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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조선-339화 (339/573)

근육조선 339화

2부 11장 7화 먼 길을 온 이들(2)

벌써 15년 전의 이야기이지만 아내와 함께 신혼여행을 다녀왔을 때 고니시 류사라는 상인과 그의 장남으로 보이는 아이와 어울린 적이 있다.

생각해 보니 당시에 지나가듯 했던 말이 있었지.

-나중에 조선과 교역을 행하여 벽란도에 들르면 강화도에도 한 번 들르시구려.

고니시의 친척을 통해 연줄을 만들고 고니시 유키나가를 포섭하거나 수가 틀리면 아예 파묻어버릴 생각으로 했던 말인데 본인이 올 줄은 몰랐다.

내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상대방도 뭔가 느꼈는지 나를 돌아보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혹시 이현 선생님이 아니십니까?”

“자네가 날 아나? 우리가 만난 적이 있던가?”

“아버지와 함께 하카타에 들렀을 적에 만나 뵌 적이 있습니다. 제 예전 이름은 고니시 야쿠로였는데 기억하십니까? 십오 년이 지났는데 얼굴이 하나도 변하지 않으셨군요!”

그 꼬맹이의 정체가 고니시 유키나가라고? 내 얼굴은 사춘기에 푹 삭아버린 다음 지금까지 거의 변하지 않았으니 얼굴을 알아차릴 수도 있다.

여기까지야 이해할 수 있는데 너무 친한 척을 하니 병사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혹시나 소문이 잘못 퍼지면 내 뒷배를 믿고 억지로 들어왔다고 오해할 수도 있다.

아는 사이일수록 민감한 문제를 짚고 넘어가는 법이다. 나는 따로 할 일도 없으니 상이경을 대신해 고니시 유키나가를 심문하기로 마음먹고 앞으로 나섰다.

“부친을 닮긴 하였군. 하지만 여기는 엄연한 아국의 강역이며 정해진 왜인만 입항할 수 있는 벽란도라네. 그렇지 않아도 자네에 관한 문제가 있으니 여기서 확실히 짚고 넘어가겠네.”

“아……. 아는 사이일수록 확실히 짚고 넘어감이 마땅하지만 궁금하신 점이 있습니까?”

“내가 알기로 천주교의 승려가 거느린 시종은 천주교의 법명(法名: 세례명)을 받는다 하였네. 하면 자네의 법명은 무엇인가?”

내가 종교는 없지만 현대에서 일 하면서 천주교는 잘 안다. 정조 시기부터 오랜 세월을 이어지며 많은 유적을 남겼고 현재도 성당으로 쓰이는 근대문화재가 즐비하니까.

현장조사를 나가며 신부님들과 접촉한 일이 허다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서 교리에 대해서는 제법 많이 알고 있다. 고니시는 내 말을 듣자마자 입을 우물거리다 한숨을 푹 내쉬며 사실을 털어놓았다.

“실은 양친(兩親)께서 천주교인이고 저는 프로이스라는 분께 교리와 산학을 조금 배운 것이 전부입니다. 시종으로 있을 자격은 없지만 조만간 법명을 받을 예정이라 허락하셨습니다.”

“허락을 받았다니 내 믿기는 하겠네. 하지만 모든 일을 확실히 하지 않으면 훗날 크나큰 화근으로 돌아올 수 있지 않겠나. 벽란도까지 온 목적이 있을 게 분명한데.”

고니시도 주변 눈치를 보면서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생각해 보면 일개 상인이 업무를 내려놓고 몇 달 동안 자리를 비우면 손해가 막심할 거다. 그럼 누군가의 명령을 받은 것이 분명하니 이걸 물고 늘어져 봐야지.

“자네의 가문은 약재상을 경영한다고 들었네. 자네와 같은 이가 자리를 비운다면 손해가 막심할 것이네. 차라리 자네 부친이 온다면 이해할 수 있지만 자네가 온 이유를 모르겠군.”

“분가하여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 直家) 님에게 고용되었습니다. 우키타 님의 자금을 기반으로 약재를 거래하다 조선과 연줄을 만들라는 명령을 받았기에 상황을 보아 조선으로 올 기회를 찾아본 것입니다.”

