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323화
2부 9장 7화 이 관원은 거의 다 합니다(2)
이황은 질문에 앞서 여송, 현대의 명칭으로는 필리핀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였다. 이미 제자로 학문을 배우며 알음알음 익혀왔던 터라 기후나 풍속에 대해서는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핵심 질문이 시작되었다.
“한 달 동안 한 자(347㎜)가 넘는 호우가 이어지는 고장에서는 준천(濬川: 하천을 보수함)이 중요할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준천을 어떻게 행해야 하겠느냐.”
그거야 예상 강수량과 최대 강수량을 감안해서 완충을 위한 하천 범람영역을 설정하고…… 이걸 답하면 내가 외통수를 두는 것 같았는데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답변한 적이 있다!
내 대과 전시 답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으니까.
[새로 고장을 만들 적에는 토관의 경험과 측우기를 통한 강우량을 계산하여 하천의 범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준천과 목재의 보호는…….]
식은땀이 흘러나왔지만 이미 답한 내용을 잊어먹었다 할 수도 없다. 더군다나 군사부일체라 하여 나라의 시책을 묻는 장소에서 스승의 질문에 거짓을 논했다가는 두고두고 꼬투리가 잡히리라.
십여 년 전에 전시에서 점수 좀 얻자고 이야기했던 내용을 고스란히 답하였다. 이미 알고 있었는지 이황도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른 이들의 태도가 문제였다.
권철과 노수신은 주거니 받거니 의견을 늘어놓았다.
“역시 유 정랑일세. 연배가 적어서 그렇지 업무에 관한 지식은 나라에서 손꼽힐 지경이군.”
“유 정랑은 어린 시절에 회령군 대감 아래에서 수학하지 않았습니까. 회령군 대감이 말년에 서적으로 정리하지 못한 지식을 제자를 통해 남겨두었군요.”
그런 일 없는데! 이건 현대 지식이지 회령군의 지식이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변명할 방법도 없었으니 다른 이들의 말을 속으로 씹어 삼켰고 이황은 질문을 이어갔다.
“그러하면 마을의 대로를 정할 때에는 무슨 방식을 택해야 하느냐.”
“가장 큰 물자가 오가는 장소를 대로로 삼으며 수직으로 엮인 대로는 관아로 이어지는 길이어야 합니다. 이후 가지를 치듯 격자 모양으로 다른 도로를 엮어나가면 될 것입니다.”
거짓을 말할 수도 없고 진실을 말하면 어디론가 발령받아 어마어마한 고생을 할 것 같았지만 이건 십여 년 전에 자초한 일이 아닌가.
이황이 나선 이유도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이 똑똑하면서 멍청한 제자야. 네가 저질러 온 일이 돌아온 격이다.’
그나마 이황이 내 전시답안과 완벽히 일치하는 답변을 유도하는 질문을 했기에 망정이지 다른 이가 나서서 덮어놓고 물어보았으면 온갖 밑천이 모조리 털렸으리라. 그나마 이황 덕분에 한 가지 짐은 덜어낸 것 같았다.
“이거 성룡이가 이리저리 오가며 산성을 축조하며 많은 지식을 습득한 줄 알았는데 평범한 관료 수준에 머물렀구려. 다른 이의 도움이 좀 필요할 것이오.”
“이리 많은 지식을 가진 이가 서른이 되기도 전에 축성에 대한 지식을 모조리 익혔다면 다른 이들이 통곡할 일이지요. 유 정랑은 갑자기 나와 질문을 받아 이상한 노릇이겠지만 논의 중간에 참여하였으니 이해해 주게나.”
원준량이 시간만 끌지 않았어도 어느 정도 대처를 할 수 있었겠지!
권철이 슬쩍 눈빛을 보내자 외조(外曹: 예조에서 분리된 외교 및 정세파악 전담기관) 판서인 상이경이 일어나 나에게 간단히 요약한 회의 주제를 알려주었다.
“논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네. 주상전하께서는 병력을 동원해 보호하느라 지나친 비용을 소모하는 여송의 남대주(민다나오 섬)를 아국의 강역에서 내치려 하시네.”
