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322화
2부 9장 6화 이 관원은 거의 다 합니다(1)
이 시대의 산은 산자락으로 연결되어 있다 생각하여 명확한 구분이 없었다.
북악이라 하면 경복궁 뒤의 북악산일 수도 있고 백운대나 도봉산일 수도 있다. 내가 택한 군기시의 이전장소는 북서쪽의 현재 산성 입구 인근이었다.
도성에서 소집한 이들은 내 계획에 의거하여 머나먼 길을 걸어 아예 숙소를 차리고 공사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노년에 가까운 대목장과 석수(石手)는 볼멘소리를 늘어놓았다.
“북악(북한산)에 새 건물을 만든다 하셨는데 하필 머나먼 북서쪽 자락을 택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남쪽 자락은 도성을 오가기 편한 장소가 아닙니까.”
“이미 공조판서 대감이 장계를 올렸으나 주상전하께서 윤허하신 일이오. 이미 집을 떠나와 일하는 것에 대하여 품삯을 추가하였으니 다른 이들은 불만 없이 일하지 않소.”
본래 조선시대에는 집의 거리에 대한 규정이 없어서 이틀 내내 걸어가서 일하건 코앞에서 일하건 같은 품삯을 주고 기껏해야 고생이 심하다며 약간 위로금을 주는 것이 전부라더라.
그래서 품셈을 만들 때에 할증 개념을 추가하였다. 집이 아닌 숙소에서 일하는 경우에는 약간의 위로금이 아닌 봉급을 규정에 따라 많이 지급하니 인부들은 환영하였다.
하지만 노령의 사람들은 여전히 불편함을 호소하였다.
“이렇게 먼 고장인데 불편하지는 않겠습니까? 도성에서 사십 리(16㎞)나 떨어져 있지 않습니까? 당장 도로부터 만드는 모습을 보니 큰 관아가 들어설 것 같은데 불편하지 않겠습니까.”
“도로는 응당 만들어야 하는 법이오. 여기로 마차가 지나갈 수도 있으며 병사들이 훈련하러 다닐지도 모르지 않소. 이는 주상전하의 뜻이오.”
이들도 나라의 일에 소집되어 녹봉을 받는 관료나 마찬가지이니 더 이상 불만을 표시하지는 않았다.
이 시대에는 나름 접근하기 힘든 이 지역을 택한 이유는 내 호기심 때문이었다.
정말 북한산성을 지을 계획이라면 업무에 참가하지 않고 의견만 제시하는 게 좋다 여겼다.
그래서 북한산 끝자락을 군기시의 이전 장소로 계획하였는데 바로 통과되었다. 심지어 좋은 장소를 정하였다고 내 공사와 함께 다른 시설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다른 관료가 달라붙어 도로를 만들고 실개천 위에 화포를 올려도 좋을 큼지막한 석재 교각을 만들었으니 조만간 북한산성 공사를 시작하리라.
물론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니까 넘어가자.
저 멀리서 수레가 도착했는데 예상보다 자재가 부족하게 도착하였다.
“이거 도로 공사가 생각보다 늦어져서 큰일이군요. 수레가 부서질 것 같은 구간이 있어서 짐을 내려놓고 오느라 아직도 많은 물자가 묶여 있습니다.”
호조의 관리가 툴툴대면서 허리를 매만졌고 수레를 끌고 온 소도 얼마나 지쳤는지 털썩 주저앉아 눈만 굴리고 있었다. 여러 공사를 동시에 진행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다음에 도착한 사람은 수(需)조판서인 노수신이다! 작년에 새로 임명되자마자 공조판서인 유잠과 예산싸움을 벌이다 삼대운동 경쟁까지 벌였던 사람이 왜 여기에 도착했단 말인가.
그는 나를 보더니 성큼성큼 걸어와 말하였다.
“이거 유 정랑이 아닌가? 자네가 여기 있다는 소식을 듣고 논의할 것이 있어 찾아왔다네.”
“대감께서 한미한 저와 논의할 것이 있다 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몸 둘 바를 모른다 하였는가? 자네가 창안한 명세내역 덕분에 수조의 일이 편해졌다네. 자금을 아껴 작년과 비교하여 오만 냥가량의 세입이 생겨난 것과 마찬가지이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유잠은 삼만 냥을 예상했는데 은자 오만 냥이라.
