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338화
2부 11장 6화 먼 길을 온 이들(1)
이순신 입장에서 가까스로 여송 부임을 마쳤는데 또 가라니 억울한 소리라 여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전쟁이 벌어지지 않더라도 이순신을 보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수리가 부족은 예전에 있던 힌두교 세력의 멸망 이후 계속 수세에 몰려서 패배감이 저변에 깔려 있다.
하지만 일 년 만에 약졸을 강병으로 만들어낸 이순신의 훈련 방침이라면 최소한 평범한 병사로 성장할 게 아닌가?
“자네가 병졸을 훌륭히 육성하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네. 평범한 장수도 강병(强兵)을 만나면 효용을 볼 수 있지만 빼어난 장수도 약졸을 휘하에 두면 어떠한 일도 하지 못하는 법이지. 그러니 자네가 필요한 장소라네.”
설령 이순신의 부임 시기 동안 전쟁이 벌어지지 않아도 훌륭한 포병을 육성했다고 좋은 평가를 받겠지. 어떤 방법이든 전쟁이 벌어질 장소이니 이순신의 승진은 보장되어 있다.
이순신도 내 말에 설득되었는지 건배를 하고 잔을 비우고는 슬쩍 웃으며 말하였다.
“내가 다른 사람이 말을 했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지만 서애 자네의 말이니 한 번 더 믿어보겠네. 나는 원리원칙만 따지는 사람인데 강병을 육성할 수 있다니 믿기지 않는군.”
원리원칙을 흐트러트리는 일이 흔하니 그렇지!
빼어난 장수라 명성이 높은 남상정도 가끔 벌어지는 실전 대응훈련에서 귀찮은 일을 대충 넘기는 모습을 보았으니 이 시대에는 평범한 일이 분명하다.
아마 수리가 부족의 청년들은 죽기 직전까지 고생을 반복하며 강한 병사가 되리라.
하지만 고란은 전쟁이라는 말을 듣고 촉이 왔는지 개구리 같은 얼굴을 활짝 펴며 물어보았다.
“정말로 전쟁이 벌어질 것 같습니까? 적의 규모가 얼마나 될지 알고 계시는지요?”
“남대주에서 아귀다툼을 벌이는 호족들이 모조리 집결하고 해구(海寇: 해적)를 모조리 소집하면 일만 명 이상의 병력이 될 것이네. 하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 것이야.”
최악 중의 최악을 가정한 적의 규모이고 실제로는 오천 명도 힘들 것이다. 하지만 고란은 마음을 정했는지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히죽거리며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해적 머리통을 박살 내고 품계를 올려 진급하려는 생각이겠지만 무과 급제가 먼저다 이 멍청한 녀석아.
이순신도 고란을 슬쩍 본 다음 마음을 정했는지 술자리를 마치고 나와 악수를 나누었다.
“한양에 올라오고 몇 달이 지나기도 전에 다시 여송으로 내려가다니. 안사람이 회(薈: 이순신의 장남)의 선생님을 구할 시기라 하였는데 아쉬운 일이군.”
“혹여나 자네가 늦게 돌아온다면 내가 회를 좋은 선생님 아래에 둘 것이니 염려하지 말게.”
이순신의 아들이 벌써 둘이나 되는데 내가 좀 챙겨줘야지. 지금까지의 행적을 떠올리니 이래저래 챙겨줄 사람이 많아도 업무에 치어 사느라 적당히 넘어가는 일이 많았다.
남은 휴가 한 달 동안 친구들이나 업무를 통해 알게 된 관료들과 우애를 다져 나갔고 꿀 같은 장기 휴가도 끝나서 조정으로 돌아올 시기가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편한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지만.
* * *
예정된 시일이 다가오자 라마국(신성로마제국)의 사절단은 미리 서신을 보내 벽란도에 입항하기를 청하였다. 당연히 외조 관원은 물론이요, 왕제(王弟)인 진해대군을 비롯한 관료들이 벽란도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정된 도착시간보다 늦었다. 이 시대에는 풍향과 해류의 영향을 받는 선박이라 한 시진(2시간) 정도 늦는 일은 흔했기에 사절단은 어느새 잡담을 시작하였다.
