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근육조선-321화 (321/573)

근육조선 321화

2부 9장 5화 군기시(2)

요구사항을 모두 적은 쪽지를 들고 집에 돌아오는데 누군가가 서신을 보내왔다. 머나먼 여송에서 온 서신인지라 투박한 종이였는데 혹시 이순신이 아닐까.

다급하게 편지를 뜯어보니 세 글자만 적혀 있었다.

[살려줘]

이 삐뚤빼뚤한 글자는 고란 녀석의 것이다.

녀석의 본래 성격대로면 해적을 몇을 죽이고 공을 얼마나 세웠는지에 대해 구구절절한 글귀가 적혀 있겠지만 이런 편지를 보내왔다?

답은 하나다.

“아이고! 여해에게 내가 좋은 부장을 보냈구나!”

고란 녀석이 운이 지지리도 없었는지 아니면 어떤 운명에 의해서인지 이순신의 부장이 된 것이다! 아마 죽도록 고생하며 해적을 상대하느라 세 글자 외에는 어떤 글귀도 적어 보내지 못했겠지.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왔고 내 웃음소리를 들은 진성이가 벌떡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 아내는 오늘 입신체비를 하러 순흥군의 부인에게 지도를 받으니 조금 이따 들어오겠지.

나는 진성이에게 당부하듯이 붓을 놀려 답신을 적어나갔다.

“진성아, 꾀를 부릴 적에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자신에게 작은 이득이 되는 꾀를 부려야 가까스로 성공하는 법이란다. 이렇게 날로 먹으려는 녀석은 큰 손해를 입기에 마련이지.”

“소자 배움이 부족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왜인이나 머나먼 남방의 토인도 아니고 물건을 생으로 집어삼키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 참 이 시대에는 날로 먹는다는 말이 없나?

현대에서야 날먹이니 날로 먹네 하면서 마음대로 말하지만 이 시대에는 적용할 수 없는 말이겠다. 진성이에게 차근차근 풀어주었다.

“고기를 먹을 적에 익혀 먹지 않으면 뱃속에 벌레가 생기는 것처럼 꾀를 어설프게 부리면 화로 돌아오니 날로 먹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더냐. 그러고 보니 집에 돌아와 손을 씻었더냐?”

“소자 들어오자마자 손을 씻었습니다!”

진성이의 손톱을 보니 때가 끼어 있지 않아서 오늘도 비누로 제대로 몸을 씻었구나. 수양대군이 세상을 바꿔 만들어낸 업적 가운데 하나가 기생충의 증명인데 이미 조선에는 기생충의 존재를 백성들도 알고는 있었다.

손을 깨끗이 씻고 두엄은 충분히 삭혀서 사용하며 채소는 흐르는 물에 씻어 먹거나 아예 데쳐 먹으며 육류나 어패류도 생으로 먹는 일은 거의 없다. 물론 구충제는 없으니 내 배 속에도 기생충이 있겠지만.

옷도 갈아입고 깔끔하게 몸을 씻으니 진짜 기생충이 들끓는지 속이 울렁거려 구충제를 만드는 방법을 찾아내려 하였지만 지식이 없어서 찾지 못하였다.

가만히 돌아보니 메스꺼움의 정체는 눈앞에 있었다.

어느새 이이의 집 뒤뜰로 향하는 문을 막고 있던 판자가 해체되고 온전한 판문이 다시 설치되었다. 이미 진해대군과 관련된 업무가 끝나고 일 년 가까이 흘렀으니 이이와 함께할 날이 시작된 것이다.

“내가 삼대운동 칠백 근인데 더 하라고? 이대로는 억울해서 하지 못…… 아니, 그냥 하자.”

이제 품계도 올라가고 스승인 이황도 칠순이 넘어 삶을 정리하고 있는데 언제까지 스승의 그늘에 기댈 수는 없다. 조식과 이황이라는 두 거유(巨儒: 큰 유학자)의 그늘에 치어 살지 않으려면 스스로 나서야 하는 법이다.

