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332화
2부 10장 9화 귀향
졸지에 조선에서 이주한 주요 관원 모두 코끼리에 올랐다.
코끼리의 등 위면 건물 지붕과 대등한 높이인데 여기에 가마를 올리면 더욱 높아지게 마련이다.
코끼리의 등 위에서 두려움에 떨던 이들은 이내 안정을 찾고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정탁은 정식으로 군수로 임명된 상급자여서 체면을 지키려 하였지만 코끼리의 등은 제법 많이 흔들렸는지 멀미를 참으며 억지로 찬사를 늘어놓았다.
“시야가 넓어지는 것이 장대(將臺: 장수의 지휘대)에 오른 기분일세. 그런데 너무 흔들리지 않는가? 이래서야 오래 버틸 수 없겠는데.”
“저도 곽란(癨亂)에 시달리다 꾀를 내어 먼 곳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더욱 넓은 곳을 볼 수 있더군요.”
조감도(鳥瞰圖)와 같이 높은 지형에서 바라보면 도시 계획을 잘 세울 수 있다지만 어디까지나 새처럼 높은 시선을 가질 경우의 이야기이다.
기껏해야 코끼리 등 위에서는 가로계획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될 뿐이다.
그래도 정탁이 코끼리에 익숙해지면 도움이 된다. 나는 입신체비를 하며 놀아주고 가끔 실랑이도 벌이고 민가에서 뭘 훔쳐 먹으면 손찌검도 하는데, 이렇게 벌벌 떨면 코끼리가 우습게 보아 명령을 듣지 않을 수 있다.
덕분에 주 업무를 담당하는 세 관원은 인수인계와 현지 적응, 그리고 코끼리 적응을 순차적으로 실시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군수로 부임할 정탁은 정말 철저한 원칙주의자였다. 그는 장계를 살펴보더니 매섭게 쏘아보고는 말했다.
“예산이 제법 비는 것 같은데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아직 제대로 된 법도를 적용하지 않아 물품을 횡령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형무소가 세워지지 않아 임시로 요새 축성에 보내 과오를 뉘우치게 하지만 한도가 있습니다.”
이미 내역과 산출이 공식화된 조선에서도 대략 5푼, 5% 정도의 물자는 허공에 뜬 신세가 되어버린다. 중간 유통 과정에서의 손실이라 위장해서 빼돌리는데, 어느 정도는 눈을 감아주지만 정도가 지나치면 형무소행이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는 손실 물자가 20%에 달해 조선 초기의 추정 손실과 비슷한 실정이었다.
정탁은 답답한 마음에 혀를 차며 금광 방향을 돌아보고는 다짐하듯 말했다.
“내가 삼 년을 부임할 예정이지만 가능하면 이런 사특한 짓거리를 행하지 못하게 기강을 다잡을 것이네. 그렇지 않아도 인근에 화산이 있던데 형무소 대신 유황을 캐면 정신을 차리겠지.”
유황을 캐게 만들면 뇌에 유황이 스며들어 정신이 나갈 것인데 무서운 소리를 대놓고 하는구나.
하지만 나야 주민들을 어르고 달래는 입장이라 하지 못할 일이다. 그러나 정탁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수리가 부족은 조선이 주는 혜택을 받으려 수단을 가리지 않는 상황이니 정탁의 뜻대로 일이 돌아가리라.
하지만 의외로 까다로운 사람이 장인어른의 마지막 제자인 조헌이었다.
조헌은 종8품에 불과하여 권율처럼 도시를 담당할 사람은 아니었다. 덕분에 조헌의 담당은 오로지 금광 일대에 불과하였으나 그는 자신의 담당 지역을 돌아보고 날카로운 간언(諫言)을 시작하였다.
“파양군을 돌아보니 이 지역의 문제점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고장은 금광도 있으며 주상전하께서 명을 내리셔서 서역과 교류하는 항구이지만 내부 방비가 부족합니다.”
내부 방비가 부족하다? 지금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고 군문의 일은 남상정에게 일임하였기에 나는 요새 설계에 조금씩 조언을 보내고 물자를 지급하였다.
이미 이 지역에 병사가 사백 명이요, 최소한 정예병 오십 명에 해당하는 코끼리가 다섯 마리이니 차고 넘치는 병사가 주둔하고 있다.