은자 오만 냥이면 인부 오천 명을 일 년 내내 부릴 수 있는 막대한 자금이다. 이 양반이 나를 보자마자 좋아할 이유가 있었다.
본래 역사에서 선조의 총애를 받는 신하 중 하나였는데 여기서는 그럭저럭 성공한 관료의 모습만 비추고 있었다.
노수신은 내가 기초 공사를 진행하는 군기시 예정지를 보며 수염을 쓰다듬으며 질문을 시작하였다.
“물골을 한 방향만 제법 깊게 파고 들어갔군. 이유가 무엇인가?”
“산자락에는 물이 쏠리는 법입니다. 물이 쏠리면 자연스럽게 흙이 들어차고 흙이 들어차면 물이 넘치기에 마련입니다. 다행히도 근방에 결이 있는 돌이 많으니 이를 판석(板石)으로 만들어 수로를 만들면 될 것입니다.”
“주변에 넘치는 물건을 잘 사용할 줄 아니 이 얼마나 훌륭한 모습인지 모르겠군. 역시 자네만큼 일을 잘하는 젊은이는 흔치 않아. 저건 무엇인가?”
이런저런 설명을 하는데 노수신 이 양반 사람들을 데리고 점점 깊은 곳으로 향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현대에도 몇 번 지나친 북한산성의 대서문 터에 도착하였는데 노수신은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저 돌무더기를 보니 전조가 세워지기 이전 삼한 시대의 치열한 싸움터로 북악이 꼽혔던 이유를 알 수 있겠군. 내가 알기로 북악 일대에 돌무더기가 널려 있으니 이를 쌓아 산성을 만든다면 얼마나 걸리겠는가?”
사람 키의 몇 배는 될 법한 돌무더기가 덤불과 엉겨서 흉측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현대의 이야기를 하려다 냉정히 현실만 보기로 하였다. 내가 알기로는 북한산성은 날림공사로 조선시대 내내 문제가 많았다 하니까.
북한산성은 수십 년의 논의를 거쳤지만 날림공사로 만들어졌고, 축조 규정을 지키지 않은 덕분에 대부분 무너져서 현대에도 엉망으로 복원된 문화재이다.
그리고 나도 생각이 있었으니 공사 규모를 가급적 크게 말했다.
“아무리 빨리 축성하여도 삼 년을 잡아야 할 것이고 부대시설을 감안하면 오 년은 필요할 것입니다. 예전에 도원군이 남긴 서적을 읽었는데 이 성벽의 길이를 합치면 적어도 삼십 리는 된다고 하였습니다.”
“오 년이라 하였는가? 자네가 일을 할 적에 심혈을 기울이고 항시 숙고한다 하였는데 지나치게 길게 본 것이 아니겠는가. 이유가 무엇인가?”
“제가 여기에서 말씀드리면 지나친 견해가 될 수도 있지만. 남쪽의 산성보다 커다란 삼십 리의 둘레를 가진 산성이라면 도성 사람 절반이 피난을 올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습니까.”
한양 백성의 절반이면 10만 명이 넘는다. 조선이 뒤집어질 변란이 일어나 정말 이 산성이 쓰이게 되면 석 달만 지낸다 하여도 최소 10만석 이상의 곡식이 필요하다.
당연히 군사가 주둔할 장소도 필요하고 행궁을 비롯한 임시 관아도 필요하다. 이런 모든 요소를 감안해서 제대로 만들려면 길게 잡아 삼 년이다.
하지만 오 년이라 부른 이유는?
‘이렇게 중요한 일을 제가 담당하지는 않겠지요?’
규모가 크면 클수록 나와 같이 젊은 관료가 나설 수 없는 법이다.
단순한 산성이면 몰라도 도성 사람들의 절반과 각 관청을 이전할 오 년 규모 공사를 내가 담당하라고? 불가능하다!
당연히 공조 관원 전체가 나서야 할 것이며 나는 그 아래에서 담당한 구역만 제대로 설계하면 되겠지.
