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331화
2부 10장 8화 인수인계
파야오, 조선의 말로는 파양(鄱陽)이라 명명된 고장은 조선과 접촉하고 나서 완전히 달라졌다. 얼마 전에 전해진 장계로는 현(縣)을 넘어서 종4품의 군수가 파견될 군(郡)으로 분류하였다.
내가 도착한 시기는 1573년 음력 1월이요. 지금은 2년이 지나지도 않은 1574년 10월이다.
하지만 어느새 스무 척의 배를 정박할 수 있는 항구가 완성되었고 이미 향교 공사가 한창이었다. 또한 내가 설계한 관아도 마음에 들었다.
“그래도 소박하게 삼 층만 올렸으니 양심적이지. 본래 계획은 오 층을 올리려 했지만 모든 일을 맘대로 할 수는 없는 법이잖아?”
토질을 개량하니 지반 침하도 줄어들었고 자연스럽게 관아 크기도 커졌다. 본래 오 층 건물을 만들어도 되었지만 근정전 높이를 넘어서면 임금에 대한 무례이기에 크기를 줄이고 실속을 챙겼다. 코끼리도 재산인데 관아에서 길러야지.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으니 오늘도 이 파양군에서 일하려는 이들이 관아 앞에 줄을 섰다. 매월 초하루에 시보(時報)가 사시(巳時: 오전 9시)를 알리면 시작한다 하였는데 이들이 얼마나 광산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이 참으로 근면하니 내 마음의 근심이 사라지는구나. 이제 입신체비를 적당히 퍼뜨릴 수 있을 정도로 가르치면 좋을 것이야. 그렇지 않더냐 완보(莞補)야?”
-뿌오오옹!
지금은 음력 10월, 아직 더운 시기이지만 선선한 아침에는 입신체비를 할 수 있었다. 조선 기준으로 땀이 흐를 더위이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나도 제법 적응한 것 같았다.
물론 코끼리도 내 행동에 적응해 버렸고, 코끼리가 열 마리에 불과하였고 각기 덩치도 특징도 달랐기에 나도 이름을 부르며 통솔할 수 있었다. 이름이라 해도 코끼리를 다루는 토관들이 부르는 이름과 유사한 한자를 붙인 것이 전부였다.
반 시진(1시간)에 걸친 입신체비가 끝나자 온몸에서 땀이 흘렀지만 마무리 운동 전에 할 일이 있었다.
바닥에 내려놓은 대역기를 분해해 역기봉만 건네니 코끼리의 코가 역기봉을 휘감았다.
“너무 험하게 다루지 말고 잘 쓰다 돌아오너라.”
-뿌아오아앙!
코끼리들에게 강철로 벼려낸 대역기봉은 요긴한 놀이도구로 인식되었다. 심심하면 나무를 코로 감아서 이리저리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 한 번 줘봤는데 여러 용도로 사용했다.
처음에는 민가를 손상시키거나 아예 박살 내서 문제였지만 코끼리들도 눈치가 생겨서 몸을 긁거나 서로 대역기봉으로 줄다리기, 아니, 코로 역기봉을 이용한 힘겨루기를 하였다. 물론 파손되는 역기봉이야 있지만 가공해서 곡괭이로 만들면 된다.
가볍게 몸의 땀을 씻어내니 다시 습한 공기가 밀려왔지만 그래도 버틸 수 있었다.
의복을 정돈하고 이주민의 심사를 마치려 하니 관원이 신상명세를 적은 종이를 건네줬다.
“이번에 파양군에 이주하기로 정한 이는 스물두 호에 달합니다. 이미 관원들에게 심사를 받은 이가 열일곱 호요. 나머지 다섯 호는 인근에 사는 이들이라 하였습니다.”
“간자로 추정되는 이는 몇이나 되는가?”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다섯 호 모두 간자일지도 모르지요.”
“꾸준히 간자를 보내다니. 정말 금광이라 하니 안달이 나서 버티지 못하나 보군.”