상이경은 예전에 강화도 도호부사였던 비륜 상씨의 압진, 서양인의 피가 섞인 그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나친 비용을 소모한다고?
얼마나 많은 비용이기에 금의 산지로 꼽히는 민다나오 섬을 포기하려 하는지 궁금했다.
“대체 얼마나 많은 비용을 소모하기에 그러한 성심(聖心: 임금의 마음)을 보이셨는지요.”
“은자 삼십만 냥이라네. 반면 남대주에서 거둬들이는 수익은 각종 지원과 소모되는 비용을 제할 경우 은자 십오만 냥에 불과하지.”
삼십만 냥이라는 소리가 나오자 호조판서인 심수경이 헛기침을 하며 상이경을 보았고 상이경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실은 이마저도 문래국(브루나이)을 징벌한 이후 해적의 기세가 꺾여 군사를 조금 덜 보내도 되어서 군비가 줄어든 것이네. 이전에는 소득이 십만 냥에 불과하였다네. 혹여나 호판께서는 다른 의견이 있으십니까?”
“이미 삼 년 전에 상왕전하께서 명을 내리시어 여송 일대의 토지를 측량하고 물목을 확인하여 세금제도를 명확히 하라 명을 내리셨네. 하지만 남대주는 모든 간섭을 거부하니 이미 호조에서는 손을 놓기로 하였지.”
노수신도 심수경의 의견에 동조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보아도 외조는 외교부서라 민다나오 섬을 유지하자는 쪽이며 호조와 수조는 예산부서라 포기하자는 방향이었다.
그럼 공조는 왜 불려왔나? 유잠은 점잖게 있다가 한마디를 던지듯이 말하였다.
“남대주 일대에 치수를 행하면 이들도 자연스럽게 복속할 겁니다. 이십 년 정도 소모될 것이고 비용은 대략 은자 삼백만 냥 정도이겠지만 충분히 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호족 세력 흡수에 대한 비용 산출을 위해 이황과 같이 자문위원으로 불려왔나 본데, 은자 삼백만 냥이면 그냥 원정대를 꾸려 민다나오 섬 일대를 다 뒤집어엎자는 의견이 나올 비용이다.
말이 끊기니 권철이 다시 일어서서 말하였다.
“주상전하의 뜻이 확고히 정해졌다면 모를까 아직 남대주를 유지할 연유는 있소. 아국이 외방(外邦: 외국)을 복속시키는 방법에는 네 가지가 있소이다. 이전에 말한 대로 남대주를 복속시키는 일에 마지막 방법을 시도해 봄은 어떻소.”
이건 다른 누구도 아니고 이지함에게 배운 지식이다. 조선이 외부 영토를 개척할 때에는 4가지 방법으로 접근한다 하였다.
첫 번째는 대양도(대만)나 중미국(멕시코)처럼 부족 단위로 쪼개진 이들 가운데 일부를 포섭하며 따르지 않는 난폭한 풍속을 가진 이들을 무력으로 제압한다. 다만 이 방법은 군사의 소모가 심해 가급적 택하지 않는다.
두 번째는 큐슈처럼 유사한 문화권에 속한 이들을 수십 년을 들여 차근차근 흡수한다. 이 경우에는 확실한 조선의 영토가 되지만 큐슈에만 사용할 수 있는 특이한 방법이다.
세 번째는 아메리카 원주민처럼 온화한 이들을 차근차근 새로운 문물을 유입시켜 조선의 문화권에 합류하게 만든다. 문제는 천연두 같은 전염병 때문에 진척이 더디다는 것이고.
마지막 네 번째 방법은 여진족을 끌어들일 때 사용한 것이다. 조선에 친한 변방 부족에 힘을 주어 세력의 축을 만들고 다른 이들을 포섭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권철의 말이 끝나자 다른 이들이 슬쩍 나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러니까 내가 가라는 소리잖아! 왜 하필 나야! 내 행적이나 지식이야 충분하다 하지만 고작 정5품에 불과한 관원을 왜 보내?
나도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일어나 질문을 시작하였다. 당연히 상이경에게 질문을 하였다.
