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조선 315화
2부 8장 8화 종친을 짓밟다(1)
세자야 차기 국왕이며 나를 두고두고 갈아버릴 사람이지만 나를 지목하여 부를 일은 없었다.
하지만 공조에 출근하기가 무섭게 동궁에 내시가 대기하고 있다가 나를 콕 짚어 지명하였다.
“아이고 유 좌랑! 자네가 앞으로 관직에 나설 길이 훤히 열려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공조 관원들이 이렇게 칭찬은 했지만 내 입장에서는 나를 갈아버릴 차기 임금에게 훌륭한 인재라 확인을 받으러 가는 자리라 여겼다. 세자가 다룰 신하들을 생각하면 나는 2세대쯤 된다.
관료들이 바보도 아니고 몇 년 이내로 양위를 통하여 세자가 임금이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지금의 정승들은 몇 년 정도 더 일하며 세자에게 조언을 시행할 것이고, 아마 아버지나 정걸, 김종인 같은 이들이 실질적으로 업무에 임할 것이다.
십 년쯤 지나면 아버지의 세대가 사퇴하고 나를 포함하여 연배가 약간 앞서는 이들이 실질적인 관료가 될 것이다. 대체 어떤 업무가 기다리고 있을지는 몰랐지만 동궁으로 향하였다.
이미 8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세자도 23세가 되었으며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두고 있는 어엿한 가장이자 왕위를 물려받을 준비를 끝낸 완성된 차기 임금이었다.
당연히 우리 주변에는 사관이 예리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유 좌랑을 오래간만에 독대하는구려. 그간 업무에 열중하였다 들었소.”
“조정에서 일하는 이로 마땅한 행동이옵니다. 주상전하께서 저를 아끼시니 부족한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는 일이 당연하옵니다.”
“하지만 너무 업무에 몰두하면 근손실은 물론이요, 몸을 망치는 질병으로 돌아오는 법이오. 아직 이립(30세)에 미치지도 못하는 사람이 이렇게 행동하면 훗날 어떻게 되겠소.”
좋은 말이다. 나도 현대에서 몸 마구 놀리다가 40이 되기도 전에 성인병의 폭탄에 휩쓸렸는데 여기서도 적당히 해야겠다는 마음이 샘솟았다.
하지만 적당히 하면 이이가 뒷마당의 문을 두들기는데 열심히 해야지! 이 영원한 고통의 고리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단 말인가.
세자는 내 표정을 보더니만 말을 듣지 않는다고 중얼거리고는 본론에 들어갔다.
“아무리 보아도 유 좌랑은 업무에 열중하다 변을 당할 것 같으니 쉽고 편한 업무를 주선하려 부른 것이오. 도성에 산 지 오래되어 알고 있겠지만 연희당에 대해서 알고 계시오?”
“진휼청의 부속기관인 유접소를 세종대왕께서 고쳐 만드신 장소라 알고 있습니다. 듣자 하니 왕실 종친들이 대대로 후원하여 각지에 연희당이라는 이름이 퍼졌다 하였습니다.”
“잘 알고 있구려. 다름이 아니고 도성의 인구가 넘쳐나 유접소의 아이들이 밖에서 뛰어놀기 힘들 지경이라 하였소. 세월이 지나면 도성의 구획을 새로 고칠 것이나 아이들이 고생하는 일이 바람직한 모습은 아닌 것 같소.”
내가 어린 시절에도 도성에 사람이 넘쳐났지만 이십 년 가까이 지나니 도성의 인구는 더욱 증가하였다. 당연히 공조 관원들은 이런 도성을 관리하느라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한양의 인구만 하여도 성저십리까지 계산할 경우 조선 후기보다 많은 21만에 달하며 청계천을 비롯한 오폐수 배출용 하천도 한계치에 도달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경기도 일대에 초석 생산시설을 두어 오물을 수거하여 초석을 만드는 것이다.
덕분에 오물이 길거리에 넘쳐나는 유럽 꼴은 면해서 다행이다.