진해대군은 내 모습을 보더니 아는 척을 하며 다가왔다.
“대군 어른을 뵙습니다. 오랜 시일이 지났는데 몸이 더욱 좋아지셔서 보기에 아주 좋습니다.”
“그렇소? 실지로 건물이 지어지는 모습을 알고자 직접 움직인 일이 제법 되어 몸이 좋아졌나 보구려. 얼마 전에는 상왕전하께서 별궁의 누각을 고치라 명하셨소.”
진해대군이 사기행적에 이용당하다 내 도움으로 탈출하고 본격적으로 건축을 배운 지 오 년이 지났다. 고작 오 년이 지났지만 벌써부터 누각에 손을 댄다면 어마어마한 노력이 필요하리라.
진해대군도 꽤나 고생을 했는지 푸념을 늘어놓았다.
“다른 일은 다 할 수 있었지만 명세내역은 정말 힘든 일이더구려. 오리(梧里: 이원익의 호)라는 관원이 내가 제출한 명세내역을 다시 계산하여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플 지경이었지.”
“본래 명세내역만큼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상왕전하께서 기거하시는 곳이니 더욱 심혈을 기울이는 일은 마땅하지요.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참 사람은 좋단 말이야. 그 좋은 성품과 한 가지 취미에 몰입하는 모습을 제외하면 다른 모든 능력이 평범해서 문제지.
그래도 평범한 사람이 노력하면 대성할 수 있으니 훗날 큰일을 할지도 모른다.
오늘 방문하는 신성로마제국의 사절단이 마침내 남쪽 바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먼 바다에 배는 단 한 척만 보였고 진해대군도 자신의 팔뚝만 한 망원경을 빌려 살펴봤는데 실망한 눈치로 말하였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는데 배 한 척만 당도할 줄은 몰랐는걸. 다들 천리경으로 보시오. 혹여나 사절단의 선두에 선 배일지도 모르나 내 안력(眼力: 시력)이 평범해서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오.”
상이경도 망원경을 보고 한숨을 쉬었고 망원경을 건네받아 살펴보니 조선의 배 세 척이 호위 겸 안내로 뒤에 따라붙고 적당히 큰 범선 한 척이 맨 앞에 있었다.
영직이가 누군가의 말을 빌려 평가하기를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고 제국도 아니라 하였다. 확실한 것은 제국의 이름을 빌린 사절단 주제에 규모가 저 규모는 뭐란 말인가.
혹시나 문제가 생겨서 배 한 척에 사람을 욱여넣었을 사정이 있나 염려하였지만 항구에 내린 사절단 인원은 고작 60명에 불과하였다. 이들 중 절반은 하인이니 실제 사절단은 30인이다.
그래도 공식 사절단이니 서로 인사를 올리며 예의를 표시했고 진해대군은 가장 앞에 선 학자로 보이는 대표와 인사를 나누었다.
당연히 라틴어를 번역하기 위한 역관도 옆에서 숨죽이고 대기하고 있었다.
“머나먼 길을 걸어 이 땅의 반대편에서 건너오신 분들을 맞이하게 되어 기쁘오. 나는 왕제이자 종친의 일원인 진해대군이오.”
“참으로 반갑습니다. 저는 이번 사절단의 대표이자 학자인 알치드 데 상갈로(Alcide de Sangallo)라 합니다. 저에게 역관은 필요가 없으니 안심하십시오.”
떨떠름한 표정의 진해대군의 표정이 확 변했고 관료들도 놀라서 헛숨을 들이켰다. 발음이 아주 부정확하고 강세가 난잡하지만 엄연한 조선의 말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상이경은 입을 벌리고 앞으로 다가왔다.
“비…… 아니, 피렌체의 상갈로 가문에서 오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보아하니 다른 이들과 외모가 다르신데 혹여나 상갈로의 후손이십니까?”
상이경의 조상이 피렌체의 상갈로 가문 출신이고 아내와 어린아이가 조선으로 돌아와 가문을 세웠다 했었지!
