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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조선-336화 (336/573)

근육조선 336화

2부 11장 4화 주변 사람도 챙겨야지(4)

형님의 일을 도운 지 한 달이 지났다.

형님의 품계가 상승함은 물론이요 농조의 속아문인 장원서(掌苑署: 정원, 숲 그리고 작물을 관리하는 기관)에서 관리가 내려와 내가 모아둔 고추 씨앗은 물론 고춧가루도 대부분 가져갔다.

내가 20년 가까이 개량한 고추는 매운맛이 빠지고 복잡한 맛이 생겨나 술꾼들의 술안주에서 음식에 넣어도 될 부재료가 되었다. 계기가 뭔지 몰라도 궁궐에서는 내금위 군관을 시작으로 닭갈비가 퍼져 나가고 있다더라.

“닭갈비가 그렇게 인기라던데 정작 나는 먹어볼 수도 없으니…….”

형님이 만든 고추장이 숙성되면 더 맛있는 닭갈비는 물론이요 고추를 이용한 각종 요리를 만들 수 있으니, 천천히 기다리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아직도 휴가는 한 달 넘게 남아 있으니 홍문관에서 할 일이 있었다.

몇 년 만에 방문한 홍문관 입구에 들어서자 반가움과 질시가 섞인 기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자료 보관소나 마찬가지인 홍문관에 지나치게 많은 과업을 떠넘긴 사람이 바로 내가 아니겠는가.

물론 관료생활 초창기에 날뛴 거고 이후 몇 년 동안 인맥관리를 철저히 했으니 대부분 사이가 좋아졌지. 덕분에 인품이 좋다고 소문이 퍼졌지만 내가 만날 사람은 나와 대척점에 서 있는 자이다.

“송강 있는가? 자네와 논의할 이야기가 있어서 왔다네.”

“궁궐 반대편에서 업무를 행하며 나를 한 번도 보러 오지 않다가 여기까지 웬 일인가? 이 무거운 엉덩이가 들썩거릴 연유라도 있던가?”

얼마 전에 홍문관의 부교리(副校理: 종5품 관직)로 부임한 정철은 나와 확실한 대척점에 서 있지. 입신체비는 체면치레 이상으로 안 하여 삼대운동 500근 턱걸이요, 절육(커팅)을 비롯한 섭생관리도 안 하니까.

성격은 더 개판이다. 지금도 내 인사에 쏘아붙이듯이 답하는데 서로 소과 동기이자 훈도 동기임은 모조리 까먹은 양 아집을 부린다.

하지만 이런 사람이라도 쓸모는 있으니 적당히 맞장구를 쳐줬다.

“엉덩이가 들썩거릴 연유는 많고 많다네. 당장 하체를 할 적에는 엉덩이가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하는데 자네도 하체를 놀려보지 않겠나.”

“내 입신체비는 완숙의 경지에 이르러 더 발전하지 않는다네. 그나저나 자네가 관심을 가질 만한 서적을 준비했다네. 요즘 잡무만 행한다는데 자네에게 도움이 될 것 같군.”

술을 하도 마셔대니 통통한 몸이 되어 체중을 감당하기 위한 근육이 생겼고 그걸로 대충대충 때우는 주제에!

그래도 정철의 문학적 재능과 자신이 몰두한 업무에 사력을 다하는 행동은 필요하니 아내에게 받은 가계부 요약본을 전달하였다.

“내가 이번에 형님을 도우면서 안사람이 물목에 대해 소상히 정리한 장부를 보았다네. 내가 보기에는 자네처럼 잡다한 지식에 능통한 사람이 없으니 요람(要覽: 백과사전)을 집필해 봄은 어떠한가.”

“요람? 요람이라 함은 사소한 물목을 적어나가는 것이 아닌가? 자네는 나를 저기 구석에 있는 한 사자관(寫字官: 문서를 옮겨 쓰는 벼슬)과 같이 보나?”

“자네에게도 좋은 일이라 추천하는 것이네. 내가 알기로 자네가 홍문관에 들어오고 뚜렷한 업무를 수행한 적이 없는데 요람을 편찬한다 하면 주상전하께서도 크게 기뻐하시겠지.”