그렇다면 나 보고 새로운 도성의 도시계획을 세우라는 말이라 예상하지만 아닐 거다.
앞에서 쉽고 편한 업무를 주선할 거라 운을 띄웠으니 무슨 업무를 시킬지 궁금하였는데 생각보다 훨씬 쉬운 업무이다.
“당장 필요한 일은 도성을 넓히는 것이지만 이는 쉬운 일이 아니오. 그러하니 중요하지 않은 관청을 성저십리 외곽으로 옮기는 일을 먼저 행해야 하지 않겠소.”
“하오면 앞서 말씀하신 연희당을…….”
“연희당은 두 곳이 있소. 우 연희당은 다른 이가 옮기겠다고 하였으니 예부터 전해진 좌 연희당(궁궐을 중심으로 위치를 정하니 동쪽)을 동부 12방에 속한 인창방으로 옮기시구려.”
인창방이면 성저십리의 외곽이며 현대의 동대문구와 성북구 인근이다. 업무가 쉬워도 너무나 쉬운데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이런 업무면 나를 부를 필요도 없다.
궁궐과 관련된 기관도 아니니 하급 관료를 시켜 적당한 경력을 쌓은 대목장 두 명을 고용해 은자 좀 쥐여주면 끝나는 일이지.
하지만 세자는 사관의 눈치를 살피더니 아예 못을 박았다.
“듣자 하니 이조 관료인 이이가 종친에 속하지도 않았지만 연희당에 자주 들리고 미곡과 질 좋은 고기를 보낸다 하였네. 자네와 친한 사람이니 상세한 일을 알 것이라네.”
“세자 저하께서 말씀하신 일이니 소임을 다하여 임하겠사옵니다.”
이이가 연희당에 자주 들러? 맨날 입신체비만 하는 사람이 뭘 자주 들리나? 휴가를 받아도 강릉에 가서 어머니께 문안인사를 올리고 돌아오는 것이 전부인 사람인데.
그래도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세자가 말을 빙빙 돌려 하며 사관의 눈치를 보았다는 말은 단순한 일이지만 정치적인 의도가 담겨 있다는 뜻이었다.
한숨을 쉬며 일찍 퇴근하니 당연히 이이도 칼같이 퇴근하여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자네의 몸 전체를 단련하는 입신체비를 시행하도록 하세. 수양대군께서 입신체비서에 기입하기를 전체승압(파워클린)과 연계하여 박압(숄더 프레스)을 행하는 방식이라 하였지.”
내 앞에 놓인 역기를 보고 침을 삼켰는데 이이도 세자 혹은 다른 이에게 들은 말은 있지만 입신체비를 하고 대화를 나누자는 소리였다.
평상시에는 지독한 난이도로 인하여 시도도 안 하던 운동을 시키다니.
전체승압과 박압을 연계해 한다면 아래에 놓인 역기를 역도 선수처럼 온몸의 힘을 활용해 가슴까지 끌어 올리고 스쿼트를 한 다음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 내려놓는 일련의 과정이다.
“크허으아아으아아어아억!”
“기합 소리가 아주 좋군! 오늘 자네의 한계를 시험해 보겠네!”
처음 들어 올리는 자세는 데드리프트요. 다음에는 가슴까지 역기를 끌어 올리며 척추기립근과 삼각근을 비롯한 등의 모든 근육에 부하를 가하고 스쿼트로 허벅지를 작살 낸 다음 팔과 어깨 근육 전체를 혹사시킨다.
순발력과 근지구력은 물론이요, 폐가 앞뒤로 쥐어 짜이는 느낌이라 호흡이 가빠졌다.
아마 내 입술은 호흡곤란으로 창백해졌을 것인데 이이는 무게를 줄이지도 않고 진안군도 보이지 않는다!
“조금만 더! 일 회만 더 행해보게!”