본관 사람을 만난 상이경이 감동하였는지 눈물을 글썽거렸고 알치드라는 학자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조선에서 요청한 사람들을 모두 데려왔습니다. 명확한 뜻을 알 길이 없는 옛 서적의 뜻을 명확히 하고자 불가타(Vulgata: 교회 규정 라틴어)와 조선의 말을 익힌 저는 물론이요, 각 분야의 학문을 익힌 이들이 관련 서적과 함께 방문하였습니다.”
“참으로 좋은 일이오. 궁금한 것이 있는데 조선의 말을 어찌 익혔는지 알 수 있소? 라마국에는 아국 사람이 없다 하였는데 발음이야 부정확하지만 단어만큼은 명확하구려.”
“예전에 세종이라는 임금께서 조선의 말과 불가타 사이에 사전을 만든 적이 있으니 피렌체의 가문들은 각자의 모계를 잊지 않고자 스스로 익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준비는 충분하니 예자문집이 어떠한 서적이라도 해석을 바로잡을 수 있겠지요.”
최소한 성경, 아니, 안평대군이 어설프게 번역한 예자문집의 정체는 알 수 있겠지.
진해대군을 시작으로 관료들과 인사를 나눈 알치드는 사절단을 한번 돌아보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희도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하여 조선의 물산을 상세히 알고 학문에 이바지하고자 하였지만 험난한 일이 많았습니다. 사 년 전에는 신성동맹을 결성하여 오스만 제국과 일전을 벌였지요.”
“오스만 제국이라 하면 오사만국이군요. 오사만국과 또 전쟁을 벌이다니 참으로 험난한 일을 겪으셨습니다. 본디 전쟁은 재정을 고갈시키는 법이지요. 하지만 선박이…….”
이들이 타고 온 배는 일반 상선이며 짐이라고 해봤자 약간의 식량이나 옷가지를 비롯한 필수품이 전부였다.
알치드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는지 고개도 들지 못하고 변명을 시작했다.
“실은 합스부르크에 작은 분쟁이 있었습니다. 막시밀리안 폐하의 오촌이자 카스티야 왕국의 국왕 펠리페 2세가 이번 사절단에 개입하기를 원하였고 선단을 빌려주기로 하였지요. 하지만 이를 거절하고 그 명분으로 규모를 축소하였습니다.”
“참 좋은 판단을 하셨구려. 언제나 진출의 야욕을 숨기지 않는 서반아(스페인)인이 단 한 명이라도 아국에 당도하였다면 당장 경을 칠 일이 아니겠소.”
스페인과 조선은 대놓고 분쟁 중인 국가이다. 무역이야 허가하지만 무역 외에는 정말 목숨의 위기가 닥칠 경우를 제외하면 규정된 장소 외에는 상륙을 불허하였다.
진해대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런저런 공치사를 늘어놓으니 사절단의 표정이 급격히 뒤틀리며 무어라 말을 주고받았다. 결국 사절단 맨 뒤에 있던 젊은이가 앞으로 나서서 인사를 올렸다.
현대와 모습은 다르지만 검은 사제복을 입은 갈색 머리의 서양인이었고 이 복장이 천주교 사제를 의미함을 아는 관료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번져 나갔다.
그 사람 좋던 진해대군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앞으로 다가왔다.
“이보시오! 이자는 천주교의 승려인데 왜 여기에 있소? 분명 아국에서는 천주교를 선교하는 일을 금하였고 오로지 상륙과 휴식만 허용함을 잊었단 말이오?”
“저희가 일본에 들렀을 적에 합류한 스페인 사제입니다. 예수회에 소속된 신부라서 처음에는 거절하려 하였으나 선교가 목적이 아니어서 시도라도 해보려고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사제께서는 어서 설명이라도 하시오.”
조선은 32년 전인 1543년에 최초로 천주교와 접촉하였다. 가까스로 이슬람 세력의 견제와 숱한 교전을 뚫고 인도를 건너 필리핀에 상륙한 스페인 상선은 선교사 한 명을 소개하였다.
처음에는 불교와 유사한 종교라 여겼지만 신기하게 여겨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았다. 서양인이 사방을 돌아다니며 돈도 나오지 않는 선교 활동을 벌이는 모습을 보고 불교보다 나은 종교라 여겼다 하더라.