그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던 금광은 넉 달 전인 1574년 6월에 존재 여부를 공표하고 인부를 소집하였다. 처음 금광에 투입된 이들은 숙련공인 조선 출신 광부 백여 명이었지만 이후에는 이백 명의 지역 출신 인부를 소집했다.
간첩을 막기 위해 선발도 까다롭게 하였다. 기존에 육 개월 이상 파양군에서 일한 이들이자 땅을 잘 파는 이들을 우선으로 선발하여서 처음 선발된 이들 중에는 간자가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금광의 일손은 부족하였다. 덕분에 금광을 이용해서 아예 호적조사도 마칠 생각으로 일부러 천천히 선발하였고 조정에서도 이를 적극 추천하였다.
내 앞에서 쭈뼛거리는 중년 남성과 바짝 얼어 있던 청년은 다른 관원에게 받은 서류를 내밀었다. 서류를 보니 바쿠아라는 고장 출신인데 여기에는 얼마 전에 관원이 파견되어 호구조사를 마쳤다.
혹여나 외부에서 파견된 첩자일지도 모르니 눈을 흘기며 질문을 시작하였다.
“이번에 파양군에 이주하기로 정했는데 본디 무엇을 하고 지냈나?”
“제가 뭐 하는 일이 있었겠습니까. 저는 땅을 파먹고 살았으며 아내는 베틀을 잘 놀렸지요.”
이 지역 언어는 여러 고장의 언어가 섞여서 배우기 쉬운 특성이 있었다. 덕분에 역관을 두지 않고도 어느 정도의 대화는 가능해서 이리저리 질문을 퍼부을 수 있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혐의가 없으니 서류 면접은 통과시켰다.
“흠을 잡을 곳은 없지만 금광에서 일하는 이가 밥을 축내면 될 일인가? 자네 아들이 일하기로 정했으니 심사를 보러 관원을 따라 나가게나. 다음 사람!”
새로 일하려는 광부 예정자들의 시험은 간단했다. 한나절을 줄 것이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혼자서 여덟 자(약 2.8m)의 구덩이를 파낼 것.
큰 건물을 지을 장소에는 샌드 드레인의 효과가 좋았기에 심사와 노동력 절감의 이중 효과가 있었다.
관원의 안내를 받은 청년이 팔을 붕붕 돌리며 뛰쳐나가는 모습을 보며 다음 사람을 만났다.
“저는 키차라오 지역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소식을 듣고 먼 길을 떠나 여기까지 당도하였지요.”
“키차라오 지역에 산다고? 그 지역에는 얼마 전에 관원이 다녀갔다 하던데.”
“제가 산골에 사는지라 소식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저희 가족은 산골에 살며 진흙을 이겨 옹기를 구워내기에 일 년에 한 번 정도 마을을 오가니까요.”
소문을 들으려면 마을에 오갔을 것이고 촌장에게 조선에서 전한 목패를 받았겠지.
내가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자 상대는 깜빡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품속에서 목패를 건네줬다.
“제가 목패를 받았는데 잊어먹고 있었군요! 저에게는 장성한 아들이 둘이나 있고 진흙을 잘 퍼내니 아들 둘만 이주하여도 괜찮습니다.”
“가족 모두가 이주하지 않고 아들 둘만 이주하니 차라리 잘된 일이구려. 저기 관원을 따라가시오.”
심사를 통과했다 여기고 관원을 따라가는데 저놈은 확실한 첩자고 이 목패는 내가 퍼뜨린 물건을 위조한 것이다. 목패 겉에 기름칠을 하고 정교하게 한자를 새겼지만 가장 중요한 목재를 속일 수 없었다.
내가 만든 목패는 조선에서 들여온 은행나무를 엄선해 만든 녀석이라 촘촘한 나이테가 있었다.
하지만 열대에는 은행나무가 없을뿐더러 비슷한 나무라도 성장 시기에 차이가 있어 나이테의 간격이 크다.
뒤에 대기하고 있던 병사에게 의심도 아니고 확실히 목패를 위조한 간자라 손짓하자 관원 뒤에 병사들이 따라붙었다. 아마 끌려가서 심문을 당하고 치도곤을 좀 맞으면 누가 보냈는지 술술 토해내리라.