이이와 함께 학파를 만들거나 파벌을 만들지 않아도 좋다. 중요한 사실은 내가 이 시대에 융화되어 사람들과 어울리며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대로 일만 하면 요직에는 올라가지도 못하고 업무에 파묻혀 살다 죽으리라.

“이 사예(司藝: 성균관의 정4품 관직)님 계십니까?”

“이 사예는 지금 성균관의 업무 덕분에 자리에 없다네. 하지만 입신체비에는 귀천이 없으니 어서 들어오게!”

이이와 함께 입신체비를 가다듬던 진안군의 목소리가 아니고 생소한 하성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하성군이 여기에 있는지 고민할 새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유 정랑을 여기서 만나보는군. 이렇게 좋은 입신체비를 셋이서만 즐기다니 너무하지 않은가?”

“아직 미완의 입신체비이기에 부끄러워서 알리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나저나 종형(從兄: 사촌형)의 마음에 드는 입신체비입니까?”

“물론이네. 종제가 백호풍(통풍)으로 몸이 쇠하여 가는데 필요한 근육만 쇠하지 않았기에 궁금하던 차에 좋은 해답이 되었지. 그리고 내 몸에도 좋은 입신체비가 아닌가.”

생각해 보니 이이의 입신체비 방식과 진안군이 창안한 기구를 다룬 지도 사 년이 지났다.

진안군이 자신을 대신해 차기 예진원 대제학이 될 사촌형 하성군을 가르칠 이유가 있던가?

하지만 입신체비복을 입어 고스란히 드러난 상체를 보니 알 수 있었다. 하성군은 군관 생활을 하여 훈영제식법을 익혔기에 몸이 아직도 무관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입신체비는 보디빌딩이기에 실전에 적용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대신 군관들이 익히는 훈영제식법은 삼대운동과 변형운동만 입신체비와 뿌리를 같이할 뿐이지 병장기를 다루는 근육을 단련하며 근육의 형태 자체가 다른 것이다.

“내가 훈영제식법을 뼛속까지 익혀 아직도 군관의 몸을 유지하고 있지만 고립운동이라는 방식을 택하면 입신체비에 필요한 근육만 기를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닌가.”

하성군도 제법 많이 배웠으니 틀린 판단은 아니리라.

지난 삼 년 동안 많은 노력을 하였는지 근육량 자체가 많이 늘어난 하성군 앞에서 주눅이 들었지만 하성군도 나와 사이가 좋으니 여기서 더욱 친해지면 될 것이다.

[콰광!]

한창 활대(스미스 머신)로 공좌를 시행하던 하성군이 자세를 잘못 잡아 역기를 뒤로 떨구었고 최소한 100㎏은 될 대역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튼튼하게 만든 기구인지라 크게 상하지는 않았지만 진안군은 이마를 감싸 쥐었다.

“종형께 그렇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활대공좌(스미스 머신 스쿼트)는 무릎에 충격이 집중되니 가급적 전향공좌로 행하라 하였지요. 다행히도 하부에 둔 늑철(판스프링)이 기구가 완전히 부서지는 것은 막았지만 늑철만 상했군요.”

100㎏ 단위의 대역기는 그 자체가 흉기이다. 아마 수성전을 벌이면 그냥 입신체비사를 도열해 놓고 사용하는 공령(플레이트)만 적당히 떨궈도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히지 않을까.

진안군은 투덜거리며 완전히 찌그러진 판스프링을 분해해서 새것으로 갈아 끼웠지만 부서진 녀석은 다시 용광로로 들어갈 정도로 망가졌다.

갑자기 머릿속이 요란하게 요동치며 생각이 밀려왔다.

“이보게 유 정랑? 유 정랑 자네 뭘 하는가?”

“저 친구는 가끔 저러더군요. 하나에 빠져들면 주변에서 무어라 하여도 듣지를 못합니다.”

현대에서 축적한 어마어마한 지식과 유성룡의 두뇌가 결합되어 머릿속에서 말 그대로 폭풍이 휘몰아쳤다. 군기시는 아직까지 칼과 창을 만드는 장소인데 현대에 보았던 수많은 정보의 덩어리들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올랐다.