업무를 줄이려는 속내를 알 길이 없는 노수신은 내 눈을 한참 바라보더니 흥미로운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다 말했다.
“자네의 안목이 넓다 여겼지만 이런 재능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네. 분명 자네와 같이 젊은 관료가 이런 산성을 설계하는 일은 불가할 것이야.”
“제가 십여 년 동안 경험을 쌓으면 모를까 지금은 불가한 일입니다. 아는 것이 많은 것과 제대로 행하는 것은 천지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안목이 넓으니 쓸모는 있겠지. 보름 뒤에 좌의정인 경유(권철의 호) 대감이 호조, 외조, 수조 그리고 공조 관원들을 소집하여 논의를 시행할 것이네. 여기에 참석하게나.”
지금 뭐라 했지? 권율의 아버지 권철이 회의를 연다고?
물론 지금은 십조를 통솔하는 직계제가 아닌 의정부 서사제가 운영되는 시기이니 회의를 여는 일은 간혹 있었다.
왕이 정책을 지시하면 이를 의정부의 고위 관료들이 관련된 십조 관원을 소집하여 회의를 통해 실무진의 의견을 반영하여 다시 왕에게 보고를 올리는 것이다.
하지만 소집하여 보았자 한 개의 부서를 소집하고 간혹 두 개를 소집하는 일이 전부이다.
“자네를 부르지는 않겠지만 공판이 눈치를 줄 것이네. 그때 뒷문으로 나와 알아서 의정부에 들어오도록 하게나. 분명 자네의 안목이 필요한 일이 있을 것이네.”
네 개의 부서를 소집하면 이들의 알력다툼도 어마어마할 것이요, 아무리 권철이 연배가 높고 삼정승의 한 명이라 하여도 감당하기 힘든 일이 아닌가.
더군다나 내가 비공식적으로 참가한다는 뜻은 나 외에도 비공식적으로 참가하는 사람이 많다는 소리이다.
의문을 뒤로한 채 회의를 시행할 날이 다가왔고 유잠은 나를 보고 헛기침을 하며 밖으로 나섰다.
의정부는 처음 방문하는 장소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실무직인 사인(舍人)이나 검상(檢詳)만 하여도 나와 품계가 같거나 높고 실질적으로 근무하는 재상들은 판서의 상사이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뒷문으로 들어서자마자 웬 멧돼지가 보였다.
“허어 자네가 왜 뒷문으로 들어오는가? 자네는 대체 누구인가?”
“죄…… 죄송합니다! 과회(寡悔: 노수신의 호) 대감께서 저를 논의에 참석시킬 것이라 하셨습니다.”
“과회 그 친구가 자네를? 잠깐 자네 혹시 유 정랑 아닌가? 이거 반가운 일일세!”
관복을 보니 정승인데 얼굴을 보니 이 양반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멧돼지 원균보다 조금 살집이 적고 외모는 흡사하니 원균의 아버지인 원준량이다!
듣자 하니 이 양반도 평판은 썩 좋지 않았는데 윤원형 사건만 아니면 관료 생활은 꿈도 못 꿨을 거라더라.
소문을 들어보니 윤원형 사건이 벌어졌을 때 면직되어 낙향한 상태에서 윤원형과 경쟁관계인 상단을 후원한 일이 드러나 정계에 복귀했다던가.
원균은 최악의 유전자만 골라 받았지만 그 아버지도 만만치는 않았다. 체격도 그러하고 탐욕도 그러하며 자식자랑은 대체 왜 하는가!
회의가 급한데 원준량의 칭찬이 이어졌다.
“자네에 대한 이야기는 균이를 통해 많이 들었네. 그 아이가 성정은 급하여도 장수의 자질이 있었는데 참 안타까운 일이었어. 자네가 가르침을 얻으려 하였다 들었는데.”
그 돼지가 어쩌고 어째? 이이에게 호되게 당하지 않아서 정신을 못 차리고 나를 인맥 삼아서 성장하려고 아예 거짓말을 늘어놓았어!
하지만 내 표정을 알아챈 원준량의 표정이 뒤틀어지려 해서 나도 억지 칭찬을 늘어놓았다.
