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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조선-343화 (343/573)

근육조선 343화

2부 12장 1화 북방에서(1)

거의 9개월 만에 육조거리로 나서니 싸늘한 겨울바람이 코를 스쳤다. 아직 관원들이 출근하기 이전이라 경복궁의 하인들은 주철로 만든 난로를 들여 난방을 준비하는 모습이 보여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애초에 일할 때에는 입식생활이 기본이니 구들장을 암만 덥혀도 방 안이 훈훈해지려면 시일이 걸리지. 소비되는 연료도 줄고 효율성도 챙기고 얼마나 좋아.”

지금의 상왕전하이자 예전의 주상전하도 산림자원에 대해 관심을 보였는데 드디어 목재 퍼먹는 하마인 구들 대신 주철 난로를 도입하였다. 이래저래 좋은 일이지만 마냥 좋아할 수 없다.

이제 세스페데스에게 입신체비를 가르친 후유증에 시달릴 차례이다. 나는 엄연한 외조 관원이며 강화도로 출장 간 이유는 신성로마제국 사절단이 조선 생활에 적응할 동안 돌봐줄 목적이었으니까.

본래 몇 달 전에 외조로 돌아왔어야 했는데 세스페데스에게 입신체비를 가르친다며 졸지에 강화도 생활을 연장해 버렸다.

외조 관원들은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으리라.

“이래저래 몇 달 동안 죽도록 고생하겠어. 그래도 배움을 원하는 사람에게 가르칠 수 없다 잡아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어쩔 수 없잖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 하였나? 눈치가 영 없을 줄 알았는데 잘된 일일세.”

관청에 들어서자마자 세수를 마치고 돌아온 상이경이 있었다. 외조판서가 야근을 하는 흉험한 시기에 돌아오다니 찍혀도 단단히 찍힐 것이리라.

물론 상이경은 나를 애지중지하고 있었으니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좋은 시기에 돌아왔다네. 최근에 서방에서 일제히 국서를 보내와서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는데 자네가 업무에 참가하면 일손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겠어.”

신성로마제국의 사절단과 스페인 출신 선교사 세스페데스가 조선에 방문한 지도 7개월이 지났으니 서방에 소식이 전해질 법하였다. 아마 사절단이 보낸 서신은 수많은 상선을 거쳐 가장 빨리 배송되었으리라.

눈치를 봐서 빨리 출근했지만 조기출근은 필수에 야근도 필수인 상황인지 관원들은 한 각(15분)이 지나기도 전에 속속들이 도착하였다.

심지어 내가 속한 승문원(외교문서 관할부서) 관료들도 한 몸이 되어 외조 본청에 모여서 논의를 시작하였다.

논의 내용을 보니 며칠 전에 서방에서 전달된 국서가 일제히 조정에 도착하였다. 국서에 민감한 내용은 없었는지 주상전하는 이 국서를 모조리 읽고 외교 사항을 조정하기 위해 외조로 떠넘겼으니 외조에서도 한창 해석에 골몰하고 있었다.

“일감이 넘치는데 유 교감(校勘: 승문원의 종4품 관직)이 돌아오게 되어 참으로 기쁘네. 그렇지 않아도 외교적 수사(修辭)나 어휘를 해석하는데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지.”

“저도 그러한 상황일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제가 서역의 언어를 잘 모르니 큰 도움은 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다른 무얼 떠나서 경구나 어휘가 문제라네. 자네는 선교사와 많은 대화를 나눴으니 이 국서에 담긴 상세한 뜻을 알 수 있겠지. 예전에 전쟁을 시작할 때에 말한 단어라 하였는데 이게 왜 쓰였는지 알 수 있겠나?”

외교문서는 축약된 어휘는 없지만 온갖 미사여구를 사용한다.

이를 본래 뜻대로 해석하려면 상당한 어학적 소양이 필요하며 보낸 이가 높은 신분일수록 해석이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장 과거 시험을 볼 때도 중국 전한시대부터 기록된 외교 공문이나 시구를 응용하는 이유는 이런 어휘력 함양이 필요하기 때문이지.

나는 라틴어를 다 익히지 못했지만 어휘만큼은 많이 익혔기에 어느 정도 자신이 붙었다.