하지만 조헌은 눈을 부라리며 사방을 돌아보고는 감상을 늘어놓았다.
“손자병법에 이르기를 오사와 칠계(내부와 외부의 조건)를 철저히 알고 대비하라 하였습니다. 하지만 남방에 해적이 들끓고 인근에 탐욕을 일삼는 회회교(이슬람교)가 기세를 부리는 지역이니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본래 유생이라 하면 상식을 키우기 위해서 병법서를 읽는 경우가 많고 간혹 사람이 없을 경우 무관 대신 지휘를 할 수도 있다. 물론 전공은 아니라서 어디까지 취미 생활로 유지하는 사람이 태반이다.
하지만 이 젊은 유생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일대의 수비 방안에 대해 열변을 토하였다. 나도 다 알고는 있지만 실행하지 못했다! 내 몸은 하나인데 담당 구역은 여럿이니까 답이 있나!
생각 같아서는 집필하다 그만둔 수성전수방략을 보여줘 지식을 자랑하고 싶었지만 이 서적이 퍼지면 북한산성 공사에 투입될지도 모른다. 일하고 돌아와서 또 일하기는 싫으니 조헌의 열변을 막아내야겠지.
“설령 수천이 넘는 해적이 쳐들어와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으니 염려하지 말게.”
“하오나 수천이 넘는 해적들이 쳐들어오면 백성들이 화를 입으며 고을이 파손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손해를 피하려면 석축을 만들고 목책을 두어 침략에 대비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참 틀린 말은 안 하면서 일하고 싶다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니 기가 찼지만, 장인어른 제자이니 어느 정도 보살필 마음은 들었다. 특히 업무에 임하는 태도가 마음에 든다.
“자네의 고견(高見)은 잘 들었네. 하지만 주변에 일손이 남지 않으며 장정 가운데 상당수는 남 찰리사 휘하에서 요새를 축성하고 주변을 정돈하고 있는데 방도가 있던가?”
남상정은 내년까지 근무하며 수비체계를 만들어야 하는데 시일이 촉박해 귀한 화약을 동원해 암반을 터뜨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귀한 인력을 내부 수비에 돌리라고?
하지만 조헌은 오히려 화색을 드러내며 말하였다.
“참으로 잘된 일입니다. 요새를 만든 이들이 돌아온 이후 다시 내부를 견실히 하면 수천의 적도가 침략하여도 굳건히 막아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훗날이 되어 여유가 생기면 이를 철저히 행하겠습니다.”
저 눈빛을 보니 조헌의 성품을 알 수 있었다. 이 젊은 유생은 적이 침략하건 침략하지 않건 항시 대비하여 변란을 막아내려는 의지를 보였다.
나쁘게 말하면 오지랖이 넓은 것이고 좋게 말하면 행동하는 선비이다.
눈을 부라리며 모든 요소를 파악해 보겠다고 돌아다니는 조헌을 뒤로하고, 만난 사람은 권율이었다.
권율이 담당하는 지역은 파양군 외부인데, 권율은 아직 가건물과 초소만 있는 지역을 살펴보면서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있었나 보다.
“여기에 서역인과 남방에서 올라온 회회교도가 머무르는 일이 전부인가?”
“그렇다네. 실은 만들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나도 몸이 하나인지라 부족한 점이 있었지.”
지난 한 달 동안 만나봤던 권율은 언제나 여유를 가지며 여력을 쌓아가다 필요한 일에 전념하는 사람이었다. 일할 때 힘들어하고 평소에는 털털한 사람이니 본래 역사에서도 재능을 뒤늦게 발휘하였으리라.
“자네가 부족한 점이 있다 하였는데 내가 사력을 다해 자네를 좇아가려 애쓸 것이니 염려하지 말게. 그나저나 자네는 돌아간 이후 여해와 이야기를 좀 나눠보게나.”
이순신 이야기가 왜 나온단 말인가. 주고받은 서신에 의하면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했는데 뭐 상급자와 알력다툼이라도 있었나?
의문은 있었지만 이순신이 겪은 일에 대해서는 이순신을 만나면 알 수 있으리라.
이윽고 한 달 동안 인수인계를 마치니 음력 1월 말일이 되었고, 내 근무일수도 끝나 다시 조선으로 귀환할 시기가 되었다.
