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319화
2부 9장 3화 잠시 쉬어가기(2)
임차손이라면 원인을 잘 알고 있지 않을까. 이미 조선화가 된 큐슈 북부에는 입신체비가 퍼져있지만 여기서도 배우는 이가 극히 적다고 알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일본에 대한 정보는 간혹 조보나 지인을 통해 전해지는 일본의 정황이며 이마저도 극히 제한적이다.
결국 이 일을 잘 아는 사람은 임차손 외에는 없다.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네. 왜인들 가운데 입신체비를 익힌 이가 있는가?”
“없으며 익힐 가망 또한 없다네. 자네가 입신체비에 대해 묻다니 혹여나 왜국이 어떠한 고장인지 알고 싶은가?”
고개를 끄덕이자 임차손은 일본에서 근무했던 일을 떠올리자 속이 타는지 짧은 파이프 담배를 꺼내서 불을 놓았다. 매캐한 담배연기가 솟구치고 내 인상도 찌푸려졌지만 친구 좋은 것이 뭐란 말인가.
담배에 대한 예절도 웃어른 앞에서는 허락을 받고 피우며 화기를 금하는 장소에서 피우지 말라는 것이 전부인 시대이니 그러려니 해야지.
임차손은 말솜씨가 부족하여 여러 번 숙고하고 입을 열었다.
“지난 이 년 동안 왜국의 상삼씨(우에스기) 가문에 파견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 경인왜변 이후 상삼씨와 아국 간의 약조가 맺어져 일천 명의 군관을 두기로 하였지 않은가.”
“익히 알고 있다네. 처음에는 무공을 세울 기회라 하여 자네가 바삐 움직였지.”
“나도 어수룩하게 생각했지. 상삼씨에 파견되었던 병사들이 모든 일에 모범을 보이고 행실을 올바로 가지니 자연스럽게 빼어난 무관이나 병사가 다녀올 줄 알았네. 하지만 왜국은 끔찍한 곳이야.”
끔찍한 곳이라.
이미 요동의 도적들을 소탕한 전적이 있는 임차손의 말을 들으니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었는데 입에서 나온 말은 가관이었다.
“먼저 세율이 오 할에 육박한다네. 왜국이 따스해서 소출은 좋지만 세율이 오 할이니 삶은 피폐하고 아이들을 많이 기를 수 없어 짐승을 솎아내듯 거르는 일이 많지.”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군. 그러하면 백성들의 삶은 어떠한가?”
“농부는 땅을 파먹고 사는데 젊은이들은 족경(足輕: 아시가루)이라 하여 병졸로 나선다네. 또한 문과나 무과가 없어 족경으로 전쟁에 나서며 장수를 죽여 무공으로 관직에 나서는 길이 일반적이지.”
임차손도 험한 인생을 살았다면 험하게 산 사람이다. 나이가 차자 바로 산골로 들어가 훈영제식법과 각종 무술을 연마하고 도축을 비롯한 잡일을 하며 지냈으니까.
그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으니 일본은 전쟁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 삭막한 세계라는 말 외에는 나오지 않았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표현한 화려한 문화는 애초에 없으리라.
아니면 조선과 명이 오우치의 영역에 있는 은 광산 수익의 삼 할을 가져가서 그럴지도 모르지.
여하튼 과거제도도 없고 오로지 상대를 죽이는 문화가 발달하고 있음은 이해했다.
하지만 다음 설명이 더욱 가관이었다.
“각지에서 전쟁이 빗발치니 과거제도가 없으며 관직에 오르는 방법도 공을 쌓는 것이 전부이지. 하지만 놀라지 말게나. 왜국에서는 사서삼경은커녕 한자만 읽고 쓸 줄 알아도 관직에 오를 수 있다네.”
“지금 뭐라 하였나? 한자만 제대로 읽고 쓸 정도로 익히면 사자소학과 사서삼경 가운데 몇 권만 익히라는 말이 아닌가.”
“그러하다네. 이들은 정음처럼 가명(假名: 가나)이라 하여 오십 개의 문자를 사용하고 진명(真名)이라 하여 한자도 사용한다네. 하지만 한자만 적당히 익혀도 충분하다네.”
고란이 생각보다 늦게 오지만 다른 이에게 잡혀 꾸지람을 듣는 상황인지도 모르니 넘어가야지.
