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337화
2부 11장 5화 주변 사람도 챙겨야지(5)
분명 이순신은 내 집에서 머물 적이 있다. 당시에 실수로 두고 간 미완성 상태의 서적인 수성전수방략을 비롯한 병법서를 완독하였다.
사실 현실적인 병법서는 아니고 산성을 보수한 경험과 현대에서 했던 세계의 전차라는 게임에서 생긴 트리우마, 아니, 지식을 기입한 서적이긴 하다.
기대승도 삼각함수와 이차방정식을 익혀 이를 화포를 사용하는데 응용하는 장기 과업에 착수한다고 듣기는 했다.
내가 군대는 나오지 않았지만 친구에게 들었던 이야기는 있다.
-박격포? 내 보직이 81미리인데 사표 똑바로 읽는 것도 한세월이고 이걸 만드는 것도 한세월이라 들었다. 포격할 때 모든 요소를 총망라한 표인데 이걸 보고 쏴야지.
탄도학, 방정식, 각종 기후조건 그리고 탄약과 장약의 특성을 계산한 녀석이 사표라 했던가. 물론 이순신이 작성한 사표에는 이런 요소 상당수가 누락되었지만 이 시대 사람으로는 믿기 힘든 업적이다.
하지만 이순신은 여전히 울적한 표정으로 답했다.
“화포를 처음 접하는 병사들을 조련할 목적으로 시작하였는데 생각보다 효험이 있었지. 정신을 차려보니 자네가 만든 평판측량기로 벌판에 기준점을 세우고 거리를 측정하였다네.”
“지금 뭐라 하였나? 평판측량기라 하였는가?”
“일전에 훈련원에서 진로를 정할 적에 고봉(高峰: 기대승의 호) 대감께서 알려주신 서적을 통해 팔선(삼각함수)과 함께 사용법을 익혔다네. 물론 나와 다른 이들도 같이 익혔지.”
삼각함수? 수학적 기반이 부족해도 어떻게든 익힐 수는 있다. 이 시대의 삼각함수인 팔선은 중학교에서 배우는 삼각비에 가까운 쉬운 녀석이니까 노력만 하면 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이순신의 집념이다. 매번의 사격시험마다 철저히 기록하여 이미 천 단위의 화포 사용 기록은 물론이요, 각 화포의 특성을 계산하려 했는지 화포마다 번호도 매겨뒀다.
고란은 이 표를 보더니만 당시의 일을 떠올리고는 자랑을 늘어놓았다.
“제가 사과(司果) 어르신의 아래에 처음 부임할 적에도 화포를 다루지 못하는 이들이 생기자 입신체비로 기강을 다스렸는데 일 년이 지나니 효험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헛방만 치던 녀석들이 여섯 달이 지나자 어느 정도 표적 근처에는 다가가더군요.”
“지금 뭐라 하였나? 여섯 달이 지나자 어느 정도 표적 근처에 다가갔다고?”
“그렇습니다. 혹여나 너무 빠른 일입니까?”
너무 빨라서 도저히 믿을 수 없다!
군문의 일에는 밝지 않지만, 훈련원 출신이 아니면 화포 기초 훈련에만 여섯 달. 다시 화포를 제대로 쏘는데 일 년 이상이 걸려서 총 훈련 시간이 이 년을 훌쩍 넘어간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본래 역사에서 단 일 년 만에 전라좌수영을 조선 최정예 수영(水營)으로 만든 것과 마찬가지로 병사들을 일 년 만에 최정예로 만든 것이다.
이 위업만 해도 대단한데 왜 울적해하였을까. 이순신을 가만히 바라보니 답이 나왔다.
“내가 필사적으로 조련하였음에도 효험이 부족하였다네. 다른 이들의 훈련기록을 보니 나만큼 상세하지는 않았지만 명중의 가부(可否)에 있어서는 나보다 우수한 이들이 많았다네.”
“자네보다 우수한 이들이 많았다고? 자네가 명중하였다 정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그거야 훈련에 임할 적에 해적들이 사용하는 배의 크기만큼 나무 울타리로 선체(船體)의 형상을 만들고 여기서 십 보(16m)안에 명중하는 경우만 명중하였다 적었지. 명중률은 이 할에 불과하다네.”