* * *
조선에 돌아와서 느낀 감상은 딱 하나다. 춥다! 정말 뼛골이 시리도록 춥다 못해 솜을 누빈 속저고리를 입고도 추위를 견디지 못하겠다!
“불…… 불을 좀 더 때어라!”
“이미 가장 세게 불을 놓고 있습니다. 여전히 추우십니까?”
고작 이 년 동안 적도 근처에 있었다고 추위를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바닥이야 뜨겁다 못해 화상을 입을 지경인데 이놈의 창문 사이로 파고드는 외풍에 뼛골이 시리다!
아이들이야 내 새카맣게 타들어 간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다 인사를 올렸지만 어찌나 반가운지 몰랐다. 내 무사 귀환을 축하하려고 주변 사람들이 주연을 계획하였는데 아직 할 일이 있었다. 보고는 올려야지!
도성에 돌아오고 딱 이틀 뒤에 출근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나도 바보는 아니기에 준비를 철저히 했지만 궁궐에 나설 때 아예 모피를 엮은 갖옷을 걸쳤는데도 이가 딱딱 떨려왔다.
“서애 자네가 고생이 참으로 많았네. 그나저나 몸이 좀 날렵해진 것 같은데.”
“여름 더위에 여섯 달을 시달렸으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오랜만에 만난 기대승이지만 너무 반가워서 고개를 푹 숙여 인사를 올렸다. 내가 열심히 다른 데서 일하는 동안 기대승도 진급을 하여 형조판서가 되었다.
십 년 가까이 일해서 두 품계만 오르다니 이 잔혹한 현실이 대체 뭐란 말인가. 그만큼 열심히 일해야 당상관 이후 승진이 보장되니 답답한 노릇이 아닌가.
엄동설한도 아니고 새싹이 움트는 음력 2월의 추위에 덜덜 떨며 조회를 마쳤는데 정말 견딜 수가 없었다. 들어가서 어서 뜨뜻한 국물이라도 마시고 싶어졌는데 관원이 다가오더니 갑자기 생각하지도 못한 이야기를 하였다.
“주상전하께서 명을 내리셨으니 유 교감(校勘: 외조 속아문의 종4품 관직)께서는 어서 편전(便殿)으로 드시지요.”
“지금 편전이라 하셨습니까? 주상전하께서 어찌 저를 편전에 들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보통 조선 시대의 임금이 공식 업무를 진행할 때에는 정전(正殿)에서 맞이한다. 문무백관 가운데 당상관을 소집하고 왕세자나 종친을 불러 제대로 된 업무를 진행하는 것이다.
반면 편전은 이보다 급이 낮은 업무를 진행하며 조강을 비롯한 학문 활동을 실시하는 사정전을 의미한다. 난생 처음 사정전에 들어서는데 생각해 보니 내 관직도 한 품계가 상승했다!
“가만있어 봐, 내가 나설 적에는 외조 정랑으로 임명되었는데 어느새 교감이 되었지?”
내가 알기도 전에 인사 처리가 완료되었으니 대체 무슨 업무가 내려올지 두려움이 밀려왔다. 솔직하게 말해 내 마음대로 일하면 좋지만 나도 사람이고 쉴 필요는 있다.
하지만 왕명을 거역할 수 없는 노릇이니 안내를 받아 사정전에 들어섰다.
의외로 사정전에는 문무백관은커녕 정승인 권철과 외조 소속 관리 몇 명만 도열하여 있었다. 당연히 가장 안쪽에는 주상전하가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앉아 있었다.
“유 경차관이 치적을 많이 쌓았는데 그만큼 고생이 많은 것 같구려.”
“보잘것없는 성과를 거둔 신에게 이렇게 은혜를 내리시니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보잘것없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였소? 이러다가 궁궐 전체를 뜯어고치고도 마음에 차지 않다 성을 낼 것 같다네. 이미 장계로 보고를 받았으나 상세한 일을 알고자 하여 여기까지 불렀으니 파양군에서 있었던 일을 상세히 이야기해 보게나.”
상세한 일을 알고 싶다 하였기에 정말 상세히 알려주려 하였다. 왕 앞에서 거짓말을 하거나 이야기를 숨기면 기군망상(欺君罔上)이라는 죄목에 해당되니 당연한 일이다.
처음에는 지침대로 업무를 진행하려 하였지만 회령군의 가르침을 떠올려 영회(시멘트)를 사용해 보았고, 겨울이 없는 기후 덕분에 파손이 적어서 두루 쓰일 수 있다는 대목이 나오자 주상전하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마디를 보탰다.