“다음! 다음 오시오!”
다행히도 오늘은 확실한 간자가 하나만 색출되어서 업무는 비교적 순탄하게 끝났다.
점심시간이 되어 관청 일 층에 부설된 식당에 가니 어느새 신주랑이 따라붙어 인사를 올렸다.
“경차관님께서 좋아하실 소식이 있습니다. 제가 인근에 만들어둔 밭에서 소출이 제법 좋게 나왔으니 드디어 농사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럼 여기서도 토실토실한 옥수수를 숯불에 구워 먹을 방법이 생겼군.”
“옥수수도 좋지만 저는 현감님께서 들여오신 국수가 마음에 듭니다. 대체 어찌 이런 생각을 하셨는지 모를 일입니다.”
이 지역의 식생활에 쌀국수는 없었다. 쌀국수는 대월(베트남) 일대나 명나라 남부의 음식이며 수리가 부족의 식생활은 밥 위에 생선 절임이나 돼지고기를 올려 먹는 것이 전부였다.
아쉬운 마음에 베트남 출신 상인을 섭외해 쌀국수를 퍼뜨렸다. 고춧가루를 푼 쌀국수를 먹으면 더위가 가신다고 생각해 순식간에 퍼졌고 지역 명물이 되었다.
그리고 의외의 효과가 있었다. 신주랑은 쌀국수를 받을 생각에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이미 읍내에 쌀국수를 만드는 이들이 생겨나 사람들이 더 모이게 되었습니다. 금광의 인부들에게도 고기를 올린 쌀국수를 주면 군말 없이 잘 먹는다더군요.”
“본디 입신체비를 위한 식단에 필요하여 들여온 것이 이런 효험을 보여줄 줄은 몰랐다네.”
살짝 데쳐낸 채소를 잔뜩 얹은 쌀국수에 고기나 생선을 얹으면 누구나 만족하는 한 끼 식사이고 인력 동원에 도움이 된다. 쌀국수는 조금만 삶아도 되고 채소를 데치면 질병이 퍼질 염려도 없으니까.
국수를 다 먹고 오후 업무를 보러 다시 보고를 들었다.
“지난 한 달 동안 소출된 금이 사백 냥(15㎏)에 달합니다. 여기에 사람을 더 파견하면 한 달에 육백 냥은 거뜬히 소출될 것입니다.”
“육백 냥이라…… 생각보다 많은 것 같은데 많지는 않군.”
“그래도 고작 삼백여 명의 인부가 일천 냥을 캐낸다면 모두가 놀랄 소출입니다. 좌도도(사도가시마)의 금광에는 삼천 명이 동원되어 일만 이천 냥(450㎏)을 캐내는 일이 전부입니다.”
광산에서 내려온 관원은 호들갑을 떨었지만 이미 조선의 경제 규모를 아는 내 입장에서는 그럭저럭 돈을 버는 수준이다. 광산의 수입을 은자로 따지면 십만 냥에 불과하다.
은자 십만 냥이 커 보이지만 조선의 진짜 수입은 다른 무엇도 아닌 인삼 무역이다. 수출하는 인삼이 칠만 근(45톤)에 달하며 너무 물량이 넘쳐나 명나라의 시세를 붕괴시킨 전적이 있어 시세 방어를 위해 전 세계로 수출한다.
서반아를 비롯한 상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삼을 사들이기에 총 수익이 은으로 삼백만 냥이라 본래 역사 조선의 중앙정부 수익의 8배에 달한다.
아마 이 고장에서 인삼을 이천 근만 팔아도 광산보다 무역수익이 커지겠지만 훗날의 일이지.
다음은 항구 상황을 알아보려 했는데 난데없는 손님이 도착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권율이 관원과 함께 도착하여 뛰어오더니 내 손을 맞잡았다!
“만취당(권율의 호) 자네가 여기에 무슨 일인가? 자네가 병을 앓아서 현감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관직에 되돌아와도 품계가 종육품이라 현감(縣監)으로 발령받을 예정이 아니었던가?”