“북방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내수린으로 장정 여섯을 때려눕히는 모습을 보았으니 분명 장수의 자질이 있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 용장이 있다면 모를까 세상을 떠나 안타깝습니다.”
“그런 딱한 일이 있을 줄이야. 하지만 연(埏: 원균의 동생 원연)이가 균이만큼 빼어난 모습을 보이니 자네에게 소개해 주고 싶다네. 여하튼 논의에 참석한다면 바로 들어가게나.”
현대에서 원균과 그의 가족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다. 원준량은 탐관이요 원균은 인간 이하의 무엇인가이며 나머지 형제들은 멀쩡하거나 오히려 재능이 차고 넘친다고.
“원균 그 양반 아들은 역사에 남아있나 모르겠어. 아들도 멀쩡한 사람이라던데 진짜 돌연변이 아닌가. 여하튼 이 방인가?”
한창 회의를 진행하였는지 서로 앉아서 의견을 나누다 나를 보고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권철의 옆에 앉아있는 사람은 이미 정계에서 은퇴해 낙향한 나의 스승인 이황이다!
순간 눈을 마주쳤지만 이황이 지그시 눈을 감았고 어쩔 수 없이 배정된 자리에 앉았다.
대체 이황이 왜 여기 있을까.
하지만 탁자 위에 놓인 지도는 이 시대에 여송이라 불리는 필리핀의 지도였다.
필리핀을 대체 왜? 이거 조선 영토 아니었나?
하지만 권철은 내 등장으로 끊긴 대화를 다시 이어갔다.
“얼마 전에 호조에서 관원을 파견하여 여송 일대의 토지를 측량하였는데 남대주(민다나오 섬)는 난항을 겪었다 들었네. 어찌하여 난항을 겪었는가?”
“여송에 있는 호족들은 각 섬에 수백 명에 달합니다. 그나마 아국이 처음 발을 붙인 본섬을 비롯한 다섯 지역과 아국이 없으면 해적에게 몰살당할 남서주는 몰라도 남대주는 호족의 세력이 너무 강합니다.”
“호족이라 하여도 아국의 보호가 없다면 세력을 유지할 수 없지 않은가. 이들이 믿는 구석이 있을 것인데 대체 무엇인가?”
“이들은 회회교(이슬람교)를 믿는 이들이기에 주변에 언제라도 아군을 만들 수 있다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아국이 세금을 걷거나 공납(貢納)을 요구하면 항시 반발을 늘어놓지요.”
권철은 여송에 부임한 일이 없는지 눈살을 찌푸렸는데 아마 자신의 아들인 권율이 여송도에 부임한 일을 생각하여 염려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말이 끊기자 호조에서는 서류를 보여주며 의견을 제시하였다.
“남대주의 토지 가운데 사분지 일을 측량한 것이 전부이며 심지어 옥토(沃土)를 측량할 적에는 숙소에서 나오니 기구가 파손된 일도 있었습니다. 세금을 거둔다 하지도 않았는데 이런 행적을 보이니 호조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애초에 남대주에서 세금을 거둘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계속 병사를 동원해 보호하느니 차라리 손을 놓아버리는 것도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무슨 말을 하시오! 여송도는 백여 년 전에 아국에 군사를 보내 구원을 청한 지역이며 명국에서도 인정한 아국의 강역이오! 이를 놓아버릴 수 있는 법이오?”
가끔 조정에서 논의가 되는 여송 포기론, 정확히는 너무 많은 지출만 생기는 민다나오 섬을 포기하거나 다른 세력에게 양도하는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언쟁이 거세지니 다들 이황에게 눈치를 주었고 이황은 갑자기 나를 지목하고는 말하였다.
“성룡아, 지금부터 여송의 현황을 말할 것이니 네가 사심 없는 의견을 말하면 좋겠구나.”
웬 내 의견을 물어! 스승님이지만 너무한 것 아닙니까?
하지만 내 표정을 본 이황은 어림도 없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질문을 시작하였다.
#작가의 말
제가 281화, 4장 1화에 복선을 깔아뒀습니다. 유성룡의 재능은 호조, 수조, 외조, 공조 그리고 농조 5개 부서에서 쓰일 수 있다구요.
여기에 4개 부서가 모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