상이경은 한 문서를 내놓았는데 붉은 잉크로 새겨진 첫 단어는 세스페데스가 입에 달고 살던 말이었다.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이 경구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Deus Vult? 이건 라마국에서 쓰이는 경구입니다. 뜻을 풀이하면 신께서 원하신다는 뜻인데 왜 이걸 사용했는지 짐작이 가는군요. 아국에서 선교사를 받아들인 연유를 신의 뜻이라 여기나 봅니다.”

“우리는 신께서 전쟁을 원하신다. 이렇게 해석하여 골머리를 썩였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사전을 부여잡지 말고 라마국에서 온 이들을 동원할 것을 괜히 힘을 썼군.”

“라마국 사람들이 이런 민감한 문서를 보면 그것 또한 결례겠지요.”

“뭐 은자를 좀 쥐여주면 입을 닫을 것이 아니겠는가. 여하튼 잘된 일일세.”

신께서 ‘전쟁을’ 원하신다. 이런 해석이 주 해석이지만 어떤 정신 나간 세력이 동방으로 십자군을 파견하겠는가.

이건 동방에 종교가 퍼졌음을 찬양하는 뜻으로 이중적인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경구를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

서방 국가들은 조선이 선교사를 받아들인 이유를 카톨릭 전파를 허용할 예정이라 여기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물론 카톨릭을 전파하리라 여겼던 세스페데스는 입신체비를 익히느라 고생하고 있지만 그건 그쪽 사정이다.

여하튼 우호적인 태도라 여긴 상이경은 눈을 가늘게 뜨고 국서의 해석본을 수정하기 시작하였다.

외조에서는 외교 문서가 전해질 때마다 난리를 친다던데 영 안 좋은 시기에 복귀했다.

“다들 찬사를 보내고 있군. 이럴 줄 알았으면 하베르(프란치스코 하비에르)처럼 깐깐한 사람 말고 다른 유순한 선교사를 보낼 것이지 서로 사서 고생만 하지 않았는가.”

“다들 아국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것 같습니다. 그러하면 국서에 요구사항이 적혀 있을 것인데 대체 어떤 요구를 하였습니까?”

“별다른 내용은 없고 이번 기회로 천주교를 받아들이라는 내용이 전부이지. 내 생각이지만 아국에 천주교를 전파하여 종교적 믿음은 뒷전이고 위업을 드러내려는 정치적 목적이 보이는군.”

하긴 종교를 앞세워서 정말 좋은 뜻을 전하려 하겠는가. 머나먼 동방에 내 힘으로 천주교를 전파했다 말하면 그게 곧 위업이고 세력권의 확장이라 여기겠지.

이외에도 사소한 문서를 하나하나 걸러내던 상이경은 금박이 덧대어진 화려한 양피지로 작성된 국서를 보더니 그 국서의 뒤에 있는 또 다른 서류를 꺼내 들었다.

“본래 서반아에서 국서를 보낼 적에는 각종 무역과 관련된 사항을 상인을 통하여 전달한다네. 하지만 이 무역 요청서는 서반아 국왕이 직접 작성하였군. 이런 경우는 처음일세.”

“얼마나 이례적인 일입니까? 평상시에 서반아에서는 홍삼과 각종 모피를 사들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혹여나 운총을 원하고 있습니까?”

“운총? 운총을 동방화승총이라 부르며 경계하고 있지만 애초에 유출되지도 않을 물건이기에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네. 기대를 하니까 배신을 당하는 법 아니겠는가. 그나저나 펠리페 2세 이 사람은 대체 뭔 생각을 하는지…….”

펠리페 2세는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나도 아는 스페인의 왕이다. 일화 몇 가지만 아는 것이지만 스페인을 열강의 반열에 올려놓고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하였으며 그만큼 많은 돈을 썼다더라.

일종의 국제적 큰손이니 상이경은 입맛을 다시며 국서에 첨부된 상품 요구서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대체 뭘 요구했는지 궁금했는데 다 읽어보고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말하였다.

“도합 홍삼 오천 근(3.2톤)을 서반아 왕의 쉰 번째 탄일(誕日: 생일)을 기념하여 요청하였다네. 여송 본섬과 파양군에서 각기 사들일 수 있도록 준비해 달라 하였네.”

“각기 이천오백 근이라 하셨습니까? 지금 인삼이 풍년일 적에 몇 근을 생산하지요?”