정철은 눈을 가늘게 뜨고 분풀이를 하려는 듯이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나도 꾀를 썼다.

복잡한 업무도 마음에 들면 전념으로 임하고 쉬운 업무도 마음에 안 들면 대충하는 정철이 이 업무를 마음에 들게 할 말을 준비해 놨다.

“요즈음 궁궐에서 소문이 퍼지는 닭갈비라는 음식이 이 가계부에서 비롯된 것일세. 과정이야 복잡하지만 이러한 서적이 많을수록 세상의 일에 대해 상세히 아는 법이니 더 좋은 요리가 나오지 않겠는가.”

정철의 가느다란 눈이 커지면서 시추, 그 애완견 시추와 비슷한 특유의 땡글땡글한 눈으로 변했다. 인과관계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음식을 안주로 여기는 정철에게 맛있는 요리는 관심을 가지기 충분한 소재임이 확실했다.

여기에 쐐기를 박았다.

“더군다나 요람을 만들 적에는 기이한 물산을 알아야 함이 마땅하다네. 자네가 술을 좋아하니 지나치게 값지지 않은 술이라면 요람을 만들 때 필요하다며 마셔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어허! 조정의 예산은 한정되어 있으니 내가 직접 확인하러 발을 놀려야지 어찌 국고를 탕진하려 든단 말인가!”

정철이 나를 꾸짖는 말을 하며 억지로 눈을 부라리고 목소리를 높이는데 생각이 훤하게 보여서 쓴웃음이 나왔다. 백과사전을 편찬하려는 목적으로 사방을 떠돌며 실컷 즐기려는 것 같은데 고생을 자처하고 있다.

백과사전은 수많은 자료를 취합하고 중복과 내용 간의 모순을 피하는 복잡한 작업을 요구한다.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정철이라도 최소 오 년 이상 자료를 취합하고 정리해야 하리라.

하지만 이런 고난은 염두에 두지 않았는지 정철은 가슴을 탕탕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생각하여 보니 각지의 물산을 정리한 서적이 홍문관에 집결되어 있는데 이걸 기반으로 요람의 기본을 잡으면 되겠군. 자네의 말은 고맙지만 엄연히 외조에 소속된 관원이니 이번 일은 내가 책임지고 나서겠네.”

“자네가 이렇게 관심을 보일 줄은 몰랐군. 나야 재능이 부족하여 자네에게 해를 입힐지도 모르니 차라리 자네가 전담하는 것이 나아 보이는걸.”

“그렇게 생각하면 어쩔 수 없지. 본래 업무를 분담하여 겸손함을 드러냄이 도리이건만 자네가 탐탁지 않게 여기니 내가 주상전하께 장계를 올리겠네.”

계획대로 폭탄 떠넘기기에 완벽히 성공했다. 정철이 백과사전 편찬을 시작한다 하면 성격이 개판인 정철에게 원한을 가진 이들이 너도나도 자료를 제공하리라.

내 이름이야 자료를 제공한 수많은 이들 가운데 한 명으로 남을 뿐이고, 자료의 산에 쌓인 정철은 문학적 재능을 불살라 가며 사전 편찬에 임하리라.

잠시 보고 있으니 정철은 장계를 작성하자마자 한 사자관이라는 사람에게 넘겼고 참고 서적을 찾는지 홍문관 서재를 드나들며 서적을 수십 권이나 가져왔다.

“한 사자관! 내가 남긴 장계에 이 서적의 목록을 포함하여 작성해 주게나!”

삽시간에 장계를 작성할 처지에 놓인 한 사자관은 정철과 아는 사이였지만 갑자기 업무폭탄을 받으니 정철을 슬쩍 노려보다가 벼루에 붓을 정돈하며 물어보았다.

“송강과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누었기에 아침부터 사방을 헤집고 다닙니까? 평상시에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친밀히 지내던 사람인데 이렇게 돌변하니 연유를 모르겠습니다.”

“사람마다 천직이 있는 법이라 사소한 대화로도 계기를 얻었다네. 필체가 수려한 것이 비해당(안평대군의 호)과 견줄 수 있는데 자네의 호가 무엇인가?”