이미 정신이 아득해지는데 한 번 더? 하지만 산소가 부족한 머리는 몸에 명령을 내렸고 다시 산소가 쥐어 짜이며 머리가 아득해지며 다리에 힘이 풀렸고, 이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눈을 뜨니 익숙하지 않은 천장이었다. 아무래도 쓰러진 나를 이이의 집으로 옮겨와서 치료한 모양인데 이이가 내 대역기를 받아들었는지 팔다리는 멀쩡하게 움직였다.
평소에는 몸을 혹사시켜도 이렇게 가혹한 입신체비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왜 이러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하지만 이이는 내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는 냉수를 가져와 마시게 했다.
방구석에 화로가 있었고 이이가 지필묵을 가리키는데 대화를 나누며 몰래 필담을 하자는 소리겠지.
대체 뭐가 이렇게 조심스럽게 이이를 움직이게 하였는지 몰라도 세자가 중요한 지시를 내린 것 같았다.
“내가 정말 미안하네. 자네의 입신체비가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줄 알았는데 견디지 못해 혼절할 줄은 꿈에도 몰랐네. 내가 너무 과한 횟수를 시행하였나? 말이라도 했어야지.”
“숨이 가빠오는데 말할 겨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나저나 정신이 멍하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오는군요.”
이이와 대화를 나누며 필담을 하는데 나와 이이 둘 다 머리는 좋은지라 잡담을 나누며 중요한 이야기를 붓을 놀려 주고받는 일은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내 평정심이 깨질 글이 보였다.
-이번 일은 종친과 연관된 일이라 이렇게 비밀리에 대화를 나눈다네. 공개적으로 대화를 나누면 언관들이 듣고 주상전하께 먼저 고변할지 모르는 일이 아닌가.
쓴웃음이 나왔다. 종친과 연관된 일을 사사로이 논한 일도 잘못이며 세자의 입에서 종친이 언급된 순간 언관들의 가혹한 공격이 시작될 것이라 비밀을 엄수하려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한 것이다.
억지로 돌드레보다 흰개미 맛이 좋다는 헛소리를 하면서 기다리니 이이가 붓을 놀려 다음 필담을 시작하였다.
-하필이면 이번 일이 연관된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진해대군 어른일세. 본래 연희당은 십여 년 뒤에 시행할 성저십리 확장에 속한 업무가 아니지만 문제가 발생하였다네.
진해대군과 예전에 일을 한 적은 있지. 아직 여덟 살에 불과한 코흘리개 꼬맹이였고 형인 세자가 동생이 심심할까 봐 내가 일하는 곳에 보내서 교육 아닌 교육을 시켰으니까.
진해대군은 대군의 신분이고 뚜렷한 재능을 보이지 않아서 13세가 되자 혼인 이후 궁궐 밖으로 나가 사저에서 살게 되었고 이후에는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기껏해야 16세의 대군이 뭘 어쩌고 어째?
하지만 이이는 붓을 놀려 계속 이야기를 써나갔다.
-근래에 유음자제(과거에 합격하여 양반의 신분을 쓸 수 있는 자) 가운데 학문에 소질이 없고 손재주가 좋은 이들의 유행이 목수라는 사실은 자네도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덕분에 공조에 속한 도본장인(도면장인)들이 도면을 검수하느라 수입이 제법 좋다 하더군요. 그러하면 진해대군 어른도 목수 일에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까?
-연희당에 자신의 재산을 쾌척하며 말하기를 부족한 건물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니 옳지 않은 일이라 하며 주상전하께 개축하기를 청하였다네. 하지만 시기가 너무 좋지 않군.
왕은 늙고 세자는 아직 어리며(조선 기준으로) 뚜렷한 치적을 쌓지 못한 상태에서 공을 쌓겠다고 나선다? 이 꼬맹이가 눈치가 없어도 정도껏 없어야지 이런 상황에서 나서?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도 하지 않고 붓을 놀렸다. 아무리 형제간의 사이가 좋아도 해서 될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다. 더군다나 진해대군이 취미 삼아 만나는 이들은 죄다 유음자제가 아닌가!
본래 역사에서 수양대군은 문종이 살아있을 적에는 길거리의 잡배와 어울려 놀며 몸을 조심했다.