“조정에서 정하기를 파양군은 물목이 많고 요긴한 곳이기에 감무(監務)를 여럿 둔다 하였고 내가 지목되었네. 여기에는 조만간 군수도 파견될 것이지만 병사를 통솔할 만호(萬戶)도 내년에 파견될 것이네.”
감무는 고려시대에 군현에 파견된 하급 지방관이며 조선시대에는 현감으로 개칭되었다. 하지만 간혹 쓰이는 경우가 있었으니 한 개의 지역이 지나치게 넓을 경우 종8품 정도의 지방 관원을 감무로 임명한다.
하지만 파양군에는 금광도 있고 항구도 있기에 감무도 종6품이나 되는 이가 파견된 것이다. 아마 권율의 아버지인 권철이 힘을 좀 써서 자신의 아들이 치적도 많이 쌓고 군수 아래에서 일해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장소를 추천하였으리라.
그래도 이런 민감한 곳에 권율같이 빼어난 사람이 와서 다행이다. 권율은 자신이 재능이 평범하고 잡학에 능하다 여겼지만 내 입장에서는 부족하지 않고 넘쳐나는 사람이다.
하지만 석 달이나 빨리 온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런데 너무 빨리 오지 않았나. 인수인계를 감안하여도 십이월에 오면 될 일인데.”
“자네의 오성이 빼어나니 업무를 이해하려면 몇 달 일찍 방문해야 옳은 일이 아닌가. 다음 달에는 다른 이들이 올 것인데 군수는 정약포(藥圃: 정탁)이며 다른 감무로 오는 이는 조중봉(重峯: 조헌의 호)이라네.”
정탁이면 나보다 열두 살이나 많은 관료이자 이황을 통해 면식을 텄으며 드라마에도 나온 인물이다! 이순신을 변호한 정승으로 기억하니 능력은 충분하겠지.
그리고 조중봉이면 조헌이라고 장인어른이 말년에 육성한 제자인데 까다로운 성격으로 유명한 사람이던가.
그래도 가장 먼저 온 사람이 친구라니 반가운 마음으로 맞이하였다.
코끼리 두 마리가 나란히 지나가도 공간이 남는 대로를 보자 권율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평가를 내렸다.
“참으로 대단해. 이런 대로는 도성에만 있을 줄 알았는데 일단 만들어두니 효험을 알겠네.”
권율은 자신이 다스려야 할 고장이라 여기고 철저하게 알려 하였는지 사방을 살피다 강 건너에 있는 고장을 확인하였다.
가로계획만 마치고 가건물 몇 개만 있었는데 이미 장계를 읽었는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자네의 장계를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였는데 성품이 거친 서역 사람들을 다루기보다는 아예 거주하는 장소를 달리 두는 것이 좋을 것 같군. 하지만 군데군데 빈 곳이 보이는데?”
“나도 계획이 있었기에 후임자에게 인수인계를 하며 행할 방도를 마련하였다네. 여기에 십 년을 머무른다면 모를까 아직 해야 할 일이 넘쳐난다네.”
해야 할 일이 넘쳐난다 하자 권율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는데 그리 힘든 일은 아니니까 염려할 필요는 없다. 하는 방법만 익히면 정말 편하게 고을을 다스릴 수 있으니까.
다른 이들도 예정보다 훨씬 빠른 음력 11월에 도착하였다. 본래 인수인계에는 한 달이 걸리지만 이 정도로 여유가 있으니 각종 정책을 알려줘도 될 것이다.
정탁은 면식이 있었기에 나를 반갑게 맞이하였지만 이내 눈살이 찌푸려졌다. 지나치게 올바른 성품을 가지고 있었기에 삼 층이나 되는 거대한 관아를 사치라 여긴 것이다.
“자네는 관아에 코끼리라도 들여놓으려고 이렇게 크게 지었나? 스승님께서 외방을 주유하신 경험을 알렸을 것인데 이런 사치를 부리면 아니 된다네.”