“최근에 아국에 연줄을 대려 노력하는 호족이라 알고 있는데 이래저래 수를 쓰다 자네에게도 명령을 내렸군. 일단 조선에 오면 명령을 완수하는 것이니 성패(成敗)는 큰 문제가 아니겠지.”

결국 고니시 유키나가가 조선에 온 이유는 단순했다. 어떻게든 조선에서 머물면 상관의 명령도 완수한 것이요, 잘만 하면 거래를 터서 상인으로 이득도 챙길 수 있으니까. 이 녀석은 뼛속까지 상인이다.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고니시는 상인으로 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가 된 이후 무사가 되었다 하더라. 하지만 역사가 변하면서 오다가 죽었고 히데요시는 잘해야 목숨만 건져 다른 세력에 고용되었으리라.

상인으로 먹고살다 상인으로 죽을 인생이 되었지만 확인은 해야겠다. 나는 군관들을 시켜 고니시의 손을 확인하게 하였고 여러 병사들이 자신의 손과 대조해 보며 결론을 내렸다.

“병장기를 사용한 흔적은 없습니다. 기껏해야 약재를 다듬을 때 생긴 굳은살이 전부입니다.”

“손톱이 두껍고 깨어진 흔적이 역력하니 손을 거칠게 사용했습니다. 산에 올라 약재를 직접 캐낸 사람이 분명하군요.”

지금의 고니시는 일개 상인이니 그냥 내쫓아버릴 수도 있지만 능력은 아쉽다. 기회가 생기면 놓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것만 해도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다.

생각해 보면 간신배 한명회가 세계 제일의 항해사가 되고 인간백정 홍윤성이 뛰어난 장수가 된 세상에 고니시도 상인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헛짓거리를 하거든 내쫓으면 그만이니 심문을 종료하고 말했다.

“자네가 머물 장소는 다른 어디도 아니고 강화도에 한정되어 있다네. 물론 상인으로서 넓은 세상을 알아보며 도움을 얻겠지만 연줄을 따로 만드는 일은 힘들 것이야.”

“일전에 성당이 있다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강화도의 사당을 보수하였다 했는데 제가 교리를 배우면서 법명을 받으면 좋을 장소가 되겠군요.”

세례명은 받지 않았지만 천주교 신자임은 분명한지 차라리 좋은 일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다.

대부분 심문이 끝났는데 모순을 이겨냈는지 진해대군이 세스페데스를 지목하면서 명령을 내렸다.

“다른 이들은 대다수가 결백하니 본래대로 일정을 진행하겠소. 다만 서반아인에다 선교사이니 이자를 철저히 문책하여 아국에서 배움을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해 따지겠소!”

모순을 이겨내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니고 그냥 조정에 떠넘긴 결과가 나왔지만 차라리 잘된 일이다. 어설픈 결론을 내렸다가는 진해대군 입장에서 감당하기 힘든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까.

다른 이들은 모두 짐을 정리한 후 조선에서 제공한 의복으로 갈아입고 연회장에 방문하였지만 세스페데스는 다음 문책이라 함에도 태연하게 병졸들을 따라 별도로 이송되었다.

* * *

벌써 나흘이 지났지만 조정에서는 세스페데스의 처분에 대해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주상전하도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고 성리학적으로 접근해 본다며 학문으로 명망이 높은 이들을 소집하기에 이르렀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내가 모든 인원을 인솔해 강화도로 보내야 하지만 사절단도 신부를 두고 떠날 수 없다 여겼는지 여독이 가시지 않았다는 등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있었다.

물론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은 사절단 안에서도 별종으로 여겨졌는지 연회를 마다하고 이현전에 들어가 망원경만 보고 있었다. 밤늦은 시간인데도 열기가 느껴지는데 이자의 이름이 티코 브라헤라 했던가? 뭘 잘못 먹었나?

“이 사람은 뭘 잘못 먹었습니까? 광기가 느껴지는 데다 제대로 씻지도 않았는지 안면에 개기름이 넘쳐나는군요.”

“아국에서 작성한 서적을 보고 벼슬을 마다하며 아국으로 건너온 사람인데 오죽하겠나. 낮에는 천문 기록을 분석하고 밤에는 이를 검증하니 벌써 스무 시진(40시간)째 자지 않았다네.”

