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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조선-347화 (347/573)

근육조선 347화

2부 12장 5화 외교 분쟁(2)

조선 왕실은 입신체비와 위생개념의 도입 이후 단명하여도 환갑에 이르게 되었다.

결국 오십 세가 넘어 몸이 쇠약해진 상왕이 젊은 세자에게 왕위를 양도한 이후 왕실의 웃어른이자 조언가로 머무르는 일이 일반적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이방원에 의해 퇴위당했지만 그 이후의 왕들은 하나같이 이러한 양위로 국무의 부담감을 분할하였다. 문종의 즉위 이후 법을 제정한 세종이나. 세조의 제위 이후 군권을 움직인 문종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리고 양위(讓位)를 마친 왕이 머무는 별궁인 창경궁에 한밤중이 되어 한 무리의 사람들이 도착하였다.

정문인 홍화문으로 들어선 왕 이연은 불편한 표정으로 사관을 바라보았다.

“아바마마를 뵙고자 하니 자리를 피하도록 하라.”

“신은 오로지 본 일을 적을 뿐이옵니다. 신이 눈을 막는다 하여도 하늘과 땅이 모든 일을 보고 있을 것이옵니다.”

지금부터 민감한 대화가 오가겠지만 사관을 물리칠 근거가 없었다. 세종대왕이 작성하고 이후 왕들이 다듬은 경국대전에도 사관을 물리치는 일은 침전에 머물 때를 제외하고 일어나서는 안 된다 하였으니까.

상왕인 이호에게 조언을 구하는 일조차 간섭받는 이 상황이 못마땅했다.

십여 명에 달하는 관원이 밀착해 있으니 이들을 널리 퍼뜨리면 조금 부담이 줄어들지 않을까.

그런 마음을 먹으니 좋은 꾀가 떠올랐다.

“근래에 들어 형님의 배동(陪童: 세자와 대군에게 배정된 친구)으로 알고 지내던 정철이 요람(要覽: 백과사전)을 편찬한다 하였지. 조만간 춘추관의 인원을 더 배정할 것이니 이에 대응하는 등록(登錄)을 작성함은 어떻겠소?”

“신은 주상전하께서 정하신 바를 따를 뿐이옵니다.”

사관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이연의 입술이 묘하게 뒤틀렸다.

각 지방으로 사관에 준하는 이들이 파견되어 문서를 취합하고 평론을 내리면 춘추관의 부담은 어마어마해질 것이다.

근래에 일어난 일을 생각하면 명분도 충분하니 더욱 좋지 않은가.

조만간 춘추관에 나아가 윤원형의 패악과 흡사한 우역의 전파를 들먹이면 머나먼 북방부터 이 세상의 반대인 미주까지 사관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주상께서 이 밤중에 어인 일이신지요.”

환갑에 왕위를 물려주고 육 년이 지난 상왕 이호는 왕위에 있으면서 몰려온 피로와 불안이 삽시간에 몰려왔는지 이십 년 가까이 늙은 모습이었다.

본래 훤한 낮에 만나보려 하였지만 논의가 길어져 뒤늦은 시간에 방문하게 되었으니 이연의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아바마마가 침전에 드실 무렵에 뵙고자 하여 비례(非禮)를 범하였습니다만 제 지혜가 부족하여 아바마마의 고견(高見)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며칠 동안 격무에 시달린 용안(龍顏)을 보니 이런 늦은 시간을 택한 이유를 알겠습니다. 이제 나이가 들어 밤잠이 줄어들었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나저나 외교와 군사와 관련된 문제라. 참으로 복잡합니다.”

이연이 왕위에 오르고 6년이 지났지만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젊은이였다. 정권을 장악하고 신하들을 통솔하며 차츰 왕위를 굳건히 만들 시점에서 민감한 문제를 다룰 여력은 없었다.

이미 상왕 이호도 사건의 전말은 알고 있었는지 이연의 이야기를 듣고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였다.