하지만 진해대군처럼 양반가 자제들과 어울려 놀면 폭탄으로 손장난을 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시기가 안 좋은 정도가 아니고 잘못하면 큰일이 벌어질 가망도 있습니다. 하면 세자저하께서 어떠한 명을 내리셨습니까?
-세자저하는 물론이고 주상전하께서도 크게 노하셨지만 이를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네. 수단이 서툴러도 너무 서툴러 언관들을 동원하여 꾸짖으면 끝날 일이라 하였네. 하지만 일이 벌어지면 영원히 사이가 틀어질 것이라 하더군.
어처구니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진해대군의 능력은 보잘것없고 행적도 손바닥에 들어올 듯이 훤해서 왕과 세자 모두 그를 믿고 있었지만 세상의 시선은 다르다.
만약 대군이 탄핵을 당한다면 일이 좋게 끝나도 대부분의 경우 반쯤 죽은 사람 취급이다.
간혹 꼬투리가 잡혀 탄핵당한 이들은 수양대군을 제외하면 경기도 외곽의 한적한 곳에서 한량처럼 지낸다.
그럼 진해대군과 어울리는 이들이 대체 뭔 생각일지 궁금하다. 아니, 이건 현대에서도 많이 경험한 일이라 익숙하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붓을 놀려 이이에게 내 추측을 적어나갔다.
-진해대군 어른과 어울리는 이들의 생각을 알 것 같습니다. 이들은 대군 어른의 이름을 빌려 건물을 지으며 목재를 빼돌리고 대금을 남겨서 사치를 즐기려 하는 것입니다.
건물을 지을 때 절대 지켜야 할 일이 있다.
인맥을 통해 하면 안 된다는 명제이며, 이를 지키지 않아 피를 본 사람들이 내 주변에도 넘쳐났다. 요즘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내가 일을 시작하던 2000년대 초반에는 저런 사태가 빈번했다.
시골에 전원주택을 짓는 사람이 인맥을 잘못 거치면 건축사 도장을 빌린 무허가 업자가 설계한 도면을 받으며, 시공사도 바지사장을 앉힌 무허가나 마찬가지인 회사를 통해 만든다. 이건 건물도 아니고 콘크리트 폐기물이지.
시대가 다르니 인맥의 핵심으로 진해대군을 세워 엉망진창인 건물을 짓고 돈을 남겨 먹으며 호의호식을 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벌을 받아도 종친인 진해대군이 욕을 한 번 먹으면 끝날 일이 아닌가.
이런 괘씸한 놈들을 가만히 둘 생각 따위는 없다.
세자는 아마 내가 건축에 관여하며 이런저런 수단을 동원해 진해대군의 주변 인물을 염탐하라는 명령을 내렸겠지만 나는 이미 이 분야의 전문가이다.
-자네의 생각이 옳다면 역모는 아니지만 진해대군 어른은 평생 이용만 당하다가 문책을 당하고 대군 어른을 꼬드긴 이들은 호의호식하며 살 것이네. 대책은 무엇인가?
-진해대군 어른에게 나아가 서로의 건물을 비교하자 할 것입니다. 비록 진해대군 어른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일이지만 지금 바로잡지 못하면 계속 해악으로 남을 것입니다.
어차피 세자이자 차기 임금이 아낄 신하인데 코흘리개 시절부터 보아왔던 대군 따위는 아예 내 제자로 들어오지 않으면 건축의 건 자도 꺼내기 힘들게 밟아버리면 충분하다!
이이는 내 글을 보면서 한숨을 푹푹 내쉬더니 종이를 화로에 넣어 불살라 버렸다.
조만간 정치에 진출하자고 정철을 비롯한 인맥들이 아우성을 치던데 아마 나는 정치에 나서지 못할 것이다.
30살이 되기도 전에 종친을 짓밟은 핵폭탄을 어르고 달랠 당파가 있다면 그 대단한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할 지경이다.
하지만 악습은 뿌리를 뽑아야 한다!