기대승도 이현전 출신이라 야근에는 익숙하지만 티코 브라헤라는 학자의 열정을 이길 수 없었나 보다.

그가 사지를 비비 꼬는 것이 영 이상해 보였는데 기대승은 역관을 통해 말을 전달하였다.

“소피를 좀 보고 오게! 계속 소피를 참으면 임병(淋病: 임질을 비롯한 비뇨기 질환, 여기서는 방광염)에 시달릴 염려가 있지 않은가!”

경망스럽게 화장실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니 아무리 보아도 정상인이 아니다.

기대승은 이미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어 보았는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천리경을 가리켰다.

“아무래도 저 사람이 돌아갈 적에 천리경 하나 정도는 전해줘야 속이 풀릴 것일세. 브라헤가 라마국에서 당도한 장인들을 닦달하고 있는데 우리가 쓰는 수준의 천리경을 만들 수 있는 장인이 없다더군.”

“서역에 천리경이 별로 없습니까? 듣자 하니 수십 년 전부터 천리경이 팔려 나가 서역에서도 장인들을 동원해 천리경을 만들었다 하였는데 아국과 기술이 비슷하지 않습니까?”

“상선을 모는 선장들이나 작은 물건을 사용하고 천문관들이 사용하는 큰 물건은 없다 하였네. 아국은 스무 배를 크게 보는 천리경도 많지만 서역에서는 여섯 배 정도가 한계라더군.”

선장들이나 지휘관이 휴대하기 좋은 5배율 내외의 망원경은 작은 녀석이라 널리 퍼졌지만 초대형 망원경이 건너간 일은 없었나 보다.

화장실에서 돌아온 티코 브라헤가 뭐라 말하자 역관이 이를 번역해 주었는데 절로 웃음이 나왔다.

“제가 스코네로 돌아가면 섬 하나를 영지로 삼을 것입니다! 자리에 요강을 두고 어떠한 이들도 제 관측을 방해할 수 없게 만들 것이니 여기서 필요한 기술을 모두 배워가겠습니다!”

혹시나 관측에 방해가 된다고 마을에서 불을 사용하지 못하게 만들지도 몰랐다. 기대승도 기가 찼는지 껄껄 웃었고 나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나저나 이틀 동안 심문당하는 세스페데스가 걱정될 지경이었는데 때마침 시종이 다가와 말을 전달했다.

“심문이 모두 끝났으며 업무에 종사하는 이들을 제외하고 강화도에 머물게 하라는 어명이 내려졌습니다. 유 교수께서는 군관들과 함께 라마국 사람들을 인솔하십시오.”

상이경이 최종 결론을 요약한 보고서를 줬는데 세스페데스의 출신을 비롯한 신상명세를 모조리 파악하였기에 심문이 길어졌다 하였다. 적어도 내용상의 모순은 없었는데 이 사람도 인생이 참 파란만장하다.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는 서반아의 귀족의 아들로 6년 전(1569년)에 사제에 입문해 2년 전에 천축에 도달하여 선교사로서의 가르침을 얻고 1년 전에 왜국에서 대기하며 조선으로 건너올 방법을 모색하다 기회를 얻었다.]

[그의 선임인 프로이스라는 선교사를 통해 한자와 왜국을 통해 전해진 아국의 풍속에 대해 익힌 사람이니 신뢰할 수 있다. 하지만 프로이스는 이미 왜국 영주 신장의 후손을 탈출시키는 일에 협력하였으니 유념하도록.]

상이경 입장에서는 자신을 골탕 먹인 선교사의 후배인 세스페데스를 의심하고 있지만 내 입장에서도 골치 아프기는 마찬가지이다.

수직적 구조를 가진 천주교의 특성을 고려해 세스페데스에게 전해질 정보를 적당히 검열해야 하리라.

조정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를 인솔해 강화도로 향하니 이런 거대한 강을 본 적이 없었던 사람들은 한강이 강인지 바다인지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거듭하다 물을 마셔보고 반색을 하였다.

다른 이들은 생소한 이국의 풍경에 취해 있었지만 세스페데스는 나를 물끄러미 보면서 뭐라 중얼거렸다. 라틴어를 배워야 하나 생각을 하는데 그는 작은 칠판을 꺼내 한자로 필담을 시작하였다.