경복궁에서 진행된 논의를 상세히 듣자 이호는 천천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참으로, 참으로 난해한 일입니다. 시기가 너무 이르고 지나치게 큰일이라 문제이지요.”

“소자의 생각으로는 수보(首輔) 이자 황제의 스승인 장거정의 탄핵을 부추기고 올바른 신하를 자리에 앉혀 요동을 넘겨받는 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만약 명국 황상이 스물, 아니, 관례를 올리는 열여섯만 되었어도 주상의 의견에 동조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열넷이면 너무 어린 나이입니다. 주상께서 열넷 무렵에 정무에 참여하신 적이 있습니까?”

이연이 정무에 조금이라도 간섭을 했던 일은 열다섯이 되어서였다. 당시에도 스승인 이황을 비롯한 이들이 자신을 철저히 보좌하였으며 실제로 한 일은 사람을 쓰는 것이 전부였다.

이호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이연의 대응을 이상하게 여겼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으니 지금 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지 않은가.

“이미 장거정을 탄핵할 자료는 모조리 수집하였습니다. 아국에서 주문한 함선을 보수할 적에 목재를 속여 최소 십여만 냥의 이득을 착복하였으며. 일조편법이라 하여 세제를 개편하면서 이문을 챙겨 다시 삼십만 냥 이상의 재산을 착복하였지요.”

“그래도 너무 빠릅니다. 장거정을 탄핵하여도 남은 이 년 동안 혹은 황제가 장성할 때까지 새로운 스승들이 계속 장거정을 대신해 들어올 것이 아닙니까.”

장거정은 조선 입장에서 언제라도 내칠 수 있는 부패 관리였다. 언제라도 할 수 있다면 가장 확실한 효험을 보일 수 있는 시점을 노려서 덤벼들어야 하리라.

지금 장거정을 축출하면 다음 장거정이 생겨날 것이요. 새로 권력을 잡은 이의 약점을 알아내기 위해 또 애를 써야 하리라.

이호는 이연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더니 본래 성격이 급하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혹여나 요동을 단번에 병탄하고 싶으십니까?”

“아국은 명국과 전면전을 치러도 일 년 이내에 승리를 장담할 수 있으니 무력을 앞세워 요동을 전력으로 공격한 이후 옛 고려(고구려)처럼 지형을 이용해 수비를 굳히면 될 것입니다.”

생각해 보니 이호 자신도 아버지이자 지금은 경종으로 불리는 이찬에게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젊은 시절의 혈기를 생각하면 큰 실책은 아니기에 이호는 당시의 일을 떠올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요동은 크나큰 이변이 없다면 주상의 치세 말에 아국의 손아귀에 들어올 것입니다. 그마저도 명국이 스스로 떠넘길 것이니 이는 세종대왕께서 북방을 받아낸 일과 마찬가지입니다. 싸워서 얻어낼 수는 있지만 이는 하책 중의 하책입니다.”

빼앗은 물건은 되찾으려 하지만 스스로 넘긴 물건은 아쉬운 마음이 들어도 체면 때문에 돌려받을 수 없는 법이다. 더군다나 조선의 힘이 강하다 하여도 한계가 있었다.

“명국과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아마 여섯 달 이내에 산해관을 부수고 북경을 초토화시킬 수 있겠지요. 하지만 명국의 인구는 최소 일억 이상이 아닙니까? 이후에 벌어질 일은 필사적으로 북경을 수호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조선이 혜택을 받은 만큼 명나라도 혜택을 받았다. 조선에 널리 퍼진 땅콩과 고구마는 명나라에도 퍼져 인구를 폭발시켜 본래 역사보다 훨씬 많은 1억8천만에 달하는 인구가 되었다.

지금은 부패로 신음하는 명나라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면 소집된 민병만 따져도 이백만 대군을 편성할 수 있으리라.