관청에 근무하는 하급 관원이지만 필체 하나로 뽑히는 이들이라 인간 인쇄기 수준이다. 하지만 이 사람은 안평대군의 필체와 견줄 수 있을 정도로 솜씨가 천부적이다!

혹시나 한 사자관이라 했으니 한석봉인가? 그의 입에서는 예상대로의 답이 나왔다.

“삼화 한 씨이며 호가 석봉(石峯)입니다. 개성에서 태어나 얼마 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필체가 수려하다고 사자관으로 발령받았지요. 송강과는 제법 차이가 나지만 벗이 되었습니다.”

친구가 적은 정철이 홍문관에서 가까스로 사귄 친구가 한석봉이라니 이건 우연 중의 우연이 아니겠는가. 내가 기억하기로 한석봉은 서예 솜씨만 우수하고 나머지 실력은 최악이라던데 정철과 친하다고?

정철이 저렇게 열정을 보이면 인간 인쇄기로 일을 열심히 할 것이요, 태업을 일삼으면 같이 태업하며 일을 헛되이 하지 않을까.

여하튼 위인 또 한 명을 알게 되었으니 악수를 나누고 말하였다.

“나와 대화를 나누어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서적을 편찬하여 세상에 퍼뜨릴 계획이라네. 그 서적에 자네가 힘을 더하면 출세는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듣던 중에 참으로 반가운 소리이군요! 제가 업무 능력은 형편이 없지만 붓놀림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부족하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좋다 여기겠지만 아마 일 년쯤 지나면 정철에게 걸쭉하게 욕을 날리지 않을까. 최소 수십 권 이상에 심하면 백 권 이상의 서적 원본을 만들어야 하니 사자관 입장에서도 고난이 따로 없으리라.

* * *

이틀 뒤에 정철이 갑자기 집에 방문하였다.

주상전하의 허락을 받아 조선의 본래 영토인 팔도 전체를 돌아볼 수 있게 허가를 받았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더니 평소에는 안 하던 선물까지 잔뜩 주고 떠나버렸다.

“아무리 보아도 사헌부의 입김이 들어간 인사가 분명해. 관청에 두면 슬금슬금 태업을 일삼고 평상시에 대화를 나누면 언쟁이니 지방이나 돌면서 머리나 식히라는 뜻이겠지.”

선물이랍시고 전해준 술은 대부분 유통기한이 한 달에 불과한 고급 청주다. 지방에 내려가 물목을 조사한다면서 술을 퍼마시려는 모습이 분명하기에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얼마 전에 군기시에서 돌아온 이순신과 고란을 초대해서 술판을 벌였다. 얼마 전에 절육시기를 마쳤으니 지금은 몸을 불릴 시기였으니까.

고란은 나를 만나자마자 눈물을 글썽거리며 달려들었다.

“세상에, 정말로! 정말로 힘들었습니다! 제 체중이 일백오십 근(96㎏)에 도달할 정도로 몸을 거세게 놀렸지 뭡니까! 그 뭐라 하나, 와신상담(臥薪嘗膽)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와신상담은 여기서 쓰일 단어가 아닌데 머리에 먹물이 조금 들어찼나 보군. 내가 중요하게 보는 것은 자네의 학식일세. 공부는 많이 하였는가?”

“아직 무과에 응시하지 못하였지만 훈련원을 정식으로 이수하여 지금까지 쌓인 경력을 인정받은 데다 추가시험에서 손자병법을 외워 종7품으로 품계를 올렸습니다!”

내 아래에서는 죽으라 공부 안 하더니만 어느새 손자병법도 읽었다고? 이순신이 고개를 끄덕이는걸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물론 고란이 내가 지어준 호대로 온 도시를 호령하는 만도(滿都)장군이 되려면 한참 남았다.

“그래 보았자 당상관 위로 올라설 방법이 없으니 무과를 준비함은 마땅한 일이지.”

“당상관……. 그래, 당상관 좋지요! 그렇지 않아도 임해도감에 근무하게 되었으니 이번에는 정말로 해적들 머리통이나 부수러 내려가야겠습니다!”