내 입이 벌어진 채 다물어지지 않자 임차손은 이마를 감싸 쥐면서 말하였다.
“내가 체격이 좋고 용력이 있으니 상삼씨의 가주인 겸신(謙信: 우에스기 겐신)의 호위병으로 있으면서 확인해 보았다네. 빼어난 맹장들이라 하는 이들도 사서삼경을 떼지 못하였지.”
“자네가 제법 난해한 삼경(三經)은 몰라도 사서(四書)는 완독하지 않았는가. 대체 왜인들은 어떻게 한자를 사용한단 말인가?”
“각 가문에는 학문을 익혀 대접받는 공가(公家)라는 계층이 있다네. 이들은 태어나서 학문만 익히는 이들이지만 솔직히 말해 길 가는 생원이나 진사만 따져도 이들보다 나은 편일세.”
생원과 진사를 비롯한 소과 합격자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입신체비의 최소 입문조건은 아무리 언해본을 챙겨 보더라도 사서삼경 완독이며 가급적 십삼경을 익히기를 권장한다.
일본은 고기를 먹건 먹지 않건 입신체비를 익히지 못하는 환경이 되어버렸다!
전국시대의 전쟁으로 식자층이 귀족 계층을 제외하면 존재하지 않는데 이들은 모두 외부에 눈을 돌리기 힘든 관료들이다.
임차손은 여기에 쐐기를 박았다.
“입신체비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도 있었지. 하지만 몸을 완성하기도 전에 전쟁에 나서거나 학문을 완성하기도 전에 관료가 되어 익힐 길이 막힌 것이나 마찬가지라네.”
이게 수양대군의 노림수인지 우연하게 일어난 결과물인지는 몰라도 잘된 일이 아닐까.
하지만 궁금증은 하나 더 있었다.
오다가 왜 혼약을 맺자고 제안했는가?
“결국 입신체비를 익히는 왜인은 거의 없겠군. 그렇다면 참으로 참담한 일이네만 궁금하여서 묻겠네. 대체 그 불경한 이야기를 한 직전이라는 자는 누구인가?”
“십여 년 전에는 제법 기세등등하였지만 이미 사방에서 협공을 당하고 무전(武田: 다케다)이라는 영주가 숨통을 끊을 차례이지. 아마 삼 년 이내에 명줄이 달아날 것이네. 되도 안 되는 일에 목을 매다는 것이지.”
“혹여나 재흥할 가망성은 있는가? 그러하면 불경죄를 따져 물어야 하지 않겠는가.”
“재흥할 가망성? 내가 학문을 익혀 문관으로 십 년 이내에 영의정을 달 가망이 많겠네.”
잘만 하면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세상에서 빛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케다 가문의 가신이 되어 그럭저럭 성공한 인생을 살지도 모르고.
한때 일본을 통일하기 직전까지 갔던 이가 역사가 변하여 비참하게 몰락하다니 씁쓸한 기분도 들었다. 이대로 잘만 하면 임진왜란은 아예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술을 한 잔 들이켜니 멀리서 고란이 달려왔다.
“조금 늦었습니다! 책은 있는데 지필묵을 찾는 데 오래 걸렸습니다!”
임차손에게 사자소학을 건넨 고란은 붓을 먹물에 적셔 시험을 보자 하였고 임차손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이 말한 한자를 쓰라 하였다.
그런데 임차손이 묻는 글귀를 하나하나 잘 써내려가지 않은가.
생각 외의 모습이라 헛웃음이 나왔는데 자세히 보니 종이에 손톱으로 자국을 내서 답안을 미리 표시해 두었다.
괘씸해서 호통을 치려 했는데 녀석에게 좋은 장소가 떠올랐다.
얼마 전에 만난 이순신이 여송도의 해적을 소탕하며 포술을 익히고 싶다 하였는데 이 녀석을 이순신의 부하로 보내면 좋은 일이겠지.
답안을 대부분 기입한 고란은 종이를 펄럭거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보십시오! 절반이 넘어 칠 할에 가깝게 익히지 않았습니까?”
“그래 너 참 잘났다.”
“만도 자네 학문을 제법 빠르게 익혔군. 이거 참 드문 일이니 내가 특별히 좋은 자리에 추천서를 내어주겠네.”