당시 선교사는 하베르(프란치스코 하비에르)라는 자였는데 일 년 동안 노력해 조선의 말을 익히고 선교를 실시하였다. 문제는 군관들이 한가위를 맞이해 제사를 올리는 장소에 같이 기도를 올린다며 찾아오며 시작되었다.
-신주는 우상이고 축문은 악령을 부르는 삿된 말이 아닌가! 이를 당장 그만두시오!
본래의 조선도 아니고 입신체비로 인해 효심이 더욱 강화된 조선이기에 하베르라는 선교사의 말은 조선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으며 그는 철저히 근육 당하였다.
순교라도 불사하려는 하베르의 의지를 높게 평가하여 그를 대역기봉에 묶어 대역기의 대체품으로 닷새 동안 활용하고 인도로 추방시켰다. 이후 상세한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모든 선교활동이 금지되었다.
근육이 불끈거리는 관료 수십 명이 한 걸음씩 앞으로 다가오자 젊은 신부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크게 인사를 올린 다음 말하였다.
“삼십이 년 전의 무례함을 사과드리고 조선에 대해 철저히 배워 다시는 이전의 실수를 드러내지 않고자 이 자리에 방문하였습니다. 제 나이가 올해 스물넷이니 조선에 십 년 이상을 머물며 배우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아국에 십 년 이상을 머물며 배우라 하였다고? 대체 누가 명령을 내렸소?”
“그레고리오 13세 교황 성하께서 예수회에 명을 내려 가장 젊고 육체가 빼어난 이를 보내 조선에서 머물며 이국의 풍속을 철저히 배우라 명을 내리셨습니다.”
유교는 모든 사람은 학문을 익혀 성현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 여기는 학문이었다. 당연히 집안 사정이 어려워 배움을 중단하는 일을 안타깝게 보았으며 배움을 청하는 이를 거절하는 법이 없다.
선교사의 선교 활동은 경을 칠 일이지만 선교사가 배움을 청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진해대군이 이 모순에 빠져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자 상이경이 앞으로 나섰다.
“우선 신상명세를 파악할 것이오! 참으로 번거로운 일이지만 혹여나 삿된 뜻을 품은 이가 들어올 가망도 있지 않소!”
병사들 사이에서 한 명씩 나뉜 이들은 사역원 출신의 라틴어가 가능한 역관을 대동한 상이경에게 엄한 심문을 받았다. 여기에 온 이들 대다수는 귀족 출신이기에 라틴어가 능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저…… 저는 스코네(덴마크 남부) 출신의 학자입니다. 조선에서 천문을 보는 일에 능숙하다기에 배움을 청하려 왔습니다. 여기 제가 배를 타고 오며 천문을 관측한 장부도 있습니다.”
탈모가 심각한 젊은이가 쭈뼛거리며 심문을 통과했는데 다음으로 심문받을 사람은 얼굴이 동글동글한 청년이고 어디선가 본 사람 같았다.
모자를 벗자 드러난 일본 특유의 상투를 본 군관들은 아예 창날을 들이밀려 하였고 청년은 손사래를 치며 답하였다.
“저는 세스페데스 신부님의 하인으로 발탁된 왜인입니다. 신부님께서 조선의 생활에 적응한 이후에는 돌아가려 마음을 먹었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유성룡의 뛰어난 기억력으로 이 왜인의 정체를 추측할 수 있었다.
예전에 신혼여행을 다닐 적에 만난 약재상 고니시 류사의 친척이 분명하다! 이 외모면 빼도 박도 못하지.
본래 왜인은 허가된 자 이외에는 입항이 금지되어 있지만 시종이라는 말에 군관들도 창날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안심한 왜인이 자신의 이름을 말했는데 상상조차 못 한 인물이다!
“제 이름은 고니시 유키나가입니다. 예전부터 조선과 거래한 약재상인데 이번에 신부님의 추천을 받고 여기에 당도하였습니다. 혹여나 필요한 물품이 있다면…….”
너는 또 왜 여기 있어!
#작가의 말
알치드 데 상갈로는 가상 인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