내가 알기로 화포의 명중률을 따질 때에는 근처에만 닿아도 명중으로 친다. 남상정 휘하 병사들도 일천 보(1.6㎞)를 쏜다 치면 사거리의 5%인 오십 보(80m) 안에만 들어가면 명중이라 계산하였다.
양궁으로 따지면 보통 과녁에 닿으면 명중이라 계산하지만 이순신은 8점 이상을 거둬야 명중이라 계산하는 방식이니 20%만 적중시키지!
사표 사이에 장계의 원본이 끼어 있었는데 묵묵하게 사실만 적어놓은 것같이 보였다.
[계유(癸酉)년 을묘월 기미일(1573년 3월 11일) 적선 12척이 침략하였다. 병사들을 소집하여 화포를 쏘았으며 적선도 응사하여 화포 수십 발을 쏘았으나 요새 근처에는 접근조차 하지 못하였다.]
[현자총통과 지자총통으로 오백 보 거리에서 사격을 개시하여 두 척을 침몰시키고 두 척은 좌초시켜 해적 일백이십 명을 추포하였으며 총 340발의 화포를 쏘았다.]
참 밋밋한 장계이지만 많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가만히 보니 사표도 이 이후에는 훈련 내용만 적혀 있었으니 이걸 마지막으로 어떠한 침략도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과연 이 해적들이 어떠한 경험을 했기에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한 것일까. 이순신의 실력과 해적들의 행동을 분석하면 아마 이런 일이 벌어졌을 거다.
* * *
한 무리의 해적이 브루나이의 마을에서 모여 조선의 통치 영역인 남서주(팔라완 섬)로 항해를 시작하였다.
평상시에는 농사를 짓고 고기를 낚는 이들이지만 이들에게 약탈은 생활화되어 있었다.
농기구 대신 칼과 창을 짊어지고 조상대부터 쓰였던 소형 화포를 다듬는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해적이 아닌가.
돛을 움직이던 선장은 북동쪽의 팔라완 섬 방향의 바다를 보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조선 놈들이 저렇게 팔라완을 필사적으로 지키는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야. 그냥 내버려 두면 우리도 편하고 놈들도 편한데 그냥 내버려 두면 좋지 않을까.”
“팔라완을 점령한다 치면 거기서 땅을 파먹으면서 살라고? 팔라완을 노리는 다른 놈들이 생기고 또 내전을 벌이겠지. 결국 부수앙가(북서쪽의 섬)를 시작으로 또 해적질을 해야겠지.”
마자파힛 제국의 붕괴 이후 보르네오 섬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이어졌다. 온전하게 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 식량이 부족하고, 식량이 부족하니 약탈에 나서는 악순환이 이어졌지만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열두 척의 해적선단은 300㎞에 가까운 거리를 항해하여 가까스로 팔라완 섬 인근에 도달하였다.
육지가 가까워지자 선장은 저 멀리 보이는 요새를 가리키며 선원들을 다그쳤다.
“조금 더 접근해 요새에서 화포를 쏘기 시작하면 패를 둘로 나누고 전력으로 노를 저어 상륙한다. 알아서 약탈하고 빨리 빠져나오도록.”
조선에서 만든 요새도 있고 주둔 병력도 있는 팔라완 섬이지만 약탈의 성공률은 절반에 달했다. 먼바다에서 전속력으로 항해해 요새로 향하는 척 포격을 집중시킨 다음 사방으로 산개하는 기만전술은 해적들의 특기였다.
해적들은 4세이르(seir: 이슬람의 거리단위. 약 200m)까지 요새로 뭉쳐서 돌격하였고, 조선의 병사들은 대규모의 해적이 침략을 염두에 두고 요새로 병력을 소집하여 포격을 강행한다.
해적들은 포격이 시작되면 조선 병력의 집결되었음을 확인하고 산개해 약탈을 벌이니 공격자의 장점을 극대화시킨 기만전술이었다.
하지만 한 선원은 주변 지형을 보고 창백해진 얼굴로 항의를 하였다.