분명 이순신은 여송의 남서주라는 장소에 근무하기를 청하였다.
남서주는 제법 길쭉한 섬이라 부임지가 사방에 널려 있다 하였는데 이순신을 만날지는 몰라도 그거야 하늘에 달린 일이 아닐까.
가장 험하고 해적도 많은 남서주라는 설명을 곁들이자 고란은 펄쩍거리며 뛰려다가 고마움을 표시하려 했는지 우리에게 탁주를 한 잔씩 따라주었다.
이 이후의 일은 하늘이 알아서 하시겠지.
* * *
남서주(팔라완 섬)의 해안가에 설치된 해안포대에서 찌릿한 화약 냄새가 퍼져 나가며 바다 위에 물기둥을 수놓았다. 월례 행사와 마찬가지로 해적들이 침입한 것이다.
나룻배나 마찬가지인 해적선이 포격에 휩쓸렸지만 여러 대가 상한 것이 전부였다. 나머지 해적들이 상륙에 성공하였으나 이들은 운이 지독히도 없었다.
얼마 전 추천서를 들고 부임한 고란이 근방에서 병사들을 훈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란의 추천서에는 칠 년간의 군사경험과 사자소학을 익혔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고, 무과시험을 통과하거나 훈련원을 이수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임시 무관직인 별장(別將)으로 부임할 수 있었다.
당연히 고란은 여기서도 도끼를 신들린 듯이 휘둘렀다.
“정말 좋아. 도끼로 머리통 쪼개는 기분이 아주 죽여주는군!”
마을에 당도하기도 전에 숲속에서 튀어나온 고란과 그의 부하들에게 기습당한 해적들은 제대로 된 대열도 갖추지 못하고 삽시간에 몰살당했다.
머리에 도끼가 박힌 해적을 걷어차 도끼를 뽑아낸 고란은 피를 털어내더니 부하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야 이놈들아! 내가 북방에서 호랑이도 잡아보고! 표범도 잡아보고! 반달곰과 싸워서 아쉽게 잡지 못한 녀석이 셋이요, 잡은 녀석이 넷이라 했지!”
부하들 모두 사지에 피칠갑을 한 고란을 보며 침을 삼켰다.
고란 홀로 두 배는 많은 해적들의 대열에 홀로 뛰어들어 마구 날뛰니 어쩔 수 없이 전투가 시작되었고, 고란의 무력에 힘입어 억지로 승리를 거둔 것이다.
뛰어난 무력을 가져도 언제나 조심스럽게 접근한 예전 상관들과 달라도 너무 다르니 병사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고란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나자 병사들은 양손을 들며 억지로 환호성을 올렸다.
“고 별장님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대단하면 명령도 잘 듣고 싸움도 잘하잔 말이다! 이런 놈들이 한 달에 한 번은 온다 했으니까 당분간 도끼에 피가 마를 날이 없겠어!”
제대로 된 병법을 배운 무관이었다면 병법에 의거한 작전을 세우고 행동했겠지만 그에게는 지식이 부족했다.
언젠가는 함정에 빠져 크나큰 변을 당할 것이라 예상한 부하들은 몸을 사렸지만 고란의 명령이 이어졌다.
“너희들은 전장을 정리해라! 놈들의 수급을 많이 챙겨갈 필요는 없지만 병장기는 녹여서 갑옷을 만들 것이니 함부로 빼돌리지 말고!”
“명령 받들겠습니다!”
전투가 끝났으니 전장을 수습하며 전리품을 모아 보고를 올리고 병사들의 공을 치하해야 한다. 하지만 고란은 지식이 부족하여 장계를 작성하는 일이 막막하였다.
“빌어먹을…… 장계에 정음과 한자를 혼합하라는 법은 누가 만든 거야?”
본래 역사에서는 무조건 한자로 작성할 필요가 있는 장계가 쉬워진 것도 훈련원 무관들이 한자에 익숙하지 않은 이유였다.
하지만 고란은 사자소학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한 이여서 끙끙거리며 근처에 있는 다른 서적의 언해본의 한자와 조합해 붓을 놀렸다.
제대로 된 장계를 올리지 않으면 자신의 부족한 지식이 드러나 임시 무관도 아닌 훈련원 새내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하리라.