“이십사만 근(약 150톤)이며 외방에 파는 양은 절반에 불과하다네. 당장 파양군에서 이천오백 근을 따로 요청한다면 서반아 전체에서 홍삼 일만 근은 사들이겠군.”

홍삼 일만 근이면 명나라 황제들이 황족을 위해 약으로 쓰고 관료들의 선물로 하사하기 위해 조선에 요청하는 양과 대등하다. 하지만 명나라의 경우는 가장 인접한 국가라 홍삼 시세가 은의 2배 정도에 불과하다.

필리핀에서는 홍삼의 가격이 은의 8배에 달한다. 필리핀에서만 홍삼값으로 은 64만 냥을, 모든 구매경로를 따질 경우 은 180만 냥을 생일선물로 사용하는 격이다.

은 180만 냥이 장난인가? 이 정도면 조정 관료의 일 년 녹봉을 모조리 지급할 양이거나 조선의 외부 함대를 굴릴 정도의 돈이다.

더군다나 생일을 기념한다 했으니 팔 목적도 아니다!

“평시처럼 사들인 홍삼을 구주(歐洲: 유럽)에 팔면 돈을 변통할 수 있어서 이득이긴 하지만 엄연히 탄일을 기념하는 국서를 보내왔으니 이리저리 베풀 것이 분명하군요. 이래서 나라가 파산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서반아는 이미 채무를 지불할 수 없다 선언한 국가라네. 내부에서는 반란이 일어나고 구주 일대에서 전횡이 빗발치니 채무가 눈덩이처럼 쌓여 은자 육천만 냥에 달하지. 하지만 그만큼 무서운 나라라네.”

채무가 은자 육천만 냥? 외조에서는 분명 상인을 포섭해 정보를 취득하니 과장을 감안해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는 말이겠지. 명나라 예산이 은자 이천만 냥 정도라 알고 있는데 채무가 너무 많은 것 같았다.

이건 둘 중 하나이다. 권력이 막강해 채무를 이행하지 않거나, 채무를 충분히 갚을 수 있는 막대한 자금을 운용하거나.

상이경의 이어지는 말을 듣자 막대한 자금을 운용하는 것이 확실해 보였다.

“취합된 정보에 의하면 서반아는 남미주(남아프리카)와 중미국(스페인령 멕시코) 일대에서 매년 은자 이백만 냥이 넘는 수익을 거두고 이외에도 엄청난 수익을 거둔다네. 국가 수입은 도합 일천이백만 냥에 달한다더군.”

“서반아의 인구는 아국보다 부족하지 않습니까? 이런 나라가 아국의 예산보다 더 많은 예산을 사용한다니 믿기지 않습니다.”

스페인이 강성한 나라이며 경계의 대상임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조선은 본래 역사와 비교할 수 없이 강해졌지만 환곡을 제외한 예산 규모로 따지면 아직 은자 구백만 냥에 불과해 스페인에 밀린다.

물론 조선은 쌀을 주식으로 하는 국가라 인구가 넘쳐나서 인건비가 싸고 비상시에는 환곡을 군량으로 전환하니 유리한 점이 있다. 그래도 양국은 거의 대등한 국력을 가졌으리라.

예산은 이천만 냥에 달하지만 그만큼 부패가 심해 사방으로 질질 새어나가는 명나라가 불쌍해 보일 지경이었다. 이러니까 김인후가 돼지새끼라 평가했겠지.

상이경은 불쾌한 일을 떠올린 듯이 인상을 찌푸리고 한숨을 쉬더니만 나를 바라보고 말하였다.

“일전에 농조와 이야기를 나눠보았는데 올해 인삼 작황이 흉년에 가깝다 하였네. 이런 중대사에 인삼이 부족하여 요청을 거절하면 아국의 신용은 무엇이 되겠나?”

“인삼을 다른 곳에서 변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 안 된다면 포기하는 것도 답이지요.”

“그리 하였다간 불만을 가진 서반아에서 몇 년 동안 인삼을 사들이지 말라 할 수도 있다네. 이래저래 약간 무리를 해서라도 인삼을 요구사항에 맞게 파는 일이 옳겠지.”