“하지만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남대주를 다스리기 힘들어 다른 방침을 취하는 일은 이해할 수 있으나 방법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다른 호족을 지원하는 일이 나아 보입니다.”
적당한 호족을 지원해서 조선의 지배권 안에 둔 다음 남대주의 관찰사 휘하의 봉신으로 만들어 대리통치를 하면 편하지 않을까.
내 이야기를 듣자 상이경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면서 말하였다.
“자네의 말이 옳긴 하지만 문제가 있다네. 남대주에는 회회교의 세력이 지나치게 강하고 호족들이 서로 혈연으로 엮인 경우가 많아 시도를 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네.”
“곤란이라 하시면 어떠한 문제입니까?”
“회회교는 타협을 모르는 종교라네. 이들은 아국의 법도에 맞게 행동하기를 거부하며 유학을 소개하자 귀신을 섬긴다 하며 험담을 늘어놓는다네. 조선에 귀부하면 회회교를 버려야 한다며 항의를 하지.”
귀신은 향교에서 모시는 옛 성현과 조상님을 뜻하나? 생각해 보면 조선에 천주교가 들어왔을 때에도 제사를 지내지 않으려 하여 박해를 받았다는데 이슬람교는 타협을 모른다 하니 더욱 심할 것이다.
상이경은 헛기침을 하더니 말을 이어갔다.
“회회교도 천국과 지옥이 있다며 무지한 이들에게 혹세무민(惑世誣民)을 일삼는 종교이나 이걸 버리려 하지 않는다네. 심지어 아국과 본격적으로 접촉하였을 때에는 회회교를 퍼뜨리려 하였지.”
“하지만 아국에 속한 회회교도도 가풍(家風)으로 회회교식 제사를 지낸다 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이들과의 차이점이 궁금합니다.”
“나라가 세워질 무렵과 문종대왕의 치세에 들어온 회회교의 후손이라 용인되는 것에 불과하네. 하지만 남대주의 호족들은 아국에 귀부하며 회회교를 버릴 수는 있지만 모든 친족이 같이 회회교를 떠나는 것이 법도라더군.”
이건 거짓말이다. 현대에도 이슬람에서 개종한 사람이 가족에게 비난받거나 아예 폭행을 당해 죽는 일을 몇 번이고 뉴스에서 보아왔는데 친척 모두를 끌고 개종하라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
아무리 보아도 호족들이 더욱 많은 지원을 받기 위한 거짓말을 늘어놓는 것이지만 이슬람교에 대한 지식이 적은 조선에서는 법도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았다.
반박할 근거도 없기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답하였다.
“결국 남대주의 호족을 받아들이려면 모든 친족이 같이 회회교를 떠나 아국의 신하가 되어야 하며. 그러한 일은 아국에서도 감당하기 힘든 일이라는 말씀이시군요.”
“옳은 말이네. 수십이 넘는 호족을 모조리 신하로 만들고 삼남지방과 경기도를 합한 섬보다 거대한 지역을 단숨에 집어삼키려다간 나라가 고꾸라질 것이라네.”
아마 유잠을 부른 이유도 이 비용에 대해 산출하려 했던 것이며 가장 중요한 치수 비용만 삼백만 냥이 넘어간다는 말이 나오자 질겁하고 포기한 것이리라. 내 질문이 끝나자 권철은 자신의 생각을 말하였다.
“결국 외방(外邦: 외국, 여기서는 조선에 복속된 영토)에 아국의 영향력을 전할 마지막 방법을 택하게 되었다네. 기세가 약하고 아국의 말에 잘 따르는 수리가 부족을 키우는 것이라네.”
상이경이 기다렸다는 듯이 서류를 전달했고 수리가 부족이라는 생소한 이들에 대한 정보가 담긴 서류가 전달되었다.
상이경의 설명을 들으니 이슬람교를 믿긴 하지만 신앙심은 극히 부족하며 알력다툼에서 밀려 어업이나 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이들이다.