이연은 뒤이어 벌어질 일을 떠올렸는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지만 이호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렇다고 아국이 천명(天命: 유교의 원리, 황제국의 정통성)을 받아들여 새로운 근본이 되면 이는 수와 당을 세운 선비족이 그랬던 것처럼 거대한 인구에 집어삼켜져 아국의 모습을 잃을 것입니다. 결국 단 한 가지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단 한 가지 방법이라 하시니 대체 무엇입니까?”

“명이 무너진 이후 들어올 새로운 왕조가 중원을 일통하지 못하게 방해하여 천명을 흐트러트리십시오. 최소한 중원을 셋 이상으로, 가급적이면 다섯 이상으로 갈라 버리시는 방법이지요.”

조선의 근본 사상인 유학과 완전히 대치되는 말이었기에 사관의 붓조차 멈췄고 사람의 숨소리만 들리는 적막함이 이어졌다. 이호는 육십이 넘은 노인이라 생각할 수 없는 눈빛을 밝히니 이연이 몸을 움츠릴 지경이었다.

이호도 몸이 쇠락하고 정신이 무뎌지기 시작하였지만 자신의 뜻을 전할 마지막 기회로 여겼다.

하나하나의 요소를 분석하고 이에 대한 파급을 고려하니 끝없는 이야기가 이어졌고 새벽 해가 밝을 무렵 결론이 나왔다.

“작금에 가장 먼저 행할 일은 요동에 특사를 파견하여 상황을 소상히 조사하는 일입니다. 장거정의 실각이나 요동의 병탄은 십 년 뒤에 행해도 늦지 않을 것이옵니다.”

“하온데 북원의 개입이 시작되면 어찌합니까?”

“그런 경우에도 수를 쓸 수 있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주상께서는 올바른 일을 행하면 될 것이나 저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예의에서 조금 어긋난 길을 걷겠습니다.”

이호는 붓을 놀려 머나먼 북방으로 향할 편지를 작성하였다.

북원의 개입이 지나치게 빠르지 않다면 아마 십여 년 뒤에는 조선이 요동을 병탄할 수 있으리라.

* * *

십 년 만에 방문한 북경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명나라의 부패를 어느 정도 다스린 장거정이지만 본인이 부패해 있으니 은자 사백만 냥에 달하는 재정을 확보해도 변화가 없는 법이다.

“기껏해야 사람들이 좀 늘어난 것이 전부로군. 그나저나 수은은 아직도 불티나게 팔리려나?”

김종인과 함께 시전을 돌아보았는데 여전히 정력제라 말하는 수은 화합물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이미 명나라 말을 완전히 배워서 해석할 수 있는데 하는 말이 가관이다.

“조선에서 들여온 수은과 홍삼을 섞은 환약입니다! 이번에 특별 할인으로 모십니다!”

율도(사할린)에서 수은 광맥을 발견하였고 조선에서는 이를 이용해 가죽에서 털만 뽑아내 각종 모직물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수은중독의 위험성 때문에 인기는 없고 북인들이 사용한다더라.

하지만 율도에서 나오는 수은이 워낙 많아서 당연히 주변 국가에 수출하게 되었다.

하지만 가죽에서 털을 뜯어내기 위한 수은이 중국으로 넘어가니 선단이니 뭐니 하면서 팔리는 모습이 되었다.

“수은이라 하였나? 내 명나라에서 수은을 정력제라 파는 일은 알았는데 이정도일 줄은 몰랐네. 이게 다 삿된 도학(道學: 도교)이 퍼져서라네.”

“네? 도학이 문제라 하셨습니까? 명나라는 왕수인이 만든 양명학(陽明學)을 근본으로 삼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도학이 퍼졌단 말입니까?”

“아국이 궁중에 예진원을 두어 제사를 총괄하듯이 명국의 내각에도 도사들이 득시글거린다네. 이들이 선단에 필요하다며 납과 수은을 사용하니 국본이 흐트러져 백성들도 따르는 것이지.”