인삼이 없는데 뭘 어쩌란 말인가. 내가 알기로 인삼은 최소 3년 가급적 4년을 길러야 하는 물건이라 작황이 안 좋다고 생산량을 늘릴 수도 없다.

더군다나 일 년 정도 여유가 있다면 모르겠는데 외교 문서에는 서력으로 7개월 뒤인 1576년 6월까지 홍삼을 준비해 달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민간에서 물량을 사들이면 이래저래 말이 나올 수도 있다.

“이런 방책은 취하지 않음이 마땅하지만 방도가 없으니 북원에 수출하는 인삼을 거둬들여 서반아에 팔아야 할 것이네. 이현 자네는 북변에서 일하며 하마 니씨의 가주와 친해진 사람이니 계읍 아(阿)씨에게 인삼을 사들이게나.”

“네? 지……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하마 니씨의 가주인 니양수와 친분은 있지만 그리 깊은 인연은 아닙니다.”

“얼마 전에 니양수가 가독인 니당개에게 가문을 물려주었으니 계읍 아씨와의 인연을 만들 적에 충분한 도움이 될 것이라네. 자네는 지난 몇 달 동안 외조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으니 힘을 좀 써야 하지 않겠나.”

이건 현대에도 휴가 다녀오면 항상 난이도 높은 업무를 담당한 것과 다르지 않다. 너 편히 쉬다가 돌아온 거 다 알고 있으니 출장 좀 다녀와서 다른 사람들 원한 사지 말라는 뜻이다.

욕이 절로 나오려 했지만 다른 이들은 모두 업무에 치어 근손실만 회피하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나 혼자 근육이 늘어서야 쓰겠나.

어쩔 수 없이 업무를 시작하자마자 출장에 나섰다.

* * *

십 년 넘게 세월이 지났지만 하마 니씨의 저택은 변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번성하였다. 요즘 일본에서 내전이 거세져서 병장기 수출량이 늘었다 하던데 하마 니씨의 소득이 증가했겠지.

“아이고! 서애 어르신께서 오셨군요! 이거 신수가 더욱 훤칠해지셨는데 체격이…….”

“삼대운동은 칠백 근을 넘어섰으니 염려하지 마시구려. 내가 다 생각이 있어서 체격을 줄인 것이오.”

북인들은 일단 덩치가 크면 힘이 세다고 받아들이니 원균을 좋아할 만도 했다.

만약 원균이 사고로 비참하게 죽지 않았다면 북방의 명장으로 명성을 떨치다 칠전량 같은 사태를 일으켰을지도 모르지.

처음에는 태연하던 니당개도 본론을 시작하자마자 심각한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북인들은 각 가문이 담당한 일에 대해 자부심을 가진다 하였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을까.

이윽고 니당개는 주절주절 사정을 늘어놓았다.

“계읍 아씨에게서 인삼을 거둬들여 서반아로 수출한다. 보상이 충분하면 통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래서야 북원에서 들여오는 가축이 줄어들어 길게 보면 손해가 클 겁니다.”

“북원에서 들여오는 가축이라? 생각해 보니 북원은 아국에 매년 이만 필의 마소를 수출하고 인삼과 곡식을 사들인다 하였지.”

“그렇지요. 개중에 인삼의 가격을 높게 치는데 이래서야 평시처럼 이만 필은커녕 오천 필의 마소를 사들이는 것이 전부겠지요. 그렇지 않아도 북변에는 우역(牛疫: 소의 전염병)이 돌아 요즘 험난한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역은 들어본 적이 있다. 고려 말기에 전파되고 기르던 소의 절반이 몰살당했으며 세조(본래 역사의 단종) 말기에도 한 번 돌아 소의 3할이 피해를 입었다 하던가.

이래저래 얽힌 문제가 산적해 있는데 북원이 인삼을 사는 이유도 모르겠고 우역이 왜 돌아다니는지 원인도 모르겠다.

한참을 끙끙 앓고 있자니 니당개는 벌떡 일어나 내가 가장 듣기 싫은 이야기를 하였다.

“어쩔 수 없습니다. 계읍 아씨는 물론이고 북원의 사절과도 이야기를 나눠야 하니 하르빈으로 향하여 공식적으로 대화를 나눔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지금 뭐라 했지? 하르빈? 수양대군이 요새 만든 그 장소?

거기에 내가 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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