고란이 보고서를 어설프게 작성하고 뿌듯한 얼굴로 돌아섰다.
“정7품까지는 이렇게 얼버무려도 무관 행세를 할 수 있겠지. 이후에는 공적을 쌓지 못하더라도 무과 시험을 바로 보면 되니까 큰 문제는 아니야.”
훈련원을 나오고 사자소학과 병서 몇 권만 익혀도 경력을 인정받아 바로 정8품의 정식 무관직에 오를 수 있었지만 공부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아닌가.
그가 이러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도 이순신에 대한 반발심이 아닐까.
예전 상관 아래에서 당했던 끔찍한 경험이 떠올랐는지 고란은 계단을 내려가다 갑자기 다리를 휘청거리며 머나먼 북쪽을 바라보았다.
“여해 그 양반이 여기에 있지는 않겠지? 뭘 잘못했다고 공좌(스쿼트) 이백 회를 시행하라 하며 자기도 이백 회를 옆에서 하는 독종이라니!”
하지만 자신은 옛 상관인 유성룡의 천거를 받아 가장 험난한 전쟁터에 오지 않았는가. 엄연히 무과에 합격하고 스스로를 갈고 닦으려는 이순신은 이 남서주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듣자 하니 여송 일대는 너무 덥고 습하여 무관들조차 근손실을 경계하여 쉽사리 부임하지 않는 지역이라 하였다.
만호부(萬戶府)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서서 인사를 올리니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 지방의 종4품 무관직)가 환한 얼굴로 맞이하였다.
“이거 고 별장 아닌가? 소식은 들었네! 기백에 달하는 해적들에게 먼저 공세를 퍼부어 모조리 도륙하다니 참으로 대범하지 않은가!”
“해적들이 기세가 부족하고 생소한 지역에서 경계를 태만히 하여 기습에 성공한 것입니다.”
적당히 겸손한 말과 어느 정도 병서를 읽은 지식을 늘어놓으니 자신의 상관도 속아 넘어가지 않는가.
고란의 장계를 대충 읽은 동첨절제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명령을 하달하였다.
“허어, 그래도 여전히 학식이 부족한 것 같으니 자네를 특별히 절제도위(節制都尉: 종6품 지방 무관직) 휘하에 배정할 것이네. 함께 힘쓰도록 하게.”
“저는 무훈을 쌓고 싶어 여송에 온 무관입니다. 절제사님께서 저를 내지(內地)에 배정하시면 잘 벼려진 도끼를 창고에 쟁여두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염려하지 말게나. 자네의 상관이 될 절제도위도 비슷한 말을 하였으니 둘이 서로 잘 어울리겠군.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포구서 훈련을 하며 화포로 걷어내지 못한 해적들을 소탕하면 될 일이라네.”
자신의 상관이 동일한 말을 했다면 서로 성품이 잘 어울릴 것이 아닌가.
얼마나 호탕한 사람이기에 그런 말을 했는지 손꼽아 기대하던 고란은 포대 입구에서 보고를 올렸다.
“고 별장 부임을 명받았습니다!”
우렁찬 목소리를 들은 병사들이 고란의 모습을 보고 감탄의 눈빛을…… 보내지 않았다. 이런 끔찍한 장소에 오지 말라는 익숙한 눈빛이 느껴지자 고란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고 별장? 어느새 별장의 직위에 올랐는지 모를 일이군.”
“흐아아아아으으아아아악!”
불볕더위 속에서도 제대로 된 갑주를 패용한 이순신은 전신에서 비와 같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다른 병사들도 온몸에 땀이 범벅된 것으로 보아 입신체비를 시행했으리라.
겁에 질린 고란이 자리에 넘어져 몸을 질질 끌며 버둥거리자 이순신은 점잖게 혀를 찼다.
부관으로 임명될 별장이 호탕하고 싸움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자네와 내가 만난 것은 필연일세. 나는 포술을 익히려고 가장 험한 장소를 찾았고 자네는 무훈을 쌓으려고 가장 험한 장소를 찾았지. 우리 한번 잘해보세.”
고란이 차라리 몇 달만 더 참고 훈련원에서 제대로 된 무관이 되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순신을 피하려고 머나먼 북방에서 남방까지 자리를 옮겼지만 이순신의 부관으로 다시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