엄청나게 늘어났다.
세스페데스는 사제복 위로도 두툼해진 사지가 보이니 아마 삼대운동 600근을 돌파했을 것이요. 고니시도 작달막한 키라서 문제지 사지에 근육이 들어찼다. 그러더니 둘 다 나를 보고 서로 숨으려 하였다.
“세스페데스 대체 왜 이러시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아무 일도 아닙니다! 제가 고난을 겪어보았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비할 바가 있겠습니까? 그저 고난을 약간 체험했을 뿐입니다!”
약간의 고난이라 했는데 성당 옆에 가로놓여진 십자가가 보였다. 아마 이이는 하체를 집중 단련하자면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언덕 아니 산을 오르라 했겠지. 둘 다 눈치를 보다 고니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이제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주군께서 말씀하시기를 당장 돌아오라 하셨으니 마침 잘 된 일이 아닙니까! 복사야 새로 구하시면 될 일입니다!”
“아니라네. 자네 같은 복사가 또 어디 있겠는가! 입신체비를 행해 몸이 날렵해지고 성인들의 고난을 모두 체득하였으니 이는 신앙의 발로일세!”
같이 고난을 나누자는 세스페데스와 이 지옥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고니시가 몸싸움을 벌였지만 지금 상황에서 고니시는 필요 없다. 내가 배에 잠입하려면 서역 승려를 보좌하는 시종으로 잠입해야 하지 않겠는가.
“고니시 자네는 이만 왜국으로 돌아가도록 하게나. 그리고 세스페데스 신부에게 신앙을 전파할 기회를 줄 것인데 어떻소. 머나먼 명국의 선원들을 위해 남경에서 행하는 일이오.”
“명국의 선원이라 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예수회에서 형제인 마테오 리치를 보내 남경에 머물게 할 예정인데 마테오 형제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겠군요.”
처음에는 명나라에 세스페데스가 갈 명분을 만들어야 했는데 다른 선교사가 방문할 예정이라면 명분이 충분하다. 조선에 머물던 선교사가 명나라에 온 신참을 도와주려고 방문했다 우연히 선교를 행하고 배를 축복한다고 말하면 충분하겠지.
다만 마테오 리치라는 선교사가 방문하려면 내년 3월은 되어야 한다더라. 아무 일도 하지 않기는 뭣하니 세스페데스와 보조를 맞출 천주교 교리를 배우는데 시일을 좀 소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