환약을 만들면서 수은에 노출되었는지 상인의 손이 바르르 떨리며 머리도 수은중독의 영향 탓인지 검버섯이 피고 정수리까지 벗겨져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좋다고 수은을 사들이니 이 나라는 어디까지 망가질 것인가.

우리가 한가한 이유가 있다. 기존의 동지사와 달리 비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사신인 주청사(奏請使)는 황제의 알현까지 생각 외로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가 방문하자 만력제는 저 멀리 남경에 가 있다 하였다.

만력제가 남경에 간 이유는 조선에서 인계받은 함대의 항해술이 일정 경지에 올라 남경에서 한 번 탑승해보기를 원한 덕이다.

앞으로 한 달은 걸린다던데 나라가 썩어 있었으니 원하는 것도 많았다.

“오늘도 환관이 다녀가고 태학사들이 다녀갔소. 대체 명국은 얼마나 금품을 원하는 것이오?”

시장에서 돌아오니 주청사의 정사(正使)인 진해대군은 그렇게 사람이 좋은데도 분노를 삭이느라 아예 자리에 누워서 마음을 가다듬을 지경이었다. 더군다나 명나라 관리들은 우리가 온 이유도 모른다!

요동에서 사건이 벌어졌고 변방에는 소문이 파다하지만 이들은 요동을 전혀 통제하지 못하니 소문이 퍼지지 않는다.

다들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였고 정신적 피로가 더욱 가중된 진해대군은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이미 도성에 북방에 우역을 퍼뜨리는 이들이 요동 도적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들었소. 하지만 명국에서는 아무런 일도 모르고 있으니 대체 요동도사는 뭘 하는 것이오?”

“아마 도적들에게 억눌려 숨을 죽이고 있겠지요.”

“참으로 나라꼴이 잘 돌아가는구려!”

하르빈에서 잡아 온 도적 서른 명과 도적들을 감시하는 훈련원 출신 정예병 칠십 명이 있으니 할 일도 많고 부담도 컸다.

북경에 조선 병사를 들이면 오만한 일이지만 뇌물을 계속 먹이면 오만한 일도 참아주는 법이다.

한 달 가까이 지나 1576년 5월이 되었고 만력제가 지방 순회에서 돌아왔다.

조선의 사신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에 만력제는 별로 쉬지도 않고 바로 알현을 허가하였고 외교 전쟁을 치를 시간이 되었다.

“조선의 왕제를 만나게 되니 참으로 기쁜 일이로다. 평시에는 정기적으로 보내는 사행으로 만족하였는데 혹여나 조선에 큰 문제가 있는가?”

“크나큰 문제가 발생하였기에 이를 황상께 고변하려 하옵니다. 아국의 북방 하르빈을 비롯한 변경 일대에 요동 도적들이 출몰하여 우역을 퍼뜨렸나이다. 이를 외조 관원인 유성룡이 체포하였사옵니다.”

만력제는 우역이라는 병을 처음 들어보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장거정을 보았는데, 장거정은 얼굴이 창백해지다 못해 흙빛이 되어 입가를 파르르 떨고 나를 노려보았다.

그럼 뭐 어때! 당장 만력제가 우역이 뭔지 모르고 있는데 우역에 대해 설명해야지!

나는 앞으로 나서서 크게 절을 올리고 고개를 들었고 만력제는 통통한 얼굴이라 가뜩이나 가느다란 눈을 더 가늘게 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신 유성룡 황상께 고변하옵나이다. 우역이라는 질병은 가축의 팔 할을 죽이는 병으로 사지에 칠공에서 피를 뿜어내며 고열과 곽란(癨亂)에 시달리다 삽시간에 죽는 끔찍한 병입니다.”

“하필 도적들이 그런 끔찍한 병을 퍼뜨렸다니 대체 어찌 된 일인가. 병을 퍼뜨리는 일은 옛적 달자들이 송을 급습할 때에 저질렀다 하였거늘 이를 소상히 이야기하라.”