“죄송하지만 이 지역에는 귀신이 산다고 들었습니다. 옆 마을에 살던 살만 어르신이 혼이 다 나가서 돌아왔던데 여기 말고 다른 장소는 없습니까?”
“귀신? 당치도 않는 소리는 하지도 마라.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다고 그런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으니 평소에 하던 대로 해! 운이 없으면 몰살당하겠지만 그런 경우는 흔히 본 적이 있나?”
약탈도 정성과 노력이 필요하다. 한 곳만 죽어라 약탈하면 아예 마을을 포기하고 병력만 주둔시키는 법이다.
다들 약탈에 경험이 있었기에 군소리가 줄어들었고 선장은 마지막으로 해적들을 다그쳤다.
“어차피 굶으면 죽는데 뭐라도 해보고 죽어야 하지 않겠나? 다들 속도를 높여라! 지금쯤이면 조선 놈들이 천리경인지 뭔지로 우리를 발견했으니 머리통 조심하고!”
해적들은 선장의 장난스러운 말에 머리를 숙이며 긴장을 풀었다.
선원들도 화포를 쏘아본 경험이 있기에 잘 알고 있었다. 이 시대에 화포의 명중률은 형편없으며 정확히 쏘려면 1세이르(약 200m)가 실제 사거리이다.
운이 아주 좋으면 4세이르에서도 명중하는 일이 생기지만 그건 운이 좋은 것이다.
조만간 시작될 전투의 긴장감을 덜어내려 했는지 해적들은 잡담을 늘어놓았고 한 해적은 진지한 얼굴로 친구에게 자랑을 늘어놓았다.
“이번에 금붙이라도 좀 가져가면 그녀에게 청혼할 거야.”
“어이구 그러신가? 이런 촌구석에 그런 금붙이가 나온다면 내 자네에게 소를 사주지.”
“정말인가? 그렇다면 정말 고맙…… 구억!”
태연하게 혼담을 늘어놓던 해적의 가슴에 주먹보다 커다란 납덩어리가 날아와 거대한 구멍을 뚫었다.
사방으로 피와 고깃덩이가 흩날리고 선창 아래까지 관통했는지 사지가 잘려 나간 격꾼이 비명을 질러댔다.
“내 다리! 아아아윽으아아악!”
“이런 염병할! 왜 하필 혼담을 이야기하자마자 죽느냔 말이야! 지금 거리가 얼만데!”
생각해 보니 대응이 빨라도 너무 빨랐다. 평상시의 조선군이라면 지금쯤 병력 소집이 끝나 산개할 때쯤 포격을 시작하는데 벌써부터 포격이 시작되어 사방에 물기둥이 솟구치고 있었다.
얼마나 정확한지 허공을 가르는 화포가 처음부터 선단 주변에 내리꽂혔고 개중 몇 발은 배에 적중했다. 단순한 납덩어리 몇 발로 배가 침몰하지는 않았지만 해적들의 사이에서 공포가 퍼져 나갔다.
“이게 뭐야! 하늘에서 철퇴가 쏟아진다!”
“지금 우리가 티끌보다도 작게 보이는데 대체 뭔 일이야! 이게 말이나 돼!”
공포는 물밀 듯이 번져 나갔다. 동료들이 주먹보다 거대한 납덩어리에 맞아 사지가 분해되고 튼튼한 목재로 만든 배가 수수깡 부서지듯 나무 파편을 흩날리며 바닥까지 꿰뚫렸다.
삽시간에 퍼진 공포로 선단의 속도가 느려지자 선장은 명령을 내렸다.
“지금 뭘 하나! 화포는 뒀다 국 끓여 먹었어? 계속 전진하면서 화포를 쏘라고!”
마자파힛 제국의 영향을 받은 화포는 해적들도 간혹 사용하는 무기였다. 조선의 자모포와 닮은 소구경 화포인 란타카(lantaka)는 구경은 작지만 엄연한 화포였고 사용법 또한 널리 퍼져 있었다.
“제대로 쏴! 놈들의 요새에 구멍이라도 내서 몸을 움츠리게 만들어야 해!”
“산개해서 상륙하면 안 됩니까?”