-듣자 하니 강화도라는 섬에는 성당이 있다 들었습니다. 정녕 사실입니까?

어설픈 한자라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성당은 내가 보수한 적이 있기에 흔쾌히 답했다. 혹시 보았던 성당과 비슷한 녀석이 있을지도 모르니 놀라지나 말라고.

한때 내가 근무했던 강화도에 도착해 성당이 있던 마을에 가니 주민들을 다른 장소로 옮겨 두었는지 스무 가구 정도 되는 마을은 텅텅 비어 있었다. 아마 다른 장소에 땅을 얻어 잘 지내고 있을 것이니 이 집을 마음대로 사용하면 되리라.

“정말 성당이 있군요! 문헌에서 보았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과 닮은 녀석이 아닙니까! 이 성당을 보수하셨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군요!”

산타 마리아 어쩌고 하는 걸 보니 세스페데스가 한 말은 대충 이런 뜻이겠지. 다른 이들은 마을에서 짐을 풀었지만 신부가 머무는 장소는 성당 근처에 지어진 사제관이다.

세스페데스는 한시라도 빨리 자신이 부임할, 아니, 배움을 얻을 성당을 보려 하였지만 성당 문이 잠겨 있었다. 미리 도호부사에게 받은 열쇠로 두꺼운 자물쇠를 열고 빗장을 푸니 서둘러 달려가 성수를 뿌리고 기도문을 읊어대기 시작하였다.

“지금 저 사람이 뭐라 하는 건가?”

“너무 빠르게 주문(呪文)을 외워 뭐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백여 년 가까이 주인이 없던 성당에 주인이 생겼다고 기뻐하는 것 같습니다.”

해가 져서 빛이 없으니 어두컴컴한 성당에서 마구 돌아다니던 세스페데스는 마침내 발을 접질려 넘어졌다. 생각해 보니 성당에는 촛불을 많이 두니 불을 밝히면 끝날 일이다.

큰 장대에 심지를 매달아 양초에 불을 붙이니 성당이 점점 밝아지기 시작하였다. 내가 수리했을 적에는 파손된 스테인드글라스와 성화들도 모조리 보수되었는지 금이 간 구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멀쩡하게 변한 것 같았다.

“이게 뭐야! 어르신께서 성당을 보수하였다 들었는데 대체 뭔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고니시가 목소리를 내자 정신없이 기도를 하던 세스페데스도 눈을 돌렸고.

벽을 보더니 끝없이 성호를 그으며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그리고 세례자 요한을 찾아댔다.

성당 벽면의 성화(聖畫)들을 원형대로 보존했다 하는데 보존한 모습은 근육 덩어리들이 아닌가!

한 벽면에는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있는데 죄다 근육 덩어리다. 둘 다 삼대 900근은 치겠네!

“아……. 생각해 보니 벽화는 내가 보수한 적이 없네. 나는 지붕을 보수했을 뿐이고 벽화를 보수한 이는 각지의 입신체비장에 회화를 남기던 이들이겠군.”

조선에 전해진 벽화인 프레스코화는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궁중 회화로 전수되는 궁궐 장인들의 물건이요, 다른 하나는 청계천 입신체비장을 시작으로 입신체비장의 벽면을 장식하고 자세를 규정하기 위한 회화이다.

이런 곳에 궁궐에서 일하는 장인들이 왔을 리가 없다. 결국 성당의 성화는 모조리 입신체비장에서 일하던 장인들이 참가하였으니 화풍도 입신체비를 따라간 것이다.

십자 버티기 자세로 꿋꿋하게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보자 세스페데스는 아예 경기를 일으켰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렇게 근육질의 몸을 지니셨으며 저리 굳건히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다니, 대체 누가 이런 회화를 남긴 겁니까!”

삼대 1,000근은 치고도 남을 근육질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있었다. 결국 예전에 남긴 회화는 구도나 비례만 남고 나머지가 모조리 변했다.

인물들의 체격은 입신체비적으로 완벽한 체격이 되었으며. 자세 또한 입신체비 자세를 닮은 벽화가 성당 벽면을 수놓은 것이다. 생각해 보니 지하에 보관되어 있을 십자고상도 근육적이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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