위치야 좋았다. 민다나오 섬의 북동쪽 구석에 있는 군도와 만을 끼고 있으니 배가 드나들기 힘든 점을 제외하면 조선의 영향권인 다른 섬의 지원을 받기도 편하며, 여차하면 본국으로 도주할 수도 있으리라.
다른 관원들도 외조에서 애써 이 변방 부족의 허락을 받아낸 일에 대해 공치사를 늘어놓았고 권철도 만족스러운 듯이 지도를 칠판에 붙이며 말하였다.
“다들 생각하여 보게. 아국에서 중요하지 않아 방치된 고장에 항구 하나를 만든다 하여 많은 비용을 투자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젊은 관원을 보냈다네. 이게 효험을 보이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게 나겠지! 전시 답안부터 마을을 새로 만드는 법을 완벽하게 제시했으며 현감으로 일하며 마을을 옮겼으니 이런 젊은 관원이 나 외에는 누가 있겠는가!
나를 불러온 이유도 먹지 못하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심정으로 효율 좋은 젊은 관원을 보내려는 계산이었겠지.
권절은 흥에 겨워 지도에 표시된 호족들의 세력을 지목하며 말하였다.
“이런 사실이 남대주의 호족들에게 퍼지면 호족들의 집단 사이에 균열이 생길 것이요. 먼저 귀부하는 이들을 수라가 부족처럼 적당히 대접해 주면 될 일일세.”
사실 권절의 의견에는 허점이 있었다. 호족 사이에 균열이 발생하지 않고 오히려 수라가를 적대해서 반기를 들면 남은 것은 전쟁 외에는 없을 것이다.
당연히 자문위원으로 불려온 이황이 권절에게 질문을 하였다.
“문제가 하나 있다네. 성룡이는 다른 일은 몰라도 축성이나 할 줄 알지 군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려면 군관을 보내야 할 것인데.”
“실은 빼어난 무관을 주상전하께서 키우려 하십니다. 남이장군의 후손인 남유훈(柔勳: 남상정의 호)이 올해 만호에 임명되었으니 적임자가 아닙니까. 젊어서부터 왜구를 소탕한 자이니 남방에서도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이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알 수 있었다. 권철도 정치에 능숙한 사람이라 이미 자신의 입장을 정해놓고 판을 짜놓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민다나오 유지에 대한 찬성파는 권철과 외조판서 상이경이요, 반대파는 호조판서 심수경과 수조판서 노수신이었다. 2:2의 대립이며 명분은 반대파에게 있으니 심수경은 자신이 이기리라 여겼다.
하지만 노수신에게 권철이 언질을 보냈다. 같은 예산부서라도 관리하는 부서인 호조는 몰라도 예산을 편성하는 수조 입장에서 민다나오 섬은 어디까지나 소득이 생기는 고장이 아닌가.
이런 입장 차이가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이어졌다. 약간의 돈을 투자해 효과를 알아보자며 의견이 굳어지자 심수경의 표정이 점차 흙빛으로 변해갔지만 이미 뒤엎을 방법이 없었다.
“아직 구풍이 몰아칠 때이니 올해 십일월까지 예산을 편성하고 물목과 사람을 뽑아 수리가 부족을 지원하는 것으로 정합시다. 이번 일에 효험을 보이면 주상전하께서도 크게 기뻐하시겠지요.”
수리가 부족에 대한 지원을 시작으로 항구를 건설하고 촌락을 만들자는 의견이 타결되었다. 어느새 알력다툼에서 밀린 심수경은 손을 바들바들 떨며 회의 내용을 요약한 장계에 도장을 날인하였고 이황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졸지에 적도 인근까지 내려가 항구를 만들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으며 임시로 정4품 외조 소속 경차관(敬差官: 임시로 지방에 보내는 벼슬)이 되었고 휘하에 사람들도 잔뜩 붙여줄 것이라 하였다.
하지만 이게 뭐란 말인가! 왜 적도야! 차라리 북방이 좋다고!
#작가의 말
필리핀의 부족 분포도입니다.
식민지배 이후 많은 부족이 병합되거나 소실되었지만 수리가논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하여 이 시대에도 영토가 크게 변하지 않은 것으로 설정하였습니다.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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