소상히 이야기하라고 해서 정말 소상히 이야기했다. 조선이 정기적으로 여는 마시를 조정할 일이 있어서 다녀왔고 이런저런 사건을 겪어서 모든 일을 알아냈다고.

당연히 장거정을 시작으로 관료들이 나를 공격하였다.

“명백한 증좌는 있소? 그저 우역이 퍼졌고 요동에서 장사를 하러 나온 이들이 우연히 방문하였는데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 아니요?”

“이미 서른에 달하는 도적들을 추포하였고 벌을 받아 죽은 도적만 수백에 달합니다. 증언이 한결같고 상황(가정제)께서 임명한 철령경략 소삼(小杉)가의 이름이 언급되었습니다.”

가정제가 즉위한 직후 소삼진팔의 할아버지를 경략으로 임명했더라?

만력제는 이런 사실을 당연히 몰랐으니 장거정을 의심하는 눈초리로 보았고 장거정은 목에 핏대를 올리며 답했다.

“철령경략이 머무는 지역에 우역이 돌았다 하면 지척에 있는 요동 도사 이여송에게서 보고가 들어왔을 것이 분명하옵나이다.”

“우역 정도야 크나큰 질병이 아니옵나이다. 소의 팔 할이 죽는 것은 일부 품종이며 북변의 소는 삼 할 이하의 피해만 생기옵니다! 조선에서 보낸 사신이 거짓을 논하고 있사옵니다!”

다시 공격이 들어오고 이를 막아내며 서로 목에 핏대를 올렸다. 내가 답변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서 보낸 김성일은 혹시나 내 답변이 틀리거나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걱정했지만 문제없다!

직접 경험한 사람이 누구보다 철저히 아는 법.

허점을 파고들어 대화의 논리 자체를 뒤집으려는 명나라 관리들의 수작질을 하나하나 반박하였고 만력제는 어린 나이에도 영민하였는지 손을 들어 우리의 대화를 제지하였다.

“너무 황망한 일이라 짐이 많은 일을 알지 못하지만 한 가지 사실만큼은 알 수 있다. 추포한 죄인을 엄히 친국(親鞫)할 것이니 당장 동창으로 들이도록 하라!”

뭔가 수작을 쓰려 했는지 장거정이 다른 신료들에게 눈빛을 보냈는데 만력제는 이런 눈빛을 보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논란을 원천 봉쇄하려는 듯이 다음 명령이 하달되었다.

“혹여나 죄인들이 말을 맞추어 짐을 현혹시킬지도 모르니 조선 관원 한 명과 금군 한 명이 나아가 죄인 한 명을 데려오되 눈을 가리며 귀를 솜으로 막고 재갈을 물려두어라.”

외부에서 개입하더라도 한 놈만 거짓 증언을 하도록 수를 썼다.

심지어 만력제는 얼마나 머리가 좋았는지 14세라 상상할 수 없는 다음 명령을 내렸다.

“또한 삿된 이들이 이득을 챙기고자 할지도 모르니 동창을 수비하는 금군을 절반으로 줄이며 나머지 절반을 조선에서 죄수를 들여온 병졸들로 채우고 일절 대화를 금한다.”

장거정은 마지막 기회를 놓쳤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며 입술을 짓씹었는데 피가 질질 흐를 지경이다.

그럼 뭐 어쩌라고? 이번에 실각할 염려는 없겠지만 아마 평생 동안 만력제의 의심을 짊어질 테니 잠자리가 편안하지 않을 거다.

#작가의 말

우역은 우두와 전혀 다른 질병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우두는 부스럼으로 인식되어 관심이 없었습니다.

작중에서 언급되는 우역은 가장 치명적인 가축 전염병입니다. 결국 천연두 이후 인류가 두 번째로 정복한 질병으로 2011년 야생에서 멸종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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