“머리는 여해 아래에서 실컷 부쉈을 것인데 그렇게도 욕심이 남던가? 바가지만 보여도 두들겨 패서 깨버릴 것 같으니 바가지를 다 치워야겠군.”

나는 농담으로 받아들였지만 심각한 이야기였는지 이순신도 고란도 표정이 굳으며 뭐라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고란이야 지금까지 미뤄온 경력을 인정받아 품계가 대번에 올랐지만 이순신의 품계는?

“여해 자네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 자네가 부임할 적에 분명 종6품 절제도위였는데 보통 여송의 남서주(팔라완 섬)에 부임한 군관은 삼 년 동안 두 품계가 오른다고 들었네.”

“지금은 오위로 보직이 옮겨져서 정6품 사과(司果)가 되었다네. 이게 다 운이 좋아서 벌어진 일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군.”

이건 또 뭔 소리란 말인가. 이순신은 자신의 실책도 아니고 순수한 운이라 여겼는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여전히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젊으니 공적을 쌓을 기회는 차고 넘치지 않겠나? 좋은 안주도 있고 술도 있으니 간만에 즐겨보세. 한 잔 받게나.”

잔이 가득 채워지자 이순신도 눈치는 있었는지 내 심각한 표정을 보며 억지로 얼굴을 폈다.

이윽고 몇 잔을 주고받은 이순신은 술기운이 올라 푸념을 늘어놓았다.

“내가 운이 지독히도 좋아 해적들이 내가 방비하는 지역을 제외한 다른 곳으로 침략하는 일이 잦았다네. 덕분에 백성들은 평안히 살았지만 큰 전과는 올리지 못하였지.”

“운이 좋아서 싸우지 않았다면 별 방법이……. 지금 뭐라 하였는가? 해적들이 자네가 있는 곳만 피해 갔다고?”

문래국(브루나이) 일대의 해적은 생계형 해적이다. 뭔 말인가 싶지만 열대지방의 비효율적인 농경으로 기근이 자주 벌어지니 약탈을 일삼아 부족한 물자를 보충한다.

당연히 마을이나 항구가 보이면 닥치는 대로 습격하여 한 달에 한 번꼴로 들락거리니 남서주는 사람이 살 곳이 못 되며, 하급 군관들이 전공을 쌓으려고 돌아다니는 장소이다.

고란도 아쉬운 생각이 들었는지 푸념을 덧붙였다.

“훈련이야 열심히 했습니다. 화포를 오백 보(800m) 거리로 쏘면 십오 보(24m) 이내에 명중할 정도로 열심히 훈련하고 병졸들을 통솔한 것은 좋은 일이었지요. 하지만 해적이 안 오는데 어찌합니까?”

지금 내 귀가 잘못된 것 같은데? 화포를 오백 보로 쏘면 곡사로 올려 쏜 것이요, 이백 보(320m) 이내의 직사가 아니면 이 시대의 화포는 명중률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상식이다. 당장 남상정의 이야기를 되새기면 이렇다.

[뇌력포는 곡사로 올려 쏠 경우 최대 사거리가 이천 보(3.2㎞)에 달하지만 명중률은 극히 낮으며 일백 보(160m)를 비껴가는 일도 흔하지. 수십 발을 최대 사거리로 쏘아도 적중하는 것은 한두 발 외에는 없소이다.]

요새에 빼곡하게 박힌 화포를 일제사격으로 수십 발을 날려도 곡사로는 움직이는 배를 명중시킬 수 없다 하였고 직사로 쏴야 한다던데 내가 뭘 잘못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순신은 품에서 서적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나도 열심히 병사를 다스려 보았지만 얻어낸 것은 고작 이거일세. 자네가 집필하던 수성전수방략을 보았지만 자네의 생각만큼 몸이 따라오지 않더군.”

이순신이 내민 서류는 다른 무엇도 아닌 표이다. 이게 뭔지 한참을 해석했는데 이순신은 매 화포의 사용을 기록하고 정리하여 사거리와 각도, 그리고 화약의 양을 철저히 조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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