“죄송한 말씀이지만 코끼리들에게 마구간을 만들면 덩치 때문에 어마어마한 크기로 만들어야 하니 차라리 커다란 관아를 드나들면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처음에는 나를 노려보던 정탁이지만 밖에서 돌아온 코끼리들이 관아 뒤에 있는 코끼리 전용 구유에 놓인 건초와 곡식을 우적거리며 먹는 모습을 보여주자 태도가 변했다. 자신이 코끼리와 함께 생활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눈에 공포가 들어찼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나처럼 익숙해지기 전에는 코끼리를 호랑이를 밟아 죽이는 맹수로 여겼으니 맹수와 한 집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는 것이다.
그래도 나름 대선배님이니 존중해서 차근차근 이야기하였다.
“코끼리는 자세히 보면 아주 커다란 강아지와 같은 성품이더군요. 좀 커다랗고 땅을 울리고 힘이 아주 세기는 하지만 친해지면 좋은 짐승입니다.”
“그…… 그럴…… 그럴 수도 있지! 내가 언제 코끼리가 무섭다 하였는가! 조금 시끄러울 수도 있으니 염려하는 것이 전부일세!”
코끼리들은 내가 깍듯하게 대접하는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나름 예의를 표시한답시고 모여들어 다리를 숙이고 코를 내밀었다.
코끼리 다섯 마리의 인사를 받은 정탁은 혼절할 것 같았지만 악수를 청하는 걸 알고 코끼리의 코를 단단히 움켜쥐고 흔들었다.
“역시 약포 어르신이십니다. 코끼리의 코 힘은 잘 단련된 입신체비사 두 명과 맞먹는데 코끼리도 어르신의 힘에 감탄하였군요.”
“그…… 그렇겠지! 너희들 대체 뭘 하는 게냐! 잠깐! 잠까아아아안!”
코끼리들도 나보다 힘이 강한(체중과 근육량이 많으니 당연하다) 정탁이 마음에 들었는지 몸을 코로 휘어 감아 아예 등 위에 태웠고, 정탁은 혼이 나가서 코끼리의 등에서 허우적거렸다.
“약포 어르신을 어서 내려놓지 못하겠느냐!”
“염려하지 말게나. 코끼리들이 새 사람을 만나서 기쁜 나머지 대접을 하는 것이지.”
코끼리를 체험한 정탁은 혼이 나가 있었는데 아직 인수인계를 받을 거리가 넘쳐났다. 아직도 계획을 완성하지 못한 파양군의 시설을 하나하나 소개하는데 소개를 받을 때마다 정탁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여기에는 방풍림을 조성할 것인데 가급적 성장이 빠른 나무 위주로 심어주셔야 훗날의 일이 편할 것입니다. 실지로 금광으로 향하는 샛길이 보이지 않도록 만든 방풍림이니 길목에는 반드시 초소를 세우셔야 하실 겁니다.”
“자네는 이걸 다 어찌 계획하였는가? 본디 이런 상세한 일을 알려면 경험이 많아 산세를 보고 토착민들의 생활을 유심히 파악하여야 하는데 어찌 손금 보듯이 훤하단 말인가.”
현대에서 도시계획 수강할 때 배웠는데요? 라고 답변할 수 없으니 변명거리를 찾아야겠지.
고민하던 와중에 코끼리가 멀리서 나무를 무너트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래 변명은 코끼리로 해야지!
“사람은 시야가 높아질수록 많은 것이 보이는 법입니다. 제가 도시를 세울 적에 코끼리 등에 올라타 사방을 주유하니 더욱 많은 것이 보이기 마련이었습니다.”
“지금 뭐라 하였나? 그리하면 자네는 코끼리 위에 올라 사방을 주유하였단 말인가?”
“느긋하게 흔들리는 코끼리의 등에서 주변을 돌아보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더군요.”
정탁은 물론이요, 조헌도 권율도 이 말을 듣자마자 침을 꿀꺽 삼키며 코끼리를 바라보았다.
이래저래 인수인계 거리가 넘쳐나니 한 달 동안은 정말 코끼리에 익숙하게 만들어야겠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