장인의 망치질도 균일하지 못하여 일정한 힘으로 일정한 시간마다 내려치는 유압 해머를 능가하지 못한다 하였다.

그렇다면 유압 해머의 대체품은? 유럽을 여행할 때 보았던 물레방아를 이용한 수력 해머가 있겠지.

하지만 조선 환경에서 수력 해머를 사용할 수 있을까? 효율이 지독히 떨어진다.

이놈의 기후조건은 여름에 강우량이 편중되어서 일 년의 절반은 물레방아를 돌리지 못한다. 억지로 돌린다 하여도 충분한 힘을 쓸 수 없으니 절반은 인력으로 굴려야 한다.

하지만 활대는? 튼튼한 활대에 대역기 대신 망치를 매달아 내려친다면?

망치의 무게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일정한 높이에서 떨구면 수력 해머를 대체하는 인력 해머가 될 것이다.

세세한 조절이 필요한 마무리 작업에는 사용할 수 없지만 중간 작업은 마음대로 할 수 있겠지! 그것만 해도 어디인가!

일본 출신 장인의 소원도 풀어주는 격이다. 중량을 위로 올릴 때 하체 근육을 사용하니 팔에 큰 부담도 끼치지 않을 것이요, 장인들 대다수가 팔의 고통을 호소하지만 하체는 큰 불편을 가지는 이가 적으니까.

나는 진안군에게 다가가 활대를 가리키며 물어보았다.

“진안군 대감께 여쭈어 볼 것이 있습니다. 이 활대를 많이 만들어 낼 수 있습니까?”

“가장 빼어난 장인인 동궁 입신체비장 전담 장인이나 군기시 장인들이 매달리면 가능할 수도 있는 일이지. 아직은 빼어난 야장이 한 달을 매달려 두어 개를 만드는 일이 전부라네.”

“이걸 군기시에 수십 개 두면 기술도 축적되고 군기시 장인들이 법도를 정하여 만들 것이니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진안군은 갈피를 잡지 못하였지만 하성군은 한참 생각에 잠기더니 자신이 망가뜨린 늑철을 집어 들었다. 그는 군인 출신이라 무기의 질을 결정하는 것이 장인의 손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제가 이번에 북악 자락에 군기시를 새로 만들 예정입니다. 활대를 변용하여 망치를 매달아 철물을 내리치게 하면 병장기의 질도 좋아질 것이요. 활대를 만드는 기술이 확충되어 더욱 값싸게 보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철물을 내려치는 일에 도구를 사용하면 장인들이 편해질 것이요. 장인들이 편해지면 더욱 심혈을 기울여 무기를 만든다는 뜻이 아닌가. 종제가 보기에는 어떤가?”

“일단 활대를 많이 만들면 입신체비의 폭이 넓어질 것이니 찬성입니다. 종형과 마찬가지로 입신체비로 진로를 전향한 군관들의 집에도 조만간 활대가 놓이겠지요.”

진안군과 하성군 둘의 힘이 더해지니 활대를 변용한 인력 해머의 시험은 삽시간에 진행되었다.

한 달이 지나기도 전에 동궁에 소속된 입신체비기구 전담 장인들이 가장 먼저 활대를 개조하였고 벌겋게 달아오른 쇠를 내려치면서 말하였다.

“품질이야 크게 차이는 없지만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을 정하면 병장기의 형태를 만드는 과정을 단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일은…….”

평상시라면 거대한 쇠망치를 내려쳐 창날의 형태를 잡아야 할 야장이 하체의 힘을 주어 칠십 근(44.8㎏)의 활대를 들어 올렸다. 올바른 공좌 자세를 잡으니 사지가 앙상한 장인도 큰 힘을 들이지 않고 거대한 망치를 움직이는 것이다.

풀려 나간 활대에서 쇠망치가 쏜살같이 떨어져 철물을 계속 내려치자 어느 정도 창날의 형태가 잡혔다.