“이미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쏘고 봐야지! 지금 상륙하면 사방으로 도망치다 개죽음당하니까 사기라도 올리자고! 이대로는 도망도 치지 못해!”
열두 척의 해적선에서 대응사격이 시작되었지만 허공에 화약을 날리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배에서 화포를 쏘아봤자 파도와 배의 움직임 덕분에 조준은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이다.
해적들이 일으킨 물기둥은 요새 근처에도 닿지 못했고 오히려 화포를 쏘느라 속도가 느려진 덕분인지 요새에서 날아오는 포탄이 더욱 많이 명중하였다.
결국 선장은 눈에 불을 켜고 명령을 내렸다.
“모두 퇴각해! 당장 산개해서 퇴각하라! 더 이상 맞았다가는 선체가 버티지 못해!”
이미 열두 척의 선박 가운데 두 척이 멈추고 나머지 두 척은 혼란에 빠져 서로 살아남으려고 아귀다툼을 벌였다. 가까스로 도주할 수 있었지만 열두 척의 선단은 일곱 척으로 줄어들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저 지역에는 귀신이 살고 있었다. 격꾼과 약탈에 나설 장정을 포함해 칠백여 명의 해적이 달려들었지만 이 시대에는 견제라 여긴 포격 하나로 제압당하였으니 사람이 아니고 귀신이 분명하다.
* * *
이순신이 목표로 삼은 오백 보 거리면 맨눈으로 볼 때 사람은 점으로 보이고 선박은 손톱 크기로 보인다.
이순신과 같은 하급 군관들이 휴대하는 천리경이 5배율 안팎이니 대충 선박을 손가락만 한 크기로 인식할 수준이다.
망원경이 있어도 화포를 쏘는 이들에게는 망원경이 없다. 결국 이순신이 제작한 사표대로 쏘아야 하는데 이 시대에는 군신(軍神)이나 화포의 신 혹은 귀신으로 여겨 도저히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했으리라.
스스로 까다로운 기준을 세우고 이를 달성한 이순신이기에 오히려 장수로서의 자질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으니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이순신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려고 술잔을 채운 다음 말하였다.
“솔직하게 말하겠네. 내가 유훈(남상정의 호) 장군과 일을 같이하였지만 자네와 같이 화포를 매섭게 다루는 이를 본 적이 없네. 장담하건대 자네가 조련한 병졸보다 뛰어난 이들은 충무위(忠武衛) 병사 외에는 없을 것이네.”
충무위는 오위 가운데 수비와 화포사용에 특화된 이들이다. 보급부대인 충좌위를 제외하면 오위의 말석이라 여기지만 조선 제일의 병사들이다. 내가 충무위를 논하자 이순신도 낯빛을 바꾸며 말하였다.
“충무위라? 그렇지 않아도 오위에 배속될 시기라 많은 배움을 얻으려 충무위로 진로를 정하고자 하였는데. 과찬은 책망보다 못한 법일세.”
“농담이 아닐세! 아마 충무위에서 십여 년 이상 화포를 다루던 이들도 자네에게 배움을 청할 지경이니 여해 자네의 실력을 과소평가하지 말게나.”
이순신이 전과를 거둘 장소는 어디일까. 요동은 마적이 들끓으니 화포의 효율성이 떨어질 것이요. 일본에 보내려 했는데 임차손은 또다시 일본으로 파견 나간다고 했던가.
결국 이순신을 천거할 장소는 단 한 군데 외에는 없었다. 몇 년 이내로 확실한 전쟁이 벌어지며 지금도 사방에서 아귀다툼을 벌이는 곳이다.
나는 이순신을 똑바로 보고 진중하게 말하였다.
“오위에 배속되는 일을 무르고 수리가 일대의 파양군에 부임하기를 청하게나. 조만간 자네의 힘이 발휘될 곳이 있으며 벗인 언신(권율의 호)이 있으니 많은 도움이 될 걸세.”
호랑이를 우리에 가두면 살만 찌는 법이다.
완전히 성장한 호랑이는 아니더라도 청년 호랑이인 이순신을 제대로 키우려면 확실한 전쟁이 벌어질 곳에서 키워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