“실은 자네가 장계를 올리자마자 공조 관원을 동원하여 영회를 만들어 보았다네. 하지만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되자 곳곳에 균열이 생겨나 몇 해가 지나면 무너질 것이 분명하였지. 하지만 몇 번 시험하면 좋은 물건이 나올 것 같아 계속 다루게 한다네.”
공조 관원들이 험지인 영동까지 출장 나가서 아직도 석회석을 구워 시멘트를 만들고 있다고? 공조에서 일할 적에 괜히 까불지 않으려 했는데 영회랍시고 말이라도 꺼냈다간 아직도 영동 산골에서 일하고 있겠지.
계속된 보고에 외조 관원들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특히 코끼리가 생각보다 유순하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외조판서인 상이경도 수군거리며 다른 관원들과 이야기를 나눴으니까.
“그리하여 신이 사력을 다하여 임한 결과 후임자들이 부임할 수 있는 고을을 마련하는 일이 전부였사옵니다. 아직 침략에 대한 방비도 성치 않은 고장일 뿐인지라 미흡할 따름이옵니다.”
“이천 명이 거주할 고을과 뇌력포가 스무 문에 달하고 다른 화포를 합치면 팔십 문에 달하며 요새가 네 곳에 전함 다섯 척이 정박할 수 있는 항구 두 곳을 마련했는데 부족하다 하는가?”
주상전하는 껄껄 웃으며 나에 대한 포상을 내리려는지 이미 작성한 고신(告身: 임명장)을 하사하였다. 본디 정식으로 고신식을 치러야 하지만 나를 배려한 것이 분명하였다.
내가 품속에 임명장을 집어넣자 웃음을 그친 주상전하의 말이 이어졌다.
“유성룡 자네를 외조의 속아문인 통상원(通商院: 외교통상 관할부서)의 종4품 교감에 임명하는 일은 이미 작년 말에 정해진 일이었다네. 이미 여섯 달을 근무한 것과 동일하게 대접할 것이니 다음 업무를 시작하게.”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다음 업무? 또 업무라고? 나도 솔직하게 말해 지쳤고 가족과 함께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렇지 않아도 외방에서 일하다 온 사람은 쉬게 하는 규칙이 있지 않던가?
아니나 다를까 나에 대한 휴가 이야기가 나왔다.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본디 외방에 부임하고 돌아온 관원은 여섯 달 정도 휴식을 취하게 한다네. 자네의 치적이 제법 많은지라 자네도 여섯 달 동안 휴식을 취하여도 좋겠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오나 신은 아직 젊은지라 여섯 달을 채우지 않아도 몸이 상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옵니다!”
이것도 이황과 조식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여송이나 미주에서 관찰사로 일하고 돌아온 다음 여섯 달의 휴가를 받았지만 이를 줄여달라 청하여 석 달만 휴식을 취하고 조정에 돌아왔다고.
하지만 의외로 주상전하의 의지가 강력했다.
“반드시 여섯 달을 쉬도록 하게. 만약 몸을 놀리고 싶어 안달이 났다면 석 달 뒤에 강화도호부에 방문하는 라마국(신성로마제국)의 학자를 맞이하여 대접하게나.”
웬 라마국이 나와? 신성로마제국과 조선이 연관이 있을 리가 있나?
하지만 예전 일을 떠올리니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이황 아래에서 입신체비와 학문을 배울 시기에 서적을 연구한 적이 있었지.
예자문집이라는 이름이 붙은 서적의 정체는 성경이요, 이는 안평대군이 서방에서 수입한 성경을 국한문혼용체로 해석하고 다시 회령군을 통해 전해진 서적이다. 당시의 결론을 요약하면 이거였다.
‘예자문집은 서방의 성현을 다룬 서적이니 서방의 학자를 불러들여 제대로 된 해석을 내려야 할 것이네. 안평대군께서 다녀오신 라마국 학자를 불러들이는 것이 좋겠지.’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이니 분명 신부가 같이 섞여올 것이요, 혹은 초임 신부 한 명만 보낼지도 몰랐다.
조선에는 가톨릭을 비롯한 대다수 종교의 선교 활동이 금지되어 있으니 사실상 조선 땅을 밟는 최초의 신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