처음 사용하는 도구라 몇 번이고 수정하였지만 장인들의 안색부터 화기애애함이 넘쳐났다.

“평상시에는 허리와 어깨부터 팔 전체가 끊어질 것같이 아팠지만 이제는 허벅지만 아프군요. 다리의 힘이 팔의 힘의 두 배가 넘는다 하였는데 틀린 말은 아닙니다.”

왜인 출신 장인은 솟아나는 눈물을 억지로 삼키며 다리를 놀려 쉴 새 없이 망치를 내리쳤다. 키는 크지 않겠지만 조만간 군기시의 하체괴물이라는 별명이 생겨나지 않을까.

하지만 김지는 그리 기쁘지 않은 얼굴로 활대와 나를 번갈아가며 보았다.

“그러고 보니 김자헌 어르신이 원하는 물건이 북악 자락에 있습니다. 한번 와서 보시지요.”

김지의 소원도 들어주려 했지만 너무 거대한 물건이라 궁궐이나 군기시에서는 활용할 수 없었다. 휴일을 빌려 이미 정해진 군기시 터에 김지와 같이 왔는데 장인들이 내가 원하는 물건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뭔가? 왜 북악의 바위에 이런 흠집을 낸단 말인가?”

“흠집이 아닙니다. 자세히 보시면 아시겠지만 동일한 척관을 적용하기 위하여 바위에 수를 썼지요. 이걸 화포를 만드는 건물 바닥에 깔아둘 것이니 요긴하게 쓸 수 있으실 겁니다.”

북한산에는 현대와 마찬가지로 바위가 넘쳐났다. 이 바위를 활용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고 미리 작업에 나섰는데 바위를 잘라내고 단면을 평평하게 만들어 바위 자체를 작업대로 사용한 것이다.

현대에서 대부분의 작업도구에 1㎝나 그 이하 간격으로 격자를 그어 정밀도를 높이려는 노력을 하듯이 거대한 화포를 올려도 버틸 수 있는 바위에 격자를 그려두는 것이다.

김지는 바위를 손으로 더듬더니 감탄하며 말하였다.

“이 위에서 실을 늘어뜨리면 길이를 정확히 알 수 있겠어! 한 자 단위로 깊은 금을 긋고 한 치 단위로 얕은 금을 그어두다니 참으로 대단하군.”

“실은 부족한 점이 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라 한도가 있었습니다.”

“부족하다니! 이대로 화포를 만들면 길이도 한 치 단위는 물론 사분지 일 치(약 8.7㎜)까지 정확히 계산할 수 있을 것이네. 자고로 화포란 물건은 구경은 물론이요, 길이도 신경 써야 하는 법이니 참으로 대단한 일을 하였네.”

솔직히 말해 내 기준으로는 부족하지만 지금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도량형을 미터 단위로 바꾸거나 미터가 안 된다면 33.3㎝ 혹은 30㎝의 딱 떨어지는 현대와 유사한 치수로 만들 생각도 있다.

하지만 도량형의 변경은 임금이 심사숙고하여 결정하는 법이다. 국가단위의 시책을 정하려면 내가 최소한 의정부 소속된 정승은 되어야 가능한 일이지.

“이놈의 두뇌 덕분에 북한산 순수비의 치수는 머릿속에 아예 완벽하게 기입되어 있으니 오차는 크지 않을 거야.”

지금도 기대승이 만들고 있는 삼각측량으로 지구 자오선을 측량한 다음 이를 뭉뚱그려서 북한산 순수비의 폭을 기준으로 재해석하면 오차가 없는 1m 단위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훗날 사람들이 세상을 뛰어넘은 천재라 하겠지만 뭐가 대수인가.

#작가의 말

조선에서 활대라 불리는 스미스머신은 이런 기구입니다. 레일에 고정한 역기를 위아래로 움직이는 기구이지요.

이걸 간략화한 다음 대신 쇳덩이를 달아 망치로 사용하는 겁니다.

출처 : 위키피디아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mith-machine-rear-deltoid-row-2.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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